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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1교시 - 무덤, 인류 최고의 발명품 (강인욱 / 고고학자)
등록일 : 2021-12-13 14:36:34.0
조회수 : 369
-안녕하세요?
대한민국 최고의 강연 최강 1교시에서
강연을 맡은 고고학자 강인욱입니다.
저는 경희대 사학과 교수로 고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로 시베리아와 북방 지역을 조사하고요.
한국과 유라시아 간의 다양한 사람들의
문화 교류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특별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조금 음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요.
고고학자들은 이 말만 들으면 마음이 막
설렙니다.
왜냐하면 우리 고고학자들의 기본적인
연구 자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로 무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연 주제는 무덤, 인류
최고의 발명품입니다.
무덤이라고 그러면 우리는 보통 사람만
넣는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죠.
무덤에는 여러 가지 유물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박물관에서 많은 유물을
보면 대부분의 것들은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면 뭐예요?
사람만 묻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각 몸에다가 왕관 아니면 돌아가셨을 때
먹어야 될 음식을 넣은 그릇, 정말 많은
것들을 넣어요.
왜 이렇게 고대인들은 무덤에다가
사람만 넣은 것이 아니라 그 유물을
넣었을까 생각해볼까요?
요즘 사람들은 우리가 누군가가
돌아가시면 똑같이 집처럼 만들어서
매장하는 경우는 요즘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과거 분들은 죽음을 삶의
연장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처럼 똑같이
그 무덤을 죽어 있는 사람의 집처럼
꾸미면서 만듭니다.
그래서 거대한 왕의 고분들 있죠?
피라미드나 아니면 신라의 고분, 사실
이런 많은 고분은요.
왕이나 귀족들이 어렸을 때 이미
그 터를 잡고 무덤을 평생을 만들어요.
그래도 몇십 년 동안 만들어도
다 못 만드는 경우도 꽤 있습니다.
이것은 왜 그렇냐 하면 또 다른
이유가 있어요.
요즘은 사람들의 수명이 아주 길어졌어요.
그래서 일 할만큼 하고 또 몇십 년 동안
노후를 위한 연금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과거 분들, 뭐 유목민들 같은
경우는 평균 연령이 20대, 30대고
길어야 40대고 다시 말하면 노후가
그렇게 길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마치 내가 무엇을 벌고 재화가
쌓이면 연금을 쌓아두듯이 무덤을
만들어서 따로 거기에 자신의 저승에서
쓸, 수많은 그러한 유물들을 같이
넣었던 것입니다.
지금 사진에 보이는 것은요.
2500년 전 러시아 알타이에서 썼었던
무덤입니다.
여기는 그 유목민들이 살았는데 이렇게
무덤을 팔 수 있는 시간은 여기는 춥기
때문에 시베리아이고 또 약 해발
2000m의 고산 지대예요.
그러다 보니까 한 1년에 두 달 정도만
집중적으로 이렇게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의 내세를 대비한다.
그런데 이것이 왜 고대 사람들의
살아있는 그러한 삶을 보여주냐고요?
간단한 이야기인데요.
죽은 사람은 자기 무덤을 못 만들어요.
그러면 당연하죠.
돌아가시는 분들이 이제 관 뚜껑 덮어라.
그렇게 말씀하실 리 없거든요.
심지어는 자기가 언제 죽을지도
대부분 몰라요.
무덤은 죽은 사람을 기념하여 남아 있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입니다.
즉, 죽은 사람을 통해서 그 사람의 삶을
제사와 기념을 통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삶의 활력을 찾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지만 먼저 간 분들을
떠나보낸다는 게 참 쉽지가 않을 거예요.
그런 점에서 무덤은요.
죽은 사람에게 보내는 마지막 사랑입니다.
이 사진은요.
4000년 전 서부 시베리아에서 발견된
어떤 모자의 무덤입니다.
둘이 같이 동시에 죽은 걸 봐서는
아마도 전염병 같은 것이 아마 같이
걸리지 않았을까 싶어요.
저승 가면서까지도 손 놓지 말라고
꼭 잡고 있는 이 무덤을 보면요.
아무리 감정이 메마른 고고학자라고
할지라도요.
4000년 전에 이렇게 가족을
떠나보냈었던 무덤을 만들어서
마지막으로 자식과 자기 배우자의 손을
꼭 잡고 무덤에 넣어주는 그 생각만
해도 참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또 다른 무덤은요.
약 6000년 전 부산 가덕도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의 무덤입니다.
우리 보통 생각하면 그냥 이렇게 몸을
쫙 펴서 묻는 것을 생각할 텐데
이분은 이렇게 웅크렸어요.
아마도 돌아가신 분은 다시 저승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생각해서
돌아가시자마자 이렇게 몸을 웅크리게
해서 다시 한번 부활하기를 바라는
그러한 마음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덤이 음침하고 귀신 나올 것
같이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바로
그분들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랑하던
사람이었다는 것이었고요.
바로 그들이 묻혀있는 무덤은 남아있는
사람이 먼저 간 자신들의 가족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약간 이제 무덤이 조금 달라 보이지
않나요?
한 20년 전에 한국에서도 놀라운 무덤이
발견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바로 직전에 안동에서 젊은
나이에 이응태라는 분이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이분의 무덤이 완벽하게 미라로
발견되었고요.
심지어는 그 무덤 아래는 그분을 먼저
보내는 아내의 절절한 한글로 쓰여진
종이 편지가 발견되었습니다.
워낙에 유명해서요.
상당히 많은 그러한 매체에서
알려져 있는데요.
그 내용은 이제 당신 먼저 보내면
어떡합니까라고 하는 그 절절한 마음과
함께 제발 꿈에라도 나와달라고 하는
그러한 그 애틋한 마음이 있는데 이것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고
어디 장례식장에서 조사로 읽은 것도
아닙니다.
누가 볼 새라 조용히 먼저 간 남편의
수의 속에 넣어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머리를 뽑아서 만든
미투리까지 같이 발견되었어요.
예전에 왜, 머리를 뽑아서 신발을 만들면
아픈 사람이 낫는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거든요.
이렇게 생생한 그러한 사람들의 삶이
바로 저희에게 직접 전해지는 게
바로 이 무덤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게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무덤을 발굴하면요.
다 썩고 뼈 정도밖에 안 남아 있거든요.
사실 한국은 뼈도 안 남아 있어요.
워낙 산성 토양이 강해서 한국은, 보통
무덤을 파서 뼈 몇 개 나오면 정말 운이
좋은 케이스고 뼈가 안 남을 정도로
아주 산성이 강한 토양입니다.
아니, 그런데 뼈가 아니라 종이까지
잘 남아 있어요.
어떻게 이렇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이거는 사실 먼저 간 사람을 지극하게
모시고자 했었던 조선 시대 우리
조상들의 지혜 덕분입니다.
조선 시대 초기에는요.
성리학이 널리 유행했었습니다.
그래서 성리학을 새롭게 해석한 중국의
책, 주자가례를 완벽하게 지키려고
노력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무덤을 만들면요.
이렇게 단단하게 그 무덤 주변에다가
회를 넣어서 마치 돌처럼 단단하게
만들어서 무덤 안이 완벽하게
진공상태가 된 겁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미라는 미라인데
이게 완전히 진공이 돼서 돌아가셨을 때
미세한 털 하나 안 다치고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해지는 그런 세계적인
유일무이한 미라를 만든 셈입니다.
그런데요.
고대에는 참 흥미로운 매장 풍습이
있어요.
이 사진은요.
백제의 정지산 유적입니다.
이게 보면 지상으로 건물지가 있었어요.
그래서 많은 학자가 이것이 백제 왕이
빈장을 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빈.
누가 돌아가시면 빈소가 어디에 있다.
이런 말 많이 하거든요.
빈이란 말 지금도 쓰는데요.
여기서 말하는 빈장은요.
시신을 무덤에 묻히는 사이에 일정
기간을 두고 제례를 지내는 그러한
임시 안치소라고 보시면 됩니다.
지금도 우리가 돌아가시면 일정한 기간
동안 두었다가 이제 모시죠.
그런데 이게 이제 재미있는 게 뭐냐면요.
고대에 귀족들이나 왕들이 돌아가시면요.
사실 언제쯤 돌아가신다는 거를 거의
알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당시에는 무덤이 아주
거대하고 들어가는 부장품도 많았는데
갑자기 돌아가시면 이거 어떻게 무덤을
만들죠?
그렇다고 해서 왕이시여, 언제쯤...
물어볼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삼국시대와 같은 시대 일본은요.
귀족들이 죽은 경우에 1년이나 3년 동안
죽은 사람을 마치 산 사람처럼 모셔서
예를 갖추다가 나중에 무덤에 넣는
그러한 풍습이 있었습니다.
중국 기록 보면요.
고구려인도 사람이 죽으면 집안에
안치했다가 3년이 지난 뒤에 좋은 날을
가려서 장사를 지냈다라고 하는 그러한
기록이 있어요.
그런데 기록은 기록인데 과연 그것이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될 수
있을까요?
네, 되었습니다.
그 기생충의 알은 바로 털깜장파리라고
하는데요.
사람이 죽고 나면 그 위에 파리들이
앉아서 부화를 하고 알을 까거든요.
바로 이 털깜장파리는 보통 사후
3, 4일쯤 되면 그때 본격적으로 시신에 그
알을 까는 거예요.
그런데 아마 여러분, 다양한 드라마 보면
범죄 드라마 보면 나오잖아요.
어디에서 뭐 살인 사건이 발견,
발생되었다든지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하면 그분이 언제 돌아가셨는지 알기
위해서 이렇게 시신 근처에서 다양한
곤충들의 흔적을 찾아서 언제쯤 일이
발생되었다 이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 같은 경우는 어떤
시신들은요.
한 10일쯤 있다가 무덤에 들어온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기록으로만 이야기했었던
그러한 빈장이라는 것이 실제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죠.
그래서 이 백제왕릉 근처에 있는 정지산
유적이 그와 같은 빈장.
아마 특히 백제의 왕들이라면요.
고분도 그렇고요.
참 신경 쓸 게 많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이러한 빈장,
빈장이 왜 등장했을까 한번
생각해볼까요?
인간의 숙명인 것 같습니다.
태어날 때는 알아도요.
갈 때는 모르는 게 인생
아니겠습니까?
갑자기 떠난다고 그 사람의 무덤을 대충
짓거나 짓다 만 채로 보내드릴 수
없잖아요.
그래서 몇 년 동안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분에게 최대한의 예를 다해서
보내드리겠다고 하는 아마 남아있는
사람의 그러한 그 지극한 그러한 사랑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요.
이 빈장이요.
또 이 과거에 이야기들로써 나올 때요.
상당히 재미있는 우리의 이야깃거리가
있습니다.
바로 고려장이에요.
다 들어보셨죠?
고려장이 무엇인지는 다 알죠?
살아있는 노부모를 갖다 버린다.
그런데 사실 이게요.
고려장은 역사적으로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사실은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설화이고요.
또한 세계 곳곳에 그 비슷한 이야기.
그런데 왜 전 세계적으로 이렇게
고려장이라고 하는 살아있는 사람을
버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퍼졌을까요?
아마도 고고학적으로 빈장이라는 것을
해석해보면요.
빈장으로 사람을 갖다놓은 것을 아마
고려장이라고 하는 그러한 풍습으로
오해했을 그러할 가능성이 큽니다.
보통 빈장이라고 하면 길게 3년 정도
그분을 안치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냥 어디 둘 수 없잖아요.
돌아가신 분을 살아있는 사람처럼 사당에
안치하고 마치 살아있는 분 모시듯이
공양을 하는 것이 상식이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그러면 이제 빈소를 차려두고 거기에
계속 사실 오랫동안 바깥에 두면
아무래도 시체가 보기 흉하게 바뀔 수
있으니까 계속 이렇게 염 처리도 다시
해주면서 살아있는 분 대하듯이 그렇게
대하고 옷도 갈아입히고 이렇게 하면서
잘 모셨겠죠.
그런데 여기에 빈장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거기를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누가 여기에 사람을 노인을 버리고 갔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고려장 이야기 자체는 와전된
것이지만 분명한 건 있습니다.
고려장은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것이 전혀
없습니다.
한국의 풍습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가신 분을 좀 더 편하게
모시기 위한 빈장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고려장이라는 것이 일제
강점기 때 특히 많이 이렇게 유포가
되면서 이름도 마치 한국인들,
고려인들의 매장 풍습.
우리가 이렇게 노인들을 막
박대했다는 식으로 이미지를 만들면서
한국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그러한 인식을
심으려 했었던 일제의 잔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마 여러분, 무덤 하면 떠오르는 꼭
나오는 주제입니다.
바로 미라입니다.
고고학 하면 영화가 떠오르는 게 다
미라 관련된 거.
최근까지 나온 미이라라는 영화도
있습니다.
특히 미라 하면 역시 이집트의 미라를
떠올리겠죠?
이런 영화처럼 말입니다.
이집트 미라 하면 또 우리가 안 빠지고
나오는 게 바로 이 미라의 저주예요.
사실 미라의 저주라는 것은 1922년
영국의 카터가 지휘했던 발굴대가
조사한 투탕카멘 왕의 무덤을
발굴하면서 이제 회자된 이야기입니다.
당시에 무덤의 발굴과 관련된 수많은
사람이 의문을 사고를 당했고 죽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요.
결론부터 말하면 없습니다.
그런 미라의 저주는요.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우연히 죽거나
사람이 그냥 별일이 없어도 사고사로
죽는데 그걸 굳이 이 사람이 알고
봤더니 무덤의 발굴대의 사돈의
팔촌이네, 뭐네.
이런 식으로 계속 연결을 시켜서
음모론처럼 만들었고요.
결정적으로 이 발굴을 지휘한 카터는
무사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지금도 호사가들의
이야기로만 남아 있는데요.
사실은 수많은 그러한 무덤의 저주를
아직도 사람들은 믿고 있어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무덤을 판다는 거
그 자체가 사실은 많은 두려움을 부르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저에게 고고학자들은 그러한
미라의 저주를 믿습니까라고 묻는다면요.
저희는 징크스가 있다는 분들도 가끔씩
있습니다.
예컨대 서울대학교에서 근무하시고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하셨던 김원룡
선생님 같은 경우는 무령왕릉 고분을
발굴하시고 난 다음에 그렇게 자기
주변에,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있어서
크게 손해를 많이 보고 되게 안 좋은
일이 많았었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거든요.
그런데 아마 그거는 실제 어떠한 악령이
우리한테 온다기보다 고고학자들도
아무래도 다른 사람의 그러한 무덤을
판다는 것의 두려움.
그러다 보니까 약간씩 우리가 이렇게
행동도 위축되다 보면 안 할 실수도
하고요.
또 그러한 실수나 불안한 것이 또
약간의 사고로 이어지면 이거 무덤
때문인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저희도 가끔씩 이제 20년 전,
30년 전에 발굴할 때는요.
발굴하다가 이렇게 무덤이 나오면 그때
그 무덤을 인부 아저씨들이 소주하고
안줏거리 갖다 놓고 고사를 꼭
지내시고 이제 무덤을 발굴했었던
그러한 경험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하시는 분들이 많죠.
그런데 그러한 인간으로서의 두려움이
아니라 세계에 널리 알려진 미라의
저주가 참 많은데요.
오늘은 제가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미라의 저주를 한번
소개할까 해요.
바로 세계 2차대전을 부른 미라가
있었다.
여러분, 이런 거 들어보셨나요?
14세기.
중앙아시아에서 넓게 아랍까지
제패했었던 강력한
그러한 유목 제왕이 있었습니다.
유목 제국의 제왕 바로
아미르 티무르입니다.
이 사람은 칭기즈칸의 뒤를 이은
그러한 혈통이면서 동시에
이슬람이었습니다.
명실공히 유라시아를 정복한 최대의
정복왕입니다.
이 사람이 웬 미라의 저주냐고요?
이 사람은 그 사마르칸트에 살다가
죽었는데 현재 우즈베키스탄입니다.
당시에는 소련이었어요.
소련에서 이 사람의 무덤을 발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스탈린의 명령으로요.
1942년 6월 19일에 티무르와 그의
가족이 묻힌 영묘.
영묘는 이제 거대한 건물로 된 무덤을
말하는데요.
발굴했어요.
이거는 팩트입니다.
그리고 그 3일 뒤에 실제로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는 그 유명한 독소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당연히 호사가들의
그러한 말이 나오겠죠.
티무르 무덤이 있는 곳이
구르 에미르라고 하는 영묘인데
이 사람들은 막 수군대기 시작했어요.
근처에서 호텔을 파다가 건설업자가
보물 찾는다고 무덤을 파헤치고 이것이
갑자기 연기가 올라가고 안에서 봤더니
저주의 글이 보였는데 저주의 글에
따르면 이 티무르 왕의 경고.
이 무덤을 여는 순간, 내가 다시 부활할
것이고 그러면 이 세상은 다시 전쟁의
큰 소용돌이가 칠 것이다는 경고의
문구가 새겨져 있었답니다.
실제 그리고 3일 뒤에 전쟁이
발발했으니 또 실제로 아미르 티무르가
우즈베키스탄에서 아랍까지 세계 최대의
정복왕이었거든요.
그러니 이게 지금 스탈린이 전쟁을
만들었다고 아주 그냥 난리가
났었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거는 근거가 없는
사람들의 불안감이 만들어 낸
이야기였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시의 우즈벡을 대표하는 시인
어떤 나보이라는 사람의 탄생 500주년을
맞이해서 우즈베키스탄을 대표할
기념물이 필요한 것이었어요.
물론 스탈린이 허락을 했는데 스탈린이
이거를 발굴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냥
통상적으로 여러 가지 일들 중의 하나의
어떠한 결제가 필요했었지 별로
그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때 이분들이 발굴하는 이유는요.
바로 구르 에미르 영묘 무덤에
있는 사람이 실제 티무르와 그의 가족이
맞는지를 확인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래야지만 거기를 정비해서 거대하게
기념물을 만들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인류학자 게라시모프라는 사람이
발굴합니다.
티무르의 또 다른 이름이
테무를란입니다.
테무를란은요.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한쪽 발이
절름발이였습니다.
대단하죠.
어떻게 그 몸으로 세상을
정복할 수 있었는지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오른손도 펼 수가 없었답니다.
쭉 펼 수가 없는 그러한 불구였답니다.
역사 기록에는 그래서 실제로 이렇게
발굴해서 죽어 있는 사람의 무릎뼈하고
손뼈를 보니까 정확하게 맞았습니다.
이쯤 되니까 이거는 더 이상 의심할 게
없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사진이
없었지 않습니까?
초상화밖에 없었는데 이 묻혀 있는
뼈를 가지고 복원해서요,
바로 게라시모프시라는 분이
그러한 전문가였거든요.
이렇게 해서 실제의 죽었을 때 티무르의
모습을 복원시켰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공개했던 것이었죠.
그리고 발굴 5개월 뒤에 이분과 이분의
손자들, 아들들의 무덤을
다 같이 발굴해서요.
조사하고 다시 5개월 뒤에 묻었어요.
글자 그대로 정비 사업을 했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거기서 또 말을
보태는 거예요.
티무르한테 대접을 잘해서 미라가
저주를 거두어서 소련이 전쟁을
이겼다라고 생각을 한 것이에요.
물론 처음부터 어떠한 티무르의 저주는
없었고 어떠한 전쟁과
관련성도 없습니다.
다만 어떻게 본다면 사람들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찌 됐든지 간에 미라의 저주 대신에
그의 인골로 복원된 멋있는 장군으로
다시 티무르는 태어났고요.
그의 무덤은 다시 아름다운 영묘로
거듭나서요.
우즈벡 사람들의 영웅으로 지금도
사랑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미라의 저주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거죠.
진정한 미라의 저주는
따로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지구의 온난화입니다.
알타이 지역은 영구 동결대예요.
보통 우리 영구 동결대라는 것은요.
여름에도 땅속은 아직 얼음이 녹지 않는
그러한 곳인데.
보통 북극권에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땅 겉에는 풀도 자라고 있는데
땅을 조금만 파면 밑에 얼음이
깔려 있는 것이 영구 동결대인데.
알타이 지역은 그만큼 북쪽은 아니지만
고위도 지역이기 때문에
여름에도 얼음이 있어요.
그러니까 몇천 년 지나도 무덤 속에
있는 나무나 사람 살갗 이런 옷,
이런 것이 정말 잘 남아 있습니다.
얼마나 귀한 유물이 되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되냐 얼음이 녹고 나면
곧 거기 안에 있는 모든 잘 보존되어
있었던 유물들이 다 사라지고
없는 것이죠.
너무 안타깝죠.
고분 하나만 파면 수십 년 동안 우리가
연구하고 또 후손들에게 남겨 줄 수 있는
알타이의 소중한 역사가
이렇게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생각하다 못해
러시아 알타이 지역과 바로 옆에 있는
몽골의 알타이가 또 있습니다.
그 알타이는 지형적인 거니까 국경을
두고 붙어 있는 것이죠.
몽골 쪽에서 이미 지구물리탐사를 통해서
얼음이 있다는 것이 확인된
고분을 발굴했습니다.
녹기 전에 미라를 건지기 위해서.
그런데 직접 발굴을 해보니까
바로 직전에 바로
몇 년 전에 얼음이 다 빠지고 물이 돼서.
지금 보는 사진처럼 미라가
거의 사라지고 안 남아 있었던 것을
발견했습니다.
지금도 온난화로 수많은 미라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도 저희 고고학자가 보기에는
이게 진정한 미라의 저주가
아닌가 싶습니다.
빨리 더 다 녹아 없어지기 전에
이 지역에도 많은 조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미라 저주만 이야기하면
정말 무덤은 무섭구나,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이게 또 그렇지도 않은 게,
정작 무덤은 엄청나게 많이 도굴됐어요.
바로 무덤의 저주를 누르는 놀라운
인간의 탐욕 때문입니다.
사진은 이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왕비가 썼던 황금으로 만든 장식된
베개인데요.
이거는 참고로 넣은 것이고요.
관련된 재미있는 중국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독 중국에는요, 무덤 속의 귀신과
결혼을 하고 이렇게 사랑에 빠지는
로맨스가 참 많거든요?
인기 있었던 영화, 천녀유혼의 원작도
원래 포송령의 연계지에 실린
귀신과의 로맨스거든요.
사실 그게 다 결국은 도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전국 시대 말기에 신도탁이라는 사람이
살았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황금 베개를 팔다가
걸렸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판 황금 베개가 바로
얼마 전에 그 나라에서 다른 데
시집갔다가 일찍 죽은 공주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부모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요.
이 여자는 진나라의 공주였는데,
부모님은 자기들 때문에,
정략결혼이었는데 안 맞아서 일찍
죽었나 보죠.
그래서 더 화려하게 무덤을
만들어 준 것이에요.
그런데 그 소문을 들은 도굴꾼들이
가만히 갈 리가 없겠죠?
무덤을 만들자마자 도굴꾼들의
표적이 되었고.
아마 부모님도 이거 이러다가
누가 도굴하는 거 아니야 하고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가.
그때 신도탁이라는 사람이
공주님의 베개를 팔다
걸린 거예요.
그러자 신도탁이 묶여 와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
울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거는 내가 훔친 게 아니라,
제가 어디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었는데
어떤 여성이 자기를 불렀다 그래서 우리는
3일간 이렇게 부부의 정을
나누었는데,
결국은 자기 부인이 된 사람이 자기는
여기 사람이 아니라 더 있을 수 없다면서
나를 보내 주고 이렇게 베개도
같이 준 것이다.
이거는 이별의 정표지
내가 훔친 게 아니다.
그런데 사실 그 이야기를 누가
믿겠습니까?
이거 누가 봐도 도굴꾼이잖아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갖다가 이 부모가
너 도굴꾼 맞지 하면 뭐가 됩니까?
정략결혼 시킨 것도 참 미안해 죽겠는데,
그 집은 아이 무덤까지 못 지켰네?
이런 말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인정하고
신도탁이라는 사람에게 부마라는 벼슬을
내렸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지금도 왕의 사위를
부마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게 바로 여기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만 그만큼 도굴이 널리
횡행했다는 걸 알 수 있고요.
바로 신도탁의 황금 베개 이야기의
걸맞은 도굴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약 서기 5세기 때 살았던, 북위 현재
요녕성에 살았었던 선비족들의 일파인
북위의 건국자가 있습니다.
풍발이라는 사람의 동생인 풍소불이라는
사람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이 사람의 옆에 아마 부인으로 추정되는
젊은 여인의 무덤이 발견되었어요.
그런데 이 사진 보세요.
포즈가 좀 이상하지 않나요?
엎어져 있어요.
20대의 여성인데 토기는 다 있는데
기타 귀중품들은 별로 없이 이렇게
엎어져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나올 수 있을까요?
아마 이것은 이 무덤의 주인공이 묻히고
난 다음에 아직 시신에서 다 썩어
없어지기 전에 도굴꾼이 들어가서 시신에
있는 금붙이를 떼어내기 위해서 옷을
들어냈던 아마 그런 흔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엇입니까?
그만큼 도굴이 널리 있었고 아마 그렇게
증거도 나와 있죠.
무덤에 넣자마자 이렇게 무덤이 털리는
그러한 비극도 꽤 많았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미라의 저주가 두려우신가요?
그런데 사람들의 탐욕은 그와 같은
두려움을 능가한다는 것이 또 이렇게
고고학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장 어두운 무덤을 건드린다.
그것참 얼마나 쉽지 않은 그런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인간의 막연한 공포가
전설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공포를 누르는 것은 바로
도굴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덤에서 느끼는 그러한 우리의 공포도
그리고 무덤을 보면 떠올리는 우리들의
보물과 황금.
결국 그 모든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환상이 아닌가 합니다.
다음번 이야기는 조금 더 무덤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볼까 해요.
사후 세계를 위한 축복.
여러분, 무덤이라는 것은 결국
돌아가신 분이 저승에서도 잘 살기 위한
그러한 바람을 넣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인데요, 야구선수가
죽으면 야구 글러브를 넣을까요,
축구공을 넣을까요?
당연하게도 야구공을, 야구 관련된 것을
넣을 것입니다.
무덤에 있는 물건들은 그 무덤 주인공의
살아있을 때의 그러한 모습들을
반영합니다.
또한 이 사람이 죽어서도 행복을 느끼고
영원히 살 수 있게 하는 그러한 바람을
하는 것입니다.
무덤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은 단순한
보물이 아니라 저승으로 가는데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승은 어떻게 가야 할까요?
이 그림 볼까요?
장관이죠?
그리고 이 사람들의 묘비 판에는 묘비
대신에 헤엄쳐가는 돛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샤오허 무덤의 주인공들은
유럽 계통 사람들이 강합니다.
즉, 유라시아 초원을 따라서 목축을 하던
사람이 내려온 것이죠.
사막의 한복판에서 배로 헤엄친다.
아마 이것은 이 사람들이 그 전부터, 원래
살고 있었던 고향에서부터 갖고 있었던
저승을 간다고 하는 그러한 믿음이죠.
그러고 보니까 우리나라도 얼마 전에
유행했던 신과 함께라는 영화를 보면
저승을 갈 때 삼도천이라고 하는 강을
건너는 것으로 되어 있거든요.
그리스 신화에도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가기 위해서 4개의 강을 건넌다고 하고요.
또 그 안에 노잣돈으로 동전을
넣기도 하는데요.
실제로 입안에 동전이 있는 무덤도
꽤 많이 발견되고 있어요.
어쩌면 이렇게 동서양, 실크로드에서
똑같은 생각을 하는지 참 신기한 것
같습니다.
또 다른 하늘로 가기 위한, 저승으로
가기 위한 방법으로는 나무에다가
사람을 넣는 경우도 있어요.
생각해보면 우리가 관 만든다고 치면
나무판자를 만들어서 넣는 것이
제일 편할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하나의 거대한 나무를
베어서 그 속을 파서 만든다는 것은
상당히 힘들 거예요.
왜 이렇게 힘들게 통나무 관을
만들었을까?
물론 저희는 정확하게
그 대답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비슷한 힌트가 만주의
수목장에 있습니다.
우리 보통 수목장하면 떠오르는 그 나무가
아니라 나무에다가 마치 나무 속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듯이 표현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이렇게 나무가 하늘에 닿듯
영혼의 나무를 만들어서 죽은 사람을
통나무 관에 넣어서 마치 우리가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는 로켓처럼 나무에다가
넣어서 이 사람을 하늘로 보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초원 지역에서 살고 있는
유목민들은 어떻게 믿었을까요?
말을 타고 살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타는 말을 같이 땅에 묻었어요.
그래서 그 유목민 바로 옆에는 반드시
그 사람이 타던 말이 있는데 그 말은
그냥 말을 묻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뿔을 달아서 화려한 치장을 하고.
즉, 그냥 말이 아니라 이 사람을 하늘로
같이 인도해 주는 천마인 셈이죠.
그렇게 하늘로 올라가는 그러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로 말하면 삼국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튀르크 사람들은
이렇게 네모난 제단 안에 말 있지요?
말을 이렇게 걸어놓았어요.
말이 무거워서 어떻게 걸리죠?
이것은 말을 통째로 한 것이 아니라
말의 가죽만 벗겨서 나무에 꿰어서
얹어놓아서 이 제사의 유적에 있었던
그 사람을 하늘로 인도하는 그러한
역할을 한다고 했었습니다.
즉, 이 모든 광경 하나하나는 바로 각각
사람들의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후 영혼은 어떻게
되었다고 믿었을까요?
사실 고고학이라는 것이 유물을 발굴하면
언제나 모든 것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게다가 글자도 없기 때문에 사실 사후관을
알 수 있는 그러한 자료는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멀지 않은 요서 지역에
위치한 홍산 문화에서 옛날 사람들의
사후 세계에 대한 의식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가 발견되었어요.
여기에 만든 무덤은 그냥 무덤이 아니라
사제, 즉 제사를 주동하던 사람이었는데.
이때의 홍산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은
바로 옥입니다, 옥.
그런데 이게 용인데요.
약간 입이 뭉툭하죠?
그래서 돼지와 같은 뭉툭한 코라고 해서
돼지룡이라고 불렀던 적이 있었는데.
물론 재질이나 형태, 만드는 방법은 다
다르기 때문에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겠죠.
하지만 기본적으로 용 내지는 그러한
C자형의 유물을 만들었다는데
러시아 학자 세르게이 알킨 박사는
이 홍산 문화에 대한 아주 재미있는
해석을 했습니다.
왜 홍산 문화에는 이렇게 C자형
옥이 많냐.
이것은 바로 곤충의 번데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갑자기 번데기 그러면 무슨 말이야,
했는데요.
생각해보세요.
인간이 어머니 배 속에 있었던 태아
그리고 곤충 번데기, 다 비슷한
C자형입니다.
그런데 번데기는 나중에 봄이 되면
이것이 부화를 해서, 나비가 되어서
날아갑니다.
즉, 인간의 그러한 다시 태어나는
그러한 모습으로 가장 적합한 이미지가
바로 이 C자형이기 때문에
이 홍산 문화의 옥은
생명의 부활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세르게이 알킨 선생님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의
어떠한 동조를 얻고 있죠.
그런데 그의 주장 중에 재미있는 게,
이거 보세요.
C자형 그 옥이 있는데.
이게 특정한 한 지역에서만 나오는
현상이 아니에요.
자,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무덤은
번데기 형태, 아니면 나비 형태로
표현했을까?
참 궁금합니다.
단서는요, 그 홍산 문화의 신전에 사제의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아까 봤었던.
하나의 무덤에서 처음에 애벌레, 번데기
그다음에 이렇게 나비가 돼서 하늘로
날아가는 1년의 과정이 다 모여서
발견된 것이죠.
이거는 단순한 장식품이 아닙니다.
왜, 그 거대한 신전에 묻혀진 사제의
무덤이기 때문에 그의 유물
하나하나에는 큰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바로 이 번데기와
곡옥, 나아가서 하늘로 올라가는
나비의 생명력까지 한 무덤에 똑같이
표현했었던 바로 홍산 문화 사람들의
사후관이 여기에 보이는 것입니다.
나비의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최근에 이제 그 의학이 발달하면서요.
임사 체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게 뭐냐면 이제 죽을 뻔하신 분들이,
예전에는 대부분 그냥 돌아가시는데
요즘에는 의학 기술의 발달로 다시 이제
소생을 하시는데 그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이제 죽음 직전에 갔었던
그러한 경험을 이야기하시면서
최근에 상당히 많은
학계의 관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임사 체험이
실제로 죽은 뒤에 삶이나,
그렇게 믿는 분들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은 이제 돌아가시기 전에
뇌에 어떠한 작용일 것이다.
그런 회의적으로 보통 보고 있는데,
무엇인 거냐면요.
전 세계의 임사 체험들을 모아보니까,
나라와 인종을 불문하고 죽음 직전에
갔었던 사람들이
대부분 겪는 현상이 똑같답니다.
자기 영혼이 마치.
그러한 기록이 전 세계에 공통적으로
가장 많이 보인답니다.
또 얼마 전에 어떤 뇌과학 의사가
펴낸 책에서는요.
이븐 알렉산더라는 사람은
자신이 이렇게 그러한 나비처럼
날아가는 그러한 경험을 자세하게
서술합니다.
저는 의학자가 아닙니다.
저는 고고학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사후 세계가 있다, 없다.
아니면 어떠한 믿음이 맞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전 세계 사람이 아마
사피엔스가 갖고 있는 그러한
죽을 때의 과정이 비슷하다면
어쩌면 신석기 시대 사람들도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도 아마 비슷했을 것입니다.
즉, 나비처럼 영혼이 피어오르길 바라는
그러한 염원이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나 홍산 문화 사람들은요, 옥을
좋아했기 때문에 아마 다른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뭘 만들어도
썩고 안 남아 있을 텐데.
옥은 변하지가 않지 않습니까?
아마 옥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물론 이것이 하나의 예입니다.
홍산 문화의 번데기와 나비는 앞으로 더
많은 자료가 나와야지만 그들의 정확한
의미를 밝힐 수 있겠죠.
하지만 한 가지 우리가
분명한 사실은 알아야 합니다.
무덤에 넣어주는 그 물건들 하나하나는요.
바로 저승으로 떠난 분들의
부활을 염원했을 것이란 것입니다.
지금도 바뀐 것은 없죠.
지금도 돌아가신 분에게 그분들의
부활을 바라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 우리의 방법으로
그 형태를 표현합니다.
바로 무덤을 만드는 이유는 고인이
편하게 저승에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나비처럼 만드는 옥,
나무처럼 만드는 수목장.
그 어떠한 것도요,
공통된 흐름이 있습니다.
바로 진정한 의미는 무덤에 묻힌 먼저
가신 분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런 점에서 재미있는 것이 우리나라
마한에서 만드는 옹관묘입니다.
옹관묘는 이렇게 항아리를 맞닿게 해서
무덤을 만드는 것인데요.
전 세계적으로 주로 어린아이들의
무덤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아마 대부분.
지금도, 최근까지도요, 아이들이 죽으면
항아리에 넣었었던 풍습들이 우리
주변에도 남아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죽음은 두렵습니다.
어느 하루 우리는 죽음이란 것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을 겁니다.
그리고 먼저 간 사람을 보면 언제나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먼저 간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그 두려움을 극복했습니다.
사람들은 무덤에서 죽은 자를 기억하며
가족이 모였고요.
그렇게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삶을
헤쳐나갈 용기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한시도 죽음을 잊을 수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무덤과 제사
의식으로 극복했죠.
그런 점에서 고대의 무덤은요, 죽음을
극복하는 위대한 발명품이며, 고대
사람들의 생사관이 모여진 집약체이고
타임캡슐인 셈입니다.
이번 강연에서는요, 무덤이 전하는
고고학적 메시지를 다양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정말 무덤은 음침한 듯, 보물이 있는 듯.
우리는 정말 다양하게
무덤을 만들어 왔고요.
고고학자는 그 무덤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무덤의 본질은 다름 아닌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는
우리 서로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죽은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삶을
더 가치 있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우리의 모습을 한번 비추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무덤은 죽음의 공포를 이겨낸 인간의
위대한 발명품이자, 과거와 현대를
이어주는 인연의 끈이다.
무덤은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을 위하여
살아있는 사람이 만들어주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숙명을
우리는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극복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인생은 무덤으로 수렴이
되어 잊혀집니다.
그리고 다시 고고학자는 그 무덤을
발굴을 해서 다시 우리와 만납니다.
그렇게 본다면 무덤을 통해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인연의
끈이 이어지는 셈입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최고의 강연,
최강 1교시 강인욱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강연 최강 1교시에서
강연을 맡은 고고학자 강인욱입니다.
저는 경희대 사학과 교수로 고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로 시베리아와 북방 지역을 조사하고요.
한국과 유라시아 간의 다양한 사람들의
문화 교류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특별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조금 음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요.
고고학자들은 이 말만 들으면 마음이 막
설렙니다.
왜냐하면 우리 고고학자들의 기본적인
연구 자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로 무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연 주제는 무덤, 인류
최고의 발명품입니다.
무덤이라고 그러면 우리는 보통 사람만
넣는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죠.
무덤에는 여러 가지 유물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박물관에서 많은 유물을
보면 대부분의 것들은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면 뭐예요?
사람만 묻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각 몸에다가 왕관 아니면 돌아가셨을 때
먹어야 될 음식을 넣은 그릇, 정말 많은
것들을 넣어요.
왜 이렇게 고대인들은 무덤에다가
사람만 넣은 것이 아니라 그 유물을
넣었을까 생각해볼까요?
요즘 사람들은 우리가 누군가가
돌아가시면 똑같이 집처럼 만들어서
매장하는 경우는 요즘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과거 분들은 죽음을 삶의
연장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처럼 똑같이
그 무덤을 죽어 있는 사람의 집처럼
꾸미면서 만듭니다.
그래서 거대한 왕의 고분들 있죠?
피라미드나 아니면 신라의 고분, 사실
이런 많은 고분은요.
왕이나 귀족들이 어렸을 때 이미
그 터를 잡고 무덤을 평생을 만들어요.
그래도 몇십 년 동안 만들어도
다 못 만드는 경우도 꽤 있습니다.
이것은 왜 그렇냐 하면 또 다른
이유가 있어요.
요즘은 사람들의 수명이 아주 길어졌어요.
그래서 일 할만큼 하고 또 몇십 년 동안
노후를 위한 연금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과거 분들, 뭐 유목민들 같은
경우는 평균 연령이 20대, 30대고
길어야 40대고 다시 말하면 노후가
그렇게 길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마치 내가 무엇을 벌고 재화가
쌓이면 연금을 쌓아두듯이 무덤을
만들어서 따로 거기에 자신의 저승에서
쓸, 수많은 그러한 유물들을 같이
넣었던 것입니다.
지금 사진에 보이는 것은요.
2500년 전 러시아 알타이에서 썼었던
무덤입니다.
여기는 그 유목민들이 살았는데 이렇게
무덤을 팔 수 있는 시간은 여기는 춥기
때문에 시베리아이고 또 약 해발
2000m의 고산 지대예요.
그러다 보니까 한 1년에 두 달 정도만
집중적으로 이렇게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의 내세를 대비한다.
그런데 이것이 왜 고대 사람들의
살아있는 그러한 삶을 보여주냐고요?
간단한 이야기인데요.
죽은 사람은 자기 무덤을 못 만들어요.
그러면 당연하죠.
돌아가시는 분들이 이제 관 뚜껑 덮어라.
그렇게 말씀하실 리 없거든요.
심지어는 자기가 언제 죽을지도
대부분 몰라요.
무덤은 죽은 사람을 기념하여 남아 있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입니다.
즉, 죽은 사람을 통해서 그 사람의 삶을
제사와 기념을 통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삶의 활력을 찾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지만 먼저 간 분들을
떠나보낸다는 게 참 쉽지가 않을 거예요.
그런 점에서 무덤은요.
죽은 사람에게 보내는 마지막 사랑입니다.
이 사진은요.
4000년 전 서부 시베리아에서 발견된
어떤 모자의 무덤입니다.
둘이 같이 동시에 죽은 걸 봐서는
아마도 전염병 같은 것이 아마 같이
걸리지 않았을까 싶어요.
저승 가면서까지도 손 놓지 말라고
꼭 잡고 있는 이 무덤을 보면요.
아무리 감정이 메마른 고고학자라고
할지라도요.
4000년 전에 이렇게 가족을
떠나보냈었던 무덤을 만들어서
마지막으로 자식과 자기 배우자의 손을
꼭 잡고 무덤에 넣어주는 그 생각만
해도 참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또 다른 무덤은요.
약 6000년 전 부산 가덕도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의 무덤입니다.
우리 보통 생각하면 그냥 이렇게 몸을
쫙 펴서 묻는 것을 생각할 텐데
이분은 이렇게 웅크렸어요.
아마도 돌아가신 분은 다시 저승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생각해서
돌아가시자마자 이렇게 몸을 웅크리게
해서 다시 한번 부활하기를 바라는
그러한 마음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덤이 음침하고 귀신 나올 것
같이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바로
그분들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랑하던
사람이었다는 것이었고요.
바로 그들이 묻혀있는 무덤은 남아있는
사람이 먼저 간 자신들의 가족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약간 이제 무덤이 조금 달라 보이지
않나요?
한 20년 전에 한국에서도 놀라운 무덤이
발견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바로 직전에 안동에서 젊은
나이에 이응태라는 분이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이분의 무덤이 완벽하게 미라로
발견되었고요.
심지어는 그 무덤 아래는 그분을 먼저
보내는 아내의 절절한 한글로 쓰여진
종이 편지가 발견되었습니다.
워낙에 유명해서요.
상당히 많은 그러한 매체에서
알려져 있는데요.
그 내용은 이제 당신 먼저 보내면
어떡합니까라고 하는 그 절절한 마음과
함께 제발 꿈에라도 나와달라고 하는
그러한 그 애틋한 마음이 있는데 이것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고
어디 장례식장에서 조사로 읽은 것도
아닙니다.
누가 볼 새라 조용히 먼저 간 남편의
수의 속에 넣어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머리를 뽑아서 만든
미투리까지 같이 발견되었어요.
예전에 왜, 머리를 뽑아서 신발을 만들면
아픈 사람이 낫는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거든요.
이렇게 생생한 그러한 사람들의 삶이
바로 저희에게 직접 전해지는 게
바로 이 무덤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게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무덤을 발굴하면요.
다 썩고 뼈 정도밖에 안 남아 있거든요.
사실 한국은 뼈도 안 남아 있어요.
워낙 산성 토양이 강해서 한국은, 보통
무덤을 파서 뼈 몇 개 나오면 정말 운이
좋은 케이스고 뼈가 안 남을 정도로
아주 산성이 강한 토양입니다.
아니, 그런데 뼈가 아니라 종이까지
잘 남아 있어요.
어떻게 이렇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이거는 사실 먼저 간 사람을 지극하게
모시고자 했었던 조선 시대 우리
조상들의 지혜 덕분입니다.
조선 시대 초기에는요.
성리학이 널리 유행했었습니다.
그래서 성리학을 새롭게 해석한 중국의
책, 주자가례를 완벽하게 지키려고
노력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무덤을 만들면요.
이렇게 단단하게 그 무덤 주변에다가
회를 넣어서 마치 돌처럼 단단하게
만들어서 무덤 안이 완벽하게
진공상태가 된 겁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미라는 미라인데
이게 완전히 진공이 돼서 돌아가셨을 때
미세한 털 하나 안 다치고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해지는 그런 세계적인
유일무이한 미라를 만든 셈입니다.
그런데요.
고대에는 참 흥미로운 매장 풍습이
있어요.
이 사진은요.
백제의 정지산 유적입니다.
이게 보면 지상으로 건물지가 있었어요.
그래서 많은 학자가 이것이 백제 왕이
빈장을 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빈.
누가 돌아가시면 빈소가 어디에 있다.
이런 말 많이 하거든요.
빈이란 말 지금도 쓰는데요.
여기서 말하는 빈장은요.
시신을 무덤에 묻히는 사이에 일정
기간을 두고 제례를 지내는 그러한
임시 안치소라고 보시면 됩니다.
지금도 우리가 돌아가시면 일정한 기간
동안 두었다가 이제 모시죠.
그런데 이게 이제 재미있는 게 뭐냐면요.
고대에 귀족들이나 왕들이 돌아가시면요.
사실 언제쯤 돌아가신다는 거를 거의
알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당시에는 무덤이 아주
거대하고 들어가는 부장품도 많았는데
갑자기 돌아가시면 이거 어떻게 무덤을
만들죠?
그렇다고 해서 왕이시여, 언제쯤...
물어볼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삼국시대와 같은 시대 일본은요.
귀족들이 죽은 경우에 1년이나 3년 동안
죽은 사람을 마치 산 사람처럼 모셔서
예를 갖추다가 나중에 무덤에 넣는
그러한 풍습이 있었습니다.
중국 기록 보면요.
고구려인도 사람이 죽으면 집안에
안치했다가 3년이 지난 뒤에 좋은 날을
가려서 장사를 지냈다라고 하는 그러한
기록이 있어요.
그런데 기록은 기록인데 과연 그것이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될 수
있을까요?
네, 되었습니다.
그 기생충의 알은 바로 털깜장파리라고
하는데요.
사람이 죽고 나면 그 위에 파리들이
앉아서 부화를 하고 알을 까거든요.
바로 이 털깜장파리는 보통 사후
3, 4일쯤 되면 그때 본격적으로 시신에 그
알을 까는 거예요.
그런데 아마 여러분, 다양한 드라마 보면
범죄 드라마 보면 나오잖아요.
어디에서 뭐 살인 사건이 발견,
발생되었다든지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하면 그분이 언제 돌아가셨는지 알기
위해서 이렇게 시신 근처에서 다양한
곤충들의 흔적을 찾아서 언제쯤 일이
발생되었다 이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 같은 경우는 어떤
시신들은요.
한 10일쯤 있다가 무덤에 들어온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기록으로만 이야기했었던
그러한 빈장이라는 것이 실제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죠.
그래서 이 백제왕릉 근처에 있는 정지산
유적이 그와 같은 빈장.
아마 특히 백제의 왕들이라면요.
고분도 그렇고요.
참 신경 쓸 게 많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이러한 빈장,
빈장이 왜 등장했을까 한번
생각해볼까요?
인간의 숙명인 것 같습니다.
태어날 때는 알아도요.
갈 때는 모르는 게 인생
아니겠습니까?
갑자기 떠난다고 그 사람의 무덤을 대충
짓거나 짓다 만 채로 보내드릴 수
없잖아요.
그래서 몇 년 동안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분에게 최대한의 예를 다해서
보내드리겠다고 하는 아마 남아있는
사람의 그러한 그 지극한 그러한 사랑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요.
이 빈장이요.
또 이 과거에 이야기들로써 나올 때요.
상당히 재미있는 우리의 이야깃거리가
있습니다.
바로 고려장이에요.
다 들어보셨죠?
고려장이 무엇인지는 다 알죠?
살아있는 노부모를 갖다 버린다.
그런데 사실 이게요.
고려장은 역사적으로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사실은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설화이고요.
또한 세계 곳곳에 그 비슷한 이야기.
그런데 왜 전 세계적으로 이렇게
고려장이라고 하는 살아있는 사람을
버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퍼졌을까요?
아마도 고고학적으로 빈장이라는 것을
해석해보면요.
빈장으로 사람을 갖다놓은 것을 아마
고려장이라고 하는 그러한 풍습으로
오해했을 그러할 가능성이 큽니다.
보통 빈장이라고 하면 길게 3년 정도
그분을 안치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냥 어디 둘 수 없잖아요.
돌아가신 분을 살아있는 사람처럼 사당에
안치하고 마치 살아있는 분 모시듯이
공양을 하는 것이 상식이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그러면 이제 빈소를 차려두고 거기에
계속 사실 오랫동안 바깥에 두면
아무래도 시체가 보기 흉하게 바뀔 수
있으니까 계속 이렇게 염 처리도 다시
해주면서 살아있는 분 대하듯이 그렇게
대하고 옷도 갈아입히고 이렇게 하면서
잘 모셨겠죠.
그런데 여기에 빈장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거기를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누가 여기에 사람을 노인을 버리고 갔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고려장 이야기 자체는 와전된
것이지만 분명한 건 있습니다.
고려장은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것이 전혀
없습니다.
한국의 풍습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가신 분을 좀 더 편하게
모시기 위한 빈장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고려장이라는 것이 일제
강점기 때 특히 많이 이렇게 유포가
되면서 이름도 마치 한국인들,
고려인들의 매장 풍습.
우리가 이렇게 노인들을 막
박대했다는 식으로 이미지를 만들면서
한국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그러한 인식을
심으려 했었던 일제의 잔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마 여러분, 무덤 하면 떠오르는 꼭
나오는 주제입니다.
바로 미라입니다.
고고학 하면 영화가 떠오르는 게 다
미라 관련된 거.
최근까지 나온 미이라라는 영화도
있습니다.
특히 미라 하면 역시 이집트의 미라를
떠올리겠죠?
이런 영화처럼 말입니다.
이집트 미라 하면 또 우리가 안 빠지고
나오는 게 바로 이 미라의 저주예요.
사실 미라의 저주라는 것은 1922년
영국의 카터가 지휘했던 발굴대가
조사한 투탕카멘 왕의 무덤을
발굴하면서 이제 회자된 이야기입니다.
당시에 무덤의 발굴과 관련된 수많은
사람이 의문을 사고를 당했고 죽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요.
결론부터 말하면 없습니다.
그런 미라의 저주는요.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우연히 죽거나
사람이 그냥 별일이 없어도 사고사로
죽는데 그걸 굳이 이 사람이 알고
봤더니 무덤의 발굴대의 사돈의
팔촌이네, 뭐네.
이런 식으로 계속 연결을 시켜서
음모론처럼 만들었고요.
결정적으로 이 발굴을 지휘한 카터는
무사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지금도 호사가들의
이야기로만 남아 있는데요.
사실은 수많은 그러한 무덤의 저주를
아직도 사람들은 믿고 있어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무덤을 판다는 거
그 자체가 사실은 많은 두려움을 부르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저에게 고고학자들은 그러한
미라의 저주를 믿습니까라고 묻는다면요.
저희는 징크스가 있다는 분들도 가끔씩
있습니다.
예컨대 서울대학교에서 근무하시고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하셨던 김원룡
선생님 같은 경우는 무령왕릉 고분을
발굴하시고 난 다음에 그렇게 자기
주변에,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있어서
크게 손해를 많이 보고 되게 안 좋은
일이 많았었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거든요.
그런데 아마 그거는 실제 어떠한 악령이
우리한테 온다기보다 고고학자들도
아무래도 다른 사람의 그러한 무덤을
판다는 것의 두려움.
그러다 보니까 약간씩 우리가 이렇게
행동도 위축되다 보면 안 할 실수도
하고요.
또 그러한 실수나 불안한 것이 또
약간의 사고로 이어지면 이거 무덤
때문인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저희도 가끔씩 이제 20년 전,
30년 전에 발굴할 때는요.
발굴하다가 이렇게 무덤이 나오면 그때
그 무덤을 인부 아저씨들이 소주하고
안줏거리 갖다 놓고 고사를 꼭
지내시고 이제 무덤을 발굴했었던
그러한 경험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하시는 분들이 많죠.
그런데 그러한 인간으로서의 두려움이
아니라 세계에 널리 알려진 미라의
저주가 참 많은데요.
오늘은 제가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미라의 저주를 한번
소개할까 해요.
바로 세계 2차대전을 부른 미라가
있었다.
여러분, 이런 거 들어보셨나요?
14세기.
중앙아시아에서 넓게 아랍까지
제패했었던 강력한
그러한 유목 제왕이 있었습니다.
유목 제국의 제왕 바로
아미르 티무르입니다.
이 사람은 칭기즈칸의 뒤를 이은
그러한 혈통이면서 동시에
이슬람이었습니다.
명실공히 유라시아를 정복한 최대의
정복왕입니다.
이 사람이 웬 미라의 저주냐고요?
이 사람은 그 사마르칸트에 살다가
죽었는데 현재 우즈베키스탄입니다.
당시에는 소련이었어요.
소련에서 이 사람의 무덤을 발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스탈린의 명령으로요.
1942년 6월 19일에 티무르와 그의
가족이 묻힌 영묘.
영묘는 이제 거대한 건물로 된 무덤을
말하는데요.
발굴했어요.
이거는 팩트입니다.
그리고 그 3일 뒤에 실제로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는 그 유명한 독소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당연히 호사가들의
그러한 말이 나오겠죠.
티무르 무덤이 있는 곳이
구르 에미르라고 하는 영묘인데
이 사람들은 막 수군대기 시작했어요.
근처에서 호텔을 파다가 건설업자가
보물 찾는다고 무덤을 파헤치고 이것이
갑자기 연기가 올라가고 안에서 봤더니
저주의 글이 보였는데 저주의 글에
따르면 이 티무르 왕의 경고.
이 무덤을 여는 순간, 내가 다시 부활할
것이고 그러면 이 세상은 다시 전쟁의
큰 소용돌이가 칠 것이다는 경고의
문구가 새겨져 있었답니다.
실제 그리고 3일 뒤에 전쟁이
발발했으니 또 실제로 아미르 티무르가
우즈베키스탄에서 아랍까지 세계 최대의
정복왕이었거든요.
그러니 이게 지금 스탈린이 전쟁을
만들었다고 아주 그냥 난리가
났었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거는 근거가 없는
사람들의 불안감이 만들어 낸
이야기였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시의 우즈벡을 대표하는 시인
어떤 나보이라는 사람의 탄생 500주년을
맞이해서 우즈베키스탄을 대표할
기념물이 필요한 것이었어요.
물론 스탈린이 허락을 했는데 스탈린이
이거를 발굴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냥
통상적으로 여러 가지 일들 중의 하나의
어떠한 결제가 필요했었지 별로
그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때 이분들이 발굴하는 이유는요.
바로 구르 에미르 영묘 무덤에
있는 사람이 실제 티무르와 그의 가족이
맞는지를 확인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래야지만 거기를 정비해서 거대하게
기념물을 만들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인류학자 게라시모프라는 사람이
발굴합니다.
티무르의 또 다른 이름이
테무를란입니다.
테무를란은요.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한쪽 발이
절름발이였습니다.
대단하죠.
어떻게 그 몸으로 세상을
정복할 수 있었는지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오른손도 펼 수가 없었답니다.
쭉 펼 수가 없는 그러한 불구였답니다.
역사 기록에는 그래서 실제로 이렇게
발굴해서 죽어 있는 사람의 무릎뼈하고
손뼈를 보니까 정확하게 맞았습니다.
이쯤 되니까 이거는 더 이상 의심할 게
없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사진이
없었지 않습니까?
초상화밖에 없었는데 이 묻혀 있는
뼈를 가지고 복원해서요,
바로 게라시모프시라는 분이
그러한 전문가였거든요.
이렇게 해서 실제의 죽었을 때 티무르의
모습을 복원시켰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공개했던 것이었죠.
그리고 발굴 5개월 뒤에 이분과 이분의
손자들, 아들들의 무덤을
다 같이 발굴해서요.
조사하고 다시 5개월 뒤에 묻었어요.
글자 그대로 정비 사업을 했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거기서 또 말을
보태는 거예요.
티무르한테 대접을 잘해서 미라가
저주를 거두어서 소련이 전쟁을
이겼다라고 생각을 한 것이에요.
물론 처음부터 어떠한 티무르의 저주는
없었고 어떠한 전쟁과
관련성도 없습니다.
다만 어떻게 본다면 사람들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찌 됐든지 간에 미라의 저주 대신에
그의 인골로 복원된 멋있는 장군으로
다시 티무르는 태어났고요.
그의 무덤은 다시 아름다운 영묘로
거듭나서요.
우즈벡 사람들의 영웅으로 지금도
사랑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미라의 저주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거죠.
진정한 미라의 저주는
따로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지구의 온난화입니다.
알타이 지역은 영구 동결대예요.
보통 우리 영구 동결대라는 것은요.
여름에도 땅속은 아직 얼음이 녹지 않는
그러한 곳인데.
보통 북극권에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땅 겉에는 풀도 자라고 있는데
땅을 조금만 파면 밑에 얼음이
깔려 있는 것이 영구 동결대인데.
알타이 지역은 그만큼 북쪽은 아니지만
고위도 지역이기 때문에
여름에도 얼음이 있어요.
그러니까 몇천 년 지나도 무덤 속에
있는 나무나 사람 살갗 이런 옷,
이런 것이 정말 잘 남아 있습니다.
얼마나 귀한 유물이 되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되냐 얼음이 녹고 나면
곧 거기 안에 있는 모든 잘 보존되어
있었던 유물들이 다 사라지고
없는 것이죠.
너무 안타깝죠.
고분 하나만 파면 수십 년 동안 우리가
연구하고 또 후손들에게 남겨 줄 수 있는
알타이의 소중한 역사가
이렇게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생각하다 못해
러시아 알타이 지역과 바로 옆에 있는
몽골의 알타이가 또 있습니다.
그 알타이는 지형적인 거니까 국경을
두고 붙어 있는 것이죠.
몽골 쪽에서 이미 지구물리탐사를 통해서
얼음이 있다는 것이 확인된
고분을 발굴했습니다.
녹기 전에 미라를 건지기 위해서.
그런데 직접 발굴을 해보니까
바로 직전에 바로
몇 년 전에 얼음이 다 빠지고 물이 돼서.
지금 보는 사진처럼 미라가
거의 사라지고 안 남아 있었던 것을
발견했습니다.
지금도 온난화로 수많은 미라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도 저희 고고학자가 보기에는
이게 진정한 미라의 저주가
아닌가 싶습니다.
빨리 더 다 녹아 없어지기 전에
이 지역에도 많은 조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미라 저주만 이야기하면
정말 무덤은 무섭구나,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이게 또 그렇지도 않은 게,
정작 무덤은 엄청나게 많이 도굴됐어요.
바로 무덤의 저주를 누르는 놀라운
인간의 탐욕 때문입니다.
사진은 이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왕비가 썼던 황금으로 만든 장식된
베개인데요.
이거는 참고로 넣은 것이고요.
관련된 재미있는 중국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독 중국에는요, 무덤 속의 귀신과
결혼을 하고 이렇게 사랑에 빠지는
로맨스가 참 많거든요?
인기 있었던 영화, 천녀유혼의 원작도
원래 포송령의 연계지에 실린
귀신과의 로맨스거든요.
사실 그게 다 결국은 도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전국 시대 말기에 신도탁이라는 사람이
살았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황금 베개를 팔다가
걸렸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판 황금 베개가 바로
얼마 전에 그 나라에서 다른 데
시집갔다가 일찍 죽은 공주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부모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요.
이 여자는 진나라의 공주였는데,
부모님은 자기들 때문에,
정략결혼이었는데 안 맞아서 일찍
죽었나 보죠.
그래서 더 화려하게 무덤을
만들어 준 것이에요.
그런데 그 소문을 들은 도굴꾼들이
가만히 갈 리가 없겠죠?
무덤을 만들자마자 도굴꾼들의
표적이 되었고.
아마 부모님도 이거 이러다가
누가 도굴하는 거 아니야 하고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가.
그때 신도탁이라는 사람이
공주님의 베개를 팔다
걸린 거예요.
그러자 신도탁이 묶여 와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
울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거는 내가 훔친 게 아니라,
제가 어디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었는데
어떤 여성이 자기를 불렀다 그래서 우리는
3일간 이렇게 부부의 정을
나누었는데,
결국은 자기 부인이 된 사람이 자기는
여기 사람이 아니라 더 있을 수 없다면서
나를 보내 주고 이렇게 베개도
같이 준 것이다.
이거는 이별의 정표지
내가 훔친 게 아니다.
그런데 사실 그 이야기를 누가
믿겠습니까?
이거 누가 봐도 도굴꾼이잖아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갖다가 이 부모가
너 도굴꾼 맞지 하면 뭐가 됩니까?
정략결혼 시킨 것도 참 미안해 죽겠는데,
그 집은 아이 무덤까지 못 지켰네?
이런 말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인정하고
신도탁이라는 사람에게 부마라는 벼슬을
내렸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지금도 왕의 사위를
부마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게 바로 여기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만 그만큼 도굴이 널리
횡행했다는 걸 알 수 있고요.
바로 신도탁의 황금 베개 이야기의
걸맞은 도굴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약 서기 5세기 때 살았던, 북위 현재
요녕성에 살았었던 선비족들의 일파인
북위의 건국자가 있습니다.
풍발이라는 사람의 동생인 풍소불이라는
사람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이 사람의 옆에 아마 부인으로 추정되는
젊은 여인의 무덤이 발견되었어요.
그런데 이 사진 보세요.
포즈가 좀 이상하지 않나요?
엎어져 있어요.
20대의 여성인데 토기는 다 있는데
기타 귀중품들은 별로 없이 이렇게
엎어져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나올 수 있을까요?
아마 이것은 이 무덤의 주인공이 묻히고
난 다음에 아직 시신에서 다 썩어
없어지기 전에 도굴꾼이 들어가서 시신에
있는 금붙이를 떼어내기 위해서 옷을
들어냈던 아마 그런 흔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엇입니까?
그만큼 도굴이 널리 있었고 아마 그렇게
증거도 나와 있죠.
무덤에 넣자마자 이렇게 무덤이 털리는
그러한 비극도 꽤 많았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미라의 저주가 두려우신가요?
그런데 사람들의 탐욕은 그와 같은
두려움을 능가한다는 것이 또 이렇게
고고학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장 어두운 무덤을 건드린다.
그것참 얼마나 쉽지 않은 그런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인간의 막연한 공포가
전설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공포를 누르는 것은 바로
도굴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덤에서 느끼는 그러한 우리의 공포도
그리고 무덤을 보면 떠올리는 우리들의
보물과 황금.
결국 그 모든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환상이 아닌가 합니다.
다음번 이야기는 조금 더 무덤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볼까 해요.
사후 세계를 위한 축복.
여러분, 무덤이라는 것은 결국
돌아가신 분이 저승에서도 잘 살기 위한
그러한 바람을 넣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인데요, 야구선수가
죽으면 야구 글러브를 넣을까요,
축구공을 넣을까요?
당연하게도 야구공을, 야구 관련된 것을
넣을 것입니다.
무덤에 있는 물건들은 그 무덤 주인공의
살아있을 때의 그러한 모습들을
반영합니다.
또한 이 사람이 죽어서도 행복을 느끼고
영원히 살 수 있게 하는 그러한 바람을
하는 것입니다.
무덤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은 단순한
보물이 아니라 저승으로 가는데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승은 어떻게 가야 할까요?
이 그림 볼까요?
장관이죠?
그리고 이 사람들의 묘비 판에는 묘비
대신에 헤엄쳐가는 돛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샤오허 무덤의 주인공들은
유럽 계통 사람들이 강합니다.
즉, 유라시아 초원을 따라서 목축을 하던
사람이 내려온 것이죠.
사막의 한복판에서 배로 헤엄친다.
아마 이것은 이 사람들이 그 전부터, 원래
살고 있었던 고향에서부터 갖고 있었던
저승을 간다고 하는 그러한 믿음이죠.
그러고 보니까 우리나라도 얼마 전에
유행했던 신과 함께라는 영화를 보면
저승을 갈 때 삼도천이라고 하는 강을
건너는 것으로 되어 있거든요.
그리스 신화에도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가기 위해서 4개의 강을 건넌다고 하고요.
또 그 안에 노잣돈으로 동전을
넣기도 하는데요.
실제로 입안에 동전이 있는 무덤도
꽤 많이 발견되고 있어요.
어쩌면 이렇게 동서양, 실크로드에서
똑같은 생각을 하는지 참 신기한 것
같습니다.
또 다른 하늘로 가기 위한, 저승으로
가기 위한 방법으로는 나무에다가
사람을 넣는 경우도 있어요.
생각해보면 우리가 관 만든다고 치면
나무판자를 만들어서 넣는 것이
제일 편할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하나의 거대한 나무를
베어서 그 속을 파서 만든다는 것은
상당히 힘들 거예요.
왜 이렇게 힘들게 통나무 관을
만들었을까?
물론 저희는 정확하게
그 대답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비슷한 힌트가 만주의
수목장에 있습니다.
우리 보통 수목장하면 떠오르는 그 나무가
아니라 나무에다가 마치 나무 속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듯이 표현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이렇게 나무가 하늘에 닿듯
영혼의 나무를 만들어서 죽은 사람을
통나무 관에 넣어서 마치 우리가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는 로켓처럼 나무에다가
넣어서 이 사람을 하늘로 보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초원 지역에서 살고 있는
유목민들은 어떻게 믿었을까요?
말을 타고 살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타는 말을 같이 땅에 묻었어요.
그래서 그 유목민 바로 옆에는 반드시
그 사람이 타던 말이 있는데 그 말은
그냥 말을 묻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뿔을 달아서 화려한 치장을 하고.
즉, 그냥 말이 아니라 이 사람을 하늘로
같이 인도해 주는 천마인 셈이죠.
그렇게 하늘로 올라가는 그러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로 말하면 삼국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튀르크 사람들은
이렇게 네모난 제단 안에 말 있지요?
말을 이렇게 걸어놓았어요.
말이 무거워서 어떻게 걸리죠?
이것은 말을 통째로 한 것이 아니라
말의 가죽만 벗겨서 나무에 꿰어서
얹어놓아서 이 제사의 유적에 있었던
그 사람을 하늘로 인도하는 그러한
역할을 한다고 했었습니다.
즉, 이 모든 광경 하나하나는 바로 각각
사람들의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후 영혼은 어떻게
되었다고 믿었을까요?
사실 고고학이라는 것이 유물을 발굴하면
언제나 모든 것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게다가 글자도 없기 때문에 사실 사후관을
알 수 있는 그러한 자료는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멀지 않은 요서 지역에
위치한 홍산 문화에서 옛날 사람들의
사후 세계에 대한 의식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가 발견되었어요.
여기에 만든 무덤은 그냥 무덤이 아니라
사제, 즉 제사를 주동하던 사람이었는데.
이때의 홍산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은
바로 옥입니다, 옥.
그런데 이게 용인데요.
약간 입이 뭉툭하죠?
그래서 돼지와 같은 뭉툭한 코라고 해서
돼지룡이라고 불렀던 적이 있었는데.
물론 재질이나 형태, 만드는 방법은 다
다르기 때문에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겠죠.
하지만 기본적으로 용 내지는 그러한
C자형의 유물을 만들었다는데
러시아 학자 세르게이 알킨 박사는
이 홍산 문화에 대한 아주 재미있는
해석을 했습니다.
왜 홍산 문화에는 이렇게 C자형
옥이 많냐.
이것은 바로 곤충의 번데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갑자기 번데기 그러면 무슨 말이야,
했는데요.
생각해보세요.
인간이 어머니 배 속에 있었던 태아
그리고 곤충 번데기, 다 비슷한
C자형입니다.
그런데 번데기는 나중에 봄이 되면
이것이 부화를 해서, 나비가 되어서
날아갑니다.
즉, 인간의 그러한 다시 태어나는
그러한 모습으로 가장 적합한 이미지가
바로 이 C자형이기 때문에
이 홍산 문화의 옥은
생명의 부활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세르게이 알킨 선생님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의
어떠한 동조를 얻고 있죠.
그런데 그의 주장 중에 재미있는 게,
이거 보세요.
C자형 그 옥이 있는데.
이게 특정한 한 지역에서만 나오는
현상이 아니에요.
자,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무덤은
번데기 형태, 아니면 나비 형태로
표현했을까?
참 궁금합니다.
단서는요, 그 홍산 문화의 신전에 사제의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아까 봤었던.
하나의 무덤에서 처음에 애벌레, 번데기
그다음에 이렇게 나비가 돼서 하늘로
날아가는 1년의 과정이 다 모여서
발견된 것이죠.
이거는 단순한 장식품이 아닙니다.
왜, 그 거대한 신전에 묻혀진 사제의
무덤이기 때문에 그의 유물
하나하나에는 큰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바로 이 번데기와
곡옥, 나아가서 하늘로 올라가는
나비의 생명력까지 한 무덤에 똑같이
표현했었던 바로 홍산 문화 사람들의
사후관이 여기에 보이는 것입니다.
나비의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최근에 이제 그 의학이 발달하면서요.
임사 체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게 뭐냐면 이제 죽을 뻔하신 분들이,
예전에는 대부분 그냥 돌아가시는데
요즘에는 의학 기술의 발달로 다시 이제
소생을 하시는데 그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이제 죽음 직전에 갔었던
그러한 경험을 이야기하시면서
최근에 상당히 많은
학계의 관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임사 체험이
실제로 죽은 뒤에 삶이나,
그렇게 믿는 분들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은 이제 돌아가시기 전에
뇌에 어떠한 작용일 것이다.
그런 회의적으로 보통 보고 있는데,
무엇인 거냐면요.
전 세계의 임사 체험들을 모아보니까,
나라와 인종을 불문하고 죽음 직전에
갔었던 사람들이
대부분 겪는 현상이 똑같답니다.
자기 영혼이 마치.
그러한 기록이 전 세계에 공통적으로
가장 많이 보인답니다.
또 얼마 전에 어떤 뇌과학 의사가
펴낸 책에서는요.
이븐 알렉산더라는 사람은
자신이 이렇게 그러한 나비처럼
날아가는 그러한 경험을 자세하게
서술합니다.
저는 의학자가 아닙니다.
저는 고고학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사후 세계가 있다, 없다.
아니면 어떠한 믿음이 맞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전 세계 사람이 아마
사피엔스가 갖고 있는 그러한
죽을 때의 과정이 비슷하다면
어쩌면 신석기 시대 사람들도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도 아마 비슷했을 것입니다.
즉, 나비처럼 영혼이 피어오르길 바라는
그러한 염원이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나 홍산 문화 사람들은요, 옥을
좋아했기 때문에 아마 다른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뭘 만들어도
썩고 안 남아 있을 텐데.
옥은 변하지가 않지 않습니까?
아마 옥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물론 이것이 하나의 예입니다.
홍산 문화의 번데기와 나비는 앞으로 더
많은 자료가 나와야지만 그들의 정확한
의미를 밝힐 수 있겠죠.
하지만 한 가지 우리가
분명한 사실은 알아야 합니다.
무덤에 넣어주는 그 물건들 하나하나는요.
바로 저승으로 떠난 분들의
부활을 염원했을 것이란 것입니다.
지금도 바뀐 것은 없죠.
지금도 돌아가신 분에게 그분들의
부활을 바라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 우리의 방법으로
그 형태를 표현합니다.
바로 무덤을 만드는 이유는 고인이
편하게 저승에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나비처럼 만드는 옥,
나무처럼 만드는 수목장.
그 어떠한 것도요,
공통된 흐름이 있습니다.
바로 진정한 의미는 무덤에 묻힌 먼저
가신 분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런 점에서 재미있는 것이 우리나라
마한에서 만드는 옹관묘입니다.
옹관묘는 이렇게 항아리를 맞닿게 해서
무덤을 만드는 것인데요.
전 세계적으로 주로 어린아이들의
무덤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아마 대부분.
지금도, 최근까지도요, 아이들이 죽으면
항아리에 넣었었던 풍습들이 우리
주변에도 남아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죽음은 두렵습니다.
어느 하루 우리는 죽음이란 것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을 겁니다.
그리고 먼저 간 사람을 보면 언제나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먼저 간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그 두려움을 극복했습니다.
사람들은 무덤에서 죽은 자를 기억하며
가족이 모였고요.
그렇게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삶을
헤쳐나갈 용기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한시도 죽음을 잊을 수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무덤과 제사
의식으로 극복했죠.
그런 점에서 고대의 무덤은요, 죽음을
극복하는 위대한 발명품이며, 고대
사람들의 생사관이 모여진 집약체이고
타임캡슐인 셈입니다.
이번 강연에서는요, 무덤이 전하는
고고학적 메시지를 다양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정말 무덤은 음침한 듯, 보물이 있는 듯.
우리는 정말 다양하게
무덤을 만들어 왔고요.
고고학자는 그 무덤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무덤의 본질은 다름 아닌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는
우리 서로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죽은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삶을
더 가치 있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우리의 모습을 한번 비추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무덤은 죽음의 공포를 이겨낸 인간의
위대한 발명품이자, 과거와 현대를
이어주는 인연의 끈이다.
무덤은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을 위하여
살아있는 사람이 만들어주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숙명을
우리는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극복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인생은 무덤으로 수렴이
되어 잊혀집니다.
그리고 다시 고고학자는 그 무덤을
발굴을 해서 다시 우리와 만납니다.
그렇게 본다면 무덤을 통해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인연의
끈이 이어지는 셈입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최고의 강연,
최강 1교시 강인욱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