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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 1교시 - 잊혀진 길, 유라시아 로드 (강인욱 / 고고학자)
등록일 : 2020-11-09 13:51:43.0
조회수 : 315
-안녕하세요?
지난 시간에 이어 대한민국 최고의 강연,
최강 1교시에서 강연 맡은 고고학자 강인욱입니다.
지난 강연에서는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다섯 가지의 말에 관련된 유물로써
그 역사 정리했습니다.
우리 이 장에서는요.
조금 더 우리한테 가깝게 와서요.
이 유라시아 북방 대륙과 한반도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한번 몇 가지
유물을 들어서 구체적으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강연 주제는 잊혀진 길, 유라시아 로드입니다.
여러분은 보통 북방이라면 어떤 것이
떠오릅니까?
아마 요즘에는요.
유라시아나 실크로드와 한국을 잇는
그러한 일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그 북방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물론 지역적으로 본다면 북방이라
한다는 것은 한국의 북쪽에 있다는 걸 의미하죠?
그러면 왜 동서남북도 아니고, 북쪽만 중요하냐.
북쪽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반도는
3면이 바다입니다.
그래서 이 대륙과 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북쪽밖에 없기 때문에
저희에게 이 북방이라는 것은 단순한
그러한 방위적인 것이 아니라 이 거대한
대륙과 소통을 하는 그러한 네트워크의 통로입니다.
또한 이 북방이라는 지역은요.
결코 하나의 지역이 아닙니다.
예컨대, 시베리아라고 하는 지역만 해도요.
남한의 120배예요.
그러니까 그 안에는 다양한 것이 다 있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북방이라는 거는 진짜
다양한 그러한 그 사람들 지리 환경들을
다 무시하고 그냥 어렴풋하게 어디에서
왔어라고 하니까 북방 루트 이야기해도
잘 감이 오지 않는 그러한 것을 많이 볼 수 있거든요.
전 그래서 오늘 조금 더 그 루트를
구체적으로 한번 볼까 해요.
크게 한국과 이 북방 대륙과 이어지는
그 루트는 세 가지 루트로 나눌 수 있어요.
바로 첫 번째 요동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가 한반도에 영향을 준 고조선
그리고 바로 고조선과 같이 이어진 그 길입니다.
두 번째는 역사로써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요.
동해안에 따라서 이 북쪽으로 두만강
나아가서 연해주하고 이 극동 지역으로
이어지는 환동해의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유라시아 초원
대륙과 만주를 이어서 한반도로 이어지는
이 초원의 길.
이 강의는요.
이 세 가지의 루트를 각각 따로따로
설명하겠습니다.
각각 다르고 각각 다른 지리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었던 북방이라고 하는 그러한 관념.
그것을 한번 제 강연에서 하나씩 하나씩
풀어서 다시 한번 음미하는 그러한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고조선의 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이상한 그림이 나왔어요.
이 머리는 상투를 틀었고요.
눈은 작고, 코 납작하고, 광대뼈는 튀어
나온 게 우리 동네에서 약간 개구쟁이
모습 보는 것도 같고요.
하여튼 우리한테는 그렇게 낯설지는 않은
그러한 모습인데요.
이 손바닥만 한 이 유물에서 제 첫 번째
길이 시작됩니다.
이 유물은 중국 랴오닝성 랴오양시
근처에 있는 타완촌이라는 마을에서
우연히 농부가 발견한 그 유물이에요.
이것과 함께 비파형 동검 등 다양한
유물이 나왔는데요.
처음에 이 유물이 나올 때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청동이 아니라 돌이었거든요.
그리고 이 유물의 용도는 여기다 청동
물을 부어서 만드는 청동 제품을 만드는
거푸집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여기서 나왔어요.
그 거푸집을 뒤집으니까 그 뒤에 이렇게
사람 그림이 얼굴 2개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얼굴은요.
우리가 보통 쓰다가 이렇게 마치 비누
조각하듯이 판 것이 아니라요.
이 얼굴을 부분만 솟아 있고 나머지가 다
깎여 있는 형태예요.
이게 뭐냐 하면 좀 쓰다가 장난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작정하고 사람의 얼굴을
새긴 것입니다.
게다가 이거는 동검이 있고 상당히
유력한 사람의 무덤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장난감이거나 절대 그렇지가 않겠죠.
이 거푸집을 무덤에 넣었었던 것은 바로
그 주인공이 과거에 청동기를 만들던
바로 청동기 장인이었단 뜻입니다.
청동 기술이라고 하는 고대의
하이테크놀로지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죠.
바로 이 고조선 루트는 이 거대한
흐름에서 청동기를 만드는 그러한 장인들.
그리고 그들은 그 당시 사회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의 지금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거.
여기에서 우리는 이 고조선의 루트라는
것이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흐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거는 지금 말씀드린 타완촌 바로 옆에
있는 중국 선양시에 있는 정자와쯔라고
하는 유적인데요.
약 2500년 전에 발견된 가장 대표적인
초기 고조선의 대형 귀족 무덤입니다.
이 작은 무덤 안에는요.
이 거울만 무려 6개가 발견되었고요.
그 위에 말 뼈, 그다음에 다양한 무기
이런 것들이 엄청나게 많이 묻혀 있었습니다.
왜 청동기를 썼던 기술이 과거에 중요했을까요?
바로 청동기 시대에는 이 청동기로
다양한 무기와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고
그것을 소유하는 자.
바로 그 사람이 그 시대를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청동기를 만드는 그 기술을
가진 자, 그 테크놀로지를 가진 자는
바로 그 당시의 권력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죠.
그렇다면 고조선에서 이 청동기를 만들던
사람들은 어디에서 처음 왔을까요?
바로 그 사람들에 대한 단서는 더 서쪽
요령성의 서쪽인 랴오시라고 하는
지역에서 십이대영자라고 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더 북쪽으로는 현재의 내몽골
츠펑시 근처에는 아주 발달한 청동기 문화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 청동기 문화는요.
그 지역이 아주 청동 광산이 풍부합니다.
그러니까 그 내몽골에서 초원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루트가 있거든요.
그 루트를 따라서 초원에 발달한
청동기가 오고 이 요령성 서쪽에서
발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얼굴은 지금 보시는
바와 같이 눈과 코가 작고 입이 다물어져
있어서 지금 말씀드린 타완촌의
유물과 상당히 유사해요.
아마도 이 청동기를 만드는 장인들은
이렇게 소규모로 계속 동쪽으로 이동을
하면서 그들의 기술을 전파하고 또
자신의 기술을 좀 더 높게 살 수 있는 그
사람들에게 점진적으로 확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청동기가
나온다 그러면 이상한 게 나오면 침략해
온 것이 아니었겠느냐.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침략이 아니라 청동기를 만든 사람들이.
요즘도 보면 우리 왜 반도체 같은 그런
고급 기술 가지신 분들, 스카우트
많이 해 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실제 유라시아 초원 일대에서는
발달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이동을 해요.
이동을 하고 그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거푸집하고 청동기를 만드는 것을 몰래
가지고 가죠.
한마디로 이게 노하우를 상징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신들이 청동기를 만들 때는
그냥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제사도 지내고 또 그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썼었던 거푸집이나 청동 국자
이런 것들을 다 함께 모여서 같이
묻어줬던 전통이 있었습니다.
타완촌도 그러한 전통의 일환이죠.
그렇다면 여기에 거푸집에 그렇게 힘들게
도드라지게 얼굴을 새겼다.
그거는 아마도 이 청동기를 만들던
그들이 믿었던 신이나 조상들, 아마
그러한 제사를 지냈었을 때 썼던 그러한
것인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얼굴은 바로 고조선에서 가장
높은 계급의 사람의 얼굴을 대표하는
그러한 모습으로 변화했습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끝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 더 동쪽으로 가겠습니다.
현재의 중국 쑹화강 중류에 있는
부여.
현재의 중국 길림시 일대의 그 중심지가
있었습니다.
가장 왼쪽에 있는 거는 지금 말씀드린
타완촌의 얼굴이에요.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이 세 가지의 얼굴은요.
중국 부여 중심지에서 발견된 금동으로
만든 얼굴입니다.
물론 차이는 있어요.
그래서 아마도 이거는 용도가 달랐을 것이다.
부여의 출토된 그 금동 가면은 아마도
귀신이나 나쁜 기운을 몰아내기 위해서
험상궂게 일부러 만들었다, 그렇게 이제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얼굴의 형태는 비슷해요.
광대뼈, 눈, 상투, 낮은 코 이런 것들을
보면 실제로 고조선하고 부여의 상층부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그러한
모습이 상당히 유사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들은 이렇게 기술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실제로 그분들 만나면 이렇게 생겼을까요?
아마도 일부는 비슷하겠지만 아마 아주
똑같지는 않을 겁니다.
어쨌든 이 청동기를 만드는 자들이
바로 고조선의 상층부였죠.
그다음은 바로 무기입니다.
타완촌에서 발견된 비파형 동검과 또
비파형 동검을 만드는 거푸집입니다.
과거에 이 사회를 지배하는 데 무기가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가 없죠.
물론 언제나 사람에게 무력을 쓴 건
아니었습니다.
칼을 갖고 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그
사람에게는 상당히 권력과 힘을 주는
그러한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비파형 동검은요.
나중에 남한 일대로까지 확산되면서
우리나라 남한에 고인돌 사회로 전해집니다.
그리고 이 비파형 동검은 나아가서 무기,
힘 그리고 그 당시의 사회를 다스리는
권력으로써의 역할을 했습니다.
여기 꽤 재미있는 그림을 하나 갖고 왔습니다.
그런데 칼의 크기가 사람의 몇 배예요.
그러니까 이건 아마 단순하게 칼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칼로 형상화된
과거의 신을 묘사한 것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자신하냐고요?
똑같은 기록이 스키타이한테도 있었고
그리스에도 보면 보여요.
그런데 이거는 보통 서양 신화에서는
아레스라고 해서 군신, 군사의 신을 낡은
칼로 묘사를 해서 낡은 칼을 꽂아두고
제사를 지낸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똑같은 그러한 풍습이 동서양에 거의
동시에 보이고 있어요.
지금도 보면 우리 요즘에 무속 하시는
분들 보면 칼에다 무엇을 꽂고 하는 것도
있고 칼을 들고 많이 합니다.
그래서 이 칼은 무기로서의 힘과 함께
권력을 상징했어요.
놀랍게도 실제로 이 고인돌 앞에 동검을
꽂아두고 제사를 지냈던 흔적이 보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청동기 고조선의 길은요.
청동기를 무기로 만들어서 사방으로
확산시키고 그것이 각 지역을 다스리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조선에 발달된 청동기는
세이마 투르비노라고 해서 기원전
15세기경부터 지난 강의에 이야기했었던
전차인들이 등장했었던 그때 아주 크게
발달했었던 청동 제련 기술이 이
동아시아로 널리 확산됩니다.
그렇게 해서 이 청동기가 갖고 있었던
기술 그거는 바로 그들의 무기로
활용되면서 국가로 나아가는 하나의
기틀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이게 재밌는 게 역사 기록에는 고조선과
남한의 관련성이 되게 희미하게 나오거든요.
그런데 청동기로 보면 요령성 지역과
남한은 너무나 유사한 게 많아서 이거는
관련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뚜렷합니다.
바로 그 뚜렷한 이유는 그들 사이에
제사라고 하는 공통된 분모가 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었습니다.
이거는 아마 우리 국사 시간에 많이
배웠었던 다뉴세문경 또는 잔줄 무늬
거울이라고 하는 우리나라 청동기를
대표하는데요.
우리나라 국보에도 보면 이런 게 있었죠.
현재 숭실대 박물관에 있는 국보 다뉴세문경은요.
그 두께가 0.3m 정도 되는 선을 무려 1만
3000개나 그어서 만들었다는, 지금도 잘
복원하기가 어렵다고 할 정도로 고도의
청동기를 만드는 기술이 이 거울 하나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 거울을 어디에 썼을까요?
보통 거울 떠오르면 왜 이렇게 화장할 때
보는 거울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거울은 보면 손잡이가 위에 있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그냥 어디 옷에다 걸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옷은 보면 그냥 옷이 아니었겠죠.
샤먼들이 의식을 할 때 거울을 몸에
붙이고 하는 풍습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저도 봤는데요.
당시에는 이 색깔이 약간 퍼런색이 아니었죠.
아주 금빛 나는 색깔이었겠죠.
가장 오른쪽 밑에 있는 것은 남한,
충청남도 예산에서 나왔는데요.
나머지 위의 것들은 랴오닝, 바로
고조선의 일대에서 나왔습니다.
누가 봐도 둘의 관련성을 분명하죠.
이거는 바로 그 당시 사람이 제사를 지낼
때 쓰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재밌는
걸 발견할 수 있어요.
거울 뒤에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러한 고도의 첨단의 방법으로 이
줄무늬를 넣었단 말이죠.
어쨌든 정말 아름답고 쉽게 모방하기
어려울 정도예요.
그런데 명품 기술은 좋은데요.
옷의 붙여버리면 이 부분은 보이지가 않습니다.
거울이니까.
원래 이 거울들은 뒤를 보면 뒤가
반질반질해서 평평하게 돼 있어요.
빛을 반사하게 돼 있죠.
이 부분은 거울의 뒷면인 거예요.
거울의 뒷면에 이렇게 정말 장인 정신으로
세부적으로 유물에 문양을 넣을 필요가
있었을까요?
누가 알아줬을까요?
네, 이거는 바로 누구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청동기를 가질
수 있는 기술 그리고 가장 첨단 기술이
들어갈 때 비로소 그 제사의 힘이 발휘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었죠.
즉, 맨 처음에 이야기했었던 청동기
기술이 무기뿐 아니라 제사까지도
이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고도의 청동기 만드는 기술은
다양한 의식을 하는 데 도구도 쓰였습니다.
왼쪽은 한국에서 유명한 팔주령입니다.
8개의 방울이 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딸랑거립니다.
오른쪽에 있는 거는요.
현재 시베리아하고 중국 북방에 살고
있는 에벤크라고 하는 사람들의 샤먼이
갖고 있는 방울이에요.
얼핏 봐도 똑같죠?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둘 사이는 무려 2300년이라고
하는 그러한 차이가 있죠.
그러한 차이를 무색하게 하는 건 무엇이냐.
바로 이 청동기의 발달과 함께 생겨난
과거의 기술 그리고 무기, 제사입니다.
이 단순한 청동기라고 하나의 등장이
아니라 그 속에는 수많은 사회적 변화가 있었고요.
사실 고조선 그러면 상당히 많은 다양한
견해들이 있어요.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고조선은 환상의 국가도 아니고요.
그냥 없는 국가가 있는 걸 이룬 국가도 아닙니다.
그냥 글자 그대로 우리의 청동기 시대를
만들어 내고 우리와 함께했었던 역사의
일부분입니다.
단순하게 그렇게 국경을 긋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다스렸었던, 그들을
유지했었던 기술은 과연 어디에서 있었고
또 그 기술을 그들은 그 당시 사회에서
어떻게 이용했는가.
저는 그것이 더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유라시아에서 이어진 청동기의 길이
고조선을 통해서 한반도로 이어지는 것이
제 첫 번째 길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두 번째
길로 가 볼까요?
두 번째 길은 환동해의 길입니다.
3년 전이죠.
2017년도에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에서요.
약 3300년 전에 청동기 시대에, 가장
빠른 시장에 주거지가, 집 자리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보면요.
어떤 분들은 청동기 시대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고 또 어떤 분은 무문 토기
시대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15세기에
시작되었는데요.
실제 청동기는 기원전 9세기 정도, 8세기
정도 나오기 때문에 약 600년 정도는
붕어빵에 붕어 없다는 말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청동기 시대인데 청동기가
없는 시대라는 것이 고고학계의 정설이었습니다.
정설은 왜 있다?
정설은 바뀌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거지 한쪽에서 이렇게 돌로
만든 장신구들이 나왔는데요.
보이시죠?
저기 왼쪽에 있는 그림인데 저거는 정말
작은 청동기입니다.
저거는 거대한 청동기가 아니라 소수의
청동기를 마치 우리 이 도금하듯이 돌
구슬을 갖다 감싸는 식으로 만들어서 장식했습니다.
놀라운 게요.
보통 우리가 귀한 유물들은 무덤에서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거는 무덤이 아니라 주거지예요.
이걸 버리고 사람들이 간 겁니다.
그런데 이건 어디서 왔을까요?
연대가 3300년.
그래서 기존의 연대를 무려 500년 가까이
확 올려버린 그러한 획기적인 유물입니다.
놀라운 발견입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됩니다, 질문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까 이야기했었던 세이마 투르비노라고
하는 유라시아의 청동 기술이 한반도로
오면서 그 일부로 온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3500년 전쯤에 이미 전
유라시아, 중국 북방에서 퍼졌기 때문에
한반도까지 오는 건 자연스럽죠.
이것은 서북한 쪽, 압록강 쪽에서 올까요?
동북한, 두만강 쪽에서 올까요?
흔히들 보통 우리가 중국도 서쪽에 있고
하니까 서쪽에서 오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같이 나온 토기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 똑같아 보이죠?
오른쪽 3개는요.
어디일까요?
두만강 건너편 현재 연변 자치주인
허룽이라고 하는 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참 멀죠.
그런데 둘 사이에 주거지도 그렇고
연대도 그렇게 너무 흡사해요.
허룽은 약 3500년 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제3의
길이 나온 것입니다.
유라시아에서 한반도로 통하는 또 다른 길.
바로 동북한이라고 하는 우리가 거의
잊고 있었던 바로 그 길입니다.
저는 이걸 보통 환동해의 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동해안 따라서 이어지는 길이죠.
이 지역은 백두대간이 가로막고 있고요.
동해안은 기본적으로 남해안이나
서해안과는 어족자원이 달라요.
그리고 평야도 좁고 그 대신에 산림
자원은 풍부합니다.
그들만의 독특한, 그러한 환경 자원과
기후 환경으로 그들만의 독특한
네트워크가 나올 수 있었죠.
바로 이 좁은 해안가의 길 따라서
움직이는 바로 환동해의 길로 그들은
두만강 나아가서 극동 지역으로 해서
유라시아로 이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유라시아 철도를 다시 잇는 그러한
연구가 많이 나왔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유라시아가 바로 그 루트.
바로 그 루트는 역사적으로 이미 3300년
전부터 있었다는 것이 이 유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다음에 환동해의 두 번째 길은 바로
온돌의 길입니다.
아마 여러분 국사 시간에 잘 배웠으면
옥저나 읍루 아마 들어봤을 거예요.
옥저 그러면 암기할 때 민며느리제 나올 텐데요.
옥저는 사실 지나치게 과소평가가 된
대표적인 역사입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역사 기록에 등장할 때
이들은 고구려에 복석이 되어 있었다는
식으로 나오기 때문에 처음부터
누군가에게 복석이 되었다는 그런 거로
나오지만 고고학은 그러한 것을, 그러한
풍설을 뒤집습니다.
이들에서는요.
약 기원전 4세기에 우리나라 최초로 온돌이 등장합니다.
온돌 그러면 보통 한국이 낳은 세계,
가장 유명한 주거 문화라고 이야기하는데요.
원리는 간단하죠.
불을 때고 그 불이 그냥 굴뚝 따라
올라가면 그냥 열기가 다 새 버리니까
한번 방바닥을 돌려서 다시 나가게
함으로써 열효율을 극대화시킨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방법은요.
한반도뿐 아니고 전 세계 곳곳에서
알라스카라든지 아니면 로마에서 시도가 되었는데요.
지금 남아 있고 여전히 구들 문화는
한국을 대표하는 주거 문화가 되었죠.
그런 점에서 옥저만이 성공했다고 볼 수 있어요.
왜 나왔냐.
옥저가 있는 곳은요.
처음 발표된 곳은 두만강 일대의 넓은
평야 지대였습니다.
다 좋은데 단점이 너무 추워요.
이 지역이, 겨울에.
그래서 그런 걸 극복하기 위해서 온돌을 개발했죠.
그런데 이것이 이 온돌이요.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다음에
한반도로 내려오는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일대, 지금 우리의 삶이
증명하고 있죠.
그런데 남쪽으로만 온 게 아니었어요.
옥저의 그 온돌이 서쪽, 초원 지역까지
간 흔적이 있습니다.
어디까지 갔을까요?
바로 몽골 초원입니다.
현재 바이칼의 러시아 부랴트 자치
공화국이라고 하는 동네가 있습니다.
그 지역의 이볼가라고 하는 흉노인들의
성터가 발견되었는데요.
마치 뉴타운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온돌 주거지가 50개 이상이 발견되었어요.
그런데 다 똑같이 지었습니다.
정말 단기간 내에 지었었던 뉴타운이었죠.
이게 기원전 1세기거든요.
중국 북쪽, 중국 남쪽 이런 거 안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물론 직접 옥저인들이
갔는지 아니면 옥저나 고구려를 거쳐
갔는지 그건 나중에 더 풀어야 될
문제지만 분명한 것은 이 환동해 지역,
환동해의 그 온돌 루트는 서쪽으로
흘러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세요.
그러면 거기 있었던 온돌은 지금 어디 갔어요?
현재 쓰고 있나요?
아니요.
지금 쓰고 있지 않습니다.
흉노가 멸망하면서 이 옥저의 온돌은
같이 끝났습니다.
왜?
여기서 또 옥저인의 지혜가 나오는 건데요.
옥저가 있는 곳은 물론.
평야는 약간 좁고 그렇지만 바로 뒤에
울창한 백두대간 산림이 있습니다.
연해주 쪽은 시호테알린산맥이라고 해서
지금도 호랑이가 살고 있는 그러한 울창한 숲입니다.
그런 데가 근처에 있기 때문에 이 산림
자원은 무제한 공급될 수 있었겠죠.
그런데 이 흉노가 있는 곳은 초원 지역입니다.
한 지역에 머물면서 그 지역에 있는
땔감들을 가져오니까 조만간 곧, 모든
그러한 산림 자원들이 고갈되기 시작했었죠.
그래서 더 이상 이 지역에서는 온돌이 나오지 않고요.
나중에 몽골은 이 옥저의 온돌 이후 약
한 1000년 뒤에 다시 온돌이 등장합니다.
언제냐 하면요.
그들이 살았던 성이 친톨고이라는 성인데요.
거기에서 발해식 온돌이 나온 것.
그것이 이제 그다음 역사가 되겠죠.
그럼 더 이상 서쪽으로 안 갔을까요?
아니요.
서쪽 갔습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우리의 온돌방 같죠?
실크로드는요.
이 대상, 카라반들이 지나가는 곳곳에
그들의 임시 숙소를 마련합니다.
그것이 사라이라고 해서요.
여관이죠.
그중의 하나에서 이렇게 온돌과 비슷한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은 이러한 온돌이 그
이전에 나온 적이 전혀 없어요.
이게 약간 서기 8세기에서 10세기 사이인데요.
그래서 현재로서는 이것밖에 없다.
즉 동쪽에서 온 것밖에 없다고 해서
흉노에서 살았었던 온돌을 만들던 사람이
실크로드까지 갔을 것이다라고 하는
그러한 주장이 지금 제기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보통 초원의 길이라고 하면
무조건 서쪽에서 동쪽으로 오는 줄만
아는데 역시 추위를 다스리는 구슬방에는
역시 우리나라 게 제일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건 이제 우리나라 구한말인데.
한국에서는 이게 온돌이라는 것이 상당히
자원을 고갈시키는 그러한 단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특히 조선 시대 후기에 양반들이
많아지면서 기와집과 온돌의 발생으로
산림 자원이 고갈되었다고도 하는데요.
저는 이 옥저인들의 온돌에서 또 하나.
저는 정말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추위에
적응하지만 그들의 자연환경에 걸맞은.
그러한 발명품이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왜냐하면 다른 지역은 산림 자원
고갈이라는 심각한 문제 때문에 온돌이
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됐던 적도 있었거든요.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이 옥저의
발명품을 그동안 간과하고 있지 않았나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옥저인들의 놀라움은
끝나지 않습니다.
옥저인들의 발명품은요.
북으로 또 올라가요, 북으로.
저 표시된 데 보이시죠?
저기는 삼강 평원이라고 불려요.
왜냐하면 북쪽에 있는 흑룡강 또는
아모르강이라고 이야기하죠?
오른쪽에 우수리강.
그리고 서쪽에서 흘러가는 쑹화강.
이 세 강의 사이에 있다고 해서 삼강 평원인데요.
중국에서는 가장 동북부 끝에 있으니까
가장 추운 지역이라고 하고요.
이제까지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었던
그러한 지역입니다.
이렇습니다.
이게 11월의 모습입니다.
11월, 엄청 춥죠?
그런데 여기에서 얼마 전에 약 200개
이상의 성터가 발견이 되었어요.
그중의 하나인데 이건 봉림이라고 하는
지역에서 나온 성터인데요.
그 규모가 풍납토성의 11배의 크기입니다.
저 끝에 나무가 보이는 데가 내성 안쪽 성이고요.
오른쪽에 있는 야산은 그들의 제사 터입니다.
우리 얼마 전에 무슨 영화 뭐 있죠?
겨울왕국 나왔지 않습니까?
이게 진짜 겨울왕국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 사람들은 어디에서 온 사람일까요?
이 지역 일대는 기본적으로 말갈, 이런
사람들이 또 많이 떠오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갈은 이렇게 거대한 성터를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사람들의 집
자리에서 옥저인들의 온돌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온돌은요.
쉽게 누군가가 옆에서 어깨너머로 보고
배울 수가 있는 그러한 그 건축물이 아닙니다.
이건 구들로 연기가 지나가기 때문에
불연소 연기가 지나갈 경우.
이게 새서 나올 경우는 우리 왜
일산화탄소 중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연탄가스 먹듯이.
그런 식의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에
이건 반드시 기술자들이 와서 만들어야 됐을 건데.
이 온돌이 나와서 이건 옥저인들의 그
온돌이 북쪽까지 올라간 흔적을 보여주죠.
옥저인들의 토기는요.
다른 것들과는 다른 그들만의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이 아가리 부분이 약간 바깥으로
벌어지고요.
몸은 가름하게 하는
이게 경질무문토기라고 하는데요.
얼핏 보면 한국의 무문토기 비슷하지 않아?
그런데요.
이건 아주 단단합니다.
이런 형태의 토기는 한국에는 한강 유역.
강원도부터 시작해서 두만강 일대까지
있는데 그 범위가 지금 말한 겨울왕국,
이 지역까지 널리 확산된 것이 이것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옥저인들이 살고 있었던 이 두만강
유역은 누가 생각해도 너무나 변방의
어떠한 모습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여기서는 놀랍게도 그들은 변방이
아니었던 것이었습니다.
춥지만 그들은 추위를 이겨낼 수 있었던
그들만의 노하우가 있었죠.
그리고 그 노하우는 반대로 아주 큰
그들의 장점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북쪽으로 서쪽으로 또 우리나라 남쪽으로
널리 그들의 유산들이 펼칠 수 있는
그러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환동해의 루트는요.
이제 중국으로 갑니다.
어떻게 중국까지 가죠, 두만강 유역에서?
바로 옥저와는 또 다른 계통의
사람들이었던 읍루가 있어요, 읍루.
그러면 어렵고요.
말갈, 조선 시대 북방에 살던 오랑캐라고
하는 여진족들이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영화에서 이들이 묘사되고 있는데요.
다양한 데서 묘사되는 이 사람들의
모습은 야만적이고 난폭한 그런
사람들로만 묘사되고 있어요.
그리고 중국의 기록도 역시 이 사람들을
좀 아주 야만적이고 폭력이 강한.
또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러한 영화의
이미지와 많이 유사하죠.
그런데 말갈족들의 후손이 바로 여진족입니다.
여진족은 두 번이나 중원을 점령했죠.
처음에는 금나라, 그다음에는 청나라.
단지 야만족이었는데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고고학적으로 보면 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이 추위를 견디고 있어 왔던
옥저와는 또 다른 식의 방법으로
자신들만의 그러한
문화를 일궈 나갔던 것이었죠.
말갈의 후예들은 이렇게 언제나 가족
털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렇게 뭔가를 사냥하죠.
먹을 게 없어서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이 사냥한 것은 바로 모피입니다.
담비, 스라소니, 삵 같은 아주 귀한
그러한 모피는 금보다 더 귀한 그러한
물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냥을 해서 엄청나게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죠.
하지만 겉으로 보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이 사람들을 보면 되게 좀 뭐랄까?
미개하게 보인다는 그러한 게 있어요.
왜냐하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말갈의 선조이죠.
읍루라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사람들은
땅을 파고 산다.
그리고 땅이 깊으면 깊을수록 잘 산다고 여긴다.
그리고 심한 경우는 계단이 아홉 개씩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밖에서 보면 마치 무덤처럼 보인다.
이거는 바로 추위를 이기기 위한 그들의
지혜였습니다.
그래서 추우니까 열기가 다 새어
버리니까 땅을 파고 연기 구멍으로만
왔다 갔다 하는 거였어요, 겨울에는.
물론 이제 여름에는 또 다른 방법으로 갈 수 있겠죠.
그렇게 해서 추위를 이겨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거기에서 강력한 군사력과
사냥 방법을 익힐 수 있었죠.
그리고 그 사냥 기술로 무엇을 얻었냐?
금보다 귀한 모피를 얻었기 때문에
그리고 모피와 인삼, 수많은 그러한
귀중품들을 이들은 얻었죠.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들의 부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갑자기 먹는 게 나왔네요.
또 하나의 풍습이 바로 이 돼지기름을
바른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돼지기름을 발라서 추운데
그러한 자신들의 추위를 막는다고 되어
있어서 그것이 아주 미개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는데 알고 봤더니 그거는 그냥
돼지 껍데기를 문지르는 것이 아니라
연고처럼 만들어서 이렇게 몸에 동상이
튼 것을 막아 준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그들의 후예인 만주족들은 돼지
껍데기를 이용한 요리를 많이 먹고 있죠.
그리고 세계의 북반구 추운 지역은
이렇게 돼지 껍데기를 상당히 많이 먹습니다.
지금 제가 보여드리는 이 그림은 러시아
전통 음식인데요.
엄밀히 말하면 우크라이나죠.
쌀로라고 해서 이거 돼지비계입니다.
익히지 않았습니다.
그냥 생 비계입니다.
그걸 그냥 소금에 절여서 이렇게 빵에
얹어 먹습니다.
되게 무식해 보이죠?
심지어는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이렇게
돼지 껍데기를 튀겨서 파는 간식도 많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저희는 단순하게 돼지 기름을 바른다.
그래서 정말 미개한 사람들도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읍루인들은 정말 추운 데서 자신들의
가장 장점들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었죠.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놀라운 적응력은
이후 중원으로 펼쳐져서 중국을 정복하는
그들의 강력한 원동력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길 이제 초원의 길로 가 볼까요?
사실 초원의 길은요.
우리가 보통 신라의 것들을 많이 떠올립니다.
오늘은요.
신라가 아닌 다른 백제하고 발해에서
나와 있는 그러한 초원의 흔적들, 그리고
북방 문화의 흔적을 볼까 합니다.
지금 보이는 이 그림은요.
청주 오성에서 발견된 약 서기
2세기에서 3세기쯤 되는 초기 백제의 무덤입니다.
여기에서 백제에서는 나오지 않았었던
아주 이상한 칼이 나왔습니다.
꽤 기다란 철로 만들었고요.
손잡이는 이렇게 청동으로 되어 있었어요.
그 청동을 보니까 뭔가 이렇게
도톨도톨해서 미끄러지지 않게 했죠?
이거 어디에서 왔을까요?
중국 쑹화강하고 초원 지역 사이에 있는
그 지역에 있었던 부여 안에 있었던
유목민들이 만들던 바로 그 검이었습니다.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부여 서쪽에
흉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남긴
서차구라는 유적이 있고요.
북쪽에는 노하심이라는 유적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발견된 검들과 굉장히 이거를
가지고 온 겁니다.
부여 것들은요.
상당히 장식이 많이 남아 있는데 백제 거는 없어요.
거의 대를 이어서 가보처럼 썼던 것이
아니었는가 그런 생각을 해 봐요.
그럼 여기서 저는 이제 재밌는 그러한
이야기가 나오죠.
어디서 백제의 그 부여 유물은 나왔는가?
교류를 했을까?
그런데 교류한 것치고는 너무 이렇게 뭐라 그럴까?
좀 많이 닳아, 중고품처럼 보이죠?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것은
백제는 스스로 자신들을 부여의 후손으로
칭해 왔습니다.
그래서 특히 삼국에서는요.
부여, 고구려, 백제는
다 부여계 사람들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백제는 북방계, 부여 계통의
유물이 이제까지 나온 게 거의 없었어요.
거의 없었는데 이번에 청주 오송에서 나왔습니다.
이거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마도 백제에 내려온 사람들은 자신의
아마 그러한 정체성을 현지인들 앞에서
함부로 내세울 수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딱 두고 왕관이나 이런 것처럼
쓰고 다니거나 그러지 않고 이렇게
쓰면서 자신들만의 숨겨져 있었던 그러한
선민의식이랄까?
이런 것들을 감추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이지 않게 북쪽에서
내려왔었던 유물들이 백제에도 있었던 것이죠.
즉, 우리에게 북방의 길은 숨겨져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결코 우리는 눈에 띄게 안
나온다고 해서 무조건 없었다.
내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겠죠.
그다음에 볼 것은 발해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이거는 연해주 깊숙하게 있는
콕샤로프카라고 하는 발해의 성토입니다.
한국의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러시아와
공동 발굴을 한 곳입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북쪽에 있는 발해의 성토죠.
여기에는 발해의 중심부에서만 볼 수
있는 화려한 그러한 궁궐지 같은 건물도 나왔는데요.
이상하게도 이 거대한 건물지에는 사람이
산 흔적이 거의 없는 뭔가 좀 가장
변방인데 이것저것 다양한 문화 요소들이
많이 있는 듯한 그러한 성토였답니다.
그리고 제가 현장을 가니까 현장에서 제
친한 러시아 고고학자 지인이 저한테,
공항에 만나러 나왔죠, 공항에.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앉자마자 인욱아, 내가 지금 이 동네
발굴 40년째인데 나 이런 거 처음 봐,
하면서 이상한 유물이 있다고 저한테 좀 가자고.
그런데 여기서 공항에서 한 7시간 동안
차 타고 가는데요.
너무 궁금했거든요.
오른쪽이 바로 여기 토기예요.
그런데 저도 봐도 이상하게 이건 전혀 본 적이 없거든요.
연해주 일대에서는.
그리고 이 토기가 나온 유적이 왼쪽인데
이게 무덤인데요.
무덤이 발해 무덤하고 많이 달라요.
무덤도 아니고 제사 터도 아니고 되게
하여튼 정체불명이라고 했는데.
그날 밤 저희가 현장 숙소에서 밤새 제
노트북을 켜고 자료를 검색하다,
찾아보니까 나왔습니다.
아까 저 토기는요, 발해 시대 때 몽골에
있었던 위구르 제국, 지금의 우리
신장성의 위구르인들 있죠?
그 위구르인들의 원래 조상들이 되는
분들인데, 위구르 제국의 토기였어요.
그리고 아까 봤었던 그 사각형의 그러한
무덤과 제단은 위구르 사람들이 주로
만들던 것과 상당히 유사했습니다.
그러니까 발해하고 위구르라니.
이게 어떻게 이렇게 나올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조합을 고민해봤는데 실제로
유라시아 지도를 놓고 보면 너무 당연해요.
발해 자연스럽게 둘은 이어지지 않는 게
더 이해가 안 되는 것이죠.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하나의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바로 환동해를 대표하는 나라였던 발해는
우리는 보통 한반도, 신라 내지는 이렇게
한국사냐 중국사냐 이런 얘기만 하고
있었지만 유라시아에서 바라보면 발해
같은 입장에서는 유라시아 교류를 안
하는 게 더 이상한 그러한 위치가 된 것이죠.
또 다른 재미있는 발해에는 기독교의
증거가 나왔습니다.
물론 이 기독교는 현재의 기독교가
아니라 네스토리우스라고 해서
에페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고 그 일파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실크로드를 따라서
동쪽으로 옮겨왔었던 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둔황에서 발견된.
그런데 이 사람들은 십자가를 눈에 띄게
그리지 않고 이렇게 불화, 그러니까
불교처럼 해놓고 아주 안 보이게 살짝
십자가를 넣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어떠한
힘을 감추었는데 발해에 아브리코스라고
하는 그 절터에서 이러한
네스토리우스교, 아마 중국말로는
경교라고 하는데요.
경교의 십자가가 나왔어요.
이 십자가는 일자로 되지 않고 바깥으로
갈수록 벌어집니다.
이게 시리아형 십자가라고도 하는데요.
그게 바로 이 경교 십자가의 특징이죠.
이것이 발해에 나오니까 그러면 이것은
너무 먼 것 아니냐, 믿기 어렵지 않냐 하는데요.
그 당시의 상황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당나라 때 경교는 공인화 되었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사람이 살았었어요.
그리고 그 경교인들의 일파는 자유롭게
당나라 일대로 갔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왼쪽에 보이는 십자가는
현재 북경 일대에서 발견된 십자가였어요.
중간에 경교인들은 크게 탄압받았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다시 당나라도 경교를
탄압하면서 그 일파가 몽골로도 갑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것은 몽골에 있는
네스토리우스교, 경교의 흔적입니다.
그렇다면 동쪽으로 어디까지
갔을까요?
그리고 현재에 랴오양 일대에서 요나라
시절까지도 그 네스토리우스교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쯤 되면 발해에 경교인들이 간 것이
결코 어색하거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만약에 발해에 경교가 안 갔다면 발해만
안 간 것이다.
몽골도 가고 중국 전역 다 갔는데.
그럼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저희는 가끔씩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앞뒤 맥락을 보지도 않고
아니 그거 너무 억측이 아니냐고
하는데요.
먼저 전체 유라시아 판도를 놓고 보면
우리가 얼마나 그러한 다양한 교류의
흔적들을 외면하고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그러한 예가 됩니다.
또 하나의 증거는 바로 발해의 음악이었습니다.
발해가 음악이 되게 유명했었다고 하죠.
그래서 일본이나 중국 일대에서도 널리
유행해서 금나라 때는 발해 음악을
금지할 정도였다고 하고.
그런데 그 실체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왼쪽에 보이는 것은
핀셋처럼 보이죠?
이것은 한국말로 구금 또는 영어로 주즈
하프라고 하는데요.
바르간이라고도 하고 러시아 말로.
이렇게 손으로 쳐서 하는 악기입니다.
즉 기타는 공명통이 있지 않습니까?
초원에서는 간단하게 치는 것만 있고요.
공명통을 입이 역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입에 끼고 철을 치면 입에서
울리면서 그 목소리를 내는 것이죠.
이것이 발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삼국이나 우리나라
어디에도 발견된 적이 없었던 바로
최초의 초원의 악기 구금인 셈이죠.
우리는 구금 대신에 버들피리 같을 걸 불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은.
적어도 이 한반도에서 나온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끝이 아니었죠.
나중에 이 구금은 일본으로 갑니다.
그래서 오른쪽 밑에 있는 그림은 일본의
현재 사이타마 근처에서 발견되고 있는
서기 10세기에 발견된 구금입니다.
아마 이 발해의 음악은 일본까지도 널리
전해졌던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역사로만 보고 있었던 그러한
우리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걸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은 북방과의 관련성이 있다,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렇게 하나씩
구체화해서 풀어본 적 없습니다.
하나하나 볼 때마다 우리의 역사는
다르게 보입니다.
남한에 갇힌 채로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살아왔었죠.
지난 70년간 한국은 분단 되어왔었고 또
개방이 잠깐 되었지만 지금 다시 또 여러
가지 세계적인 어떠한 팬데믹으로 닫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시대라도 우리는
유라시아와 끊긴 적이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었던
바로 그때가 우리의 역사와 경제가 널리
부흥하던 바로 그러한 시점입니다.
이 사진은 두만강 철교입니다.
여기 중국과 북한 오른쪽은 러시아
나아가서 동해가 있는데요.
모든 사람이 갇혀있어도 우리는 다시
한번 이 유라시아와의 도약를 꿈꾸면서
준비할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유라시아에서 바라보는 한국사.
그것은 어느 책에도 없고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정말로 잊힐 수 없는
우리의 소중한 뒷모습들을 밝혀준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더 여러분들과 함께
공부하고 함께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떠한 특정한 것에서만 집중적으로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넓게 보면 볼수록
우리의 역사는 좀 더 보편적인 유라시아
역사와 네트워크와 연결됩니다.
그러면 그동안에 풀리지 않았었던 수많은
연결고리가 더 자세하고 뚜렷하게 보입니다.
역설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확신합니다.
넓게 넓게 볼수록 우리는 더 자세하게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최고의 강연 최강
일교시 강인욱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대한민국 최고의 강연,
최강 1교시에서 강연 맡은 고고학자 강인욱입니다.
지난 강연에서는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다섯 가지의 말에 관련된 유물로써
그 역사 정리했습니다.
우리 이 장에서는요.
조금 더 우리한테 가깝게 와서요.
이 유라시아 북방 대륙과 한반도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한번 몇 가지
유물을 들어서 구체적으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강연 주제는 잊혀진 길, 유라시아 로드입니다.
여러분은 보통 북방이라면 어떤 것이
떠오릅니까?
아마 요즘에는요.
유라시아나 실크로드와 한국을 잇는
그러한 일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그 북방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물론 지역적으로 본다면 북방이라
한다는 것은 한국의 북쪽에 있다는 걸 의미하죠?
그러면 왜 동서남북도 아니고, 북쪽만 중요하냐.
북쪽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반도는
3면이 바다입니다.
그래서 이 대륙과 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북쪽밖에 없기 때문에
저희에게 이 북방이라는 것은 단순한
그러한 방위적인 것이 아니라 이 거대한
대륙과 소통을 하는 그러한 네트워크의 통로입니다.
또한 이 북방이라는 지역은요.
결코 하나의 지역이 아닙니다.
예컨대, 시베리아라고 하는 지역만 해도요.
남한의 120배예요.
그러니까 그 안에는 다양한 것이 다 있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북방이라는 거는 진짜
다양한 그러한 그 사람들 지리 환경들을
다 무시하고 그냥 어렴풋하게 어디에서
왔어라고 하니까 북방 루트 이야기해도
잘 감이 오지 않는 그러한 것을 많이 볼 수 있거든요.
전 그래서 오늘 조금 더 그 루트를
구체적으로 한번 볼까 해요.
크게 한국과 이 북방 대륙과 이어지는
그 루트는 세 가지 루트로 나눌 수 있어요.
바로 첫 번째 요동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가 한반도에 영향을 준 고조선
그리고 바로 고조선과 같이 이어진 그 길입니다.
두 번째는 역사로써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요.
동해안에 따라서 이 북쪽으로 두만강
나아가서 연해주하고 이 극동 지역으로
이어지는 환동해의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유라시아 초원
대륙과 만주를 이어서 한반도로 이어지는
이 초원의 길.
이 강의는요.
이 세 가지의 루트를 각각 따로따로
설명하겠습니다.
각각 다르고 각각 다른 지리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었던 북방이라고 하는 그러한 관념.
그것을 한번 제 강연에서 하나씩 하나씩
풀어서 다시 한번 음미하는 그러한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고조선의 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이상한 그림이 나왔어요.
이 머리는 상투를 틀었고요.
눈은 작고, 코 납작하고, 광대뼈는 튀어
나온 게 우리 동네에서 약간 개구쟁이
모습 보는 것도 같고요.
하여튼 우리한테는 그렇게 낯설지는 않은
그러한 모습인데요.
이 손바닥만 한 이 유물에서 제 첫 번째
길이 시작됩니다.
이 유물은 중국 랴오닝성 랴오양시
근처에 있는 타완촌이라는 마을에서
우연히 농부가 발견한 그 유물이에요.
이것과 함께 비파형 동검 등 다양한
유물이 나왔는데요.
처음에 이 유물이 나올 때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청동이 아니라 돌이었거든요.
그리고 이 유물의 용도는 여기다 청동
물을 부어서 만드는 청동 제품을 만드는
거푸집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여기서 나왔어요.
그 거푸집을 뒤집으니까 그 뒤에 이렇게
사람 그림이 얼굴 2개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얼굴은요.
우리가 보통 쓰다가 이렇게 마치 비누
조각하듯이 판 것이 아니라요.
이 얼굴을 부분만 솟아 있고 나머지가 다
깎여 있는 형태예요.
이게 뭐냐 하면 좀 쓰다가 장난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작정하고 사람의 얼굴을
새긴 것입니다.
게다가 이거는 동검이 있고 상당히
유력한 사람의 무덤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장난감이거나 절대 그렇지가 않겠죠.
이 거푸집을 무덤에 넣었었던 것은 바로
그 주인공이 과거에 청동기를 만들던
바로 청동기 장인이었단 뜻입니다.
청동 기술이라고 하는 고대의
하이테크놀로지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죠.
바로 이 고조선 루트는 이 거대한
흐름에서 청동기를 만드는 그러한 장인들.
그리고 그들은 그 당시 사회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의 지금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거.
여기에서 우리는 이 고조선의 루트라는
것이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흐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거는 지금 말씀드린 타완촌 바로 옆에
있는 중국 선양시에 있는 정자와쯔라고
하는 유적인데요.
약 2500년 전에 발견된 가장 대표적인
초기 고조선의 대형 귀족 무덤입니다.
이 작은 무덤 안에는요.
이 거울만 무려 6개가 발견되었고요.
그 위에 말 뼈, 그다음에 다양한 무기
이런 것들이 엄청나게 많이 묻혀 있었습니다.
왜 청동기를 썼던 기술이 과거에 중요했을까요?
바로 청동기 시대에는 이 청동기로
다양한 무기와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고
그것을 소유하는 자.
바로 그 사람이 그 시대를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청동기를 만드는 그 기술을
가진 자, 그 테크놀로지를 가진 자는
바로 그 당시의 권력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죠.
그렇다면 고조선에서 이 청동기를 만들던
사람들은 어디에서 처음 왔을까요?
바로 그 사람들에 대한 단서는 더 서쪽
요령성의 서쪽인 랴오시라고 하는
지역에서 십이대영자라고 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더 북쪽으로는 현재의 내몽골
츠펑시 근처에는 아주 발달한 청동기 문화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 청동기 문화는요.
그 지역이 아주 청동 광산이 풍부합니다.
그러니까 그 내몽골에서 초원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루트가 있거든요.
그 루트를 따라서 초원에 발달한
청동기가 오고 이 요령성 서쪽에서
발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얼굴은 지금 보시는
바와 같이 눈과 코가 작고 입이 다물어져
있어서 지금 말씀드린 타완촌의
유물과 상당히 유사해요.
아마도 이 청동기를 만드는 장인들은
이렇게 소규모로 계속 동쪽으로 이동을
하면서 그들의 기술을 전파하고 또
자신의 기술을 좀 더 높게 살 수 있는 그
사람들에게 점진적으로 확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청동기가
나온다 그러면 이상한 게 나오면 침략해
온 것이 아니었겠느냐.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침략이 아니라 청동기를 만든 사람들이.
요즘도 보면 우리 왜 반도체 같은 그런
고급 기술 가지신 분들, 스카우트
많이 해 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실제 유라시아 초원 일대에서는
발달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이동을 해요.
이동을 하고 그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거푸집하고 청동기를 만드는 것을 몰래
가지고 가죠.
한마디로 이게 노하우를 상징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신들이 청동기를 만들 때는
그냥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제사도 지내고 또 그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썼었던 거푸집이나 청동 국자
이런 것들을 다 함께 모여서 같이
묻어줬던 전통이 있었습니다.
타완촌도 그러한 전통의 일환이죠.
그렇다면 여기에 거푸집에 그렇게 힘들게
도드라지게 얼굴을 새겼다.
그거는 아마도 이 청동기를 만들던
그들이 믿었던 신이나 조상들, 아마
그러한 제사를 지냈었을 때 썼던 그러한
것인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얼굴은 바로 고조선에서 가장
높은 계급의 사람의 얼굴을 대표하는
그러한 모습으로 변화했습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끝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 더 동쪽으로 가겠습니다.
현재의 중국 쑹화강 중류에 있는
부여.
현재의 중국 길림시 일대의 그 중심지가
있었습니다.
가장 왼쪽에 있는 거는 지금 말씀드린
타완촌의 얼굴이에요.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이 세 가지의 얼굴은요.
중국 부여 중심지에서 발견된 금동으로
만든 얼굴입니다.
물론 차이는 있어요.
그래서 아마도 이거는 용도가 달랐을 것이다.
부여의 출토된 그 금동 가면은 아마도
귀신이나 나쁜 기운을 몰아내기 위해서
험상궂게 일부러 만들었다, 그렇게 이제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얼굴의 형태는 비슷해요.
광대뼈, 눈, 상투, 낮은 코 이런 것들을
보면 실제로 고조선하고 부여의 상층부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그러한
모습이 상당히 유사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들은 이렇게 기술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실제로 그분들 만나면 이렇게 생겼을까요?
아마도 일부는 비슷하겠지만 아마 아주
똑같지는 않을 겁니다.
어쨌든 이 청동기를 만드는 자들이
바로 고조선의 상층부였죠.
그다음은 바로 무기입니다.
타완촌에서 발견된 비파형 동검과 또
비파형 동검을 만드는 거푸집입니다.
과거에 이 사회를 지배하는 데 무기가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가 없죠.
물론 언제나 사람에게 무력을 쓴 건
아니었습니다.
칼을 갖고 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그
사람에게는 상당히 권력과 힘을 주는
그러한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비파형 동검은요.
나중에 남한 일대로까지 확산되면서
우리나라 남한에 고인돌 사회로 전해집니다.
그리고 이 비파형 동검은 나아가서 무기,
힘 그리고 그 당시의 사회를 다스리는
권력으로써의 역할을 했습니다.
여기 꽤 재미있는 그림을 하나 갖고 왔습니다.
그런데 칼의 크기가 사람의 몇 배예요.
그러니까 이건 아마 단순하게 칼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칼로 형상화된
과거의 신을 묘사한 것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자신하냐고요?
똑같은 기록이 스키타이한테도 있었고
그리스에도 보면 보여요.
그런데 이거는 보통 서양 신화에서는
아레스라고 해서 군신, 군사의 신을 낡은
칼로 묘사를 해서 낡은 칼을 꽂아두고
제사를 지낸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똑같은 그러한 풍습이 동서양에 거의
동시에 보이고 있어요.
지금도 보면 우리 요즘에 무속 하시는
분들 보면 칼에다 무엇을 꽂고 하는 것도
있고 칼을 들고 많이 합니다.
그래서 이 칼은 무기로서의 힘과 함께
권력을 상징했어요.
놀랍게도 실제로 이 고인돌 앞에 동검을
꽂아두고 제사를 지냈던 흔적이 보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청동기 고조선의 길은요.
청동기를 무기로 만들어서 사방으로
확산시키고 그것이 각 지역을 다스리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조선에 발달된 청동기는
세이마 투르비노라고 해서 기원전
15세기경부터 지난 강의에 이야기했었던
전차인들이 등장했었던 그때 아주 크게
발달했었던 청동 제련 기술이 이
동아시아로 널리 확산됩니다.
그렇게 해서 이 청동기가 갖고 있었던
기술 그거는 바로 그들의 무기로
활용되면서 국가로 나아가는 하나의
기틀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이게 재밌는 게 역사 기록에는 고조선과
남한의 관련성이 되게 희미하게 나오거든요.
그런데 청동기로 보면 요령성 지역과
남한은 너무나 유사한 게 많아서 이거는
관련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뚜렷합니다.
바로 그 뚜렷한 이유는 그들 사이에
제사라고 하는 공통된 분모가 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었습니다.
이거는 아마 우리 국사 시간에 많이
배웠었던 다뉴세문경 또는 잔줄 무늬
거울이라고 하는 우리나라 청동기를
대표하는데요.
우리나라 국보에도 보면 이런 게 있었죠.
현재 숭실대 박물관에 있는 국보 다뉴세문경은요.
그 두께가 0.3m 정도 되는 선을 무려 1만
3000개나 그어서 만들었다는, 지금도 잘
복원하기가 어렵다고 할 정도로 고도의
청동기를 만드는 기술이 이 거울 하나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 거울을 어디에 썼을까요?
보통 거울 떠오르면 왜 이렇게 화장할 때
보는 거울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거울은 보면 손잡이가 위에 있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그냥 어디 옷에다 걸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옷은 보면 그냥 옷이 아니었겠죠.
샤먼들이 의식을 할 때 거울을 몸에
붙이고 하는 풍습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저도 봤는데요.
당시에는 이 색깔이 약간 퍼런색이 아니었죠.
아주 금빛 나는 색깔이었겠죠.
가장 오른쪽 밑에 있는 것은 남한,
충청남도 예산에서 나왔는데요.
나머지 위의 것들은 랴오닝, 바로
고조선의 일대에서 나왔습니다.
누가 봐도 둘의 관련성을 분명하죠.
이거는 바로 그 당시 사람이 제사를 지낼
때 쓰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재밌는
걸 발견할 수 있어요.
거울 뒤에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러한 고도의 첨단의 방법으로 이
줄무늬를 넣었단 말이죠.
어쨌든 정말 아름답고 쉽게 모방하기
어려울 정도예요.
그런데 명품 기술은 좋은데요.
옷의 붙여버리면 이 부분은 보이지가 않습니다.
거울이니까.
원래 이 거울들은 뒤를 보면 뒤가
반질반질해서 평평하게 돼 있어요.
빛을 반사하게 돼 있죠.
이 부분은 거울의 뒷면인 거예요.
거울의 뒷면에 이렇게 정말 장인 정신으로
세부적으로 유물에 문양을 넣을 필요가
있었을까요?
누가 알아줬을까요?
네, 이거는 바로 누구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청동기를 가질
수 있는 기술 그리고 가장 첨단 기술이
들어갈 때 비로소 그 제사의 힘이 발휘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었죠.
즉, 맨 처음에 이야기했었던 청동기
기술이 무기뿐 아니라 제사까지도
이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고도의 청동기 만드는 기술은
다양한 의식을 하는 데 도구도 쓰였습니다.
왼쪽은 한국에서 유명한 팔주령입니다.
8개의 방울이 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딸랑거립니다.
오른쪽에 있는 거는요.
현재 시베리아하고 중국 북방에 살고
있는 에벤크라고 하는 사람들의 샤먼이
갖고 있는 방울이에요.
얼핏 봐도 똑같죠?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둘 사이는 무려 2300년이라고
하는 그러한 차이가 있죠.
그러한 차이를 무색하게 하는 건 무엇이냐.
바로 이 청동기의 발달과 함께 생겨난
과거의 기술 그리고 무기, 제사입니다.
이 단순한 청동기라고 하나의 등장이
아니라 그 속에는 수많은 사회적 변화가 있었고요.
사실 고조선 그러면 상당히 많은 다양한
견해들이 있어요.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고조선은 환상의 국가도 아니고요.
그냥 없는 국가가 있는 걸 이룬 국가도 아닙니다.
그냥 글자 그대로 우리의 청동기 시대를
만들어 내고 우리와 함께했었던 역사의
일부분입니다.
단순하게 그렇게 국경을 긋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다스렸었던, 그들을
유지했었던 기술은 과연 어디에서 있었고
또 그 기술을 그들은 그 당시 사회에서
어떻게 이용했는가.
저는 그것이 더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유라시아에서 이어진 청동기의 길이
고조선을 통해서 한반도로 이어지는 것이
제 첫 번째 길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두 번째
길로 가 볼까요?
두 번째 길은 환동해의 길입니다.
3년 전이죠.
2017년도에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에서요.
약 3300년 전에 청동기 시대에, 가장
빠른 시장에 주거지가, 집 자리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보면요.
어떤 분들은 청동기 시대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고 또 어떤 분은 무문 토기
시대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15세기에
시작되었는데요.
실제 청동기는 기원전 9세기 정도, 8세기
정도 나오기 때문에 약 600년 정도는
붕어빵에 붕어 없다는 말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청동기 시대인데 청동기가
없는 시대라는 것이 고고학계의 정설이었습니다.
정설은 왜 있다?
정설은 바뀌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거지 한쪽에서 이렇게 돌로
만든 장신구들이 나왔는데요.
보이시죠?
저기 왼쪽에 있는 그림인데 저거는 정말
작은 청동기입니다.
저거는 거대한 청동기가 아니라 소수의
청동기를 마치 우리 이 도금하듯이 돌
구슬을 갖다 감싸는 식으로 만들어서 장식했습니다.
놀라운 게요.
보통 우리가 귀한 유물들은 무덤에서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거는 무덤이 아니라 주거지예요.
이걸 버리고 사람들이 간 겁니다.
그런데 이건 어디서 왔을까요?
연대가 3300년.
그래서 기존의 연대를 무려 500년 가까이
확 올려버린 그러한 획기적인 유물입니다.
놀라운 발견입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됩니다, 질문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까 이야기했었던 세이마 투르비노라고
하는 유라시아의 청동 기술이 한반도로
오면서 그 일부로 온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3500년 전쯤에 이미 전
유라시아, 중국 북방에서 퍼졌기 때문에
한반도까지 오는 건 자연스럽죠.
이것은 서북한 쪽, 압록강 쪽에서 올까요?
동북한, 두만강 쪽에서 올까요?
흔히들 보통 우리가 중국도 서쪽에 있고
하니까 서쪽에서 오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같이 나온 토기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 똑같아 보이죠?
오른쪽 3개는요.
어디일까요?
두만강 건너편 현재 연변 자치주인
허룽이라고 하는 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참 멀죠.
그런데 둘 사이에 주거지도 그렇고
연대도 그렇게 너무 흡사해요.
허룽은 약 3500년 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제3의
길이 나온 것입니다.
유라시아에서 한반도로 통하는 또 다른 길.
바로 동북한이라고 하는 우리가 거의
잊고 있었던 바로 그 길입니다.
저는 이걸 보통 환동해의 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동해안 따라서 이어지는 길이죠.
이 지역은 백두대간이 가로막고 있고요.
동해안은 기본적으로 남해안이나
서해안과는 어족자원이 달라요.
그리고 평야도 좁고 그 대신에 산림
자원은 풍부합니다.
그들만의 독특한, 그러한 환경 자원과
기후 환경으로 그들만의 독특한
네트워크가 나올 수 있었죠.
바로 이 좁은 해안가의 길 따라서
움직이는 바로 환동해의 길로 그들은
두만강 나아가서 극동 지역으로 해서
유라시아로 이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유라시아 철도를 다시 잇는 그러한
연구가 많이 나왔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유라시아가 바로 그 루트.
바로 그 루트는 역사적으로 이미 3300년
전부터 있었다는 것이 이 유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다음에 환동해의 두 번째 길은 바로
온돌의 길입니다.
아마 여러분 국사 시간에 잘 배웠으면
옥저나 읍루 아마 들어봤을 거예요.
옥저 그러면 암기할 때 민며느리제 나올 텐데요.
옥저는 사실 지나치게 과소평가가 된
대표적인 역사입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역사 기록에 등장할 때
이들은 고구려에 복석이 되어 있었다는
식으로 나오기 때문에 처음부터
누군가에게 복석이 되었다는 그런 거로
나오지만 고고학은 그러한 것을, 그러한
풍설을 뒤집습니다.
이들에서는요.
약 기원전 4세기에 우리나라 최초로 온돌이 등장합니다.
온돌 그러면 보통 한국이 낳은 세계,
가장 유명한 주거 문화라고 이야기하는데요.
원리는 간단하죠.
불을 때고 그 불이 그냥 굴뚝 따라
올라가면 그냥 열기가 다 새 버리니까
한번 방바닥을 돌려서 다시 나가게
함으로써 열효율을 극대화시킨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방법은요.
한반도뿐 아니고 전 세계 곳곳에서
알라스카라든지 아니면 로마에서 시도가 되었는데요.
지금 남아 있고 여전히 구들 문화는
한국을 대표하는 주거 문화가 되었죠.
그런 점에서 옥저만이 성공했다고 볼 수 있어요.
왜 나왔냐.
옥저가 있는 곳은요.
처음 발표된 곳은 두만강 일대의 넓은
평야 지대였습니다.
다 좋은데 단점이 너무 추워요.
이 지역이, 겨울에.
그래서 그런 걸 극복하기 위해서 온돌을 개발했죠.
그런데 이것이 이 온돌이요.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다음에
한반도로 내려오는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일대, 지금 우리의 삶이
증명하고 있죠.
그런데 남쪽으로만 온 게 아니었어요.
옥저의 그 온돌이 서쪽, 초원 지역까지
간 흔적이 있습니다.
어디까지 갔을까요?
바로 몽골 초원입니다.
현재 바이칼의 러시아 부랴트 자치
공화국이라고 하는 동네가 있습니다.
그 지역의 이볼가라고 하는 흉노인들의
성터가 발견되었는데요.
마치 뉴타운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온돌 주거지가 50개 이상이 발견되었어요.
그런데 다 똑같이 지었습니다.
정말 단기간 내에 지었었던 뉴타운이었죠.
이게 기원전 1세기거든요.
중국 북쪽, 중국 남쪽 이런 거 안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물론 직접 옥저인들이
갔는지 아니면 옥저나 고구려를 거쳐
갔는지 그건 나중에 더 풀어야 될
문제지만 분명한 것은 이 환동해 지역,
환동해의 그 온돌 루트는 서쪽으로
흘러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세요.
그러면 거기 있었던 온돌은 지금 어디 갔어요?
현재 쓰고 있나요?
아니요.
지금 쓰고 있지 않습니다.
흉노가 멸망하면서 이 옥저의 온돌은
같이 끝났습니다.
왜?
여기서 또 옥저인의 지혜가 나오는 건데요.
옥저가 있는 곳은 물론.
평야는 약간 좁고 그렇지만 바로 뒤에
울창한 백두대간 산림이 있습니다.
연해주 쪽은 시호테알린산맥이라고 해서
지금도 호랑이가 살고 있는 그러한 울창한 숲입니다.
그런 데가 근처에 있기 때문에 이 산림
자원은 무제한 공급될 수 있었겠죠.
그런데 이 흉노가 있는 곳은 초원 지역입니다.
한 지역에 머물면서 그 지역에 있는
땔감들을 가져오니까 조만간 곧, 모든
그러한 산림 자원들이 고갈되기 시작했었죠.
그래서 더 이상 이 지역에서는 온돌이 나오지 않고요.
나중에 몽골은 이 옥저의 온돌 이후 약
한 1000년 뒤에 다시 온돌이 등장합니다.
언제냐 하면요.
그들이 살았던 성이 친톨고이라는 성인데요.
거기에서 발해식 온돌이 나온 것.
그것이 이제 그다음 역사가 되겠죠.
그럼 더 이상 서쪽으로 안 갔을까요?
아니요.
서쪽 갔습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우리의 온돌방 같죠?
실크로드는요.
이 대상, 카라반들이 지나가는 곳곳에
그들의 임시 숙소를 마련합니다.
그것이 사라이라고 해서요.
여관이죠.
그중의 하나에서 이렇게 온돌과 비슷한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은 이러한 온돌이 그
이전에 나온 적이 전혀 없어요.
이게 약간 서기 8세기에서 10세기 사이인데요.
그래서 현재로서는 이것밖에 없다.
즉 동쪽에서 온 것밖에 없다고 해서
흉노에서 살았었던 온돌을 만들던 사람이
실크로드까지 갔을 것이다라고 하는
그러한 주장이 지금 제기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보통 초원의 길이라고 하면
무조건 서쪽에서 동쪽으로 오는 줄만
아는데 역시 추위를 다스리는 구슬방에는
역시 우리나라 게 제일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건 이제 우리나라 구한말인데.
한국에서는 이게 온돌이라는 것이 상당히
자원을 고갈시키는 그러한 단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특히 조선 시대 후기에 양반들이
많아지면서 기와집과 온돌의 발생으로
산림 자원이 고갈되었다고도 하는데요.
저는 이 옥저인들의 온돌에서 또 하나.
저는 정말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추위에
적응하지만 그들의 자연환경에 걸맞은.
그러한 발명품이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왜냐하면 다른 지역은 산림 자원
고갈이라는 심각한 문제 때문에 온돌이
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됐던 적도 있었거든요.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이 옥저의
발명품을 그동안 간과하고 있지 않았나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옥저인들의 놀라움은
끝나지 않습니다.
옥저인들의 발명품은요.
북으로 또 올라가요, 북으로.
저 표시된 데 보이시죠?
저기는 삼강 평원이라고 불려요.
왜냐하면 북쪽에 있는 흑룡강 또는
아모르강이라고 이야기하죠?
오른쪽에 우수리강.
그리고 서쪽에서 흘러가는 쑹화강.
이 세 강의 사이에 있다고 해서 삼강 평원인데요.
중국에서는 가장 동북부 끝에 있으니까
가장 추운 지역이라고 하고요.
이제까지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었던
그러한 지역입니다.
이렇습니다.
이게 11월의 모습입니다.
11월, 엄청 춥죠?
그런데 여기에서 얼마 전에 약 200개
이상의 성터가 발견이 되었어요.
그중의 하나인데 이건 봉림이라고 하는
지역에서 나온 성터인데요.
그 규모가 풍납토성의 11배의 크기입니다.
저 끝에 나무가 보이는 데가 내성 안쪽 성이고요.
오른쪽에 있는 야산은 그들의 제사 터입니다.
우리 얼마 전에 무슨 영화 뭐 있죠?
겨울왕국 나왔지 않습니까?
이게 진짜 겨울왕국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 사람들은 어디에서 온 사람일까요?
이 지역 일대는 기본적으로 말갈, 이런
사람들이 또 많이 떠오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갈은 이렇게 거대한 성터를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사람들의 집
자리에서 옥저인들의 온돌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온돌은요.
쉽게 누군가가 옆에서 어깨너머로 보고
배울 수가 있는 그러한 그 건축물이 아닙니다.
이건 구들로 연기가 지나가기 때문에
불연소 연기가 지나갈 경우.
이게 새서 나올 경우는 우리 왜
일산화탄소 중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연탄가스 먹듯이.
그런 식의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에
이건 반드시 기술자들이 와서 만들어야 됐을 건데.
이 온돌이 나와서 이건 옥저인들의 그
온돌이 북쪽까지 올라간 흔적을 보여주죠.
옥저인들의 토기는요.
다른 것들과는 다른 그들만의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이 아가리 부분이 약간 바깥으로
벌어지고요.
몸은 가름하게 하는
이게 경질무문토기라고 하는데요.
얼핏 보면 한국의 무문토기 비슷하지 않아?
그런데요.
이건 아주 단단합니다.
이런 형태의 토기는 한국에는 한강 유역.
강원도부터 시작해서 두만강 일대까지
있는데 그 범위가 지금 말한 겨울왕국,
이 지역까지 널리 확산된 것이 이것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옥저인들이 살고 있었던 이 두만강
유역은 누가 생각해도 너무나 변방의
어떠한 모습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여기서는 놀랍게도 그들은 변방이
아니었던 것이었습니다.
춥지만 그들은 추위를 이겨낼 수 있었던
그들만의 노하우가 있었죠.
그리고 그 노하우는 반대로 아주 큰
그들의 장점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북쪽으로 서쪽으로 또 우리나라 남쪽으로
널리 그들의 유산들이 펼칠 수 있는
그러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환동해의 루트는요.
이제 중국으로 갑니다.
어떻게 중국까지 가죠, 두만강 유역에서?
바로 옥저와는 또 다른 계통의
사람들이었던 읍루가 있어요, 읍루.
그러면 어렵고요.
말갈, 조선 시대 북방에 살던 오랑캐라고
하는 여진족들이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영화에서 이들이 묘사되고 있는데요.
다양한 데서 묘사되는 이 사람들의
모습은 야만적이고 난폭한 그런
사람들로만 묘사되고 있어요.
그리고 중국의 기록도 역시 이 사람들을
좀 아주 야만적이고 폭력이 강한.
또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러한 영화의
이미지와 많이 유사하죠.
그런데 말갈족들의 후손이 바로 여진족입니다.
여진족은 두 번이나 중원을 점령했죠.
처음에는 금나라, 그다음에는 청나라.
단지 야만족이었는데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고고학적으로 보면 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이 추위를 견디고 있어 왔던
옥저와는 또 다른 식의 방법으로
자신들만의 그러한
문화를 일궈 나갔던 것이었죠.
말갈의 후예들은 이렇게 언제나 가족
털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렇게 뭔가를 사냥하죠.
먹을 게 없어서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이 사냥한 것은 바로 모피입니다.
담비, 스라소니, 삵 같은 아주 귀한
그러한 모피는 금보다 더 귀한 그러한
물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냥을 해서 엄청나게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죠.
하지만 겉으로 보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이 사람들을 보면 되게 좀 뭐랄까?
미개하게 보인다는 그러한 게 있어요.
왜냐하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말갈의 선조이죠.
읍루라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사람들은
땅을 파고 산다.
그리고 땅이 깊으면 깊을수록 잘 산다고 여긴다.
그리고 심한 경우는 계단이 아홉 개씩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밖에서 보면 마치 무덤처럼 보인다.
이거는 바로 추위를 이기기 위한 그들의
지혜였습니다.
그래서 추우니까 열기가 다 새어
버리니까 땅을 파고 연기 구멍으로만
왔다 갔다 하는 거였어요, 겨울에는.
물론 이제 여름에는 또 다른 방법으로 갈 수 있겠죠.
그렇게 해서 추위를 이겨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거기에서 강력한 군사력과
사냥 방법을 익힐 수 있었죠.
그리고 그 사냥 기술로 무엇을 얻었냐?
금보다 귀한 모피를 얻었기 때문에
그리고 모피와 인삼, 수많은 그러한
귀중품들을 이들은 얻었죠.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들의 부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갑자기 먹는 게 나왔네요.
또 하나의 풍습이 바로 이 돼지기름을
바른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돼지기름을 발라서 추운데
그러한 자신들의 추위를 막는다고 되어
있어서 그것이 아주 미개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는데 알고 봤더니 그거는 그냥
돼지 껍데기를 문지르는 것이 아니라
연고처럼 만들어서 이렇게 몸에 동상이
튼 것을 막아 준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그들의 후예인 만주족들은 돼지
껍데기를 이용한 요리를 많이 먹고 있죠.
그리고 세계의 북반구 추운 지역은
이렇게 돼지 껍데기를 상당히 많이 먹습니다.
지금 제가 보여드리는 이 그림은 러시아
전통 음식인데요.
엄밀히 말하면 우크라이나죠.
쌀로라고 해서 이거 돼지비계입니다.
익히지 않았습니다.
그냥 생 비계입니다.
그걸 그냥 소금에 절여서 이렇게 빵에
얹어 먹습니다.
되게 무식해 보이죠?
심지어는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이렇게
돼지 껍데기를 튀겨서 파는 간식도 많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저희는 단순하게 돼지 기름을 바른다.
그래서 정말 미개한 사람들도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읍루인들은 정말 추운 데서 자신들의
가장 장점들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었죠.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놀라운 적응력은
이후 중원으로 펼쳐져서 중국을 정복하는
그들의 강력한 원동력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길 이제 초원의 길로 가 볼까요?
사실 초원의 길은요.
우리가 보통 신라의 것들을 많이 떠올립니다.
오늘은요.
신라가 아닌 다른 백제하고 발해에서
나와 있는 그러한 초원의 흔적들, 그리고
북방 문화의 흔적을 볼까 합니다.
지금 보이는 이 그림은요.
청주 오성에서 발견된 약 서기
2세기에서 3세기쯤 되는 초기 백제의 무덤입니다.
여기에서 백제에서는 나오지 않았었던
아주 이상한 칼이 나왔습니다.
꽤 기다란 철로 만들었고요.
손잡이는 이렇게 청동으로 되어 있었어요.
그 청동을 보니까 뭔가 이렇게
도톨도톨해서 미끄러지지 않게 했죠?
이거 어디에서 왔을까요?
중국 쑹화강하고 초원 지역 사이에 있는
그 지역에 있었던 부여 안에 있었던
유목민들이 만들던 바로 그 검이었습니다.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부여 서쪽에
흉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남긴
서차구라는 유적이 있고요.
북쪽에는 노하심이라는 유적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발견된 검들과 굉장히 이거를
가지고 온 겁니다.
부여 것들은요.
상당히 장식이 많이 남아 있는데 백제 거는 없어요.
거의 대를 이어서 가보처럼 썼던 것이
아니었는가 그런 생각을 해 봐요.
그럼 여기서 저는 이제 재밌는 그러한
이야기가 나오죠.
어디서 백제의 그 부여 유물은 나왔는가?
교류를 했을까?
그런데 교류한 것치고는 너무 이렇게 뭐라 그럴까?
좀 많이 닳아, 중고품처럼 보이죠?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것은
백제는 스스로 자신들을 부여의 후손으로
칭해 왔습니다.
그래서 특히 삼국에서는요.
부여, 고구려, 백제는
다 부여계 사람들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백제는 북방계, 부여 계통의
유물이 이제까지 나온 게 거의 없었어요.
거의 없었는데 이번에 청주 오송에서 나왔습니다.
이거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마도 백제에 내려온 사람들은 자신의
아마 그러한 정체성을 현지인들 앞에서
함부로 내세울 수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딱 두고 왕관이나 이런 것처럼
쓰고 다니거나 그러지 않고 이렇게
쓰면서 자신들만의 숨겨져 있었던 그러한
선민의식이랄까?
이런 것들을 감추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이지 않게 북쪽에서
내려왔었던 유물들이 백제에도 있었던 것이죠.
즉, 우리에게 북방의 길은 숨겨져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결코 우리는 눈에 띄게 안
나온다고 해서 무조건 없었다.
내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겠죠.
그다음에 볼 것은 발해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이거는 연해주 깊숙하게 있는
콕샤로프카라고 하는 발해의 성토입니다.
한국의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러시아와
공동 발굴을 한 곳입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북쪽에 있는 발해의 성토죠.
여기에는 발해의 중심부에서만 볼 수
있는 화려한 그러한 궁궐지 같은 건물도 나왔는데요.
이상하게도 이 거대한 건물지에는 사람이
산 흔적이 거의 없는 뭔가 좀 가장
변방인데 이것저것 다양한 문화 요소들이
많이 있는 듯한 그러한 성토였답니다.
그리고 제가 현장을 가니까 현장에서 제
친한 러시아 고고학자 지인이 저한테,
공항에 만나러 나왔죠, 공항에.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앉자마자 인욱아, 내가 지금 이 동네
발굴 40년째인데 나 이런 거 처음 봐,
하면서 이상한 유물이 있다고 저한테 좀 가자고.
그런데 여기서 공항에서 한 7시간 동안
차 타고 가는데요.
너무 궁금했거든요.
오른쪽이 바로 여기 토기예요.
그런데 저도 봐도 이상하게 이건 전혀 본 적이 없거든요.
연해주 일대에서는.
그리고 이 토기가 나온 유적이 왼쪽인데
이게 무덤인데요.
무덤이 발해 무덤하고 많이 달라요.
무덤도 아니고 제사 터도 아니고 되게
하여튼 정체불명이라고 했는데.
그날 밤 저희가 현장 숙소에서 밤새 제
노트북을 켜고 자료를 검색하다,
찾아보니까 나왔습니다.
아까 저 토기는요, 발해 시대 때 몽골에
있었던 위구르 제국, 지금의 우리
신장성의 위구르인들 있죠?
그 위구르인들의 원래 조상들이 되는
분들인데, 위구르 제국의 토기였어요.
그리고 아까 봤었던 그 사각형의 그러한
무덤과 제단은 위구르 사람들이 주로
만들던 것과 상당히 유사했습니다.
그러니까 발해하고 위구르라니.
이게 어떻게 이렇게 나올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조합을 고민해봤는데 실제로
유라시아 지도를 놓고 보면 너무 당연해요.
발해 자연스럽게 둘은 이어지지 않는 게
더 이해가 안 되는 것이죠.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하나의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바로 환동해를 대표하는 나라였던 발해는
우리는 보통 한반도, 신라 내지는 이렇게
한국사냐 중국사냐 이런 얘기만 하고
있었지만 유라시아에서 바라보면 발해
같은 입장에서는 유라시아 교류를 안
하는 게 더 이상한 그러한 위치가 된 것이죠.
또 다른 재미있는 발해에는 기독교의
증거가 나왔습니다.
물론 이 기독교는 현재의 기독교가
아니라 네스토리우스라고 해서
에페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고 그 일파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실크로드를 따라서
동쪽으로 옮겨왔었던 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둔황에서 발견된.
그런데 이 사람들은 십자가를 눈에 띄게
그리지 않고 이렇게 불화, 그러니까
불교처럼 해놓고 아주 안 보이게 살짝
십자가를 넣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어떠한
힘을 감추었는데 발해에 아브리코스라고
하는 그 절터에서 이러한
네스토리우스교, 아마 중국말로는
경교라고 하는데요.
경교의 십자가가 나왔어요.
이 십자가는 일자로 되지 않고 바깥으로
갈수록 벌어집니다.
이게 시리아형 십자가라고도 하는데요.
그게 바로 이 경교 십자가의 특징이죠.
이것이 발해에 나오니까 그러면 이것은
너무 먼 것 아니냐, 믿기 어렵지 않냐 하는데요.
그 당시의 상황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당나라 때 경교는 공인화 되었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사람이 살았었어요.
그리고 그 경교인들의 일파는 자유롭게
당나라 일대로 갔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왼쪽에 보이는 십자가는
현재 북경 일대에서 발견된 십자가였어요.
중간에 경교인들은 크게 탄압받았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다시 당나라도 경교를
탄압하면서 그 일파가 몽골로도 갑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것은 몽골에 있는
네스토리우스교, 경교의 흔적입니다.
그렇다면 동쪽으로 어디까지
갔을까요?
그리고 현재에 랴오양 일대에서 요나라
시절까지도 그 네스토리우스교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쯤 되면 발해에 경교인들이 간 것이
결코 어색하거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만약에 발해에 경교가 안 갔다면 발해만
안 간 것이다.
몽골도 가고 중국 전역 다 갔는데.
그럼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저희는 가끔씩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앞뒤 맥락을 보지도 않고
아니 그거 너무 억측이 아니냐고
하는데요.
먼저 전체 유라시아 판도를 놓고 보면
우리가 얼마나 그러한 다양한 교류의
흔적들을 외면하고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그러한 예가 됩니다.
또 하나의 증거는 바로 발해의 음악이었습니다.
발해가 음악이 되게 유명했었다고 하죠.
그래서 일본이나 중국 일대에서도 널리
유행해서 금나라 때는 발해 음악을
금지할 정도였다고 하고.
그런데 그 실체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왼쪽에 보이는 것은
핀셋처럼 보이죠?
이것은 한국말로 구금 또는 영어로 주즈
하프라고 하는데요.
바르간이라고도 하고 러시아 말로.
이렇게 손으로 쳐서 하는 악기입니다.
즉 기타는 공명통이 있지 않습니까?
초원에서는 간단하게 치는 것만 있고요.
공명통을 입이 역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입에 끼고 철을 치면 입에서
울리면서 그 목소리를 내는 것이죠.
이것이 발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삼국이나 우리나라
어디에도 발견된 적이 없었던 바로
최초의 초원의 악기 구금인 셈이죠.
우리는 구금 대신에 버들피리 같을 걸 불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은.
적어도 이 한반도에서 나온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끝이 아니었죠.
나중에 이 구금은 일본으로 갑니다.
그래서 오른쪽 밑에 있는 그림은 일본의
현재 사이타마 근처에서 발견되고 있는
서기 10세기에 발견된 구금입니다.
아마 이 발해의 음악은 일본까지도 널리
전해졌던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역사로만 보고 있었던 그러한
우리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걸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은 북방과의 관련성이 있다,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렇게 하나씩
구체화해서 풀어본 적 없습니다.
하나하나 볼 때마다 우리의 역사는
다르게 보입니다.
남한에 갇힌 채로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살아왔었죠.
지난 70년간 한국은 분단 되어왔었고 또
개방이 잠깐 되었지만 지금 다시 또 여러
가지 세계적인 어떠한 팬데믹으로 닫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시대라도 우리는
유라시아와 끊긴 적이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었던
바로 그때가 우리의 역사와 경제가 널리
부흥하던 바로 그러한 시점입니다.
이 사진은 두만강 철교입니다.
여기 중국과 북한 오른쪽은 러시아
나아가서 동해가 있는데요.
모든 사람이 갇혀있어도 우리는 다시
한번 이 유라시아와의 도약를 꿈꾸면서
준비할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유라시아에서 바라보는 한국사.
그것은 어느 책에도 없고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정말로 잊힐 수 없는
우리의 소중한 뒷모습들을 밝혀준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더 여러분들과 함께
공부하고 함께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떠한 특정한 것에서만 집중적으로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넓게 보면 볼수록
우리의 역사는 좀 더 보편적인 유라시아
역사와 네트워크와 연결됩니다.
그러면 그동안에 풀리지 않았었던 수많은
연결고리가 더 자세하고 뚜렷하게 보입니다.
역설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확신합니다.
넓게 넓게 볼수록 우리는 더 자세하게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최고의 강연 최강
일교시 강인욱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