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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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지도 - 일기에서 역사를 읽다 (최은주 /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원)

등록일 : 2024-02-21 10:10:21.0
조회수 : 333
-보물이 되는 지식을 찾아 떠납니다. 펼쳐라.
-(함께) 보물지도.
-두 분은 이렇게 보물지도 녹화가 있는 날 끝나고 집에 가서 보물지도 녹화 길었다.
정말 그만하고 싶다. 뭐 이런 식으로.
-이건 자기 생각하는 거 말하는 것 같은데요.
-일기 쓰시는...
-본인 생각을. 이야기하면 어떡해요.
-아닙니다. 오해입니다. 이런 식으로 일기를 혹시 쓰시는지요.
-요새는 사실 이렇게 직접 쓰는 일기보다는 인별그램 같은 데다가 하루만에 사라지는 스토리에다가 촬영 너무 재밌었다.
너무 알차고 좋았다. 저는 이런 식으로 한 번씩 하지 이렇게 힘들었다 이런 건 잘 안 해요.
-방송에 거짓말하면 안 돼.
-그렇군요. 그러니까 일기를 직접 쓰기보다는 SNS에 그냥 하루 일과를 올리는 정도다.
-그렇죠.
-또 많은 분들이 사실 요즘 그렇게 하고 계시고 인욱 씨는 어떤가요? 일기 쓰시나요?
-저는 강압적인 초등학교 생활할 때 썼던 일기를 말고는 써 본 적이 없어요.
-방학 숙제라든지.
-그렇죠.
-담임 선생님이 시켰던 일기 그 정도.
-마지막 방학 전, 개학 전.
-몰아 쓰기.
-마지막 30일 치 몰아 쓰기.
-몰아 쓰기.
-그런 거.
-온 가족이 둘러앉아서 내 일기를 쓰던.
-그렇죠.
-맞습니다.
-우리 가족만 그런 게 아니었네.
-사실 저는 일기 쓰는 거를 즐겨하기는 하는데 굉장히 좀 유아적으로 쓰거든요.
-남 욕하는 거나.
-아닙니다.
-아니면.
-밥을 먹었다. 배부르다. 내일 뭐 하지?
뭐 이렇게 이 정도로 쓰기는 하는데 사실은 저는 일기 쓰는 거보다 더 좋아하는 게 있습니다.
바로 남의 일기를 보는 건데요. 그런데.
-그거는 범죄입니다, 이거.
-그런데 이 일기를 엿보는 직업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 모실 선장님의 일이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거라고 하거든요.
그 재미있는 직업 어떤 일인지 바로 선장님 불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장님.
-(함께) 나와 주세요.
-선생님,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선장님, 제가 일기를 엿보는 일을 하신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정확히 표현한 것 맞나요?
-엿보는 건 맞는데 일기를 연구하는 거죠. 조선시대에 쓰여 있는 일기들을, 일기 자료들을 연구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되게 있어 보이는데.
-나는 지금 일기 훔쳐보는 건 줄 알았잖아요.
-죄송합니다. 사실 그런데 일기라는 게 개인의 일기가 하나하나 모이다 보면 당시 사회상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들기는
합니다마는 이게 연구를 할 만큼 사료가 좀 많이 남아 있나요?
-10년 전까지 제가 조사를 했을 때 조선시대 개인 일기 자료가 1000종이 넘었으니까 아마 그 뒤에 10년 동안 또 많은 새로운 자료가 발굴이 됐다면 어쨌든 그거보다는 훨씬 더 많겠죠.
그 1000종의 일기 중에는 정말 특정한 경험, 특정한 시간, 어떤 특정한 사건, 주로 이런 것들을 기록한 일기들이 많은데 그게 관직을 수행했을 때 관직 일기.
또 유배를 갔을 때 유배 일기. 또는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 일기.
-난중일기 이런.
-그런 거죠. 전쟁 일기가 있고 제가 제목을 조선시대 유생들의 일상, 일기로 엿보다라고 했던 것은 우리가 보통 조선시대 하면 고루하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니까 선비. 선비라고 하면 사실 완성된 인격체.
뭔가 흠이나 결점이 없는 것 같은 사람. 인간적인, 사실 어떻게 보면 완성된 인격체로 우리가 존경하고 훌륭한 사람이지만 보통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는
뭔가 범접하기 어렵고 흠을 찾을 수 없는 약간 이제.
-뛰어다니지도 않고.
-맞아요.
-뛰어다니기를 할...
-뒷짐 지고?
-응.
-그렇죠. 뛰어다니지는 않습니다.
-그렇죠. 변소가 급하시더라도, 아무리 급하시더라도 걷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어떤 완전한 모습의 선비를 생각하고 일기를 생각하면 사실 그 일기가 어떤 내용일까가 사실 조금 의문스럽지만 제가 주로 주목하는 것은
완성된 인격 이전의 과정을 가는 유생들의 일상을 일기로 보려고 해서 제가 몇 개의 일기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사실 그 옛날에 글 읽는 사람들이 쓰던 일기는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 은밀한 이야기들은 잘 담겨 있지 않고 그리고 30대 이후, 40대 이후 또 만년의
일기들은 사실 우리가 생각했을 때 일상이라는 것이 대부분 주로 봉제사 접빈객이라든지 어떤 제사를 받들고 또는 손님을 맞이하고 또는 학문을 하고
그리고 일반 어떤 지역에서 사림, 유림 활동을 하고 이런 것들이 주로 일반적인데요.
제가 아까 유생이라고 말씀드렸지만 관심이 있는 것은 20대의 시절. 한참 공부를 하던. 아마 시험을 언제 치셨는지 기억나세요?
-저는 임용 시험 공부할 때 수험생이었기 때문에 약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 제일 최근에 그나마 저희 셋 중에서는 비교적 최근에 시험을 치신 것 같아요.
-그런데 꼭 종이 시험이 아니더라도 내가 누군가에게 평가받는다고 하면.
-있죠. TBC 들어올 때요.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러니까 그 평가받는 그때까지가 사실 그날의 결과로 끝나는 거지만 사실 우리가 평가를 받고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계속해서 노력을 하잖아요.
-과정이.
-시험이라는 것도 우리가 결과에만 연연하면 내가 뭐 붙었다, 떨어졌다, 잘 쳤다, 못 쳤다만 되지만 내가 그 시험을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그 중간 과정이 어땠냐.
나는 내가 생각했을 때 내 개인은 돌아볼 수 있지만 우리가 남의 일기를 보면서, 또는 조선시대를 보면서 사실 그 과정은 잘 보지 않는 거죠.
그냥 훌륭한 학자, 또는 훌륭한 인물, 역사가 기억하는 것은 두드러진 사건, 두드러진 인물.
아주 악하거나 아주 선하거나 아주 훌륭하거나.
기록이 남고 기억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사람들인데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대학자를 하더라도 그 사람이 나자마자 대학자는 아니잖아요.
그리고 과거 시험에 합격했다고 하더라도 태어나서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과거 시험에 합격하는 게 아니듯이 그 합격하기 위해서 또는 훌륭한 학자가
되기 위해서 어떤 과정을 어떻게 치열하게 공부하고 어떤 자신의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이겨내서 그런 어떤 과정까지 갔었나라는 게 사실 저는 관심이 많고.
-그 찌질했던 수험생 시절을 다 보고 싶다는 거죠?
-그렇죠. 찌질이라고 제가 말을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그분들의 어떤 그런 과정들이 섞여 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리는 처음에 있는 계암 김령이라는 분이 16세기를 사셨고 이분의 일기가 1603년부터 1641년까지, 27세부터 64세까지 39년간을 기록했어요.
-오래 썼다.
-진짜 꾸준히 썼네.
-매일매일 사실 쓰셨고 매일매일 쓰셨는데 그게 지금 남아 있는 책은 한 8책밖에 안 돼서 사실 중간중간이 좀 비어 있죠.
이해가 잘 되시지 않겠지만 내가 쓴 일기를 누가 옮겨 쓴다는 생각 해 보셨어요?
-생각만 해도 끔찍한데요.
-너무 싫은데요.
-좀 부끄러운데요.
-저는 솔직히 말하면 제 일기가 공개된다고 하면 병상에 누워 있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불태우고 갈 것 같습니다.
-대기하고.
-그 정도로.
-남이 보면 안 되는 그런 게.
-너무 부끄러워요.
-이미 다 말했잖아요. 밥을 먹었다.
-오늘 소개해 드린 일기가 본인이 쓴 일기 일부가 남아 있고 후손들이 다시 그 일기를 옮겨 쓴 일기가 남아 있습니다. 보통은 그 후손들이 일기를 옮겨 쓴다는 것은 이분들이 훌륭한 인물이라는 거죠.
-그렇죠.
-그렇죠.
-그러니까 훌륭한 인물이고 훌륭한 행적이었고 훌륭한 학문을 남겼기 때문에 기록되고 기억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남겨야 하겠다, 보존해야 하겠다,
후손에게 물려줘야 하겠다.
-나는 그래도 싫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그러면 일기가 후손에 대대손손 자료가 되려면 그래도 살아생전 어느 정도의 업적은 있기는 해야 하네요?
-그렇죠. 그래서 저희가 이제 보는...
-저희를 걱정할 필요 없네요. 제가 과한 걱정을 했네요. 알겠습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죠.
-두 번째 보는 일기가 8책 중의 1책이 마침 친필본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분이 직접 쓰신 거예요. 혹시 화이트 기억나세요?
-화이트요?
-수정할 수 있는.
-수정 팬이요?
-내가 일기를 쓴다고 생각하고 머리를 정서를 한다고 하면 쭉 쓸 때 결국 틀릴 수 있잖아요.
-그렇죠.
-틀렸을 때는 지워야 하잖아요. 이런 중간중간에 까만 점들이나 이런 것들이 본인이 이렇게.
-틀린 거네.
-지워서 쓰신 겁니다.
-저는 처음에 볼펜 똥인 줄 알았어요.
-앞부분에 보면 여기 같은 경우에는 이거는 후손이 옮겨 쓴 일기고요. 볼게요.
-후손이 옮겨 씀에도 불구하고 그때도 틀리면 저렇게.
-그렇죠. 어차피 붓으로 쓴다는 거는 지금도 우리가 볼펜으로 쓰면 고치지 못해서 수정을 하듯이 그때도 당연히.
-아니면 저거는 실제로 쓰셨을 때도 저 부분 틀리셔서, 그러니까 그 원래 원본이 거기가 까맣게 칠해져 있었던 거죠.
-그것까지 따라 하지는 않겠지.
-그런 거 아닌가?
-그거를 똑같이 써야 하는 거 아닌가?
나도 지금 그 생각하고 있었거든.
-후손들이 옮겨 쓴 일기도 이 기록을 대개 존숭한다는 그 선조의 기록을 함부로 손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에 약간 민감한 사실들은 생길 수 있어요. 100년이 흘렀다.
흐른 100년 사이에 사실은 여러 가지 이슈들이 생길 수 있잖아요. 지역에서도, 사회적으로도.
그런 어떤 대립과 갈등이 생길 수 있으니까 혹시 그런 민감한 게 생기면 빠트리기는 해도 그것을 고치거나 수정하지는 않습니다.
-포장은 안 하는구나.
-포장은 하지 않습니다.
-멋있게.
-저는 이 기록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봤을 때 어쨌든 지켜야 하는 선조들의 기록을 함부로 손대지는 않는다.
그런 결론을 제 스스로 얻고 있습니다. 어떤 일기에서 이 청대 권상일이라는 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는데요.
-권씨입니까?
-다른 본가일 거예요, 아마.
-아마 파가 다를 수 있지만.
-이분은 상주, 예전의 상주, 지금은 문경. 문경 출신의.
-문경.
-선비세요.
-내가 또 문경에서 군인, 군대 출신이죠. 내 부대.
-다들 한 발짝씩 좀 얹네요. 우리 권상일 선생님께.
-23세부터 80세까지 57년간.
-57년 동안 일기를 쓰셨다고요?
-네, 일기를 쓰셨어요. 그래서.
-누가 검사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썼다고요?
-조금 전에 보셨던 그 일기 모양과 조금 다르잖아요. 나름 자신들만의 형태가 있어요.
-이분이 조금 더 약간 레이아웃을 좀 잘 잡으신 것 같아요.
-그래서 달과 제일 앞에 제목이 딱 진하게 이제 임오년 정월, 이렇게 해서 연도와 월을 좀 진하게 쓰셨죠.
그래서 옛날 일기들을 보면 사람마다 기록의 어떤 성향이 다르기는 하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수정 흔적도 거의 없는 것 같고.
-다음은 보시면 이거는 뭔가 조금 더 줄이 생겼잖아요.
일기가 좀 줄이 생겼죠? 이것도 후손이 옮겨 쓴 일기입니다.
후손이 옮겨 쓴 일기인데 이 일기는 대산 이상정이라는 분이 이분은 안동 출신의 대산 선생이라는 이상정이라는 분이 25세부터 70세까지 약 한 46년간을
기록했고 문집을 만들 때 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체 문집을 모으면서 다 이거를 필사를 한 그 안에 여러 가지 유형의 글들이 있어요.
뭐 시도 쓰고 또는 산문도 쓰는데 그중의 그런 시와 문에 조금 포함되지 어려운 형태를 잡저라고 해서 이 일기를 그 잡저 부분에 넣어놨어요.
그래서 지금 이 문집에 일기가 대단히 많이 수록이 되어 있는 것이 후손이 옮겨쓴 일기고.
그런데 원본 형태가 이제 마침 또 이렇게 남아 있는 게 이게 이제 아마 말씀하셨던 줄 공책.
일기 날짜 쓰고 날씨 쓰고 하면 줄 공책이라는 거.
-틀이 있네요.
-틀이 있죠. 이게 이제 책력이라고 해서 옛날 달력이에요.
그래서 달력이고 자세히 보시면 달이 있고 날짜가 있습니다.
그 날짜 아래 작게 이제 쓰여 있는 글이 그 밑에 일기예요.
그래서 이건 일기가 사실 길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백이 없잖아요.
-짧게 짧게 간결하게.
-짧게 짧게 쓰시는 거죠.
-저랑 비슷하셨을 것 같은데요, 내용이.
-그럴 수 있죠.
-밥을 먹었다.
-왜냐하면 이분도 주로 글을 많이 지었어요. 밥 먹는 건 기록을 안 하시고.
-그런 건 기록 안 하셨... 반찬 이런 건 기록 안 하셨어요?
-그런 건 안 하고.
-멸치볶음.
-내가 지었다, 이걸 봤다.
-그러면 가장 많이 다뤄지는 주제가 본 것들에 대한 건가요?
-이분 일기는 주로 글을 많이 남기셨기때문에 내가 어떤 글을 지었고 또는 이제 내가 누구의 부탁을 받아서 어떤 글을 지어줬고 또는 내가 지은 글을 교정을 했고 이런 글들이 많습니다.
주로 이제 학문과 관련된 내가 무슨 공부를 했다, 이런 이야기들이 주로 많이...
지금 우리는 고등학교의 계속해서 수없는 시험을 치고 이제 고3이 되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고.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면 기본적으로는 뭐 어떻게든지 그다음의 과정을 가서 자신의 직업을 가지기 위한 관문을 또 거쳐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제 이것이 조선시대에는 과거시험, 특히 이제 문과라고 하는, 그 문과 시험 급제만으로 내가 공부를 해서 그 문과 시험에 급제를 하면 관직에 진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직업인이 되는 거죠? 우리가 지금 대학수학능력시험과 그다음에 내가 어느 직장인이 되기 위해서 치루는 모든 시험, 이것이 섞여 있다고 생각을 하시면 돼요.
꼭 앉아서 수능시험 치는 그 외에도 우리가 어떤 시험을 나를 평가받고 내가 치는 시험이 다 조선시대에는 과거 시험에 응축되어 있다라고 생각을 하시면
이제 그때 그 시절의 시험이 나와 무관하다라고 생각할 수 없다라는 생각을 저는 하면서 공부를 계속하거든요.
-그러면 지금 저희가 수능만 생각해도 우리한테는 엄청난 시험이잖아요.
그런데 심지어 수능과 약간 취업을 합친 느낌이라고 보면 좋겠다라고 말씀을 하셨으니까 조선시대 당시 공부하셨던 분들에게 과거란 정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시험이었겠네요.
-그렇죠. 그냥 이제 사실 태어나면 자연스럽게, 양반이라면 자연스럽게 공부를 하고, 그래서 과거 시험을 치고.
그래서 이제 이분들은 입신양명이라고 해서 어쨌든 몸을 세워서 이름을 드날리는 게 또 효도의 가장 첫 번째다라고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이건 뭐 내가 선택을 하는 게 아니었죠.
-운명이다.
-그냥 받아들이고 시작하고.
-당연한 거다. 내가 선택해서 하지는 않잖아요.
고등학교 교육까지, 그거랑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과거 급제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일생을 조금 구분해 보면 이분은 1702년에 23세 때 이제 일기를 시작해서 28세 때 생원, 진사 많이 들어보셨죠?
-생원, 진사 보물 지도에서 살짝 나온 적 있습니다.
-그러네요.
-이쯤에서 복습 한번 갈까요? 생원과 진사란?
-생원과 진사는 기억이 안 나네요? 다시 재방송, 생방송 또 봐야겠다.
-명륜진사밖에 모르겠습니다.
-거기에서 진사도 맞죠.
-맞습니다.
생원 진사가 중요한 건 아니고 과거 시험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좀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문과라고 하는 것은 대과라고 해서 문과에 급제를 해야만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거고요.
그 문과 앞에 이제 소과라고 해서 이 생원, 진사시를 소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격시험 같은.
-약간 맞아요. 되고 나면 타이틀을 따는 거고.
급제라는 합격증은 받지만 관직 진출하고는 연결이 되지는 않는 그런 시험이라고 생각을 하시면.
-그러니까 마치 대학 졸업증 같은 거예요?
그게 있어야 이걸 시험 칠 수 있다, 일정 교육 과정을 거쳤다라는.
-맞습니다. 일반적으로 표현을 하면.
-수료증 같은 느낌.
-그렇게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이분이 이제 어쨌든 첫 시험은 그렇게부터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이제 28세에 생원, 진사, 복시, 초시, 합격, 불합격 이걸 계속해서 반복을 하다가 31세, 1710년 31세에 이제 증광문과라는 그 문과 시험에 급제를 해요.
그런데 이제 우리가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연 1회 매번 있잖아요.
그런데 이분들은 시험이 정기 시험은 3년마다 1번 있었습니다.
-이거 한 번 놓치면 3년을 기다려야 되니까.
-거의 뭐 월드컵이네요.
-월드컵처럼.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런데 또 그렇게 두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중간중간에 별시라고 해서 시험들이 또 들어가는, 다른 시험들이 생기는 거죠.
-특별 시험.
-맞습니다, 특별 시험이 생기는 거죠.
그래서 이제 주로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으면 이제 별시라는 어떤 걸 통해서 큰 경사가 있을 때 치는 게 이제 증관시라고 해서 이분은 청대 권상일
선생은 증광문과에 31세의 나이로 급제를 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그러면 이제 특별 시험에 붙은 거네요?
-그렇죠. 특별 시험에 붙으셔서 시험을 치시고 그다음 초입, 승문원 권지부정자라고 해서.
권지라는 말이 붙는 거는 임시라는 뜻입니다, 임시. 그래서 이제.
-계약직인가요?
-처음에 대부분의 시작을 권지부정자로 시작을 하시더라고요, 부정자.
-처음에 약간 인턴 느낌처럼?
-인턴 느낌같은.
그렇게 해서 우리는 들어가면, 한번 들어가면 계속해서 그 직업을 갖고 있지만 이분들은 이제 중간 관직에 진출을 하면 많은 이제 관직을 받았다가
사직을 했다가 그러면 또다시 다른 관직을 받고 이렇게 해서 또 공을 세우면 또 올라가고 이게 이제 계속 반복이 되는 거죠.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러면 과거에 이제 급제를 했어요,
과거라는 시험에 급제를 하고 통과가 되면 그 안에서는 좀 관직 이동이 자유로운 것까지는 아니지만 가능합니까?
-관직 이동이요? 그런 데 있어서는, 질문이 되게 신선한데.
맞아요, 맞는데 그걸 그렇게 표현하니까, 그런데 맞다고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게 왜냐하면 제가 그다음에 표현을 한 게 여러 가지 관직을, 숱한 관직을 역임을
하셨다라는 것에 실제로 이제 뭐 그 안에 부처들이 대단히 많잖아요, 그 직제 안에.
그 직급을 다 돌아다니시면서 많은 관직을 제수받고 다시 또 사직을 하고 이거를 계속 반복을 하는데 이분이 실제로는 관직에 임명이 되지만 나가지 않은 관직이 많아요.
-왜죠?
-그러니까 내가 이제 여러 가지 좀 복잡하게 설명을 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지방에 계신 분들이 약간 좀 당 색이 다르거나 또는 갔을 때 생활이 어렵거나
또는 노모가 계시거나 이렇게 됐을 경우에는, 또는 자기에게 명분이 없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사실은 관직에 임명이 되었을 때 사직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습니다, 나가지 않고
결국은 이제 이분이 제일 마지막으로는 울산부사에서, 이제 울산의 지자체장인 거죠.
울산부사, 울산의 어떤 수령. 이제 그걸로 마지막으로 관직을 마무리하시고 낙향해서는 학문에 몰두하시고 제자들을 키우시고.
이분의 일생은 어쨌든 쭉 공부를 해서 과거 급제, 과거 급제한 다음에는 관직 출사, 출사한 다음에는 이제 서울과 그다음에 고향 상주를 왔다 갔다 하면서
관직에도 있다가 고향에도 있다가 울산부사를 끝으로 낙향하셔서 다시 학문 활동.
이렇게 이제 어떻게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냥 일반적으로 사람이 살아갈 때 지금 우리 사회 구조에서도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교 들어가서 직장인이 되고 이런 어떤 과정을 약간
전형적인, 어떤 선비의 일생이었다라는 것을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이 일기를 통해서 이 사람의 평생 동안의 어떤 동선을 볼 수가 있네요? 신기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그거를 일기를 통해서 분석을 하면서 그걸 정리를 해 봤어요.
그런데 대부분의 그 선비들이 또는 이제 유생의 어떤 시절을 거쳐서 본인이 이제 과거 급제를 하고 그다음에 관직에 진출을 했다가 다시 학문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를 그렇게 하나의 그런 주기표로 제가 만들어 본 거고요.
공부는 주로, 예전에 시험공부하실 때 어디서 공부를 많이 하셨어요?
-도서관?
-저는 보통 스터디 카페.
-스터디 카페.
-뭐 이런데요.
-뭐 저를 봐요, 공부 안 한 거 알면서. 공부 안 했는데...
-아니, 그러니까.
-보통 이제 우리가 공부를 하려고 하면 환경의 영향을 받거나.
-맞아요.
-또는 이제 좀 조용한 곳, 또는 아까 스터디 카페 이야기하셨지만 나 혼자 말고 여럿이, 또는 스터디, 같이하는 스터디.
-이게 공부 환경에 따라서 집중도가 너무 달라져서.
-맞습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조용한 데 있으면 또 집중이 안 된다하고.
-잇츠 미.
-어느 정도 소음이 있거나 아니면 좀 사람들이랑 떠들면서 공부를 하는 게 잘 되는 사람도 있고.
-그러면 조선시대에 이분들은 이미 이제 훌륭한 분들이에요라고 말씀을 드렸잖아요.
그러면 이분들은 어떻게 공부를 했을지, 저는 이제 그 공부하는 과정에 공부도 되게 힘들어했을까 이런 것들이 이제 좀 궁금했었거든요.
그래서 그중의 일부를 제가 하나를 소개를 해드리면 1703년이면 한창 공부하던 시절이시잖아요.
그중에 이제 절에 들어가셔서 서쪽 윗방에 머물렀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템플스테이하면서?
-옛날 뭐 드라마 같은 거 보면 고시 공부하던 사람이 절에 들어가서 혼자 공부 막 하는 그런.
-맞아요, 맞아요.
-장면들 이렇게 이제, 좀 젊은 분들은 잘 모르시더라고요.
-모르겠네요.
-이분 청대 권상일 선생님도 지금 이제 문경 대승사라는 절에 들어가서.
-템플 스테이.
-11월 24일 머물기 시작한 거죠.
-고시 생활을 저기서 이제 시작을 하신 거네요?
-그런데 26일이 되니까 누가 아파요, 같이 갔던 사람이.
그래서 감기가 들어서 이불 뒤집어쓰고 크게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자기가 보는 겁니다.
그러면서 딱 하는 말이 마음을 집중해서 공부를 할 수 없으니 고민이다, 마음이 집중이 안 되는 거죠.
옆에 누군가가 아프기 시작하니까. 그러니까 혼자 있는 게 아니고 여럿이 있었어요.
-옮을까 봐?
-그게 아니고 걱정, 갑자기 또 인성 논란이.
-아니, 그런데 약간 우리 인욱 씨 말이 맞아요.
보니까 염려된다 하신 다음에 바로 공부할 수 없으니 고민이다, 이렇게 하셨거든요.
-감기 옮으면 공부 못하잖아.
-어떻게 보면 대단히 자연스러운 거겠죠.
-맞아요, 맞아요, 일기니까.
-아프니까 염려도 되는데 내가 이제 집중을 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은 상당히, 우리가 수험생의 입장이라면.
-맞아요.
-그건 너무 당연한 거니까.
-일단 이 선생님은 집중 안 되는 명분이 있어야 일기 쓸 시간이 있는 거예요.
-맞아, 맞아요.
-집중 안 되니까 쓰는 거야.
-오늘 일기 거리 하나 득템.
-그런 느낌...
-거접이라고 해서 앞부분에 제가 그 동접이라는 부분에 빨간 줄을 쳤었는데, 살 거 자에 접할 접 자입니다.
이 말이 과거 시험에 응시하려는 사람들이 서원, 서당, 절 등에 모여서 같이 공부하는 거예요.
-스터디네요, 스터디.
-주거하면서 같이 있는다.
-그러니까 절에 대승사 들어가서 자기가 머무는 방이 있었고 다 같이 이제 모여 있는 거죠.
-마치 선수촌처럼.
-약간 그런 느낌이네요.
-그러네요. 그리고 정보도 많이 얻잖아요.
-맞아요. 혼자 공부하는 게 아니라 같이 공부를 해야 또 서로 테스트로 해주고. 그런 것들을 사실 이분들도 다 하고 있는 거예요.
조선시대 때도 이미 있었네요.
-그렇죠, 전 사람이 다 똑같다고 생각을 하면서.
-진짜.
-공부를 하면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대부분 비슷하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고.
이걸 이제 옆에서 보시면 왼쪽 편에 있는 것은 이제 1702년에 시험을 2번 쳤고 1704년 1번, 1707년 1번, 뭐 8년, 10년, 10년해서 실패, 실패, 실패, 합격, 실패,
실패 이렇게 이제 1702년부터 1710년까지 약 여덟 차례의 시험에 응시를 해서 계속 실패를 하다가 중간에 한 번 합격하고 마지막에 이제 합격을 하는 거죠.
그 과정 동안 이제 아까 그 거접이라는 것을 대승사에 가서도 하고 이계서원에 가서도 하고 수계소에 가서도 하고 계속 이제 짧게는 2일, 길게는 한 달.
그렇게 해서 1702년과 1710년까지는 계속해서 이렇게 공부를 동접들과 계속해서 같이했습니다.
-그러면 동접이라는 거는 같이 공부하는.
-함께, 함께 공부하는.
-동시 접속.
-아니, 우리 인욱 씨가 동시 접속이라고 하는데.
-오늘 말이 참 상당히 맞는 것 같은데요, 동시 접속.
-오늘 굉장히 내용이 흥미롭나 봅니다. 우리 인욱 씨가.
-말이 되네요, 말이 되네요. 그래서 스터디 하자 하면은 거접하자, 할 수 있고 우리 스터디원들은 동접, 동접.
-동접이 되는 거죠, 같이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은 동접이 되는 거죠.
-동접들아, 거접하자.
-그렇게 하면 되는...
-이렇게 하면 되는 거네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그 스터디를 하는 부분이 역시 이제 시험은 여러 가지 정보가 필요하다.
지금은 내가 어디 들어가서 이 시험에 대한 공지가 떴나, 안 떴나, 언제 치나, 내가 언제 테스트를 봤나 이런 것들의 정보를 빨리빨리 알 수가 있지만, 그때는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도대체 이런 게 언제 치고, 언제 하는지 어떻게 알았을까.
-맞아요.
-그러니까 공고문이나.
-제도 말고 정보들이.
-필요해요.
-맞아, 그런 것도 중요하거든요.
-시험 문제 어디에서 어땠더라, 어느 해 어디가 시관이 누구라더라 이런 돌고 도는 이야기 이런 것들이 교류하면서 여러 가지로 많은 걸 챙겼던 것 같아요.
-진짜 똑같네요, 지금도 어디 들어가면 면접관 보면서 하면 좋아, 아니면 면접관 안 보고 하면 좋아.
이런 정보들이 사소한 데도 엄청 도움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꼭 그다음에 있는 시험이 아니더라도 사실 이제 그런 것들을 계속해서 수험 정보들을 같이 교류하고 또는 마음을 나누고 그런 것들이라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또 필요한 게 있잖아요. 내가 공부를 했는데 날 테스트해. 내가 어디쯤 가 있는지를 몰라요.
그래서 우리가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지만, 대학수학능력시험일에 말고도 치는 것들이 있잖아요.
-(함께) 모의고사.
-모의고사, 그래서 이제 조선시대 수험생들도 모의시험을 쳤다. 모의시험을 쳤다고 하는 게 백일장 들어보셨어요?
-(함께) 백일장.
-그 백일장이 사실은 유생들을 모아 놓고 정식 과거 시험처럼 시험을 치는 그것을 백일장이라고 불렀거든요, 대낮에 불러놓고.
-백일의 의미는 그러면 대낮이라는.
-대낮, 대낮입니다, 한자가 마당 장.
-하얀.
-그런데 백일장을 여러 기록들이 이때는 정말 과거 시험과 백일장과 공부했던 이야기가 진짜 많이 나오는데 제가 그중에 일부를 발췌를 해서 소개를
해드리면 신임 고을 수령이 백일장을 연다고 하는데 과거시험을 쳐야 되니까 백일장을 못 간 거예요.
모의시험을 안 간 거죠, 그다음에 이제.
-과거 시험이 더 중요하지.
-당연하죠.
-그리고 이제 1706년에는 관찰사가 관하에서 백일장을 여니까 아주 크게 여는 거예요.
아주 작은 규모도 있고 큰 규모의 모의시험도 있고.
-관찰사면 약간 시장님 이 정도인가요?
-경상도 관찰사.
-도지사 정도.
-도지사 느낌인가요?
-경상도 관찰사, 그래서 시험 문제를 밀봉해서 직접 보냈다라고 하는 정도는 상당히 아주 격식 있게 그 모의시험을 진짜 정식 시험처럼 치겠다, 하고 난
다음에 상품도 많이 주고 그런 경우에 1월달에 기록이 있었고. 그리고 8월달에 저도 이제 사실은 그냥 백일장은 그렇다라고만 생각하다가 이런 한 줄의 모인 자들이 7, 800명.
-많네요.
-백일장만 치기 위해서 7, 800명 모였다라고 생각해 보면 그때 저도 의문이 들죠, 도대체 어디에 7, 800명을 앉아서 이렇게 쳤다고?
-그러게요.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러니까 어디에 하며 이게 모의고사인데 왜 7, 800명이 그렇게 모일 정도로.
-그만큼 시험을 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얘기죠.
방금 소개해 드린 일기에서 그러면 시험을 도대체 얼마나 쳤을까. 얼마를 쳤을까를 계산을 해보니까청대 권상일 선생의 경우로 해서 제가 통계를 내보니까
1702년부터 1710년까지 과거 급제 때까지 약 평균 연 1회.
그리고 평균 연 2.5회의 백일장에 응시.
-모의고사.
-모의고사에 응시, 그리고 과거 급제 때까지 평균 그러면 2개 다 합하면 연 3.5회의 시험을 응시했던 거죠.
-그러면 분기마다 거의 한 번씩 시험을 치셨네요.
-그렇네. 이게 사실은 그런데 조금 더 생각을 해봐야 될 게 지금은 우리가 시험을 치는 게 하루 만에 치기도 하고 시험 장소로 가는 것도 쉽기도 하고
또 모의시험 시험도 꼭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아니라 어떤 시험이라도 모의시험이 있잖아요.
-맞아요.
-자격시험도 모의시험을 치고 내가 이거를 테스트해 볼 수 있는데 어렵지 않잖아요, 시험을 치는 게.
그런데 예전에는 장소도 멀고 그러면 한 번 갔다 오면 그것이 20일이 걸리기도 하고 30일이 걸리기도 하고 짧게는 7일, 8일.
-과거 시험 보러 걸어가니까, 먼 지역까지.
-그러니까 앞에서 제가 생원진사시를 치고 문과 시험을 칠 때 주로 문과 시험 같은 경우에는 한양에서 주로 많이 치니까 한양을 간다거나 또는
생원진자시가 경상도와 좌측과 우측에서 좌도와 우도에 시험 장소를, 지역을 정하고 나면 그쪽으로 가야 된다고 했을 때 아무리 가깝다 하더라도 멀잖아요, 옛날 같은 경우에는.
-며칠 동안 걸어야죠.
-그런 경우에 이분이 청재 선생은 일기에서 어려움도 많이 토로를 합니다.
경제적인 것도 토로를 많이 하고 왜냐하면 계속 어쨌든 8년간은 실패잖아요.
-맞아요.
-실패를 했고 8년 만에 급제를 한 거잖아요.
-여기서 N수생의 울분이 담겨 있네요.
-정말.
-그렇죠, N수생의.
-그런데 진짜 이런 일기의 기록들이 없었으면 우리가 머릿속으로 선조들이 어떻게 공부하고 시험을 쳤을지 사실 일기를 보니까 그려지잖아요.
그런데 이런 일기들이 없었다면 도저히 몰랐을 법한 모습들이네요.
-그렇죠, 그런 어떤 부분들이 사실 일기가 가지는 의미가 바로 거기에 있죠.
우리가 주로 제도나 또는 역사적 사건들 말고 이런 풍경들을 볼 수가 있잖아요.
-맞아요.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 이런 것들에 대한 기록들을 찾아가는 것이 취미를 갖게 된 그런 계기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시험 합격이 만약에 정말 시험에 내가 합격한 시험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기쁨이 얼마나 가던가요?
-아직까지 가고 있습니다, 저는.
-그래요?
-지금도 일어나면 행복해요.
-이게 저는.
-거짓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방송에서 거짓말 많이 하네요, 두 분.
-시험 합격한 기억이 많이 없다 보니까 소중한 거죠.
-통과하고 하루, 이틀 정도 즐거웠지만 그다음에 어디 발령 나서 일을 해야 되는 그 걱정이 또 앞서고.
-맞습니다.
-그렇죠, 그러면 이제 그다음, 그다음, 또는 이제 계속해서 우리가 삶이 딱 멈추지 않고 계속 가야 되면 내가 앞에 있는 목표를 이루고 났을 때
그 기쁨이 사실은 잠시잖아요. 그다음에 해볼 생각을 해야 되는데.
-계속, 계속 있어요.
-현실로 돌아가야죠.
-현실로 돌아가니까 여기에 이분도 사실은 그래서 제가 시험 합격의 기쁨을 조금 발췌를 해보니까 1706년에 백일장 합격했을 때 기록이 작은아버지가 삼중으로 장원을 하고 그다음에 친구가
삼중으로 제3 등을 차지했고 본인은 삼하로 6등에 입격했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성적이 높지 않은 거죠. 그런데 높지 않았는데 입격을 한 거예요. 그래서 헛웃음이 났다. 자조인 거죠, 성적은 마음에 들지 않고.
-그러니까 약간 나 문 닫고 겨우 들어왔어 하는 느낌.
-그게 아니라 백일장 합격이니까 합격은 했지만 자기의 성적이 썩 만족하지는 않는.
-만족하지 못하는.
-그런 거고 1707년에 생원진사시 초시 합격했을 때 2등 세 번째로 입격했다, 다행이다, 한 줄.
-다행이다.
-너무 건조한데, 이렇게 생각을 했었고요. 그다음에 문과 복시에 최종 합격인 거죠. 문과 시험 합격해야 관직 가니까 거기에서 보면 서울 왕십리에 이르러 방목이라는 건 합격자 명단이거든요.
합격자 소식을 들으니까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했다.
이게 들은 거예요, 그런데 놀라거나 기쁜 마음은 별로 없으니 너무 기뻐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이 말이 저는 뭔가 좀 와닿는 것 같다, 8년간의.
-그러네요.
-이게 다른 한 장에 너무 좋아하면서 막 썼다가 이거는 체면이 하면서 생략을.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럴 수도 있어요.
-리얼 일기에는 기분 째진다, 이렇게 했다가.
-너무 좋아.
-체통이 있어야지 하면서.
-시각이 다른 거죠, 저는 8년간 너무 고생을 했으니 이런 마음일 수도 있겠다.
-오히려 담담한.
-오히려 약간 너무 담담하고 그다음에 생각했을 때 뭔가 약간 허탈감.
이 마음이 약간 허탈감, 뭔가 애써 너무 막 몰두하고 난 다음에 이루었는데 그 순간에 대단히 기쁘기도 하지만, 기쁜 마음 그 이면에 뭔가.
-맞아요, 맞아요.
-끝났고 이루었는데 뭔가 허탈, 이런 느낌이었어요.
-내가 이걸 위해서 몇 년을, 또 막상 넘어보니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내가 이 몇 년을 이걸 위해서 달렸구나.
-순간적으로 저는 그런 기분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9년째는 안 해도 된다, 이런거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럴 수도 있지.
-이제 인욱 씨의 일기장을 펴보면 그런 일기가 나오는 거죠.
-8년으로 끝냈다.
-그다음에 합격 보면 며칠 뒤에, 열흘 뒤에 고향집에 종이 와서 모든 식구들이 편안하다는 얘기를 들었고
집의 편지와 일가들의 축하 편지를 받았다고 나와요. 그러면서 울적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뛸 듯이 기뻤다.
저는 10일간의 간격이 합격자 소식을 들었을 때 약간 순간적으로 허탈감, 그런데 10일이 지나서. 내가 정말 이제 이루었구나.
-실감이 막 나는 거죠.
-실감이 좀.
-실감이 한 열흘 뒤에 있지 않았었나라는 생각을 제가 대단히 몰입을 해서 일기를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혹시 그러고 나서 합격자 소식을 듣는 게 저만해도 제가 대입 합격했을 때 학교 가서 이게 붙어 있었던 시절, 그러니까 되게 많은 것 같은데.
-보면 막 여기 방을 붙여 놓고 보시오.
-그러니까 그걸로 봤던 기억이 저는 나는데.
-그러면 이분이랑도 비슷하신 것 같은데요?
-비슷한 세대시구나.
-이때는 비둘기가 날아왔나요, 합격 비둘기?
-그러니까 이때도 어쨌든, 방목이니까 합격자 명단이 오는 거잖아요.
사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이 발표의 수단이나 문화도 사실 이렇게 시대를 계속 반영하는 거잖아요, 붙여놓고 보게 하거나.
-맞아요.
-또는 전화로 확인하거나 또는 입력하면 바로 뜨거나. 그게 사실은 짧은 시간 안에 많이 변해왔다는 거를 저는 많이 느끼는데
계암 김령 선생의 일기에서 제가 그거를 또 발췌해 왔는데 방방이라는 것은.
-(함께) 방방?
-트램펄린?
-과거 급제했다는 발표와 그 의식.
-방, 방을 붙이는 그 방이구나.
-방을 붙인다, 방방.
그렇게 해서 과거 급제자 발표와 그 의식인데 그러면서 1612년 8월 3일의 일기에서 방방할 때의 치장과.
-복장.
-복장들을 여러 가지 일들을 조처하기 어려우니 매우 염려스럽다라는 말을 썼고요.
어쨌든 공식적인 거니까 치장이 되게 신경이 쓰이는 거예요, 이분은.
갔을 때 입어야 되는 옷, 이런 것들이 신경이 쓰이니까 일기에서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분도 대구 분인데 서찬규라는 분이거든요.
임재 서찬규라는 분이 1825년에서 1905년을 살았던 분인데 일종의 생활 일기입니다.
이분은 소과에 합격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날의 일기입니다.
그래서 이걸 잠깐 읽어보면 작은 범선에 올라 쌍 고동 소리를 날리며 강을 건넜다. 아버지께서 말을 메어 놓고 기다리고 계신다.
그리고 관에서 또 악사를 보내어서 사방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게 이제 보통 사극 보시면 늘 나오는 상상할 수 있는.
-진짜 금의환향하는.
-그런 장면이잖아요.
-우리 아들 보시오 하면서 이렇게 자랑하는.
-그렇게 해서 관악을 연주하고 소매를 펄럭이며 춤을 추고 진짜로 합격자를 환영하는 그런 건데 그 뒤에 보면 수령이 호신을 했다.
신래를 부르는 거죠. 신래라는 것은 새로울 신 자에 올 래 자를 써서 과거에 새로 급제해서 처음 관직에 나온 사람을 선배가 가르키는 말.
선임자들이 그다음에 새로 급제한 사람들을 이렇게 희롱을 하는 것이 오래된 풍습이다, 이때부터.
-신참들 놀리는.
-신참, 신참들 놀리는 게.
-많이 놀림 받았지.
-너희도 있었지 않아? 군대에도 그런 게 있죠, 사실 처음에 딱 신입 들어왔을 때 진짜 고참인데 나 너랑 동기야 하면서 거짓말해서 속여서 약간 곤란하게 만들거나.
-군대에서 괴롭히는 게, 신참 괴롭히는 게 있듯이 조선시대에도 그런 게 있었나 봐요?
-그러니까 일단 관행 같은 거였는데 사람에 따라서 좀 심하게 하거나 이러면 그게 다 어쨌든 그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었겠죠.
어쨌든 그런 풍습이 축하를 해주려고 만들어진 풍습이 너무 악습이 되다 보니까.
-너무 짓궂게 한 거네.
-그것이 맞지 않는 사람들은 힘들어지는 거겠죠.
이제 나옵니다. 그 뒤에 보면 수령이 호신을 했다.
이제 신래를 부르는 거죠. 신래를 부르면서 했다가 얼굴에 먹을 묻히고. 왔다 갔다 하다가 얼굴에 먹을 묻히고
말을 거꾸로 타고 동산으로 말을 몰아가는데, 이분도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렇게 이제 쓰고 있는 거죠.
-이게 행사의 한 그...
-마지막에 이게 어쨌든 관행처럼그 수령은 어쨌든, 수령에게는 이분이 신참인 거잖아요.
신참인 거니까 신래 부르기를 하는 거죠.
-보면 막 먹칠하고 이런 거는 요즘 시대에 따지면 케이크, 축하 케이크 에잇, 막 이렇게 하는 거랑 비슷하네요.
-뭐 그렇다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약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결혼식 할 때 신랑한테 약간 짓궂은 장난을 조금 하게 하는 것처럼.
그러면 사람들이 정말 축하하면서도 웃을 수 있는 그런 이벤트가 아닐까. -자꾸 사극 이야기해서 말을 하면 너무 오래된 것 같지만.
왜 그 발바닥 때리고 하는 그런 것도 있었잖아요. 막 많이 나오고 했었잖아요.
그러니까 아마 처음에 만들어질 때는 나쁘게 뭐, 나쁜 뜻으로 만들어진 관행은 아니었겠지만 그것이 계속해서 축적이 되다 보니까 좀 짓궂은 사람도
많이 나오고, 정말 희롱이 희롱만을 위한. 그리고 이제 조금 권위를 세우기 위한 이런 것들이 악습이 되는 부분들이 많았겠죠?
-그렇죠.
-그래서 이분이 율곡 선생께서도 이런 어떤 희롱을 받지 않았다. 그분은 받지 않으셨나 봐요. 이분이 그렇게 썼어요.
-그러면 또 사람 기분 나쁘게. 차별하면 또 사람 기분 나쁘지.
-내가, 내가 거부했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받지 않았다고 하니 바로 잡아야 할 일이다.
그러니까 본인은 이걸 당하면서 되게 괴롭고 좀 부끄럽다, 이렇게 기록을 했더라고요. 되게 기쁘게 돌아왔는데 그걸 당하면서,
-너무 당했구나.
-이런 이야기가 어쨌든 저도 읽으면서도 조금 흥미로운 이야기다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혹시 그, 내가 합격을 위해서 뭔가 운을 끌어올리기 위한 걸 해보신 적 있으세요?
-있죠. 저는 아버지가 네잎클로버를 따서 책 사이에 끼워 주셨어요.
-임용직 합격을 위해서요?
-네.
-그런 것도 있잖아요. 팔공산에 가서 이제 시험 치기 전에 학부모들이 가서 비는 것도 사실 이제 항상 보면 수능 시험 칠 때 되면 그런
풍경 많이 뉴스에, 이제 그런 풍경 뉴스에 많이 나오잖아요.
-맞아요, 맞아요.
-여기에서도 보면 합격을 위한, 과거 시험을 보는 사람들이 그런 어떤 운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하는 것을 이제 기록한 부분들도 있습니다.
-사람 다 똑같군요.
-그래서 이제 아까 말씀드렸던, 방금 내가 고개가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라고 말씀하셨던 서찬규라는 분이 과거 보러 가던 사람들이 이름 많이 새긴.
그게 이제 구룡암이라는 바위가 있었는데 거기에 이제 9명의 이름을 새겨 놓았는데 그 사람들이 다 과거에 합격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과거에 합격했다는 스토리로 그것을 지나는 사람들은 그것을 이제 계속해서 이름을 많이 새기고 있는 거죠.
자기들 이름도 새겨서. 이제 시험에 또 합격을 기원하는. 그러니까 이제 이런 것들이 지금도 그렇고 그때도 그렇고.
-마치 어디 관광지 같은 데다 여기 커플 이름을 써놓으면 사랑이 영원하대, 뭐 그런 느낌처럼.
-그런 느낌처럼 사실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그리고 이제 또 1850년에도 이런 부분들이 지나가다가 어떤 이제 벽면에 글자가 쓰여 있었는데 과거시험 보러 가는 자가 보면 좋다, 이렇게 해서
많은 선비들이 또 거기 다투어 달려가서 본다.
이런 이야기들이 이제 많이 써놓고 있습니다.
저는 오래된 사람이라서 오래된 이야기인데, 방석 같은 거 어디 가서 누가 훔쳐 오고 그랬던 것 같아요.
여고생들이 뭐 누구 잘하는.
-전교 1등 방석 훔쳐 오고, 받아오고.
-맨날 방석 훔쳐 오고 그랬던 기억이 나거든요.
-요즘 장사를 하니까 그게 있더라고요. 오프너 빌려 가는 거, 옆집에서.
-잘 되는 집 오프너?
-네, 잘 되는 집 오프너.
-또 그런 게 시험에도 사실은 어떻게 보면 그게 시험에도 아주 강하게.
그게 이제 일기를 더 꼼꼼하게 살펴보면 이런 이야기들이 더 많을 것 같은데. 제가 이제 많이 찾지는 못했습니다.
-아직 연구를 많이 못 하셨네요.
-아직 연구를 할 수 있는 자료가 무궁무진하답니다.
-아직 ing입니다.
-제가 이런, 이런 강의를 정말 농담...
그런데 이제 또 그렇게 생각하면 시험이 늘 공정하지는 않잖아요.
-맞아요.
-뒷돈 주고받고.
-평가와,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저는 대학 수학 능력 시험은 공정하다, 공정하다.
그런데 이 평가가 좀 정성적인 것은 공평하지 못할 수 있다.
-정략적 평가과 정성적 평가가 이게 좀 말이 나와요.
-그래서 이제 제가 이제 여기 보면 수험생들, 더군다나 지금은 그 공정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제도를 많이 강화하고 있는데.
그때는 사실 제도가 아주 엄격하기가 어려웠을 거잖아요.
지금처럼 엄격하기는 어려웠겠죠. 그러다 보니까 어쨌든 부정부패가 많이 있습니다. 부정부패가 많이 있고.
제가 이제 흥미롭게 봤던 거는 내가 수험생이면서 바라보는 부정부패. 그다음에 내가 수험생이 아니면서 바라보는 부정부패.
이게 좀 시각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는데 그걸 제가 면밀하게 검토해서 뭔가를 이제 다들 분류를 해본 것은 아니, 연구가 아직 부족해서.
-뒤끝.
-ing입니다.
-그중의 하나를 제가 소개를 해드리면 이제 그 시험에 부정부패가 있다라고 하는 여기에서 이 분은 이미 합격을 하신 거죠, 1639년이면.
계암 김령 선생은 합격을 하고 난 뒤에 이제 한참 이제 연세가 있으실 때 쓰신 건데.
향시에서 예천 사람으로 합격한 사람 16명 가운데 오직 네 사람만 빼고는 서리에게 뇌물을 쓰고 농간을 부려서 합격했다, 이 말도 있습니다.
정말 부정부패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이분의 일기에.
되게 많이 나오는데 제가 이거를, 일기는 사실 내가 설명을 해주기 위해서 쓰는 게 아니잖아요.
봤던 거, 보는 거를 그냥 즉흥적으로 내가 이제 내 느낌을 막 쓰다 보니까.
-간단하게.
-사실은 그 일기만 읽어서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맥락이 이게 맞는지를 사실 되게 어려울 때가 많거든요.
그런 부분에서 제가 많은 부정부패를 여러 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중의 조금 일반적인 거를 제가 가져왔던 것은. 빈 시험지를 이제 가지고 있다가, 점수를 먼저 매겨놓는 거예요.
점수를 매겨놓은 걸 둔 다음에 등수에 든 재수를 베껴 써놓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교체를 한 다음에 원 시험지는 숨기고 베낀 시험지로 내서 이제 등수에 들어가는 거죠.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때 OMR 카드 있었으면 그, 못하는데 이런 거.
-다 죽었어.
-그렇죠. 지금 또 OMR 카드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게 빈 시험지로 먼저 이제 점수 매겨놓고 등수에 든 재수를 옮겨 써서 시험지를 교체를 하니까. 교체를 하면 결국 그 사람이 합격이 되는 거죠.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제 그 뇌물이 어느 정도 가치를 줘서 그렇게 했다,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 얼마나 줬다, 이런 내용들도 있었다는 거죠?
-여기 있네요.
-여기에 보면 이제 배, 배를 줬다. 우리가 생각하던 상당히 다양한 방식으로, 뭐 시험관이 매수가 되기도 하고.
갚거나 했을 때 여러 가지, 우리가 지금 있을 수 있는 모든 부정부패의 양상이 그때도 있었다라고 생각을 하시면 될 것 같아요.
-진짜 이런 일기를 통해서 다 그런 걸 엿볼 수가 있네요.
-그런 거죠.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
-저는 일기를 보면 볼수록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
일기는 이런 어떤 보통의 면모, 면모가 있고.
그중에 제가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그 관직이라는, 관직 진출을 하기 위한 과거시험 급제까지 상당히 치열하게 살았던.
우리랑 다를 바 없이 치열하게 살았고,우리랑 다를 바 없이 시험에 부정부패에 분노를 했으며 우리랑 다를 바 없이 같이 모여서 공부를 했고, 이런 것들에 대해서 제가 이제 좀 관심이 많고.
그런 걸 일기를 통해서 알려드리고 싶었다라는 말씀을 좀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진짜 우리 선조들의 일기를 통해서 그때 당시의 수험 생활과 또 당시 느꼈던 심정들, 느낀 점들을 좀 솔직하게 엿보는 시간이었는데.
오늘의 강의 선장님이 딱 한 마디로 정리를 해주신다면요?
-저는 모든 사람에게 과정이 있다. 제가 이제 일기를 보면서 우리는 뭐 서두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늘 이제 잘난 것, 훌륭한 것, 두드러지는 것, 그리고 이제 아주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들을
모두 다 기억을 하고 그것에 대해서 열광을 하는데. 사실은 그렇게까지 가는 모든 것에 과정이 있지 않나.
우리가 기억하는 훌륭한 학자들도 수없이 자기 자신하고의 어떤 그런 관문을 통과하고 스스로 치열하게 이제 싸워가면서 극복을 했기 때문에 이런 어떤 결과를 이루어낸 것이다.
제가 이제 이 수험 생활을 엿보는 이유는,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우리가 결과만 연연해하는 그런 시대보다 과정이, 과정에 있어서 자기가 스스로
어떤 쌓아온 충분한 이유가 있다면 어떤 결과도 받아들이고, 어떤 결과도.
결국은 이제 어떻게든지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일 것이다라는 그런 것으로 이제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오늘은 진짜 삼국사기, 조선왕조실록, 이런 곳에서는 엿볼 수 없었던 개인의 기록에서 발견한 민족의 기록들을 살펴봤는데요.
두 분 오늘 열심히 들으셨잖아요. 아마 좀 깨달은 게 있을 것 같아요. 이제 내가 보물 일기를, 보물 지도와 함께하는 일기를 써서.
하루하루 써서 내가 후손에게 좀 도움이 될 만한 사료로 남길 수 있겠구나, 이 일기가. 이런 생각이 들지 않나요?
-제가,
-안 드는 눈이네요.
-제가 보기에는 이미 보물 지도는 말로세움에서 아주 멋있는 영상 자료로 만들어 놓기 때문에 일기가 더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고요.
-일기 쓰지 않겠다.
-저는 사실 지금은 워낙 다양한 매체들이 있고, 남길 수 있는 방식이 다양한데. 제 인생의 좀 재미있는 이야기나 이런 것들을 음반을 남겨놓거나 뭔가 CD나
디스크처럼 그런 식으로, 다른 방식으로 남겨 놓는 건 어떨까 생각 했습니다.
-좋습니다. 오늘의 지식 강연은 여기서 마무리를 하고요.
다음에도 더 멋진 지식 항해 떠나보도록 하겠습니다.
다함께 외치면서 끝내볼게요. 다음 주에도 찾아라,
-(함께) 보물지도.
-어르신 전문가이시잖아요.
어르신 마음을 그래도 저희보다 훨씬 잘 꿰뚫어 보시잖아요.
-우리 부모님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아이고 두야.
-아이고 두야. 뭔가 자식이 뭔가 하려면 하면 됐다면서, 너희끼리 그렇게 해라하면서.
-꼭 우리 엄마, 아빠를 보시고 말씀을 하시는 것 같은데, 신기하네요.
내가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 그런 세월을 살아오신 분들이라서 이 세상에 짐을 지고, 짐을 지러 나온 사람처럼 생각하잖아요.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의 거름이 되어주셨잖아요.
그 거름 덕분에 우리가 오늘같이 이렇게 편안한, 우리가 참 좋은 세상을 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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