부마항쟁 전초 ‘9·17 못골 시위’ 주역, 명예회복 길 열렸다

조회수85의견0

- 반유신 선언문 낭독 후 구속 고초
- 한달 뒤 부산대 시위에 영향 평가

1979년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의 전초적 사건으로 평가받는 ‘9·17 못골 시위’의 주역들이 부마항쟁 관련자로 공식 인정됐다. ‘부마민주항쟁 진상 규명 및 관련자 명예 회복 심의위원회’는 지난 21일 열린 본회의에서 ‘9·17 못골 시위’의 주역 김맹규 씨 등 8명을 부마민주항쟁 관련자로 지정했다고 27일 밝혔다.

이 시위는 1979년 9월 17일 부산 남구 대연동 부산공업전문대학(현 부경대) 교내에서 일어난 반유신·반독재 투쟁이다. 위원회는 9·17 시위가 그해 10월 16일 부산대에서 촉발된 부마항쟁에 영향을 줬다고 봤다.

위원회에 따르면 못골 시위는 당일 낮 12시30분께 일어났다. 이들은 메가폰으로 사이렌을 울려 학생 500여 명을 주강의동 인근 게시판 앞으로 모은 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하야와 유신 철폐를 요구하는 선언문을 읽었다. 학내 독서 모임을 꾸려 시국을 논해온 이들은 그해 8월 서울 신민당사에서 일어난 ‘YH무역 사건’에 분개한 것을 계기로 시위를 준비했다.

당시 선언문은 부산 천주교 교구청에서 빌린 등사기와 줄판을 이용해 등사됐다. 600장의 선언문이 배포됐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시위를 주도한 김 씨와 신홍석, 서석권 씨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됐다가 그해 12월 8일 긴급조치가 해제되면서 82일 만에 풀려났다.

학생들 앞에서 선언문을 낭독한 신 씨는 부산대 항쟁의 주역 정광민 10·16부마항쟁연구소 이사장의 고교 동창이다. 부마항쟁을 기록한 조갑제의 저서 ‘유고!’를 보면 당시 시위를 준비하던 신 씨는 정 이사장에게 계획을 알린 뒤 부산대도 동참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정 이사장이 “분위기가 충분히 익지 않아 자신이 없다”며 거절해 무산됐다.

2015년 부경대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정 이사장은 “친구 홍석이가 시위를 제안했지만,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러나 9·17 이후 친구가 옥살이하는 것에 일종의 부채 의식을 느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9·17 항쟁은 내가 부마항쟁을 결행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 바 있다.

애초 9·17 시위 당사자들은 2017년에도 위원회에 관련자 심의를 신청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일어난 사건에 국한해 의결이 이뤄진 탓에 기각됐다. 지난해 6월부터 해당 기간을 전후해 일어난 사건 또한 심의 대상에 포함되면서 마침내 관련자로 인정받게 됐다.

9·17 시위 주역 중 한 사람인 신 씨는 “부끄럽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1979년 9월 16일 해운대 최치원 동상 앞에서 시위 계획을 짜고 이틀 뒤 9월 18일 진행하려 했다. 모든 부산시민과 대학생이 이날 광복동 부영극장에 집결해 국기하강식 때 애국가를 제창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 하야와 유신 철폐를 요구하는 대중 시위에 돌입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그러나 시위를 실질적으로 이끈 김 씨의 계획이 대학교수에게 발각돼 김해 한 사찰에 감금된 터라 무산될 위기였지만 학내에서나마 뜻을 밀고 나가게 됐다”며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산화한 분들도 계신다. 그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울컥한다. 살아 있는 나로선 부끄러울 따름”이라고 했다. 

의견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