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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유산 100선 - 조선 후기 지역 불교문화의 꽃, 마하사 현왕도와 석조석가여래삼존상
등록일 : 2025-05-19 15:42:43.0
조회수 : 883
-(해설) 처음에는 그저 화강암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돌이 조금씩 부처의 형상으로 다듬어질수록 만든 이의 손길은
조심스러워지고 마음은 공손해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수개월 혹은 수년이 지나 완성된 석조상은 지금에 이르러 중생들을
위로하는 마음의 안식처로, 조선 후기 지역 불교 미술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금빛 나는 연꽃이라는 뜻의 금련산.
학령산 줄기의 하나로 천년고찰 마하사를 품고 있으며 계곡이 다양하고
숲길이 좋아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인데요.
이 금빛 연꽃산 서북쪽 기슭에 마하사가 있습니다.
남겨진 기록에 따르면 신라 내물왕 39년에 아도 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데요.
긴 시간을 버텨왔음에도 험난한 시절을 비껴가지 못해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고 18, 19세기에 이르러 단계적으로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됐습니다.
절의 규모는 작고 모습은 소박하지만 부산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유서 깊은
사찰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나한도량으로 의미가 깊은 마하사.
설법전 외벽에 그려진 그림에서 마하사 나한도량의 설화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느 동짓날 밤, 스님이 불씨를 구하러 봉수대를 찾아가니 봉수꾼이 말하기를
동자승에게 불씨를 주고 팥죽도 먹여 보냈다고 하였다.
절로 돌아와 보니 화덕에선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스님이 기이함을 느껴 나한전에 들어가 보니 16나한 중 한 나한의 입술에 팥죽이 묻어 있었다.
스님은 나한의 신통함에 감읍하며 자신의 게으름을 반성했다고 합니다.
그 16나한을 모시고 있는 마하사 나한전.
중생들의 기도를 들어주고 소원을 성취시켜준다는 나한은 설화에서
신환으로 이렇듯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는데요.
나한의 신통력이 현실로 이어진 걸까.
지난해 11월 나한전 영산회상도 복장물에서 사리 8과가 발견됐습니다.
-영산회상도가 그때 당시 벽면 쪽에 가까이 있다 보니까
습기가 차서 보존 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영산회상도 뒤편에 복장이 있었는데
그 복장을 열어보니까 여덟 과가 나왔던 거예요.
그때 당시 문화재위원들이 자료들을 다 확보해서 영산회상도에 같이 모시는 게
좋겠다 해서 그렇게 합의를 해서 지금 현재 영산회상 뒤편에 모셔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해설) 간절한 마음으로 현생의 소원을 빌고 나한전을 돌아 나오면 죽음 이후에 평안을 기도하는 곳.
비장전을 마주하게 되는데요.
그곳에 현안과 그 권속들을 그린 조선 후기의 불화, 마하사 현왕도가 있습니다.
-마하사 현왕도는 18세기 말에 조성이 됐습니다.
우리가 저승에 가게 되면 심판을 받게 되는데 대왕이 있습니다.
대왕 앞에 우리는 심판을 받게 되는데 그런 심판을 받는 차원에서 지장전에서
모셔져 있는 게 상례인데 저 현왕도는 지금 현재 영인본만 지금 마하사
지장전에 모셔져 있고 실제 실물은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지금 모셔져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해설) 비단 바탕에 채색을 한 마하사 현왕도는 현왕이 정면을 향해 앉아 있고
예를 갖춘 권속들이 좌우 대칭으로 표현돼 있습니다.
하지만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현왕이 측면상을 취하고 동적인 구도를 나타내는데요.
조선 후기 불교 미술 양식의 변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러 번의 개축으로 전통적인 가람 형식은 벗어났지만 단정하게 배치돼 있는 마하사.
사찰의 중심,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법당 내부에는
부산시 문화유산 자료로 지정돼 있는 석조석가여래삼존상이 봉안돼 있습니다.
-중앙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시고 좌우 부처가 모셔져 있습니다.
불상의 크기로 봤을 때는 그다지 높지 않지만 그러나 고려시대나 신라시대에
비해서 얼굴이 네모 형상을 가지고 있는 이런 형태들이 조선시대의 후기에 조성된 특색으로 보여집니다.
-(해설) 조선 후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한 석조석가여래삼존상.
네모형의 얼굴에 볼록한 눈두덩이, 작고 오똑한 코에 가늘면서 굵은 입술,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한 석가여래상은 아무 수인도 취하지 않은 자세로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좌우 협시보살 역시 석가여래상과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표현돼 있는데요.
수발은 흑칠을 하고 가장자리는 녹청색으로 표현돼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둥근 얼굴에 풍만하면서 당당한 신라 불상에 비해
석조석가여래삼존상은 네모난 얼굴에 단순하게 표현된 것이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해설) 1000년 고찰에서 찾은 조선 후기의 문화유산. 그 빛나는 가치가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수많은 불자들이 수많은 세월에 기도했던 그런 여러 원력들이 포함돼
있는데 후손들에게 전해주어야 할 그런 가치 있는 보물이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해설) 시대의 특징을 고스란히 품고 역사를 견뎌온 우리의 문화유산.
이제는 우리가 배우고 아끼며 소중히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 돌이 조금씩 부처의 형상으로 다듬어질수록 만든 이의 손길은
조심스러워지고 마음은 공손해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수개월 혹은 수년이 지나 완성된 석조상은 지금에 이르러 중생들을
위로하는 마음의 안식처로, 조선 후기 지역 불교 미술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금빛 나는 연꽃이라는 뜻의 금련산.
학령산 줄기의 하나로 천년고찰 마하사를 품고 있으며 계곡이 다양하고
숲길이 좋아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인데요.
이 금빛 연꽃산 서북쪽 기슭에 마하사가 있습니다.
남겨진 기록에 따르면 신라 내물왕 39년에 아도 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데요.
긴 시간을 버텨왔음에도 험난한 시절을 비껴가지 못해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고 18, 19세기에 이르러 단계적으로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됐습니다.
절의 규모는 작고 모습은 소박하지만 부산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유서 깊은
사찰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나한도량으로 의미가 깊은 마하사.
설법전 외벽에 그려진 그림에서 마하사 나한도량의 설화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느 동짓날 밤, 스님이 불씨를 구하러 봉수대를 찾아가니 봉수꾼이 말하기를
동자승에게 불씨를 주고 팥죽도 먹여 보냈다고 하였다.
절로 돌아와 보니 화덕에선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스님이 기이함을 느껴 나한전에 들어가 보니 16나한 중 한 나한의 입술에 팥죽이 묻어 있었다.
스님은 나한의 신통함에 감읍하며 자신의 게으름을 반성했다고 합니다.
그 16나한을 모시고 있는 마하사 나한전.
중생들의 기도를 들어주고 소원을 성취시켜준다는 나한은 설화에서
신환으로 이렇듯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는데요.
나한의 신통력이 현실로 이어진 걸까.
지난해 11월 나한전 영산회상도 복장물에서 사리 8과가 발견됐습니다.
-영산회상도가 그때 당시 벽면 쪽에 가까이 있다 보니까
습기가 차서 보존 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영산회상도 뒤편에 복장이 있었는데
그 복장을 열어보니까 여덟 과가 나왔던 거예요.
그때 당시 문화재위원들이 자료들을 다 확보해서 영산회상도에 같이 모시는 게
좋겠다 해서 그렇게 합의를 해서 지금 현재 영산회상 뒤편에 모셔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해설) 간절한 마음으로 현생의 소원을 빌고 나한전을 돌아 나오면 죽음 이후에 평안을 기도하는 곳.
비장전을 마주하게 되는데요.
그곳에 현안과 그 권속들을 그린 조선 후기의 불화, 마하사 현왕도가 있습니다.
-마하사 현왕도는 18세기 말에 조성이 됐습니다.
우리가 저승에 가게 되면 심판을 받게 되는데 대왕이 있습니다.
대왕 앞에 우리는 심판을 받게 되는데 그런 심판을 받는 차원에서 지장전에서
모셔져 있는 게 상례인데 저 현왕도는 지금 현재 영인본만 지금 마하사
지장전에 모셔져 있고 실제 실물은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지금 모셔져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해설) 비단 바탕에 채색을 한 마하사 현왕도는 현왕이 정면을 향해 앉아 있고
예를 갖춘 권속들이 좌우 대칭으로 표현돼 있습니다.
하지만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현왕이 측면상을 취하고 동적인 구도를 나타내는데요.
조선 후기 불교 미술 양식의 변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러 번의 개축으로 전통적인 가람 형식은 벗어났지만 단정하게 배치돼 있는 마하사.
사찰의 중심,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법당 내부에는
부산시 문화유산 자료로 지정돼 있는 석조석가여래삼존상이 봉안돼 있습니다.
-중앙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시고 좌우 부처가 모셔져 있습니다.
불상의 크기로 봤을 때는 그다지 높지 않지만 그러나 고려시대나 신라시대에
비해서 얼굴이 네모 형상을 가지고 있는 이런 형태들이 조선시대의 후기에 조성된 특색으로 보여집니다.
-(해설) 조선 후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한 석조석가여래삼존상.
네모형의 얼굴에 볼록한 눈두덩이, 작고 오똑한 코에 가늘면서 굵은 입술,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한 석가여래상은 아무 수인도 취하지 않은 자세로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좌우 협시보살 역시 석가여래상과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표현돼 있는데요.
수발은 흑칠을 하고 가장자리는 녹청색으로 표현돼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둥근 얼굴에 풍만하면서 당당한 신라 불상에 비해
석조석가여래삼존상은 네모난 얼굴에 단순하게 표현된 것이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해설) 1000년 고찰에서 찾은 조선 후기의 문화유산. 그 빛나는 가치가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수많은 불자들이 수많은 세월에 기도했던 그런 여러 원력들이 포함돼
있는데 후손들에게 전해주어야 할 그런 가치 있는 보물이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해설) 시대의 특징을 고스란히 품고 역사를 견뎌온 우리의 문화유산.
이제는 우리가 배우고 아끼며 소중히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