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기
찬란한 유산 100선 - 꾸밈없는 아름다움을 담다, 백자대호
등록일 : 2025-03-04 17:11:30.0
조회수 : 611
-(해설) 도자기를 만드는 재료는 모두 자연에서 온 것들입니다. 흙과 물. 바람과 불. 그리고 사람의 손이 만나 빚어낸 그릇.
신석기 시대 토기에서 시작된 한반도의 그릇은 조선 시대에 이르러 찬란한 꽃을 피웠습니다.
그 가운데 소중한 보물. 백자대호가 있습니다. 역사 연구에서 도자기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보존 상태가 좋고 수량이 많으며 새겨진 문자나 문양은 시대를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도자기 중 자기는 초벌구이 후 유약을 발라 1100에서 1300도 고온에서 재벌하는 그릇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청자나 백자는 모두 자기로 분류되죠. 흔히 청자는 고려 시대.
백자는 조선 시대로 나누어 생각하기 쉬운데요. 사실 백자는 고려 시대에도 제작됐습니다.
우리나라 도자기가 청자 계통에서 백자 계통으로 바뀌는 시기는 조선 초인 15세기경입니다.
특히 15세기 후반 이후 생산량이 늘면서 백자가 주류를 이룹니다.
이런 역사 속에서 백자 대호가 만들어졌습니다.
-(해설) 높이 52.6. 너비 45.3cm의 보기 드문 크기. 완만한 어깨에서 편안함이 느껴집니다.
-(해설) 백자 제작에는 불순물이 거의 없는 흙과 철분 함량이 낮은 투명한 유약을 썼습니다.
고온의 불과 산소 농도 조절 등 고도로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이 시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게 되는데 특히 일본은 조선의 사기장을 납치하고 가마터를 파괴했습니다.
두 번의 전쟁으로 조선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도자기 제작 여건도 크게 악화되어 오랫동안 회복기를 거쳐야 했습니다.
백자대호는 안정기에 속하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숙종 재위 기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나라 안팎이 안정되는 과정에서 왕실과 중앙관청용 백자를 생산하는 관요도 재정비됐습니다.
그 결과 도자기 제작 여건도 크게 개선됩니다.
백자철화용문호와 백자대호는 그즈음 제작됐으며 백자청화운룡문호는 이후 1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백자청화운룡문호는 산화코발트를 안료로 써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도화서 화원이 그린 듯 화려하고 세밀하지만 거침없는 회화적 묘사가 특징으로 세로로 긴 항아리 입호입니다.
백자철화용문호에는 산화철 안료로 지네를 닮은 용과 풀처럼 생긴 구름을 그려 넣었는데요.
전체 모양은 달처럼 둥근 원호입니다. 세밀하지는 않지만 생동감 있고 해학미 넘치는 그림은
왕실과 중앙관청용과는 다른 서민들이 사용하는 그릇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부산박물관 대표 유물로 꼽히는 세 점의 도자기 중 백자대호만 보물로 지정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해설) 일체의 장식과 문양 없이 담백하고 순수한 모습.
백자대호는 그저 자연을 닮고 싶었던 우리 선조들이 남긴 소중한 국가유산입니다.
신석기 시대 토기에서 시작된 한반도의 그릇은 조선 시대에 이르러 찬란한 꽃을 피웠습니다.
그 가운데 소중한 보물. 백자대호가 있습니다. 역사 연구에서 도자기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보존 상태가 좋고 수량이 많으며 새겨진 문자나 문양은 시대를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도자기 중 자기는 초벌구이 후 유약을 발라 1100에서 1300도 고온에서 재벌하는 그릇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청자나 백자는 모두 자기로 분류되죠. 흔히 청자는 고려 시대.
백자는 조선 시대로 나누어 생각하기 쉬운데요. 사실 백자는 고려 시대에도 제작됐습니다.
우리나라 도자기가 청자 계통에서 백자 계통으로 바뀌는 시기는 조선 초인 15세기경입니다.
특히 15세기 후반 이후 생산량이 늘면서 백자가 주류를 이룹니다.
이런 역사 속에서 백자 대호가 만들어졌습니다.
-(해설) 높이 52.6. 너비 45.3cm의 보기 드문 크기. 완만한 어깨에서 편안함이 느껴집니다.
-(해설) 백자 제작에는 불순물이 거의 없는 흙과 철분 함량이 낮은 투명한 유약을 썼습니다.
고온의 불과 산소 농도 조절 등 고도로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이 시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게 되는데 특히 일본은 조선의 사기장을 납치하고 가마터를 파괴했습니다.
두 번의 전쟁으로 조선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도자기 제작 여건도 크게 악화되어 오랫동안 회복기를 거쳐야 했습니다.
백자대호는 안정기에 속하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숙종 재위 기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나라 안팎이 안정되는 과정에서 왕실과 중앙관청용 백자를 생산하는 관요도 재정비됐습니다.
그 결과 도자기 제작 여건도 크게 개선됩니다.
백자철화용문호와 백자대호는 그즈음 제작됐으며 백자청화운룡문호는 이후 1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백자청화운룡문호는 산화코발트를 안료로 써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도화서 화원이 그린 듯 화려하고 세밀하지만 거침없는 회화적 묘사가 특징으로 세로로 긴 항아리 입호입니다.
백자철화용문호에는 산화철 안료로 지네를 닮은 용과 풀처럼 생긴 구름을 그려 넣었는데요.
전체 모양은 달처럼 둥근 원호입니다. 세밀하지는 않지만 생동감 있고 해학미 넘치는 그림은
왕실과 중앙관청용과는 다른 서민들이 사용하는 그릇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부산박물관 대표 유물로 꼽히는 세 점의 도자기 중 백자대호만 보물로 지정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해설) 일체의 장식과 문양 없이 담백하고 순수한 모습.
백자대호는 그저 자연을 닮고 싶었던 우리 선조들이 남긴 소중한 국가유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