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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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지도 - 역사 속 의학도 (김상태 /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교수)

등록일 : 2024-03-20 09:50:24.0
조회수 : 301
-보물이 되는 지식을 찾아 떠납니다. 펼쳐라.
-(함께) 보물지도!
-두 분은 어렸을 때 장래 희망이 뭐였어요?
-장래 희망. 저는 장래 희망 어렸을 때 짜장면집 하는 게 꿈이었고.
떡볶이집도 장래 희망 써낸 적이 있고, 먹고 싶은 게 많아서 그런 것들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그 장래 희망과 다르게 선생님을 하고 계시네요.
-그러게요. 이렇게 될 줄 저도 몰랐어요.
-우리 인욱 씨는요?
-저희는 보면 이제 그때 당시 많이 써냈던 게 과학자나 경찰, 대통령 이런 것들밖에 없었어요.
-맞아요.
-거의.
-맞아.
-친구들 다 보면 다 똑같은 장래 희망밖에 없었어요.
-다 되고 싶은 게 똑같았고. 맞습니다.
그런데 이게 장래 희망이요.
옛날과 많이 다른 것 같으면서도 또 시대가 변해도 비슷한 게 최근에 초등학교, 중학교 애들을 상대로 해서 장래 희망을 물어봤더니 되고 싶은 직업 5위 안에 운동선수와.
-운동.
-교사가 있었습니다. 인기 직종을 우리 두 분은 이루신 거예요.
-워너비가 된 거네요.
-그러네요.
-그런데 운동선수와 또 선생님 말고도 되고 싶다, 하는 직종이 하나가 더 있었습니다. 뭘까요?
-의사.
-정답.
-정답?
-사실 의사, 정말 많은 친구가 의사가 되고 싶다 혹은 부모님들이 우리 자식은 의사가 되면 참 좋겠다.
-그렇죠.
-하는 직업 중의 하나도 의사입니다. 오늘 의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하는데요.
의사와 관련된 이야기는 이분을 모시고 들어보면 됩니다. 선장님 바로 모셔볼게요. 선장님.
-(함께) 나와주세요!
-안녕하십니까?
-제가 우리 선장님 소개를 드릴 때 의사에 관해서라면 이분께 물어봐라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맞나요?
-네, 맞습니다.
-의사신가요?
-아닙니다. 제가 의사 아니고 간호사는 더더욱 아니고.
저는 역사 전공자예요. 한국 근대사, 현대사를 전공했던 것을 바로 우리 의료 분야에 접목해서, 예를 들면 3.1운동이 있으면 3.1운동 때
그러면 우리 의학도 의사분들은 뭘 했을까, 이런 것을 이제 같이 이렇게 파악해 보는 거죠.
-우리 역사학자가 들려주는 의사 이야기, 너무나도 흥미롭습니다.
특히 역사 중에서도 아픈 역사 속에서 빛나는 항일 정신을 의술로 펼쳤던 분들 오늘 만나볼 텐데요. 두 분도 기대되시죠?
-궁금합니다.
-기대됩니다.
-좋습니다. 그럼 박수로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오늘은 일제강점기에 우리 한국인 의학도 그다음에 또 우리 의사분들이 어떻게 의학을 배우고 또 연구하고
그러면서도 어떻게 민족의식, 애국심을 잃지 않았는지 계속 유지해 나갔는지 그리고 또 어떻게 실천을 했는지 이런 내용들을 좀 살펴드릴 거고요.
한국의 최초 의사가 누군지 아세요? 한의사 말고, 허준 말고.
-허준 생각했는데.
-나도 아는 사람이.
-양의사로 최초.
-양의사 최초의 의사.
-양의사로 최초로는.
-모릅니다.
-그렇죠. 감도 안 잡히시죠?
그러면 혹시 서재필은 아시죠?
-서재필 선생님은 아시죠.
-독립신문.
-독립신문. 그렇죠?
그 서재필이 최초 의사예요.
서재필이 갑신정변의 주도자였고 그래서 실패하면서 역적이 됐잖아요.
그래서 일본 거쳐서 미국으로 망명을 한 다음에 서재필이 의과대학에 들어가서 미국에서 의사가 됐습니다.
여기 사진을 보시면요. 미국의 한 야간 의과대학이에요.
그런데 거기 졸업 사진인데 저기 파란 동그라미 저분이 서재필입니다, 서재필.
-키가 크네요.
-그러니까 의사가 되고 나서 우리 국내에 다시 들어와서 독립신문을 만든 거예요.
-문십립독.
-그래서 한국인으로 최초 의사인데 다만 이 서재필이 우리나라에서 의사로 활동한 적은 없어요.
그러니까 미국에서 의사가 된 다음에 미국에서 병원도 차려보고 병리학자도 되어 보고 이런 건 있는데 우리 한국에서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계속 미국에서만 활동을 했기 때문에 그런 점은 있고요.
그러면 한국인 최초 여의사 누구일까요? 최초 여의사.
-최초 여의사.
-혹시 모르세요?
-최초 여의사.
-최초 여의사.
-네, 혹시 모릅니다.
-모릅니다.
-저분의 이름은 김점동입니다.
-김점동.
-(함께) 김점동.
-이름 귀여운데요.
-김점동인데 우리가 이제 아는 것은 박에스더죠, 박에스더.
-박에스더.
-에스더.
-김점동이 본명인데 어떻게 박에스더가 됐느냐, 이게 신기하실 텐데.
-박에스더는 들어봤는데.
-교회에서 세례명이 에스더예요. 그런데 왜 성 씨가 바뀌었느냐.
-성까지 바꾸고.
-남편이 박씨 성이고.
-미국식으로.
-저 때만 해도 미국식으로 해서 결혼하면 남편 성을 따랐어요, 교회 쪽에서는.
박에스더는 어떻게 해서 한국 최초 여의사가 됐냐 하면 이화학당에서 아주 똘똘한 여학생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미국에서 온 여자 선교 의사들 입장에서는 한국인 여의사를 키우는 게 급선무였습니다.
그래야 한국인 여성 환자들을 활발하게 진료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이제 저 김점동을 딱 찍었어요.
-이대 나온 여자.
-그런데 지금도 아니고 그 옛날에 쉽게 미국 유학이라는 것을 어떤 부모가 그것도 조혼하던 상황에서 나이가 찬 딸을 어떻게 유학을 보내요.
그러니까 부모들이 동의를 안 해줘요, 선교사들한테.
그래서 선교사들이 이제 궁리를 하다가 결국은 착실한 신자가 1명 있었습니다. 남편 박여선이라는 사람인데요.
그래서 결혼을 주선해서 결혼을 해서 남편이 있으니까, 보호자가 있으니까 같이 이제.
-같이 가라.
-갈 수 있었던 거죠.
그래서 박에스더는 미국에 가서 여자 의학도가 되어서 의과대학을 다니고요.
그러면 남편은 뭐 했냐 하면요. 남편은 아르바이트 뛰었어요. 열심히 정말 사랑하는 아내가 의사가 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느라고.
-외조를 열심히 했네요.
-정말 열심히 외조를 했어요. 그런데 이 착한 남편이 그만 불행하게도.
-안 돼.
-안 돼.
-박에스더가 이제.
-안 돼.
-의사 졸업 시험을 치기 3주 전에.
-안 돼.
-죽었습니다. 과로로 죽었어요.
-과로.
-얼마나, 얼마나...
-그런데 그게 패결핵이였어요.
-공부를 시키려고 열심히 하셨으면.
-폐결핵.
-폐결핵.
-폐결핵으로 죽은 거예요.
그래서 이제 그 선교사들이 참 안타까워했는데 박에스더는 그리고 나서 이제 한국인 최초의 여의사가 됐고
우리나라로 돌아와서 한 10년 정도 여성 환자 또 소아과 아이들 환자를 열심히 진료해요.
그러다가 또 과로로 죽습니다. 박에스더도 역시 폐결핵으로 죽었어요. 역시 폐결핵.
-결핵 미워.
-그래서 이제 미국과 캐나다 기독교권에서 한국이라는 나라에 결핵이 이렇게 심하구나.
이런 상황이 바로 이 두 사람, 이 부부의 가슴 아픈 사연을 통해서 알려지기 시작한 거고요.
그렇게 해서 박에스더가 전설처럼 이렇게 남게 된 거죠.
일제강점기 의학도에 이제 민족의식과 항일운동이 어땠는지를 제가 좀 짚어드릴 건데요.
우리가 이제 일제강점기 의학도가 의과대학생들은 의사라는 직업을 원해서 의과대학에 갔잖아요.
그러면 사회,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거, 아주 편안하게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거. 이걸 원해서 갔을까요?
-어쨌든 약간의 부유층이나 상류층들이 교육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서 의학도의 길을 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면 일제와 친하게 지내지 않고 그런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이 들기는 해요.
-우선 이제 이 신문이 일본 아사히 신문의 1919년 3월 7일 자 기사인데요.
이 신문 보도가 3.1운동을 최초로 보도한 기사입니다.
그러니까 3월 1일부터 6일까지만 해도 이 3.1운동에 대한 보도가 다 통제됐어요.
그러니까 언론에 내보낼 수 없었는데 일본 정부에서 3월 7일부터 보도할 수 있도록 이걸 허용한 겁니다.
그래서 저게 최초의 기사고요. 제목이 뭐냐 하면 조선 각지의 폭동.
사실 일본들 입장에서는 폭동인 거죠. 우리 입장에서는 3.1운동인데 저 안에 유독 경성의학전문학교가 비중 있게 설명이 되어 있어요.
경성의학전문학교가 뭐냐 하면 지금으로 말하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거든요.
3.1운동 당시에 각 학교 학생 대표들이 모여서 3.1운동을 준비하거든요.
그래서 지금으로 말하자면 서울법대도 있고 그다음에 연세대도 있고 고려대도 있고 그런데 바로 서울의대, 그러니까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대표가 있더라는 거죠.
그래서 보시면 김형기, 한위건, 김탁원, 최경하, 나창헌. 이런 학생들이에요.
그런데 이 의학도들의 활약상을 제가 짚어드리고 싶은데 이 문건이 뭐냐 하면요.
3.1운동과 관련해서 서울에서 체포되어서 이제 재판에 넘겨지는 사람들.
그 모든 사람 중에 지금 맨 앞에 나와 있는 이름이 김형기예요. 경성의학전문학교 4학년.
-가장 주동자.
-그렇죠. 맨 앞에 있습니다.
저 예심 종결 결정이라는 게 저 문건의 제목인데요.
저 문건에 올라와 있는 사람이 전부 210명이에요.
그리고 210명이고 저 중의 학생이 전문학교 그다음에 중등학교 학생 통틀어서 164명. 그래서.
-많네.
-학교별로 학생 수를 한번 따져봤더니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이 32명.
당시 한국인 전체 학생이 208명이었는데 그중의 32명. 약 15%입니다.
그래서 숫자로 보나 그다음에 비율로 보나 의학도들이 제일 많아요.
3.1운동이 제일 많습니다. 그중의 또 한 사람이 이익종이라는 학생, 2학년이었는데 체포되어서 지금 교도소에 가 있는 상황에서 이제 죄수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죠?
그런데 이 이익종은요. 종로4가에서 연설도 하고 만세도 독려하고 이랬는데 왜 잡혔냐 하면요. 잡히게 된 계기가 뭐냐 하면 3월 1일 그날 한국인 순사, 아마 순사보다도 군사경찰 보조원?
이런 사람이 지나가니까 너도 한국인이니까 너도 만세 불러라. 그러면서 한마디한 거예요.
그런데 그 군사경찰 보조원이 저 이익종을 기억하고 있다가 한 2주 정도 후에 잡았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가게 된 그런 경우고요. 3.1운동에 의학도들이 참여한 것이 대단하다고 제가 느낀 이유가 뭐냐 하면 지금은 우리가 3월 1일부터 새 학년이 시작하잖아요, 3월 1일부터.
이때는 4월 1일부터입니다, 4월 1일. 지금도 일본이 4월 1일부터 하거든요.
일본하고 똑같아요, 4월 1일. 그래서 이 3월 1일 저날이 토요일이었는데요.
저날은 어떤 학년들은 시험도 보고요. 아니면 시험이 코앞에 닥쳐 있는 상황. 그런데 의과대학이라는 데가 시험이 대단히 중요하거든요.
유급도 당하고 낙제, 유급당하고 하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고 시험도 보고 그러는데 이 학생들이 시험도 안 보고 시험공부도 안 하고 거리로 나왔다는 거.
-보통 결심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요.
-그렇죠. 그러면 혹시 3.1운동이 워낙 대단했으니까, 전국적인 거니까 혹시 의학도들이 그때만 그냥 참가하고 그 이후부터는 그냥 나 몰라라한 거 혹시 아닐까 이런 생각도 가능하죠, 사실은.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한번 보시면요. 이 3.1운동 이후에 학교에 그대로 남아서 공부 열심히 한 학생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고 아예 정말 독립운동 쪽으로 그 방향을.
-전향.
-틀어보는 경우도 많아요. 혹시 강우규 의거 아세요? 강우규 의거.
-강우규 의거.
-처음 들어 봐요.
-처음 들어보세요, 강우규 의거?
-네.
-그러면 사이토 총독이라고 들어보셨어요?
-들어봤어요.
-사이토 총독?
-사이토.
-사이토 총독. 그러니까 우리 조선 총독 중에서 세 번째 사람이고 3.1운동 이후에 문화통치를 시작한 게 바로 그 사이토 총독이거든요.
-사이토 총독.
-이 사이토 총독이 이제 일본에서 서울로 와요.
서울역에 딱 내렸는데 폭탄이 탁 터져요. 결국 아깝게도 실패했는데 그런데 그 주인공이 바로 강우규라는 분입니다. 현장에서 체포되지 않았어요.
-도망갔어요?
-그런데 체포되지 않은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 이 강우규 의사는 당시 할아버지세요. 연세가 많으시다고요.
그래서 이 강우규 의사가 처음에 체포되지 않고 처음에 계속 피신을 하는데 그때 그거를 도와준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또 저 의학도 오태영이라는 사람이에요.
그다음에 의열단 아시죠?
-(함께) 의열단.
-전지현.
-그 드라마... 드라마란다, 영화의.
-전지현.
-그렇죠, 영화의 의열단 나오고 왜 김원봉이라는 의열단장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그 의결단 단원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이렇게 뭐, 친일파 암살 이런 거를 기도한다든가 아니면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간다든가 이런 일들을 하거든요.
그런데 그때 또 도와준 사람 중에 또 허영조라는 의학도가 있고.
그다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분들이 있어요.
제가 한번 보여드리면요. 이게 1919년 10월에 상해 임시정부에 당시 활동하던 분들이 같이 사진을 찍었거든요.
-그래도 아는 분도 계시네요.
-누구 아세요?
-아는 사람 있어요?
-가운데 분. 안창호 선생님 맞죠?
-맞습니다. 맨 앞줄에 도산 안창호.
저 시절 상해 임시정부의 가장 중심인물이죠?
-잘생긴 인물을 기억하고 계시는...
-다 잘생기셨지만 그래도 안창호 선생님 얼굴은 더 눈이 익으니.
-그렇죠. 그런데 이 중에 의학도가 있어요.
-의학도가.
-이 중에 의학도가 있습니다. 20대 초반의 의학도가 있어요.
-의학도 저 뒤에 있는 사람. 저 사람...
-어디에 있냐 하면요, 둘째 줄에 왼쪽에서 세 번째.
-왼쪽에서 세 번째.
-나비 넥타이, 나비 넥타이.
-살짝 대각선으로 서 있는 사람.
-그렇죠, 그렇죠. 몸을 살짝 틀었죠. 유상규. 이름이 유상규인데요.
-(함께) 유산균?
-유상규.
-규.
-유상규.
-규, 규.
유상규.
-유상규.
-유상규라는 의학도예요.
경성의학전문학교 3학년 학생이었고 3학년 대표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잡히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 길로 상해로 망명을 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고요.
저 임시정부에 가서 어떤 보직을 받았냐 하면 바로 도산 안창호의 비서.
도산 안창호의 비서가 됐습니다.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을 해내는데요.
특히 나중에 이 안창호의 제자들이 정말 수도 없이 많거든요.
그 제자들 사이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냐 하면 도산 안창호의 그 훌륭한 인격을 가장 닮은 제자가 누구냐. 유상규라는 거죠.
-멋있다.
-유상규.
-인격을 닮은 제자.
-그리고 이 유상규는 나중에 도산 안창호, 이 상해 임시정부가요.
이렇게 잘 계속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조금 무능해지고 그다음에 분파 싸움에 각종 잡음이 많이 나고 이러거든요.
도산 안창호가 유상규를 불러요. 안 되겠다, 자네는 한국에 다시 들어가서 원래 의학도가 돼서 한국인들을 진료해주면서 할 일이 많은 친구였으니까 다시 돌아가서 그렇게 해라.
그래서 다시 학교로 복귀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의사가 되었다가 40살도 안 돼서 무좀 환자를 치료하다가 감염이 됐는데 이게 급성 감염이 돼서 40살 돼서 죽었거든요.
-무좀 때문에.
-무좀균이 옮겨서. 그런데 저 유상규가 죽고 나서 1년 반 정도 후에 도산 안창호가 세상을 떠나게 돼요.
그때 도산 안창호가 유언을 하나 남겼습니다.
내가 죽거든 유상규 군 옆에 묻어달라. 그래서 그렇게 묻었어요.
-정말 아끼는 제자였나 봐요.
-그래서. 그리고 그거는 옆에 있던 제자들도 다 인정하는 거고.
유상규라는 저 의학도 의사가 굉장히 아주 멋진 사람이에요.
그러면 이제 학교로 다시 돌아간 학생들은 그러면 식민 통치에 그냥 순응하면서 공부만 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 투쟁했을 것 같아요.
-한번 보시죠. 1924년 졸업생들의 졸업앨범에 저렇게 머릿말이 있고요.
저 졸업생 중의 1명이 직접 썼어요.직접 썼는데 심술 많은 새엄마한테 구박받으며.
그 심술 많은 새엄마가 누구겠어요? 그러니까 좁게 이야기하면.
-일본.
-그 학교의 일본인 교수님들, 민족 차별하는 그런 사람들일 테고 넓게 보면.
-일제 전체를 말하는 것 같아요.
-그렇죠, 일본이죠. 그런가 하면 옛 어머니 생각하면서 울고 하던 때가 몇 번이냐.
그러니까 거기서 옛 어머니라는 거는.
-우리나라.
-그렇게 되기 이전의 시대가.
-친엄마. 그렇죠, 우리 민족이죠.
-그립다는 거죠.
-우리나라. 그렇죠?
그러면서 대체 우리가 거기에 맞서 싸우던 적이 몇 번이냐, 이렇게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이 말이 거짓말이 아니에요. 이게 경성의학전문학교의 해부학 교실이고 거기에는 이렇게 실습용 두개골이 이렇게 있어요.
되게 중요한 수업 실습 도구죠. 그런데 하루는 저 두개골이 하나 없어졌어요.
대단히 중요한 건데 이게 없어지면 안 되는 건데 하나가 없어졌어요.
그랬는데 당시 해부학 교수가 이 구보라는 일본인 교수인데 이 양반이 평소에 수업시간이든 아니면 사적인 자리든 어디서든 늘 뭘 강조하냐 하면 이
두개골을 들고 다니면서 이 두개골 예쁘게 아주 잘생겼지?
이거 우리 일본인 거야. 그다음에 또 옆에 이거 봐 봐. 뭔가 좀 이렇게 둔하지? 이거 너희 한국인 거야.
너희가 그러니까 우리한테 통치를 받고 있는 거야. 너희가 알기나 했어? 이러면서 자기들의 그런.
-우월성을.
-우월성. 이런 식으로 늘 하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 한국 학생들이.
-재수 없었겠다.
-그렇죠, 환장하죠, 사실. 그런데 어떻게 해요.
학교는 다녀야 하고 교수님이고.
그러니까 대들지도 못하고 그냥 벙어리 냉가슴 이런 식으로 살았는데 이날, 이 일본인 교수 구보가 아무런 증거도 없고
아무런 증인도 없는, 목격자도 없는 상황에서 덮어놓고 이 두개골 훔쳐 간 건 너희.
-조선인이다.
-조선인 학생들 짓이다. 우리 일본 학생들이 이런 짓을 할 리가 없다.
그러니까 빨리 너희 범인 색출해서.
-나와라.
-자수시켜라. 안 그러면 내가 가만히 안 있겠다, 이런 식이 된 거죠. 이런 식이 된 거예요.
-생긴 것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그래서 이게.
-진짜 얄밉다, 진짜.
-구보 교수 망언 사건이라는 건데요.
-망언.
-이게 지금 동아일보의 1면에 사설인데 매일같이 이 사건 이야기가 완전히 신문을 그냥 도배하는 거죠.
-그런데 그 일본인 교수가 그런 말을 했다고, 그 말을 했다는 게 계속 오르는 거예요?
-그렇죠. 그러니까 말을 하니까, 저렇게 이야기하니까 한국 학생들이 어떻게 하냐 하면 단체로 수업 거부를 하면서.
-반발을 했겠네.
-반발을 했군요.
-사과해라. 사과해라.
구보한테서 사과를 꼭 받아야 하겠다. 그러니까 학교 측에서는 어떻게 하겠어요?
주동자를 또 뽑아서 이러면 퇴학시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그때 그 한국인 전교생 1, 2, 3, 4학년 다 합해서 한 190명 정도가 돼요. 100% 자퇴서를 내버렸어요.
-멋있다.
-진짜 멋있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난리가 난 거죠.
-어떠냐, 구보야. 사과해라.
-학부형들, 그다음에 졸업한 선배들, 그다음에 뭐 신문들 난리가 나고. 이게 나중에는 어떻게 됐냐, 하면요.
사이토 총독이 우회적으로 지금 한국경성의학전문학교 한국 학생들이 저러는 게 일리가 있다는 거를 내가 안다.
조금만 기다려 봐라. 내가 어떻게 해 볼게. 조금만 기다려. 이런 식으로 약간.
-당근을 좀.
-무마시켰는데 결국 구보 교수를 파면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게 뭐냐면요. 한국 학생들이 끙끙 앓다가 저렇게 터져 나왔잖아요.
저는 저게 왜 그러냐면 3.1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봐요.
-좀 약간 일본인들도 겁을 먹었군요.
-그렇죠. 그리고 한국 학생들은 3.1 운동을 해봤기 때문에 전 국민이 우리 민족 전체가 독립을 원하고 있고 그런 거에 대한 어떤 에너지, 이런 거를 사기가 올라가 있는 상황인 거죠.
-그렇죠.
-그러니까 참고 견뎌냈던 거를 이제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는 거죠.
-안 참지. 그렇지.
-뭉쳐서 하니까 된다.
-이 사건이 한 달 내내 굉장히 큰 사건이었습니다.
당시에 한반도에 최대 사회 문제였어요, 이 사건이.
일제강점기에 한국인들이 제일 좋아했던 스포츠가 뭘 것 같으세요?
일제강점기에 한국인들 전체적으로 제일 좋아했던 스포츠 2개가 있는데요.
-씨름.
-아닙니다.
-야구.
-씨름도 물론 중요했겠지만.
권투입니다, 권투. 첫 번째가 권투예요.
그런데 권투를 좋아한 이유가 뭔지 아세요?
-그 스트레스, 분노.
-합법적으로 때릴 수 있잖아요.
-분노가, 맞아. 분노, 일본인들한테 분노.
-정답. 정답입니다.
룰 자체가 권투는 룰 자체가 상대편을 때리는 거잖아요.
-때려눕히는.
-구보 빡.
-그러니까 합법적으로 일본 선수를 때려도 상관없다.
전혀 죄를 묻지 않는다. 또 하나가 축구예요.
사실 축구는 지금도 어떻게 보면 지금도.
-축구, 사커.
-그때부터 한일전이.
-한일전 계속 있었네.
-축구는 정말 저 시대에는 전쟁입니다, 전쟁.
그런데 축구라는 스포츠가 잘 생각해 보세요.
가장 돈이 안 드는 스포츠예요.
-그렇죠. 공만 있으면 뭐.
-그렇죠, 공만 있고 일정한 공간만 있으면 골대도 그냥 대충 가방을 놓거나 이렇게 하면 되잖아요.
-용품이 필요 없으니까.
-유니폼도 구태여 필요 없고 하니까.
그래서 저 시절에 식민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특히 학생들 입장에서는 축구라는 것이 뭔가 억눌린 그런 여러 가지 것들을 분출할 수 있는
그런 수단이기도 하고 또 우리의 응집력 또는 민족적인 어떤 우수성 이런 것들을 보여줄 수 있는.
그렇다 보니까 이 축구는 정말 전쟁 그 자체였습니다.
이게 경성의학전문학교 축구부인데요. 저기 보시면 유니폼에 저게 M 자예요, M 자.
Medical.
Medical.
-축구부.
-이과생들이다.
-유니폼이에요?
-네. 그래서 저게 대회에 출전해서 지금 사진을 찍은 건데요.
-너무 귀여워요.
-그런가 하면 한국에서 우승을 하면요. 일본에 갈 자격이 생겨요.
그래서 일본 대회에 참전을 한단 말이죠.
그래서 일본에 가서 아깝게 지고 오는 경우도 있는데 또 이기는 경우도 있어요.
우승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저 때가 그런 겁니다.
그래서 일본의 무슨 유명한 무슨 관광지.
-나라 공원.
-무슨 사원에 제가... 아니, 나라 공원 아니고 저때 원정을 가서 찍은 사진인데.
-귀여워.
-저기 양복 입은 사람은 인솔자겠죠. 축구부장, 단장 이런 거잖아요.
저게 바로 유상규입니다. 아까 안창호 얘기했던 유상규. 저 축구부는 사실은 동아리 중의 하나예요.
동아리 중의 하나인데 100% 한국인만. 일본 학생 못 들어와요.
-좋다.
-아예 못 들어옵니다.
그래서 이 축구부가 100% 한국인이다 보니까 저게 학생회 역할을 해요. 한국인 학생회 역할을 하는 거고 그러다 보니까 저 축구부장, 감독 전부 다 한국인이 하게 돼 있어요.
이것도 제가 조금 의미심장해서 넣어봤는데요. 1930년 12월에 일본 원정을 떠나는 축구부 선수들이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요.
그래서 거기서 배를 타고 가야 하니까. 취재 기자가 한마디씩 하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이 박응근이라는 선수가 학생에게 뭐라고 했냐면 작년에는 석패했는데 금년에는 복수를 하고 말겠다.
그다음에 정도상이라는 학생은 또 뭐라고 했냐면 우리의 정신과 투지를 현해탄 저편, 즉 일본이겠죠, 저거는.
거기에 비추고 후쿠오카에서 행진곡을 울리겠다. 이렇게 축구에 대한.
-견해를.
-이기고 말겠다는 그런 어떤 투지를 보여주는데요.
염형섭이라는 학생은 더, 더 해요. 차창 밖 설경, 그러니까 눈이 쌓였나 봐요.
왜 옷을 입은 조선인의 경상도 사투리, 다 쓴 영감님의 자만에 가득 찬 이야기, 여학생이 부는 하모니카 소리 이 모든 것이 어쩜 조금도 안 어울린다.
그러니까 그 기차 안에서 보이는 그 여러 가지의 모습을 보고 저런 얘기를 하고 있고요.
맨 마지막에 김응수는 백골이 진토 되어이라도 있고 없고.
이 정도로, 이 정도로 일본 원정을 떠나는 가슴속에 맺혀 있는 것들이 이게 범상치 않습니다.
-다시 한번 봐도 의학도들인데 문인 같아요, 진짜.
-그렇습니다. 이렇게 또 항일의식은 항일의식이고 의사가 되기 위해서 어떨 때는 공부를 또 열심히 해야 하잖아요.
-배워야죠.
-그렇죠.
-다시 한번 제가 1924년 졸업 앨범을 보여드리는데요. 이건 표지예요.
아까 왜 제가 머리말에 새엄마 옛 어머니 얘기했잖아요.
바로 그 앨범이거든요. 그런데, 여기에 졸업생들끼리 제목을 넣었어요. 형설기념.
형설이 뭐죠, 형설?
-형설지공해서 형설.
-형설, 형설지공.
-눈빛으로.
-그러니까요. 반딧불이 빛하고 눈빛으로 공부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우리가 4년 동안 이렇게 형설지공을 했다고 스스로 자부심을 표현하는 건데요.
-멋있다, 형설기념.
-보시면 막이 닫히고 그러니까 4년이 지났다는 뜻이죠.
다시 머리에는 이론의 투구를 쓰고 손에는 실제 칼을 잡고 그러니까 의학 이론.
-의사로서.
-그다음에 실제 메스, 수술해야 하니까. 가슴에는 진실의 갑옷을 입고. 사면팔방으로 각기 흩어질 거 아니에요, 각자.
그렇죠, 갈 길 가야죠, 졸업했으니까. 그럴 때 삼천리나 되는 폐허에서 누구의 입김으로 새 문화가 일어날 터이며 2000만, 당시 인구가 2000만이에요. 남북한 합쳐서죠.
2000만의 황량한 마음속은 누구의 손으로 개척될 터인.
우리가 개척해야 한다는 뜻이죠. 우리가 개척해야 하고 개척할 거라는 뜻이죠.
-의대생들이 왜 이렇게 글도 잘 쓰나요?
-잘 써요. 진짜 잘 씁니다.
-문과네.
-처음부터 아주 기가 막혀요. 진짜 잘 씁니다.
이렇게 이론도 공부해야 하고 또 술기도 익혀야 하고 그렇지만 진실, 진정성 이게 제일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그런가 하면 이 앨범 속에 지금 넣어놓은 한 페이지가 우리나라 지도예요, 전도입니다.
-전도가 있네요. 전도가 왜 있을까요?
-우리나라 전도를 넣어놨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식민지 상황이고 그다음에 경성의학전문학교는 결국 총독부가 운영하는 학교고 그리고 한국인 학생들은 늘 일본인 교수나 일본인 학생한테 어떻게 보면 힘없는 편에 속하고, 약자에 속하고.
그런데 졸업앨범을 그러니까 우리 한국인 학생들만 따로 만들었어요, 따로.
따로 만들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안에 저렇게 우리나라 지도를 넣어놨다는 거죠.
그리고 저게 지도에 보면 뭔가 글자 같은 게 이렇게 쓰여 있잖아요.
-지역마다 글자가 적혀있어요.
-그렇죠? 저게 한국인 졸업생 49명.
-어디 출신인지.
-맞습니다. 그러니까 그 49명이 어떤 친구는 서울이 고향이고 누구는 평안도, 누구는 경상도 다 자기 고향이 있잖아요, 그렇죠?
그것도 대구, 평양 아주 구체적으로. 그 위치에 이름을 써놓은 거예요.
-멋지다.
-뭔가 그런 기획도 참 잘하네요.
-정말 범상치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요.
내가 잘나서 또는 우리 집이 잘나서 됐다고 생각 안 해요.
그렇게 생각 안 하고 나는 이렇게 혜택받아서 이렇게, 이렇게 학교까지 와서 의학을 배우고 있으니까 나는 내 고향에 가서 우리 고향 사람들에게 그 은혜를 갚아야 해.
이런 생각이 굉장히 강합니다. 굉장히 강해요.
그러니까 저게 자기 고향 위치에 이름을 써 놓은 데는 자기 고장, 자기 지역 사회에 대한 애정.
-잊지 말자.
-이걸 다 표현하고.
그러니까 민족애만 있는 게 아니에요. 자기 고장에 대해서 저렇게.
-지금까지는 주로 학생들 이야기를 좀 했었는데 이번에는 교수님 이야기를 좀 해드릴게요.
사실 저 시절 훌륭한 교수님들이 참 많은데 정말 전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분들인데요.
첫 번째, 경성의학전문학교의 미생물학 주임 교수 유일준이라는 분이 있어요.
이분이 학교를 졸업하고 독일 유학을 가서 박사를 받고 왔는데요. 독일 유학을 갈 때는 참 정말 복잡했겠죠.
그 머나먼 나라, 언어도 잘 안 통하고 요즘도 아니고 그 시절에 독일 유학 간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간 이유는 이런 거겠죠. 가장 일류 국가, 의학에서 일류 국가인 독일에 가서 의학의 본질을 정말 한번 규명해 보고 싶다.
또 그래야 그게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그게 동포들에게 어떤 좋은 그런 의학 의도를 베풀 수 있다, 이런 거였겠고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독일 유학을 당시 갔던 이유가 뭐냐 하면 일본이 1차 대전 때 패전하고 나니까 마르크화 가치가 떨어져서 유학 비용이 상대적으로 유리해진 거예요.
요즘 엔화 떨어진 것처럼. 그런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 시절에 유일준 선생님 또래분들이 여러 명이 독일 유학을 갔다 왔어요.
-싸지니까 지금이다 하고 딱.
-그런데 그러다가 뚝 끊겨요. 독일 유학이 뚝 끊긴 이유가 또 두 가지인데 하나는 마르크화가 회복되거든요.
그건 경제적인 이유고.
-정말 코인처럼.
-또 하나.
-세계 대전.
-또 하나의 이유는 독일이나 미국이나 하여튼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의 박사를 인정해 주지 않아요.
그러니까 완전히 자기네 중심으로 이걸 통제하는 거죠. 의학 연구까지도.
-일본도 독일한테 배웠으면서.
-더구나 자기가 독일 의학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독일 박사인데도 인정을 안 해줘서 저분들은 다시 일본에 가서 다시 박사를 또 받아야 했어요.
그렇게 돼서 유일준 선생이 교수가 됐는데 경성의학전문학교는 식민지 상황에서 일본인들이 주도하는 학교다 보니까 한국인 교수를 채용해주지 거의 않거든요.
그다음에 교수가 딱 한 명, 조교수 한 명, 강사 한 명, 조교 한 명.
딱 한 명씩밖에 없어요. 그래서 교수는 이퀄 자동적으로 주임 교수예요.
그러니까 교수가 무조건 교수 하면 무조건 주임 교수예요, 그거는.
그러니까 지금처럼 교수가 여러 명 있고조교수가 여러 명 있고 이런 시스템이 아니에요.
그래서 한국인이 주임 교수가 된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구조거든요.
그런데 저 유일준 교수가 최초로, 한국인 최초로 주임 교수가 된 거예요.
세균학은 요즘 말로 하면 미생물학 교실인데 그런데 왜 유일준 교수가 독일 유학도 좋고 최초 주임 교수도 좋은데 그것만 가지고 전설은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 싶고요.
진짜 전설인 이유가 또 있습니다. 뭐냐 하면 저렇게 연구를 했는데 뭘 연구하냐 하면 발진티푸스라는 전염병을 연구해요.
발진티푸스. 그래서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이렇게티푸스균인데 그런데 그 발진티푸스를 당시 매개하는 숙주가 뭐냐 하면 이에요, 이.
-머릿니.
-그게 또 옛날에 이 엄청 많았잖아요.
유일준 교수가 이를 연구해야 발진티푸스가 해명이 되니까, 풀리니까 어떻게 하냐 하면 노숙자들하고 안면을 터요, 우선.
그래서 조금 안면이 튼 다음에는 노숙자들한테 돈을 주고 그 사람들 입고 있는 옷을 사요.
그래서 그 옷을 자기가 입고 다녀요. 그럼 거기에 이가 얼마나 많겠어요, 그 노숙자들 옷이니까.
거기에는 감염된 이가 물기도 하고 감염되지 않은 이가 물기도 하고 이게 매일 물리는 거 아니에요.
계속 보면서 관찰하면서 그걸 가지고 연구하는 거예요.
-대단하시다.
-발진티푸스를 치료하기 위해서.
-이건 레전드 맞네요.
-그러던 어느날, 어느날 한 학생이, 재학생이 익명으로 편지를 보냈어요. 유일준 교수에게.
-교수님, 적당히 부탁드려요. 이런 게 아닐까요?
-더러워요.
-냄새나요.
-저희 무서워요.
-비슷해요, 비슷합니다.
-교수님, 쇼 그만하십시오. 그거 쇼하는 거 아닙니까?
-부정적이네.
-그거 위선 같습니다. 우리 학교의 체면도 있고 다른 교수님도 많고 학생들도 많은데 이거 뭐 하는 거냐.
그만 해도 된다, 이제는. 그만하시라고.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답을 어떻게 했냐 하면요.
나는, 유일준 나는 한국인들의 질병을 연구하고 고치기 위해서라면, 치료하기 위해서라면 적도에도 갈 수 있고 알래스카에도 갈 수 있고 염라대왕 앞에도 갈 수 있다.
-그럼에도 학생이 쓰겠죠. 염라대왕 앞에는 혼자 가시면 안 될까요?
이렇게 쓰실 수도 있을 것 같긴 하지만 멋있습니다.
-이게 요즘 우리가 적도, 알래스카 다 아니까 그러는데 사실 이게 100년 전 우리 상황에서 알래스카, 적도, 염라대왕 이렇게 표현한다는 건 사실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대단하십니다.
-그러니까 이게 학생들이 다 알잖아요.
그러니까 학생들을 통해서 이게 학교 바깥으로까지도 소문이 퍼지고 이렇게 대단한 학자가 있더라.
이렇게 해서 난리가 났죠. 이런 교수님이 있다.
그런데 참 그러고 나서 몇 년 후에 1932년에 여름에, 옛날 여름에 한강에서 수영 많이 했거든요, 한강에서. 익사 사고로 죽었어요. 40살도 안 됐습니다.
-익사요?
-40살도 안 됐는데. 주임 교수가 된 지 꼭 6년 만에, 6년 만에 마흔 살도 안 됐는데 익사 사고로 죽었어요.
-얼마 안 됐네요.
-그래서 저분이 전설로 남은, 레전드로 남은 거예요.
그런가 하면 유일준 교수에 이어서 두 번째 전설, 백인제.
백인제 이름 들어보셨어요, 백인제?
-백제는 아는데.
-백병원.
-백병원.
-백병원.
-백병원.
-인제대학.
-들어봤습니다.
-인제대 들어봤죠.
-그 백인제. 물론 한자는 다르지만.
그런데 맞아요, 이분이에요.
백병원 그다음에 인제대학, 그 백인제입니다.
백인제는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최고 의사죠.
최고 실력의 의사입니다. 백인제를 보통 우리가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라고만 기억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분은 연구 쪽도 굉장히 탁월했어요.
박사 따기 전에 받기 전에 연구 논문을 통해서, 우수 논문으로 뽑혀서 장학금을 받는 그런 기사고요.
그런데 왜 백인제가 대단하냐면 이분이 입학 때부터 졸업 때까지 단 한 번도 수석을 안 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3학년 때 시험을 앞두고 3.1운동에 참여해요. 그래서 감옥에 가고 재판받고 난리가났죠.
그래서 나중에 복교해서 졸업하는데. 당시의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은 졸업만 하면 의사 시험을 치지 않고 바로 의사면허증을 받을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학교에서 보복을 합니다, 백인제한테. 그래서 수석 졸업생인데 수석 졸업생한테 의사면허증을 주지 않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백인제는 의사면허증을 받아야만 의사가 될 수 있는데.
그래서 조건을 내겁니다, 학교에서. 뭐라고 하냐면 네가 2년 동안 마취과에 가서 일 좀 할래?
그거 하면 내가, 우리가 줄게. 지금하고 달라요.
지금은 마취과가 대단히 중요한 과지만 이 시기에는 마취과라는 과도 없었고 마취라는 게 약간 허드렛일.
-약간 잡일 담당.
-조수, 이런 식으로 느껴지는 거였거든요.
그러니 4년 내내 수석을 한 사람한테 면허증도 안 주고 마취 일이나 해, 이렇게 되어 버린 거잖아요.
웬만했으면 아이씨 하고 당장 때려치운다고 했을 것도 같은데 백인제는 그걸 다 이겨냈어요.
학교와 일본인 스승들이 손들었죠. 너는 진짜 당할 수가 없구나. 너의 실력과 너의 근성에 당할 수가 없다.
그래서 박사 따서 오자마자 바로 외과학 교실의 주임교수가 됐습니다.
서른 살에. 서른 살에.
그리고 이걸 생각하셔야 해요. 지금은 우리가 내과, 외과뿐만 아니라 모든 과가 다 중요하지만 사실 저 시절에는 내과, 외과가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일본에 외과 수재들이 없었겠어요? 다 있단 말이죠, 얼마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인제의, 한국인 백인제, 그것도 3.1운동에 참여했고.
그런 백인제한테 서른 살짜리에게 외과학 교실 주임교수 자리를 줬다는 건 장난이 아닌 거죠, 한마디로.
-정말 실력으로 인증했네요.
-그럼요. 실력과 그 근성이.
그리고 체력이 엄청났답니다, 이분이.
이거는 뭐냐면요, 이 그림은 백인제의 일본인 제자들이 그린 그림이에요.
이게 뭐냐면 1937년에 백인제 주임교수가 장폐색, 장이 완전히 막혔을 때 외과 수술로 어떻게 치료하는가. 그걸 감압술이라고 부르는데요.
-감압술.
-그거를 37년에 백인제 선생이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도 하고 연구 발표도 하고 다 했다는 거죠.
이게 국제학회에 알려지지만 않았던 거예요.
그런데 3년 후에 왕겐스틴이라는 미국에 유명한 외과의사가 있어요.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에요. 그 양반이 국제학회에 발표해서 최초로 공인을 받았거든요.
그러고 나니까 백인제의 일본인 제자들이 아닌데, 우리 선생님이 먼저인데.
그게 너무 아쉽고 분해서 그림으로까지 이렇게 표현했다는 거죠.
여기서 중요한 게 한 가지 뭐냐면 백인제라는 사람이 주는 희망, 힘, 이런 건데요.
예를 들어 이렇게 설명을 해볼까요?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 선수.
-독립운동을 직접 한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올림픽에 나가서 그것도 사실은 일본 선수로 나간 거였지만 아무튼 한국인이 가서 1등을 하고 왔다.
그게 지금까지도 우리 한국인들에게 주는 자부심, 희망, 위로, 위안 대단하지 않은가요? 그렇죠?
스포츠에 손기정이 있듯이 저는 의료 쪽에 백인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외과거든요. 외과야말로 이게 뭐랄까요, 응급 수술 같으면 정말 죽을 수도 있거든요, 환자가.
그런데 저 식민지 시절에 만약에 서울로 급하게 가서 마지막으로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그게 일본인 교수다. 이게 조금 뭔가 불편하잖아요. 뭔가 불편한데.
그런데 백인제, 한국인이 있거든요. 한국인이 있거든요. 그리고 저 백인제가 웬만하면 다 살리거든요. 정말 실력자니까.
-너무 든든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게 국민들에게 식민지 상황에서 주는 힘.
그뿐만이 아니에요. 저 후배 제자들. 만약에 백인제가 주임교수가 아니었고 일본인 교수가 있었다고 한다면 한국인, 백인제의 후배 제자들이 그렇게 기를 펼수 있었을까요? 쉽지 않죠.
이런 해방 후 우리나라에 정말 기라성 같은 외과의사들이 다 백인제의 후배 제자로서 백인제 주임교수의 울타리, 그 보호도 받고 거기서 좋은 자극도 받고 이러면서 다 커 나온 거잖아요.
저기에 일본인 외과 교수가 있었다고 하면 이게 힘들다고요, 쉽지 않아요.
그러니까 백인제는 자기 한 사람의 문제만이 아니라 결국은 해방 후 한국 외과학 전체를 다 다져놓는 그런 역할을 했다.
-정말 중요한 인물이네요.
-그다음에 일제강점기에 여의사, 되게 귀했겠죠, 되게 귀했는데.
국내에서 탄생한 여의사가 있었을까요,
국내에서?
-국내 출신.
-있었죠.
-있었어요.
-있었으니까 말하겠죠?
-여기 보시면 아래에 앉아 있는 3명의 여학생이 국내에서 최초의 여학생.
이게 무슨 뜻이냐면요. 여학생들이 가는 의과대학이 없었습니다. 처음에 없었어요.
처음이 아니라 한동안 없었어요. 그래서 어떤 여학생이 내가 의사가 되고 싶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냐면 일본 유학을 가서 의사가 돼서 돌아오거나 미국 유학을 가서 돌아와야 해요.
-우리나라에는 방법이 없으니까.
-우리나라에는 방법이 없으니까. 학교가 없으니까, 여학생들이 가는 학교가 없으니까.
그런데 저 뒷줄에 왼쪽 분이 누구냐면 로제타 셔우드 홀이라고 해서 결핵 퇴치 운동하고 크리스마스실 만들었던 셔우드 홀의 어머니예요.
저분이 한국에 와서 보니까 한국의 여성 환자들은 남자 의사한테 진료를 안 받아요.
남녀칠세부동석, 그렇죠?
-그러면 어떻게 해요?
-절대로 안 받아요. 더군다나 외국에는 더더군다나.
그러니까 저 로제트 셔우드 홀은 그렇다면 방법은 한국인 여의사를 길러야 해요.
한국인 여의사를 탄생시켜야 그나마 그래도 한국인 여성 환자들이 와서 진료를 받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학교가 없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했냐면 로제트 셔우드 홀은 저 아래에 있는 3명을 개인적으로 키워요. 개인적으로 의학을 가르치고.
-아예.
-이렇게 키워요.
그런데 그것도 한계가 있잖아요.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아야 하니까, 장비도 그렇고 여러 가지.
그래서 경성의학전문학교가 남자들만의 학교인데 이걸 교섭을 해서 3명의 여학생을 청강생으로 입학시킵니다.
청강생으로 입학시켜요. 그래서 저 여학생 3명이 4년 동안 남학생들과 똑같이 수업을 받고 졸업을 해요.
그래서 그렇게 하면서 이게 의사로 인정이 된 거예요.
그래서 저 3명이 최초의 여자 의사입니다.
그런데 이게 정상적인 루트는 아니잖아요.
-그렇죠.
-정상적인 루트는 아닌데 좀 이례적으로 저렇게 3명의 여자 의사가 나왔는데 로제타 셔우드 홀이 얼마나 대단하냐면요.
저는 정말 로제타 셔우드 홀은 한국 사람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아요. 왜 그러냐면 그 3명을 성공시켰잖아요.
또, 또 키우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 또 3명을 또 뽑았어요, 개인적으로.
또 학교에 집어넣어요. 그러는 과정에 김탁원, 길정희라는 두 사람이 바로 로제트 셔우드 홀의 여의사 양성 작업에 동참하기 시작을 해요.
그다음에 옆에 길정희라는 부인인데 저분도 의사예요.
그렇게 해서 이 두 분도 여의사 양성 작업에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제를 터서 경성여자의학강습소라고 해서 하나 이게 정식 학교까지는 아닌데 학교를 하나 만들어서 이렇게 여의사들을.
그러니까 유학 안 가고 국내에서 클 수 있도록 이렇게 만드는 거죠.
-좋다.
-감격스럽네요, 이 사진.
-그렇죠. 그래서 이렇게 의사들이 탄생해요, 국내에서.
시험에 붙어서. 이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가 지금 어디냐면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입니다.
-고려대학교.
-고려대.
-그러니까 주인이 몇 번 바뀌고 하면서 학교가 여러 번 개편이 됐는데요.
지금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이에요.
-고려대.
-오늘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의학사.
특히 일제강점기 의술로 항일 정신을 펼쳤던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봤는데요.
그렇다면 오늘 강의, 선장님께서 한마디로 딱 정리를 해 주신다면요?
-지금의 우리 의학도 의사분들 많으시잖아요.
이분들이 한 번쯤 그 옛날 일제강점기의 선배 의학도, 선배 의사분들이 어떻게 고민하고 어떻게 또 실천했는지, 이런 거를 한 번쯤 기억을 해 주셨으면 하는 그런 생각이 들고요.
또 하나는 우리 시청자들, 국민 중에도 의학도나 의사들을 조금 안 좋게 분들도 꽤 있으세요.
그렇지만 적어도 이 일제강점기에 우리 의학도, 의사분들이 항상 이렇게 민족을 생각하고 또 자기 고향을 생각하고 정말 치열하게 정말 노력하고 그 실력과 근성들을 다 보여주셨다.
이런 것들을 조금 기억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정말 선장님의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다, 이런 말이 굉장히 저한테도 인상 깊었습니다.
저는 좀 마음이 경건해지는 그런 시간이었는데 두 분은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해요. 어땠어요, 인욱 씨?
-이분들이 이렇게 노력해 준 덕분에 저희가 이렇게 누리고 있지 않나.
우리나라가 이렇게 많이 발전된 것 같아서 너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눈가도 좀 촉촉해 보여요, 인욱 씨. 감동, 감동인가요?
-그런가요?
-좋습니다. 경환 씨는 어땠어요?
-저는 지금도 공부하는 의대생들도 정말 코피 쏟을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 당시에도 그렇게 했다는 그게 오늘 너무 와닿았고 그리고 과로하지 마시고.
적당히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여러분, 건강이 최고예요.
-나라를 위해서 힘쓰셨던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미처 업적이 다 알려지지 않은 분들도 참 많으실 텐데요. 이게 우리가 더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던 건 아닌지.
관심이 부족했던 건 아닌지, 반성을 하게 되고요.
마침 애국과 애족 정신을 기르는 시기입니다.
다시 한번 나라를 위해 애쓰셨던, 힘쓰셨던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서 오늘의 보물지도 지식 항해는 마쳐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외치면서 다음 주를 기약해 볼게요.
다음 주에도 찾아라.
-(함께) 보물지도!
-이 물질은 그전에 나왔던 독가스랑은 좀 다른 계열이에요.
조금만 들어가도 우리 몸의 유전자에 들어가서 유전자 변형을 일으켜요. 신경독을 살포하면서 이 지역에서 한 5000명 이상이 사망하게 됩니다.
-어떻게 해.
-더 강력한 물질도.
-안 돼.
-만들었던 거예요. 이게 한자로 봤을 때 살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은데.
-진짜 그런 느낌이에요.
-그러나 사람들은 정말 끝이 없어요.
-거짓말이요.
-더 강력한 독을 더 은밀한 독을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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