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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스페셜 - 저 너머 마을에는

등록일 : 2024-04-22 17:26:24.0
조회수 : 235
-(해설) 오늘도 어김없이 문의를 향해 가는 길.
올해로 4년째 문의마을 곳곳을 찾아다니며 마을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기록해 온 동네기록활동가 탁금란 씨의 출근길입니다.
차창 밖으로 만나는 문의에는 아직 옛 풍경이 많이 남아 있는데요.
-고맙습니다.
-(해설) 높지 않은 집들이 옹기종기 정겹게 어깨를 맞대고 있고.
호수와 산이 감싸안은 고즈넉한 동네 문의.
빠르게 변하는 시간도 이곳에서는 잠시 멈춰선 듯합니다.
-안녕하세요?
어디 가시는 거예요?
-출근이요.
-그러시구나.
-많이 파세요.
-안녕히 가세요.
-귀제비집이에요.
문의에 제비집이 많아요.
저기 제비집 보시면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제비랑 다르게 귀제비라고 하는
맹맹이라고 불리는 제비집이 저렇게 구식 터널식으로 만들어진 제비집이 있어요.
일반 제비집도 많은데 곳곳에 제비집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해설) 출근길에 만나는 이웃과의 인사도 반갑고 자주 보는 풍경조차도 정겨운 아침입니다.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가 공유되고 기록되는 이곳은 탁금란 씨의 일터이자 마을의 사랑방입니다.
문의는 수몰의 역사를 품은 마을입니다.
마을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기록하는 작업을 하면서 문의의 사람들은 어떤 기억을 가지고 살고 있을까.
물 속에 잠겨 있는 옛날 문의의 모습은 어땠을까가 궁금해졌습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마을의 풍경.
먹고살았던 일, 일상을 오갔던 길 등 마치 한 조각, 한 조각 퍼즐을 맞추듯 개개인의 이야기를 모아 마을의 시공간을 맞추는 일.
동네기록활동가 탁금란 씨에게 이 일은 어떤 의미일까요?
-(해설) 발길이 닿는 곳, 눈길이 머무는 곳에서 마을을 만나고 그 터를 지켜온 사람들과 진솔한 이야기를 담은 삶의 풍경들을 만납니다.
탁금란 씨와 함께 만날 풍경들 안에는 어떤 보물 같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요?
청주시 상당구 남단에 위치한 문의면은 양성산 아래 배청호와 맞닿은 곳으로
한적한 시골 마을이면서 사람들로 북적이는 관광지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삶을 일구는 터전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지친 마음을 달래러
오는 휴식처로 그렇게 서로 다른 모습이 뒤섞여 공존하는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찾아 동분서주하는 탁금란 씨가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는데요.
작두산과 이어지며 병풍처럼 문의면 소재지를 둘러싸고 있는 양성산에 오릅니다.
양성산은 해발 300m 정도 되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삼국 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국경을 마주한 곳이기도 했고 후삼국 시대, 고려 시대까지도 전투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산 정상부를 둘러싸고 흙과 돌을 섞어 쌓은 양성산성이 있습니다.
-(해설) 양성산성은 661년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던 군사가 주둔했던 곳이기도 하고 이후 10세기 초에는 태조
왕건이 견훤으로부터 산성을 빼앗기 위해 전력을 다했던 곳이라고 하는데요.
산길에서 벗어나 능선의 바깥쪽으로 조금 내려와야 비로소 성벽의 일부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해설) 크기도 두께도 일정하지 않지만 한 줄, 한 줄 쌓아 올린 성벽은 그 시대를 이해하는 흔적이 됩니다.
-(해설) 지금 성벽의 대부분은 무너져 사라졌지만 오랜 시간을 버텨 남아 있는 성벽의 일부는 과거 온전했던 산성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양성산 정상에서 작두산 쪽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작두산 능선에 우뚝 서 있는 팔각정. 고개를 넘어 산길을 걸어와 숨을 고르며 계단을 오릅니다.
-(해설) 팔각정에 오르니 문의를 품은 산들과 대청호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풍경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금강이 흐르던 작은 물길은 호수가 되었고 호수 너머에는 여전히 너른 들판이 있습니다.
마을마다 동네마다 이름의 유래가 있는데요.
문의라는 이름의 유래는 고려 말 일륜선사의 이야기로 시작됐습니다.
-(해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삶은 삶으로 이어지며 사람들은 이 터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왔습니다.
삶이 이어지는 한 이야기도 끊임없이 이어지겠죠.
삶의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탁금란 씨의 여정은 두루봉 동굴이 있던 노현리 신한마을로 이어집니다.
문의에는 아주 오랜 구석기부터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교과서에도 실린 흥수아이도 이곳 문의면 노현리 두루봉 동굴에서 살았다고 하는데요.
먼 옛날, 이곳엔 두루뭉술하게 솟은 봉우리, 두루봉이 있었습니다.
두루봉에는 두루봉 동굴을 비롯해 여러 개의 동굴이 있었는데요.
구석기 사람들에겐 꽤 괜찮은 살림터였을 겁니다.
석회석을 채석하게 되면서부터 계속 파내고 깎여나가 봉우리는 큰 구덩이가
돼 구석기 사람들의 삶터였던 두루봉 동굴 자리는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해설) 두루봉 동굴 자리는 사유지로, 채석 활동을 하는 도중에 유적이 발견된 경우인데요.
1976년부터 수년간 발굴한 두루봉 유적에서는 무려 6개의 동굴 유적이 발굴됐다고 합니다.
흥수아이의 뼈도 이때 발굴됐는데요.
두루봉동굴 유적의 여러 개의 동굴 중 한 동굴에서 석회석을 캐내는 작업을
하다가 우연히 사람의 뼈가 발견됐습니다.
당시 현장 소장이었던 김흥수 님이 이 사실을 발굴단에게 알렸고 그로 인해
이 유적이 마침내 세상에 알려지게 됐죠.
그래서 제보자의 이름을 따서 뼈가 발견된 동굴을 흥수굴이라 이름 붙였고
흥수굴에서 출토된 아이의 뼈는 흥수아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때 두루봉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 중에는 지금은 멸종돼 사라진 동물들의
뼈도 있고 구석기 사람들의 장신구와 석기들도 볼 수 있는데요.
많은 양의 구석기 유물이 썩지 않고 발견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이 석회암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주 오래전, 채집과 수렵으로 삶을 일구던 구석기인들의 삶터가 지금은
석회석을 채석하는 사람들의 삶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삶은 삶으로 이어집니다.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문의마을 첫 사람들의 활동 무대가 있습니다.
바로 작은용굴인데요.
구석기 최고의 주거지, 작은용굴로 조심스럽게 들어가 봅니다.
오랜 세월, 그 긴긴 시간을 품어 온 동굴 내부의 모습은 재미난 이야기를 만들었는데요.
-(해설)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볼까요?
넓고 아늑한 공간이 있습니다.
-(해설) 비바람과 짐승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따뜻하고 안전한 곳.
동굴은 아마도 최적의 주거지였을 겁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긴 숨을 들이쉬면 먼 옛날 이곳에서 살았던 구석기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는 듯합니다.
두로봉 동굴과 근처의 동굴 유적들은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지만 근방 괴곡마을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삶의 터전이기도 합니다.
-어머니 집이에요?
-네.
-(해설) 두루봉 일대 광산에서 채석한 돌로 마을 사람들이 일일이 깎고 갈아서 만든 것이 있었는데요.
바로 다듬잇돌입니다.
질 좋은 돌에 무늬도 좋아 전국 제일로 손꼽혔다고 합니다.
-여기 다듬잇돌이 있네요.
여기 다듬잇돌은 어머니가 지금 안 쓰셔서 여기다 놔두신 거예요?
-그렇지.
이거는 아버님이 해놓은 거고.
그거 도매로 많이 만들어가는 이들이 갈아달라면 갈아 준 거지.
-어머니, 그럼.
-이렇게 판판하게 그냥.
-어디를 이렇게 가는 거예요?
-이 바닥도 갈고 옆도.
-이 여기도 갈고, 이렇게?
-그럼.
그러니까 이렇지 안 갈면 이게 엄청 거칠어.
-거칠고.
-그렇지.
숫돌 같은 거, 고운 걸로 위에는 갈지.
그렇게 해서 이걸 한 거야.
-(해설) 마을의 남자들이 돌을 깨서 모양을 만들면 여자들이 여러 번에 걸쳐 갈고 갈아 매끈한 다듬잇돌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집에 가.
-(해설) 그래서 괴곡마을에서는 어느 집에서나 다듬잇돌을 볼 수 있고 그에 얽힌 사연들도 있는데요.
-어디, 어디요?
-여기.
여기야.
-다듬잇돌이 있네요.
-여기 있어요.
-어머니, 그런데 계단에다가 다듬잇돌을 두는 이유가 있어요?
-네.
-왜요?
-감춰놓느라고.
-왜요?
-우리 할아버지 거라고.
-아 할아버지 거예요, 이게?
-우리 할아버지가 만든 거.
돌아가실 때 두고 잘 쓰라고 그래서.
-지금 안 쓰시니까 계단에다 두고 오고가면서.
-쳐다봐요.
-쳐다보면서.
-그래서 보느라고 여기 놓은 거야.
-할아버지 생각날 때마다
보시려고요?
-그래요.
-보고 싶을 때는 또 할아버지
보시는 것처럼.
-솜씨, 두드렸던 거.
여기 봐.
-여기.
-여기부터 저기까지.
-여기도.
어머니가 가신 거예요?
-내가 다 갈았어.
만든 거야.
-할아버지가 만들고 어머니가 완성하고. 이거 볼 때마다 할아버지 생각 많이 나시겠다.
-그래서 그냥 놔두는 거야.
누가 달래도 안 주고 내가 간직하는 거지.
두고 보려고.
-원석을 광산에서 그 구토라고 해서 흙을 파내고 돌을 좋은 원석을 찾아서 떼서.
-정, 망치.
-정과 망치 두 가지로 때려서 전 제품을 만들었어요.
-그걸로 만들었지.
-아저씨.
-큰 돌멩이로는 저기를 놓고 쪼갰다고.
-칼로 깎았다고.
나는 그렇게 안 했어.
-이틀이고 삼일이고 쫙 쪼개서 벌어진 다음에 그걸 또 쪼개서 이렇게 만들었다고.
-해봤어.
-시아버지가?
-우리 마을에서 남자분들은 제품을 가공을 해서 만들고 이제 아주머니들이 면삭, 면을 부드럽게 깎아서.
-하루에 20개도 만들었어.
-20개, 어머니는 20개, 난 20개. 어머니는 몇 개 하신 거예요?
-여기도 20개.
-서로 시합해서 간 거예요.
-시합도 하시고.
-아주머니들은 한 20개씩 갈고 또 젊은 사람들은 한 10개 정도씩 갈고.
-조그마니까 나는 이제.
-몇 살 때 했었어요?
갈 때, 이거 처음 시작할 때.
-그때 뭐 열댓 살 넘었지.
-아기 때 하셨네요.
-그렇지.
-14살?
-지금은, 그때는 어른이었지 그렇게 먹으면.
지금은 아기로 쳐.
-이런 데가 피가 나고 그랬어요.
-피가 나고.
-갈아서.
-(해설) 마을에서 다듬잇돌을 만든 건 1940년대부터 1980년쯤까지였다고 합니다.
-60원도 받고 70원도 받고.
-괴곡마을 사람들에게
귀한 수입원이었을 텐데요.
-그래서 그때는 그게 컸다고.
-그게 쓸 게 있었어요, 그래도.
-그 옛날에 근동에서 이쪽 마을 사람들이 좀 부유하게 좀 택택하게 살았어요.
-힘들고 일은 쉽지 않았지만 좋았어요, 진짜.
-그리고 재미도 있었어, 그거 하다 보니까.
-(해설) 좋았던 마을의 전성기를 다시 떠올려서인지 마을 어르신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핍니다.
오랜만에 울리는 다듬이 소리가 경쾌합니다.
-좋다!
잘한다!
-(해설) 젊은 날 익숙하게 해왔던 생활의 일부분이어서 일까요?
연습하지 않았는데도 즉석에서 멋진 합주가 됩니다.
한때는 괴곡마을의 집집에 울렸을 다듬이 소리.
그 소리에서 4만 년 전 두루봉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정겨운 다듬이 소리를 뒤로 하고 다시 발길을 옮겨 한적한 산골 마을 산덕리로 향합니다.
이 길은 산 너머 마을 아이들이 학교 가는 길이었다고 합니다.
주변 산세가 덕스럽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산덕마을에는 태실이 있습니다.
태실은 아기가 태어날 때 달고 나오는 태를 묻는 장소를 말하는데요.
우리 조상들은 아이의 태를 생명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해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
태를 아주 소중하게 묻었다고 합니다.
-(해설) 태실이 있는 이곳을 태봉이라고 부릅니다.
해동지도, 여지도서 등을 비롯한 옛 문화에도 태봉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요.
태를 묻은 봉우리라는 뜻입니다.
태실이 자리하고 있는 이곳, 산덕마을은 영산 신씨가 400여 년을 살아온 영산 신씨 집성촌입니다.
35대째 대대손손 모여 살아온 이곳에서 사람들의 기억에 기대어 마을의 시간을 기록합니다.
지금도 주민의 80% 이상이 영산 신씨인 이 마을에선 궂은일, 좋은 일 가리지 않고 마을의 대소사를 함께 나누며 살고 있다는데요.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종중에서 내려오는 종계 문서입니다.
-거의 100년이 넘었던 기록들이네요 .
-네.
-그럼요.
-넘었지.
-(해설) 종계 문서는 제사를 지내고 문중과 관련된 행사를 진행하는 금전 입출납에 대한 내용을 적은 문서입니다.
-그러면 추입은 얼마 정도 받은 거예요?
-그건 뭐.
-그때마다 달라요?
-그러니까 최소한 쌀 몇 되, 이렇게 돼요.
-(해설) 산덕마을이 영산 신씨 집성촌을 이루게 된 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는데요.
증평에 살던 무관이신 입향조께서 태실을 지키기 위해
처음 이곳, 산덕마을에 들어와 정착했고 그 후 400여 년 동안 영산 신씨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면서
마을 공동체를 잘 유지해 오고 있답니다.
-지금.
-못해서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이 더 많더라고요.
-맞아요.
-97통을 연락을 했어요, 연락되는 사람들.
그런데 한 200여 명이 들어왔으니까.
-서울 소문...
-연락을 안 해도 자진해서 내는 사람들이 더 많아.
-각지에 흩어져 있지만.
-연락이.
-마음은 다 이 산덕리를 향하고 있는 거네요.
-산덕리, 네.
-그분들이 또 얘기하는 게 고향에서 계신 분들이, 여기 계신 분들
또 이런 걸 추진하고 할 때 너무 고맙다고.
미처 자기네들이 더 해야 하는데 그런 거.
하여간 그래서
더 협조를 많이 하는 거 같아요.
-그러면 종중에서
이렇게 조상을 기리고 섬기는 일을 이렇게 중요하 게 여기는 이유가 있을까요?
-그것은 현대 사람들이 알아들어야 할 이야기인데,
나도 우리 할아버지들이 안 계셨다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이런 개념이 없었을 거예요.
어른을 잘 모시고 하는 것은 단순히 어른을 모시는 게 아니고
자라나는 사람이 그렇게 대우를 받고 커야 하고
대우를 받아야 하잖아요, 우리 자식도.
우리 자식이 낳아서 예쁘게만 크지, 제 새끼를 낳아서 방치한다면 자식이고 그리고
나도 억울하고 자식도 억울하고.
그래서 효라는 걸로 해서 교육이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그걸 효를 하는 것을 힘들게 생각하면 안 되고.
옛날에 내가 어른을 모신다는 그 자체는 너도 이렇게 대우를 받도록 하는 기반에서 이게 되는 거지,
어른이 자기를 자기가 대우를 받기 위해서 한다는 건 효에 어긋나는 거라고.
-(해설)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산덕마을에서는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형님, 동서, 아주머님입니다.
이런 관계로 엮여 있다 보니 촌수로 인해 생기는 일들도 있다는데요.
-그러니까 여기가 동서고.
-저를 기준으로 했을 때 여기는 아주머니 되시고요.
-여기는 아주머니.
-이분하고 여기는 형님시고 여기는 또 아주머니.
여기는 또 조카며느리.
여기는 동서뻘.
-동서.
-여기는 아주머니.
-아주머니.
그럼 우리 제일 연세가 많으신 우리 어머니가 여기서는 제일 아랫사람이네요.
-제일 촌수가 낮다.
-그런 거죠, 어머니?
-촌수로는 제일 촌수가 낮은 거죠.
-아주머니, 아주머니.
-조카며느리라고 이렇게 막, 말 막 하거나 이런 건 없었어.
연세도 많고 또 아무리 조카며느리라도 연세가 많으니까 대우는 해 줘야지.
밥 먹어라, 이 소리도 안 해봤어, 나.
잡수세요, 하고 꼭 그렇게 했지.
그렇게 했어요.
-어린 아주머니한테도 함부로 안 하시고요.
-함부로 안 했죠.
절대 안 했지, 함부로.
지금 아주머니뻘이거든, 우리 아주머니가.
연세가 제일 많으신데 저 아주머니도 우리한테 뭐 이렇게 함부로 이렇게 하는 게 없었어.
-어머니들도 다 그렇게 하셨어요?
-다 그렇게 했죠.
-다 똑같아요.
우리 신 서방네가 다 그래요.
-신 서방네가 다 그래요?
-(해설) 산덕마을의 주 생산 작물은 감이었습니다.
감나무는 잎이 넓어 글씨를 쓰며 공부를 할 수 있어 문덕이 있고 나무가
탄탄하여 화살촉을 깎아 쓸 수 있어 무덕이 있고 겉과 속이 한결같이 붉어 충덕이 있으며 치아가 없는 노인도 즐겨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열리니 효덕이 있고 서리가 내려도 오래도록 감을 매달고 있으니 절덕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덕으로 삶을 꾸려가는 산덕마을의 오덕의 과일인 감이 많은 건 어쩌면 우연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골 마을의 축소와 소멸의 위기를 우려하는 요즘.
조상을 섬기고 고향을 아끼는 후손들의 마음으로 희망을 이어가는 산덕마을입니다.
1980년, 대청댐의 준공과 함께 생겨난 인공 호수 대청호.
-여기에도 폐선이 있어요.
-(해설) 금강의 물줄기를 막아 댐 안으로 가둬놓은 탓에 흐르던 강물은 호수가
되어 버렸고 논밭을 일구며 살아가던 사람들의 터전은 물속에 잠겼습니다.
이곳도 그중 한 곳인데요.
일부는 수몰되고 일부 수몰되지 않고 남은 터에 지금은 여섯 가구가 살고 있는 조용한 피미마을.
탁금란 씨의 카메라에 마을이 기록됩니다.
피미마을이 그랬던 것처럼 대청호가 생기며 86개 마을의 2만 6000여 명의
이주민들이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떠나야 했는데요.
수몰민들의 갖가지 사연을 품은 호수 위로 그리움이 머뭅니다.
-(해설) 피미마을의 안쪽으로 들어가면 호수 둘레로 조성된 호젓한 숲길이 있습니다.
대청호 오백리길의 19구간에 속하는 피미숲길인데요.
숲길을 걷다 보면 그 길 끝에서 지금은 이름만 남은 들, 노루실을 만나게 됩니다.
문의면 소재지와 피미마을 사이에 있었던 드넓은 들판.
생긴 모양이 노루를 닮았다 해서 노루실이라 불렀다는데요.
지금은 인공 수초 재배섬이 이정 표처럼떠있는 호수 아래 저 어디쯤 노루실이 있을 겁니다.
-(해설) 구름은 흘러가 어딘가에서 또 그늘을 만들고 낮이 끝나면 밤이 오는
것처럼 지금은 사라져 볼 수 없는 것들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않는 그리움으로 깊이 뿌리내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요일 오후, 마을 어르신들이 탁금란 씨의 작업실로 모였습니다.
-안녕하세요?
-(해설) 일주일에 한 번.
문의면에 살고 계시는 어르신들과 함께 살아온 삶과 지금의 삶의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풀어내는 수업을 진행하는데요.
-우리 앞에는 영업소였어.
-(해설) 오늘 모이신 세 분은 모두 예전 수몰 되었던 마을에 살았고 지금은 문의면 소재지에 살고 있습니다.
-잠겼죠.
지금은 뭐, 동네 이렇게 조그마한 산만 보이죠.
물 속에 들어갔죠, 지금 다.
-다 그냥 뭐.
-어디로 가셨을까요?
-대전, 청주, 평택.
-평택.
-주로 평택으로 많이들 갔어.
-평택에 많이 갔어요, 거기가.
-거기가 개간지, 땅을 싸게 파니까.
-간척지에서.
-맞아.
-여기 사람들을 분양을 했어요.
-(해설) 평생을 문의에서 살아오신
어르신들의 기억은 마치 마르지 않고 계속 솟아나는 화수분 같습니다.
-이건 우리 시댁이라고 내가 이야기했지.
-(해설) 1977년 문의면 문산리 일대의 항공 사진인데요.
대청호에 수몰되기 전 문산의 옛 모습입니다.
어르신들의 생생한 기억이 희미한 사진 위에 덧붙여지면서 마을이 되살아납니다.
-담배 창고는.
-담배 창고는 상당히 컸어.
-이때, 석교가 그때 저한테는 여기 실개천 있는데 아니고 여기 안쪽으로 있다고 했잖아요.
다리니까.
-그렇죠.
노루실 개천 안으로 있어.
-개천을 지나서.
그럼, 개천은 어떻게 넘어 다녔어요?
-이리로 넘어가면 노루실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야, 여기가.
-여기 노루실 가는 길인데.
-그렇지.
-이게 개천이거든요?
그러면 개천을 넘는 게 문산 석교가 아니고.
-아니야, 개천 가기 전에.
-다리가 따로 있었어.
-여기 있었을 것 같은데.
-다리 따로 있었어.
-여기요?
-집 끄트머리, 여기가 맞다.
-여기 맞아요?
-맞아, 맞아.
-그러면 개천은 어떻게 건넜어요?
-다리로 건너갔지
-다리.
-거기 다리가 또 있었어요?
-다리, 나무다리.
-또 있었어.
-여기 있는 나무다리.
-나무다리.
-(해설) 지금은 물 속에 남겨있는 문산의 옛 모습을 도면으로 다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는 탁금란 씨는
어르신들이 오실 때마다 지도를 보여드리며 위치를 여쭙는데요.
이렇게 여러 어르신들의 의견을 듣고서 정확한 위치를 표시한답니다.
어르신들의 기억이 기록을 통해 문의의 내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게 역사야, 내 역사.
-그럼, 이런 게 어디 있어.
-그래서 제가.
-이거 봐, 이거, 이거.
-여기 노루실에서 마늘 나네요.
-이 노루실 마늘, 이걸 뽑아다가 우리 79년도 6월에 전국체전,
소년전국체전을 했어, 충북 청주에서.
그래서 이걸 뽑아다가 민박 가정에 다 나눠줬다고, 차로 싣고 가서.
그때 자기네 마늘 뽑았나 보다.
그렇지?
노루실에서 뽑은 거야, 이거.
-마늘밭이 엄청 많았어요, 제가.
-여기 경로회.
-폐품 수집할 때 병이 돈이 제일 잘 되니까 제일 많이 모은 거고요.
이렇게 모아서 어른들한테 어버이날 꽃도 달아드리고 선물도 해드리고.
-(해설) 빛바랜 사진들 속에는 지난날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예전 살았던 마을 모습 풍경이랑 그 안에서 왔다 갔다 하는 자기 모습,
아니면 자기 모습만 크게 부각하고 주변에 있는 것들을 다양하게 이렇게 쭉 그려놔도 괜찮아요.
-(해설) 어리고 젊었던 날들의 모습, 가족들의 모습, 마을의 옛 모습 등 가슴 깊이 남아 지워지지 않은 기억들이
어르신들의 붓끝에서 그림으로 되살아납니다.
애써 떠올리지 않아도 실타래 풀리듯 술술 나오는 지난날의 이야기들.
-(해설) 고향집을 그리는 손은 주저함도 막힘도 없습니다.
-옛날에는 마당에서 환갑 잔치하고 뭐하고 무슨 잔치들 다 했는데, 그렇죠?
-우리 어머니네.
-어머니 앉아계세요?
-여기 계신 게 우리 어머니네.
-잘 그리는 거야.
-우리 어머니네, 생각해 보니까.
-(해설) 어르신들의 그림은 서로에게 말문을 열고 기억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어 줍니다.
우리 시댁, 시댁.
-(해설) 어르신들의 그림은 추억을 뽑아내는 자판기 같습니다.
-이건 감나무인데 섯밭, 신대리 섯밭에는 감이 무척 많았어요, 감나무가.
가을만 되면 마을이 빨갛다시피 감이 많아.
-그래, 감나무 있어, 거기에.
-(해설) 좋은 친구들도 만나고 묻어두었던 옛 추억을 공유하며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어서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어르신들.
어르신들에게 그림을 그리는 이 시간은 가슴 한편에 심어져 있던 그리움의 씨앗을 싹틔우는 시간입니다.
그 씨앗들이 그림으로 더 활짝 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고단했고 부족했던 삶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고 지나간 날들을 따뜻하게
추억하시는 어르신들의 기억 속에는 고향에 대한 향수와 시대를 함께 겪어온 이웃들이 있습니다.
-(해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마을 전경들이 사진 속에 남아있습니다.
지나간 옛 추억도, 붙잡고 싶은 청춘의 기억도 이제는 책 속 사진으로만 만날 수 있습니다.
젊은 날의 고됨도 상실의 고통도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밑거름이었다고 기억하는 사람들.
힘겨운 삶이었지만 마음만은 반짝반짝 빛나던 시절이었을 겁니다.
지나간 시간과 사라지는 것들을 기억하여 전하는 일은 어쩌면 과거로부터 흘러온 삶이라는 강에서 다가올 삶에 대한 희망을 낚아 올리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해설) 한 마을이 사라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사람이 흩어지고 터전이 사라지고 따라서 문화와 역사도 묻히는 것이 아닐까요?
가만히 두면 흩어지거나 사라져 버릴 삶의 이야기, 마을의 이야기들이 귀하게
생각되고 소중하게 모아져 언제든 꺼내볼 수 있게 전달되고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땅과 물이 맞닿아 함께 가는 길이 호수를 따라 굽이굽이 이어져 있습니다.
호젓한 오솔길과도 정겨운 시골 마을 길과도 이어집니다.
대청호가 품은 이 길들 위에는 마을을 굽어 흘러온 물길의 궤적과 시간을
품어온 역사의 깊이만큼이나 유구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길이 또 다른 길로 이어지듯 이야기도 이어집니다.
때로는 잊히고 다시 살아나기도 하면서 말이죠.
대청호가 만들어낸 숨은 오지 중 한 곳인 가호리는 더 이상 버스도 들어가지 않는 곳입니다.
진사골 종점에서 1.9km에 이르는 이 길은 옛 가호리로 가는 비포장도로입니다.
대청호가 만들어지면서 마을이 소멸하고 마을 뒤로 비포장도로가 만들어졌죠.
산비탈에 살던 수몰되지 않은 네댓 집마저 떠나고 이제 이 길만 남았습니다.
길을 따라 걷다가 아득이 마을로 이어지는 소나무 숲길로 들어섭니다.
마을 주민들이 밭 매러 나무하러 다니던 옛길입니다.
마을은 사라졌지만 길은 남아 잊고 지냈던 그리운 것들을 추억하게 합니다.
-아득이라고 하는 마을은 긴 백사장에 있어서 밖에서 덕이 들어온다고 해서 아덕리라고도 불렸고요.
아덕리를 지나면 꽃이 아름답게 핀 꽃계라고 하는 이름만 들어도 아주 아름다운 마을이 있었고요.
가여울에도 여울이 흐르는 자연마을이 있었다고 합니다.
-(해설) 수몰 마을 중 한 곳인 가호리에는 아득이, 화계, 가여울 3개의 자연마을이 있었는데요.
모두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이 고개는 꽃계 마을하고 가호리 마을을 구분 짓는 고개인데요.
여기에 있는 보호수 한 200년 된 이 나무를 지나면 저희가 가호리 마을에 들어서게 됩니다.
가호리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해요.
여기 마을 뒷산에서 이렇게 내려가면 여기 물속에는 마을이 있었는데요.
저기 보이는 섬이 하나 있는데 저 섬 이 마을의 앞산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산 뒤쪽으로 마을이 쭉 있었을 거고요.
그리고 뒷산으로 학교 가는 길도 있었고요.
그래서 이곳 아이들은 한 5, 60명 정도 되었다고 해요.
산을 넘어서 용흥초등학교까지 학교를 가기도 하고 강을 건너서 대전으로 또 시장도 가고 학교도 갔다고 합니다.
지금은 물속에 잠겨 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저기 아래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있을 것 같은 느낌, 상상이 되지 않나요?
-(해설) 한 사람의 일상 이야기가 차곡차곡 모이면 개인의 역사가 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졌던 생각들이 기록돼 공통 분모를 가지게 되면 마을의 역사가 되는 거겠죠.
수몰의 아픔과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호수.
호수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한 문의문화재단지는 수몰 지역의 삶과 흔적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가호리 아득이마을에 있던 청동기 시대 고인돌입니다.
고인돌에서 약 3m 떨어진 곳에서는 북극성 주변 별자리를 그린 별자리판도 발굴되었습니다.
오래전 아득이에 밤 하늘을 수놓았을 별들, 그 반짝임이 느껴집니다.
조선 시대 문의현의 객사였던 문산관 은1909년 문의초등학교가 생기면서 한때 학교 건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수몰 인후 문의향교 옆으로 옮겼다가 1997년 다시 이곳으로 이전하여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는데요.
시간은 흘러도 공간은 남아 세월의 이야기를 오래도록 기억하게 합니다.
-(해설) 누구에게는 학교 가는 길로 누구에게는 장에 가는 길로,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갔을
문산리 돌다리도 세월을 고스란히 품은 채 여기 놓여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그 과정에 삶의 우여곡절들도 있었지만 명랑하다고 하는
그 기운들이 계속 이어지고 문의를 오가는 사람,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명랑한 기운에 젖어 든다면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이 터전에 다시 새로운 삶의 무늬가 새겨지지 않을까요?
문산 앞에 드넓은 노루실이 있고 저기 멀리 아득이까지 강줄기를 따라서 넓은 들판이 좌우에 펼쳐져 있었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넓은 들판에서 마늘 농사를 짓고 어떤 사람들은 물길 따라 고깃배를 띄웠겠죠.
우리가 잘 몰랐던 마을의 사라진 것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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