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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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듯, 도시기행 마실가요 - 다정히 손내밀다, 부산 서구

등록일 : 2024-11-26 13:56:17.0
조회수 : 781
-(해설) 정겨운 항구 소리가 부산의 아침을 깨우는 이곳.
오늘은 생동감 넘치는 부산항과 마주한 구도심의 축. 부산 서구에 왔습니다.
-너무 멋있다. 그림이네, 그림 그냥.
-(해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뷰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더라고요.
-세상에. 저쪽에 저게 부산항대교도 앞에 영도다리 있고 용두산공원.
국제시장 있고. 여기 있으니까 서구가 그냥 완전히 쫙 다 펼쳐져 보이네.
여기도 장관인데요.
어떻게 보면 부산에 이렇게 진짜 첫 출발 같은 곳이기도 한 곳이 서구인데.
여기 이렇게 아주 오래된 집들이랑 또 이렇게 새로 지은 아파트들도 많이 꽉 차 있고
이런 거 보니까 왠지 서구에는 사연이 많은 분이 많이 살고 계실 거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오늘 서구에서 어떤 재미있는 일들이 펼쳐질지 한번 떠나보겠습니다. 좋네, 여기.
-(해설)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부산의 풍경을 한눈에 담고서 부산 서구의 이야기를 만나러 갑니다.
-(해설) 설레는 마음 안고 도착한 오늘의 첫 번째 여행지는 바로 서구의 구덕운동장.
-운동장인가 보네. 구덕운동장.
-(해설) 오래된 운동장 앞에 도착하자 웬 기념비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는데요.
-대신동 전차 종점 터.
부산의 근대화기 50여 년 동안 시민들의 풍요한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어 추억과
애환이 깃들어 있는 전차 종점이 있었던 곳이다.
대중 교통수단이 점차 이렇게 버스로 전환되면서 68년에 전차 운행이 중단이 됐다네.
여기에 종점 터였으면 사람들이 많이 모였겠는데, 이 동네에.
-(해설) 교통 시설까지 잘 갖춰져 중심지 역할을 톡톡히 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1928년도에 설립되어 약 100년의 역사를 품은 구덕운동장.
부산 서구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오롯이 기억하고 있는 공간이라고 하네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여기 저기 이게 옛날 저 구덕운동장 아닌가요?
-옛날 여기가 야구장이었거든요.
-여기 야구장이었구나.
-야구장이고. 주 경기장만 놔두고.
-이거 축구장, 주 경기장이고요?
-네. 전부 다.
-(해설) 구덕운동장은 사직운동장이 들어서기 전까지 부산의 유일한 시민종합운동장이었는데요.
88 올림픽, 동아시아 대회 등 굵직한 스포츠 이벤트들의 무대였다고 합니다.
-어르신께서는 이 동네 어릴 때부터 그러면 쭉 사신 거예요, 나시고?
-여기는, 여기서 나서 여기서 자랐어요.
-그러면 여기 이제 동네 싹 변하는 거 다 보셨겠네요.
-네. 지금도 기억나는 게 레슬링 선수들이 그냥.
-그때는 프로레슬링이 엄청 유명했잖아요.
-김일 선수와.
-김일 선수.
-천규덕, 이왕표.
-이왕표.
-이런 분들이 많이 있었죠. 끝에는 오늘 같이 들어가고 놀고 이랬어요.
-재미있으셨겠다. 옛날 추억이 많이 생각나시겠어요.
-추억은 지금 많이 생각나지.
-(해설)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공간답게 곳곳에 주민들의 추억도 가득하더라고요.
-제가 한번 구덕운동장을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그래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여기 안쪽. 아버님, 너무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해설) 친절한 주민분의 도움으로 구덕운동장 투어를 시작해 봅니다.
-가만 있어 봐. 뭐가 익숙한 벽이다 싶었더니 이게 지금 야구장 벽이에요?
-네, 네.
-정면에 있는 벽체는 스탠드를 지지했던 옹벽이구나.
-내야석. 지금 그림에 보시는 거 같이.
-여기.
-우측 스탠드. 뒤에 보시는 저 문화아파트 쪽이 외야석입니다.
-(해설) 이렇게 보니 옛 구덕운동장의 형태가 여전히 남아 있네요.
-저 어렸을 때 와봤던 거 같아요.
-그래요?
-아주 어릴 때.
잠깐 어릴 때 부산 산 적 있었는데 그때 야구장 구경 온 적 있거든요.
여기였던 거 같아요. 예전에 여기에서 야구 시합 벌어지면 사람들 진짜 많이 오셨겠어요.
-엄청나게 옵니다.
-여기 뭐.
-만원 관중인데 저희가 다 못 들어가잖아요. 그러면 어디로 가느냐.
-어디로 가요?
-문화아파트로 갑니다. 지금 보시면 10층 건물인데 복도식이에요.
-그러네요.
-저쪽으로 가서 다들 봅니다. 그러면 카메라에도 한 번씩 잡히는데 새카맣습니다.
-그거 장관이었겠는데.
-위에서 보면 다 보이는 겁니다.
-그러면 저기 무료 좌석 아닙니까?
-당연하죠.
-저기 옥상에서 막 올라가서 저기서 막 보시고?
-네.
-그런데. 그거 진짜 볼만 했겠네.
-그렇죠. 사실은 롯데가 여기에서 우승도 했던 장소입니다. 예전에는.
-롯데 자이언츠가 구덕운동장을 사용할 때 우승을 했군요.
-그때가 아마 92년도인 거 같습니다.
-92년도에.
-난리 났습니다, 동네.
-이 동네 뭐 잔치, 잔치.
-뒤집어집니다, 뒤집어져.
-잔치 잔치 난리 났었겠네요, 진짜.
-당연하죠.
-여기 아주 뭐. 엄청난 추억이 깃든 곳이네요.
-(해설) 부산 최초의 야구 전용 경기장이었던 구덕야구장.
자이언츠의 우승도 간직한 구장이었고요. 고 최동원 선수도 서구 출신이라네요.
이토록 화려했던 시절을 간직한 구덕야구장은 세월이 흘러 현재 생활체육공원으로 변했습니다.
-서구 구민들의 쉼터이자 허파 역할을 해주고 있네요.
저희가 지금 이게 거의 도심 한복판이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가 이렇게 숨을 쉬는데 뭔가 풀 내음이 가득하고 건강해지는 느낌이에요.
-저희는 자부심이 큽니다.
-그렇죠.
-그리고 역사적인 이 장소가 이렇게 유지된다는 것도 너무 좋은 일이죠.
-그렇죠.
-(해설) 부산 스포츠 발전의 구심점 역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서구 주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재탄생했네요.
-주변에 이렇게 공원이 잘 없는데 이렇게 공원이 도심 내에 있는 게 되게 좋은 거 같아요.
편하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어 좋습니다.
-원래는 구덕운동장에서 이렇게 철거를 하고 시민들한테 돌려준 거잖아요.
그래서 저희는 잘 쓰고 있고 시민 입장에서는 참 좋은 거 같습니다.
-(해설) 아직 구덕운동장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곳도 있습니다.
바로 주 경기장인데요. 때마침 육상부 학생들이 훈련 중인가 봅니다.
-트랙이 있으니까 우리 학생들이 여기서 운동도 하고 하나 봐요.
-트랙이 유일하게 구덕운동장에만 있어서.
-그렇죠. 안녕하세요.
-(함께) 안녕하세요.
-우리 학생들이구나. 중학생들?
-(함께) 네.
-육상부예요?
-(함께) 네.
-다 듬직하다, 중학생들인데. 코치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학생들이랑 여기서 운동하시나 봐요.
-맞습니다.
-트랙이 있는 데가 지금 들어보니까 여기 구덕운동장밖에 없다고.
-맞습니다. 지금 유일하게 부산에는 구덕운동장에만 있습니다.
-운동하는 친구들한테는 없어서는 안 되는 곳이네요.
-네, 맞습니다.
저희 부산 대신중학교는 이건호 학생이라고 100m, 200m 소년체전 2등 했습니다.
-2등 했어요, 축하해요.
-3등 했습니다.
-3등. 100m 몇 초예요, 그러면?
-소년체전 때는 11초 5 뛰었습니다.
-대박이다. 꿈이 뭐예요?
-올림픽.
-올림픽 출전.
우리 친구들 서구의 허파에서 열심히 운동해서 우리 부산 서구의 자랑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여러분.
-(함께) 파이팅!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해설) 오늘도 부산의 육상 꿈나무들은 구덕운동장에서 꿈을 위한 한 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저도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소원이 생겼습니다.
-그래요.
-구덕운동장에서 저희 축구단 친구들과 축구 한번 해 보는 거 한번 저도 알아보겠습니다.
-언제 연예인 축구단 오면 열렬하게 저희가 응원해 드리겠습니다.
-꼭 방문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해설) 부산 스포츠의 메카였던 구덕운동장을 뒤로하고 이번에는 부산 서구의 산 동네로 왔습니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과 골목길 사이를 거닐며 부산 산복도로 감성을 느껴보는데요.
이때 제 발걸음을 멈추게 한 건물 하나. 서서히 계단을 올라 집의 형태를 살펴봅니다.
축대가 특이해 보이는데. 이 마을에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게 뭐예요, 이게?
-이게 이 일대가 일본인 공동묘지였어요.
-이게 비석마을이 뭔가 했더니 예전에 일본 무덤들인 거네요, 비석?
-그렇죠, 그렇죠, 그렇죠. 이게 일본 납골묘인데 그대로 드러나 있잖아요, 이렇게. 여기에 그 위에 이제.
-이 위에 집을 짓는 거예요?
-네, 피난 오신 분들이 천막 치고 살다가.
-이게 흙바닥보다는 뭔가 이 위가 나으니까 이 위에 집을 지으셨나 보구나.
-그렇죠, 그렇죠.
-세상에.
-(해설) 일본인 공동묘지였던 지역에 터를 잡으면서 생겨난 마을이라니.
피난민들의 처절했던 삶이 느껴지더라고요.
부산에는 전쟁의 아픔을 간직한 공간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이거 발레복 아니에요?
-맞습니다.
-발레하세요?
-제가 하는 건 아니고 저희 마을 어르신들이 백세발레단이라고 모임이 있어요, 할머니들.
-어르신들이요?
-80대 어르신들이에요.
-따라 가서 좀 구경해도 될까요?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할머님들이?
-네.
-(해설) 아미동의 마스코트, 발레하는 할머니들이 있다는데요. 기대되죠?
-올라가 보시죠.
-여기에 이런 공간이 있어요. 안녕하세요.
-(함께) 반갑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아니 이렇게 고운 천사분들이 계시네. 제일 어르신이 어떻게 되세요?
-우리 둘이 제일, 84.
-여든넷이세요? 공주님이신데, 아직도.
-저는 85.
-대부분 70대, 80대 분들이신 거예요?
-네.
-너무 근데 고우세요, 다들.
-(해설) 평균 나이 78세. 벌써 9년 차 활동 중인 발레단입니다.
아미동 토박이인 할머니들은 마을 축제 때 뭉쳤던 것을 계기로 발레단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데요.
처음부터 순탄했던 건 아니라고 하네요.
너희가 나를 창피를 줄 거냐. 발레복이 허리 43인치에 들어가겠어?
나는 팔도 안 올라간다, 다리도 안 올라간다.
사람들이 내 흉볼 거야 이러면서 다 안 하신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발레복을 보시고는 너무 예쁘니까 며느리 줘야겠다,
손녀 줘야겠다는 욕심으로 참여하신 분들이 백세발레단이 탄생한 거죠.
-(해설) 발레단을 해 보자는 말에 손사래부터 치던 어머니들.
하지만 지금은 발레를 통해 자신감을 되찾고 그 누구보다 열정적인 노년기를 보내고 있다는데요.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천천히요. 하나, 둘, 셋, 넷.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돌아서요. 하나, 둘, 셋. 짝지 만나러 갑니다, 짝지.
-너무 잘하시는데요. 지난번 대회 이거로 공연하신 거예요?
-(함께) 네.
-작년에 라인댄스도 하고.
-라인댄스도 하시고? 라인댄스도 좀 보여주세요, 그러면. 하나.
-하나, 둘. 셋, 둘, 셋, 넷.
-이모 많이 늘었다.
-(해설) 발레를 신호탄으로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는 어머니들.
평생 먹고사는 일이 바빠 일찍이 글을 깨치지 못한 분들이 다반사.
나를 위한 삶이 1순위라는 요즘 한글을 배우는 재미에도 푹 빠졌다고 합니다.
-피읖을 쓰고 여기에 요, 요를 붙여야죠. 여기 피읖 하고 여기는 요야, 요 요.
동그라미 있다고 생각하고 요. 차표 했죠?
-(함께) 네.
-또 표 자로 시작하는 말 내가 많이 가르쳐 줬을 텐데.
-표정.
-남순이 이모한테 박수. 박수 세 번만 시작.
-(해설) 열정이 참 대단하시죠?
단어를 한 글자, 한 글자 쓰는 재미를 넘어 이제는 멋진 글도 쓰기 시작했다네요.
-양덕자 이모 아들한테 처음 글 배워서 쓴 일기, 편지 한번 읽어보세요.
-사랑하는 아들에게. 요즘 글을 배우다 보니 생각이 나서 몇 자 적는다.
우관아, 엄마가 말을 부드럽게 못 하고 너에게 무뚝뚝했던 점이 참 미안하다.
앞으로는 너에게 의지가 되고 힘이 되는 엄마가 되도록 노력할게.
눈물이 나서 못 읽겠네. 2024년 6월 2일 너의 제일 사랑하는 엄마가.
-할 때마다 눈물 나, 할 때마다 눈물 나.
이모가 우관이한테 사랑한다 표현해 본 적 있어요? 없잖아요.
그런데 편지로는 할 수 있었잖아. 그래서 글이 중요한 거예요. 내 마음을 표현한다는 게.
-수국. 수국아, 너는 행복해. 친구가 많아서 좋겠다. 그런데 코스모스는 외로워.
날씬한 몸매에 바람만 불어도 흔들려. 때로는 너를 보면 내 마음도 흔들린단다.
내가 이거 아니면 내가 죽는다, 이래서. 그래서 아프면서도 이걸 하니까 차차로 좋아지고.
그렇게 해야 내가 사니까.
내가 다른 거는 아무 즐거운 게 없는데 이거를 하니까 너무 즐겁고 행복하고 내 몸도 살살 낫는 것 같고요.
-(해설) 발레를 통해 위로와 일상의 활기를 선물받았다는 어머니들.
다양한 무대 경험이 쌓이자 자연스레 자존감도 업!
드디어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된 순간.
발레를 통해 적극적인 삶을 살게 된 어머니들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몸소 보여주고 계십니다.
-너무 잘하셨어요. 저기 발레하시고 나면서 뭔가 좀 내가 변한 게 있다, 삶에.
-너무 건강해지고요.
-아픈 데가 없어졌어.
-발레 이거 하고 나서 많이 좋아졌어, 운동을 하니까.
-이 발레가 건강 지킴이네.
-걷고 다니니까 그것이 생겨서. 근육이 생겨서.
-그렇지, 그렇지. 근육이 생겨서 힘이 생겨서. 너무 좋아, 내가 지금.
지금은 죽을까 싶어서 겁납니다. 우리가 이렇게 발레 하면서 좋은 세월을 살고 싶다는 마음뿐이거든요.
-(해설) 전쟁의 아픔을 딛고 부산의 명소가 된 아미동처럼 백세발레단은
힘들었던 삶을 이겨내고 아미동에 싱그러운 활력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부산 서구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 송도해수욕장에 왔습니다.
-여기 송도해수욕장 쫙 펼쳐지고 여기 너무 좋네.
송도해수욕장이 아마 부산에서 제일 먼저 개장한 해수욕장인 거로 아는데
주변에 경관도 좋고 케이블카부터 시작해서 많이들 찾아주셔야 할 것 같아.
너무 좋은데. 밑에 뚫려 있어. 물이 그냥 파릇파릇한 게 너무 멋지다.
-(해설) 아담한 해수욕장과 쪽빛 바다. 광안리나 해운대와는 또 다른 부산 바다의 멋이 느껴지는데요.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다 보면 10분이 순식간에 지나가네요.
-고맙습니다. 여기.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게 너무 좋은데. 마실 다니기 딱 좋은 날씨네.
-(해설) 송도 케이블카를 탔다면 빠질 수 없는 필수 코스가 있습니다.
바로 송도용궁구름다리.
암남공원에서 무인도인 동섬 상부를 연결한 길이 127m의 다리로 바다와
기암절벽이 빚어내는 자연 경관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진짜 좋다. 케이블카 타고 오면서 여기가 계속 여기가 보이거든요.
그런데 또 여기를 바라보는 거랑 또 여기에서 또 이렇게 반대로 저쪽을 바라보는 거랑
아주 사뭇 느낌이 다른데 둘 다 아주 매력적이에요.
마음에 이렇게 응어리진 것들을 바람이 싹 씻겨주는 것 같아.
지금 몸과 마음이 다 정화되는 그런 느낌이네. 너무 좋다.
-(해설) 일상의 스트레스를 확 날려주는 시원한 바다 풍경. 기분 전환 제대로 하네요.
송도에 반한 것 저뿐만이 아닌가 봅니다. 오가는 외국인 관광객들도 참 많더라고요.
-사우디아라비아.
-리얼리?
-리얼리? 생큐, 헤브 펀.
-(해설) 발 아래 펼쳐진 송도 바다의 시원한 매력. 잘 즐기고 갑니다.
암남공원에서 15분 남짓 달려 도착한 서구의 남부민동.
제가 이 동네를 찾은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실천으로 이어지는 나눔의 아이콘. 이태석 신부님.
-(해설) 바로 이태석 신부님을 만나러 왔는데요.
-우리 부산 서구에 또 자랑이시자 대표적인 인물이신 분이 우리 고 이태석 신부님이시잖아요.
-(해설) 우리에게 많은 울림을 주고 가신 고 이태석 신부님. 다들 기억하시죠?
오랜 내전으로 폐허가 되어가던 남수단에서 의술과 교육을 펼쳤던 분입니다.
아낌없는 사랑과 희생 정신을 보여주셨죠.
-마침 또 걷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네요.
여기 이태석 신부님 기념관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저거인가 보다.
-(해설) 서구에 이태석 신부님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기념관이 있더라고요.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여기 이태석 신부님 기념관 맞죠?
-맞습니다. 우리가 좀 잘 아는 울지마 톤즈로 많이 알려진 이태석 신부님.
-그렇죠. 영화로도 제작이 됐었죠, 울지마 톤즈.
-그렇죠, 그렇죠. 실제로 이태석 신부님이 태어나신 곳이거든요, 여기가.
-이 동네가요?
-이 동네가.
-(해설) 이태석 신부님은 부산 서구에서 나고 자랐는데요.
한국전쟁 후 천주교 살레시오수도회에서 이곳 서구의 피란민을 위해 50여 채의 집을 지어주게 됩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그 집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미국에서 온 선교사 알로이시오
신부님의 영향을 받은 그는 자연스럽게 가난한 청소년을 위한 신부가 되는 꿈을 꾸었답니다.
-그러면 신부님께서는 혹시...
-저는 이태석 신부님하고 같이 살았던 실제적으로 함께 살았던.
-진짜요?
-사람입니다. 제가 먼저 수도원에 들어와서 실은 제가 선배예요.
-수도원 선배님이시군요.
-그렇죠.
실은 이태석 신부님이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저희 동기들은 깜짝 놀랐죠.
왜냐하면 의사 선생님이 수도원에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거든요.
밖에서도 잘살 수 있는데 굳이 이렇게 수도원에 들어왔을까라고 생각하면서
같이 공부도 하고 같이 운동도 하고 클럽 활동처럼 음악도 같이 하면서 이렇게 보냈습니다.
-실제 이태석 신부님 키입니다.
-신부님께서 딱 들어오자마자 그냥 팔을 벌리고 딱 맞이해 주시네요.
-맞이해 주는 느낌이죠. 모든 사람을 환대하는 모습입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습니다.
멀리서 뵀을 때는 조금 작으시구나라고 이렇게 해서 가까이 이렇게 갔는데
저보다 눈높이가 조금 더 위에 계시는 것 같아요.
-제가 이태석 신부님 옆에 있으면 항상 이만큼 컸거든요.
-이만큼이요?
-그래서 제가 이만큼 크게 해달라고 이렇게. 이 정도.
-저보다도 크시네요, 좀.
-(해설) 이태석 신부님의 환영 인사를 받으며 기념관 내부로 들어섭니다.
-여기는 이제 이태석 신부님의 삶 전체를 이렇게 볼 수 있도록.
-일대기를 이렇게.
-연도별로 나열을 해놨어요.
-(해설) 이곳에서 신부님이 남기고 간 나눔의 의미를 헤아려 봅니다.
-어린 시절의 꿈이 신부가 되고 싶었는데 형님과 어머님 때문에
의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왜 의사가 되셨어야 했나요?
-바로 위의 형도 신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한 집에서 아들이 둘이나 다 신부가 되면 어머님 입장에서는 조금 서운하실 수 있으니까.
-좀 어렵지, 그렇죠. 또 10남매잖아요.
-(해설) 그렇게 집안 사정으로 신부라는 꿈을 접게 된 청년 이태석.
어떻게 하면 힘든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을까 고민하던 끝에 의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답니다.
그렇게 의대에 입학하고 군의관으로 복무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를 강력히 끌어당겼던 사제로서의 삶.
그렇게 자신의 삶의 가치를 따라 진정한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사제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살레시오에 들어와서 여러 가지 공부를 하다가 외국에 이태리에 유학을 갑니다.
거기서 선교사로 나가는 꿈을 체험해 봐요. 아프리카에 가서.
-이때 그러면 처음으로 아프리카에 가셔서.
-그렇죠.
-선교 체험을.
-그때 정말 이상하게도 톤즈라는 마을에 가게 되죠.
-(해설) 전쟁의 아픔이 채 가시지 않은 시절. 부산에서 태어나 가난을 겪었던 이태석 신부.
운명처럼 아프리카의 남수단 톤즈로 향했고 전쟁으로 고통받던 아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시작했습니다.
-여기 이렇게 지금 톤즈에서의 삶을 표현해놓은 건가요?
-그렇죠, 그렇죠. 저거는 이제 한센인들을 위해서 신발을 만들어주는 모습.
-신발을 또 제작해서.
-그렇죠.
-또 이거는 진료.
-진료.
-의대 나오셨으니까. 그런데 참 대단하시네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 참 정교하게 잘 만들었네요.
-저희도 깜짝 놀랄 정도로 잘 만들어주셨더라고요.
-안에...
-(해설) 톤즈에서의 생활이 생생히 전해지네요.
-마치 운명과 같았던 것 같아요. 실은 톤즈가 내전 때문에 다 폐허가 되다시피 했어요.
그런데 이태석 신부님이 가신 이후로 다 폐허가 된 병원도 재건을 하기 위해서
노력하셨고 또 학교도 이렇게 지으셨던 것이죠.
그런데 아무리 보내도 거기는 너무 부족하잖아요.
약품이 왔는데 약품을 넣을 냉장고는 어떻게 구했는데 그걸 돌릴 전기가 없으니
지붕에 올라가서 태양열을 설치해서 그거로도 전기를 돌리고.
이태석 신부님 병원이 유일하게 무료로 치료해 주는 병의원이다 보니
아주 먼 곳에서 일주일씩 걸어서 와서 살고자,
치료를 받고자 오는 사람들도 너무 많았던 거죠.
-(해설) 그리고 이태석 신부님은 음악의 힘을 전하고자 했는데요.
전쟁으로 상처받은 톤즈의 총, 칼 대신 악기를 쥐여줍니다.
음악을 통해 함께하는 기쁨을 알려주셨죠.
-이태석 신부님이 이렇게 열심히 생활하다 보니 병이 든 것을 눈치는 채셨어요.
이태석 신부님 한국에 나와서 건강검진을 했는데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어요.
그때 의사 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들었어요. 저를 조금만 살려주십시오.
제가 이럴 줄 모르고 병원하고 학교를 짓다 왔는데 조금만 더 있으면 다 지을 수 있을 것 같대요.
그때까지만이라도 조금 살려주십시오.
그리고 가끔 꿈에 아이들이 나타났다 다시 톤즈에 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죠.
-(해설) 하지만 결국 2009년에 48세의 나이로 선종하신 이태석 신부님.
-이태석 신부님의 선종 소식을 듣고 브라스 밴드 친구들이
이태석 신부님을 기억하고 추모했던 모습이에요.
-갑자기 울컥하네요.
-정말 7년 8개월의 그런 삶이 헛되지 않았고 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감동을 줬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싶어요.
-(해설) 강인한 전사를 자청하는 톤즈의 아이들.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울지 않는다는 아이들이 이태석 신부님의 선종 소식에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는데요.
신부님의 존재의 무게가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여전히 이태석 신부님의 정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제자이자 톤즈에서 한국으로 와 의사가 된 존 마옌 루벤.
-요즘 바쁘죠?
-(해설) 부산에서 의사로 재직 중인 존은 신부님이 생각날 때면 기념관을 찾곤 한다는데요.
참 친구 같았습니다. 가까운 친구. 약간 같이 있으면 행복하다. 뭐 이런 친구로 이제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진을 지금 보시면 제가 신부님 처음 왔을 때 여기 이렇게 기타를 쳤거든요.
기타를 조금 접고 제가 리코더를 부는 이거는 접니다.
제가 그 당시에 첫 멤버였거든요. 음악도 열심히 하고 신부님 사랑을 좀 받았죠,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해설) 이태석 신부님과 음악을 즐기고 오지마을 순회 의료 활동을 돕던 존은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답니다.
그는 신부님이 그랬던 것처럼 진심을 가득 담아 환자들을 대하는데요.
-오늘 좀 어떻습니까, 컨디션은.
-그냥 그래요. 속에 병이 있잖아.
-어머니는 조금 빨리 좋아질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포기하지 않고 또 희망을 가지고 있으면 진료가 잘 되니까.
-(해설) 신부님이 보시면 참 뿌듯하시겠어요.
-(해설) 존은 언젠가 남수단으로 돌아가 가난한 이를 위한 의사가 되기 위해 한국에서 의학을 배우고 있습니다.
-아직은 남수단 인구의 절반 이상 정도는 아직 어떤 의료서비스 보장을 못 받고 있는 상황이고.
특히나 힘든 사람을 도와줘야 한다는 그런 마음을 늘 가지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해설) 세상의 어둠에 다정히 손 내밀었던 이태석 신부님.
그가 실천한 나눔의 행복이 오래도록 더 많은 사람을 통해 전해지길 바랍니다.
-(해설) 어느새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하고 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충무동 골목시장에 다다르자 시끌벅적 정겨운 이야기 소리가 흘러넘치는 공간이 있더라고요.
바로 충무동 고갈비 거리입니다. 노릇노릇 익어가는 국민 생선, 고등어. 입구부터 기름 냄새가 진동하네요.
-여기 뭐, 냄새가 냄새가.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여기 뭐 팔아요?
-고갈비, 파전. 저기 빈대떡, 고갈비, 파전 이런 거 쭉 골목에 다 가게가 같이 있나 봐요.
-골목, 고갈비골목.
-여기가 혹시 제일 처음에? 여기가 거기구나.
-(해설) 이곳은 충무동 고갈비 거리가 형성될 무렵부터 이 자리를 지켜오고 있는 터줏대감 맛집입니다.
오랜 세월의 손맛으로 고갈비를 선보이는데요.
군침이 절로 도는 정겨운 비주얼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라고요.
-여기서 장사하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한 50년 됐어요.
-50년이요? 이 거리도 그러면 50년 이상 됐다는 거네요?
-그렇죠.
-이 골목시장 거리가.
-50년 넘었으면 넘었지.
-(해설) 그 추억의 맛 저도 한번 즐겨 보려 합니다.
-메뉴가 엄청 많네요. 그런데 가격이 대부분 다 1만 원 안쪽이네요.
제일 비싼 게 병어 무침. 제일 비싼 게 1만 5000원.
-병어 무침 1만 5000원.
-1만 5000원. 나머지는 다 1만 원.
-1만 원.
-8000원. 이렇게 저렴하게 맛있게.
-(해설) 요즘 1만 원에 어디서 이런 푸짐한 한 상을 즐기겠냐고요.
서민들이 하루에 고단함을 풀고 따스함을 채워갈 수 있는 최고의 공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산 서구의 고갈비 거리가 만들어진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데요.
국내 고등어 유통의 80% 이상을 담당하는 부산 공동어시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신선한 고등어로 이 충무동 일대에 고갈비 특화 거리가 들어섰다네요.
-고갈비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잘 먹겠습니다. 엄청 고소하네. 짭조름 하니.
고추랑 같이 썰어서 해주시니까 맛이 그냥 조화가 쫙쫙쫙 붙네요.
-딱 맞지, 딱 맞아.
-짭조름하면서 고소하면서 이렇게 얼큰한 맛이 딱 끝에 매겨지면서.
-맛있지.
-어머니 막걸리 하나 있어요? 막걸리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냥 못 먹겠는데. 막걸리 하나 주세요. 이거는.
오른손은 젓가락으로 저절로 가고 왼손은 저절로 술잔으로 가네.
비 오는 날 이 처마 밑에서 떨어지는 빗줄기 보면서 파전이랑 고갈비에
막걸리 이 조합은 돈으로 살 수 있는 맛이 아니에요. 너무 맛있는데요, 어머니?
-(해설) 언제나 우리 곁에서 따뜻한 한 끼를 내어주는 고갈비 거리.
이곳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과 함께 따스한 위로를 받고 간다고 합니다.
-(해설) 오래오래 건강하게 고갈비 거리를 지켜주시면 좋겠네요.
고갈비 한 접시를 즐기며 되돌아보는 서구에서의 하루.
따뜻한 정을 물씬 느끼고 가는 마실길입니다.
-(해설) 부산의 아픈 큰 현대를 품고 흘러가는 시간에 멋을 더해가는 동네, 서구.
이곳에서 만난 따뜻한 이야기가 치열했던 일상에 위로가 되기도 하는데요.
차곡차곡 쌓여가는 오랜 세월의 이야기가 빛나는 서구였습니다. 돌아와요
-모이시오! 금방 나오시네.
-다시 태어나도 해녀 하라고 해도 나는 하지. 안 하지는 않는다.
-다시마 자체가 수심이 깊고 파도가 센 곳에서 자라기 때문에
감칠맛이 우러나는 그런 장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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