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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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산책

등록일 : 2017-10-21 11:43:00.0
조회수 : 271
-지난 시간에 저희는 음식물 쓰레기와
음주, 흡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음식물 쓰레기를 줄여 통일기금을
마련하고 음주와 흡연을 줄여 사회적
손실을 막자는 것이 지난 시간 말씀드린
것의 골자였죠.
이 세 가지 주제만 놓고 본다면 굉장히
구체적이지만, 실은 넓게 보자면 인간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보면
됩니다.
음식물 쓰레기 문제나 술 문화, 그리고
흡연은 모든 인간의 욕망이 불러온
사회의 병폐입니다.
그렇다면 사회를 병들게 하는 이들을
줄이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바로 욕망의 크기를 줄이면 됩니다.
그렇다면 욕망은 어떻게 줄여야 할까요?
요즘 유행하고 있는 삶의 방식 중
미니멀라이프라고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최소화로 줄여 산다는
뜻인데 주로 집에 있는 가구를 줄이거나
갖고 있는 옷의 개수를 줄인다든지
하면서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미니멀라이프의 본질은 소유욕을 버리는
데 있습니다.
단순히 물건을 버리고 여백을 늘리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불필요한 소유를 버리고 새로운
소유욕을 갖지 않은 것이 핵심입니다.
하지만 욕망이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서 집을 비우는 것처럼 바로
버려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인 겁니다.
정전에 등장하는 호미 현인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오랫동안 호미 하나로 농사를 짓던 어진
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그는 더 이상 세속과 인연이
없다고 생각하고서는 출가를 결심했는데
정들었던 호미를 버릴 수 없어서 깊은
곳에 숨겨 두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수행자가 되어서도 그 호미가
그리워서 다시 환속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러기를 여러 번 출가와 환속을 여섯
번이나 반복하던 그는 일곱 번째 출가에
앞서 호미를 버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호미 현인은 눈을 감고 호미 자루를
단단히 쥐고서는 곧장 강으로
던져버렸습니다.
그러고는 외쳤습니다.
나는 이겼다.
마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던 왕이 그
소리를 듣고 나는 지금 전쟁에서
승리하고 오는 길인데 당신은 무엇을
이겼다는 말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호미 현인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왕은 비록 천만 번의 승리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번뇌를 정복하지 못한
것이라서 진정한 승리자가, 승리자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의 탐욕을 억제하고
번뇌를 정복하였기 때문에 진정으로
이긴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가 던진 것은 호미였지만, 실제로는
호미에 대한 집착을 내던졌기 때문에
진정한 자신의 승리를 이루어낸
것입니다.
현인이야 호미와 집착을 한 번에
버렸다지만, 보통 우리는 호미만 내던질
줄 알지, 집착까지 한 번에 던져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욕심을
버리는 특별한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수행인데요.
우리가 스님들을 일컬어 수행자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호미 현인은 수행을 통해 호미에
집착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집착을
강물에 내던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수행, 수행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흔히 쓰한 말 중 업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인과를 뜻하는데 몸과 입,
생각으로 짓는 모든 행위를 뜻합니다.
불교에서는 업을 세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바로, 몸으로 짓는 업인 신업.
입과 말로 짓는 업인 구업.
그리고 생각으로 짓는 의업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때렸다고
합시다.
이때 때리는 행위는 신업입니다.
그러면서 말로써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이것은 구업이 됩니다.
그리고 애초에 그를 때리고자 했던
마음을 품었을 때, 그것은 뜻으로 짓는
업이므로 의업이 됩니다.
물론 이 세 가지는 같이 나타날 수도
있고 각각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또 의도를 가지고 지을 수도 있고
모르고 지을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업입니다.
길을 가다가 실수로 지렁이를 밟아
죽였다면 그것 역시 몸으로 지은
업입니다.
의도했든 아니든 우리는 늘 업을 짓고
살아갑니다.
몸으로, 입으로, 생각으로도 업을 짓지
않고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겠죠?
그렇기 때문에 이 삼업을 짓지 않고
청정히 하는 것이 바로 수행이며
불교에서는 이러한 수행이 성불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출가하여 가장 처음 읽는 경전이
초발심자경문입니다.
이 경전에 이르시길, 선남선녀에게 세
가지 법이 있다면 진리의 도량에 이르게
되나니, 그 세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는 신체의 청정이요, 둘째는 입의
청정이요, 셋째는 생각의 청정이다.
이 세 가지 법을 갖추면 부처님의
도량에 이르게 된다.
몸을 가벼이 움직이지 않으면 산란한
마음을 다스려 선정을 이루고 말이
적으면 미혹을 들이켜보아 지혜를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설명하자면, 앞서 말한 신구의
삼업을 청정해야 하는 것을 수행의
기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구의 3업을 짓지 않기 위해
수행을 통해 몸과 입 그리고 생각을
청정하게 하는 것과 욕망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다시 물을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욕망, 욕심은 나쁜 업을 짓게
하는 빌미를 제공합니다.
아주 단순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술을 탐하는 욕심을 내면 술을 과하게
마시게 되고 그러다 보면 술자리에서
남의 험담을 한다든지 말싸움을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겠죠?
술을 탐하는 욕심이 저절로 구업을 짓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주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남의 물건을 탐해서 훔친다든지 욕심이
과해서 남을 상하게 하는 일은 아주
비일비재하게 나타납니다.
음식물 쓰레기를 남겨서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도 업이며 담배를 피워서
자신의 몸과 남의 몸을 상하게 하는 것
역시 업입니다.
결국 욕망은 끊임없이 나쁜 업을 짓게
하고 나쁜 업이 쌓이다 보면 자신에게
과보로 돌아오게 하는 겁니다.
화엄경에 이르시길, 중생은 4대로
이루어져 그 안에는 자아의 실체가 없고
모든 존재의 본성은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과보를 받는 것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그 업이라는 것도 실체는 없다.
마치 맑은 거울에 비친 그림자가 여러
가지이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다.
종자와 밭이 서로 모르지만 싹이 트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다.
많은 새가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다.
지옥의 고통이 따로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다고
했습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의 업은 무엇
때문에 쌓이고 무엇 때문에 사라지고
하는 실체가 없습니다.
앞서 아주 단순하게 업의 원리에 대해
말씀드렸지만, 사실 우리는 일상에서
인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업을 짓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수학 공식을 풀듯이 명확한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업을 짓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은 쉽게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수행을 통해 삼업을 끊임없이
다스리고 단속하여 나쁜 업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이라고 하면 성직자나
하는 것이라고 여겨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수행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며
누구나 마음만 가지면 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수행이란 닦을 수에 행할 행 자를 써서
말 그대로 닦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거울을 볼 때, 거울이 더러우면
얼굴이 잘 안 보이겠죠?
그럴 때는 거울을 싹싹 닦아내면 됩니다.
수행이란, 그처럼 더러운 것을 닦는
일입니다.
거울을 닦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입니다.
수행도 그처럼 어렵고 까다로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알고서
고쳐나가는 일인 것입니다.
앞서 신구의 삼업은 업을 짓는 방법에
따라 나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좋은 방향으로
돌리는 방법 역시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먼저 신업은 남을 죽이는 살생, 남의
것을 훔치는 투도, 부정한 남녀의 관계,
싸움을 하지 않는 것으로 닦을 수
있습니다.
또 구업은 거짓말을 하는 망언, 사이를
이간질하는 양설, 험담을 하는 악구,
함부로 말하는 기어를 지저르지
않음으로써 닦을 수 있습니다.
또 의업은 탐하는 탐욕, 화내는 진에,
잘못된 생각을 하는 사견.
이것을 각각 행하지 않는 것으로 닦을
수 있습니다.
모두 합쳐 열 가지의 선업을 닦는
일입니다.
이 열 가지를 엄격하게 지키는 것을
십선계라고 합니다.
불교의 수행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 중에서도 일반인들이
실생활에서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십선계를 지키는
십선수행입니다.
제가 불러드리는 십선수행을 잘 따라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 불살생.
살생을 하지 않고 모든 생명을
살리겠습니다.
둘, 불투도.
남의 것을 훔치지 않고 베푸는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셋, 불사음.
삿된 음행을 하지 않고 청정한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넷, 불망어.
거짓된 말을 하지 않고 진실한 말로써
살아가겠습니다.
다섯, 불기어.
가식된 꾸밈말을 하지 않고 항상 법다운
말로 살아가겠습니다.
여섯, 불양설.
이간하는 말을 하지 않고 화합된 말로써
살아가겠습니다.
일곱, 불악구.
악한 말 하지 않고 부드러운 말로써
살아가겠습니다.
여덟, 불탐욕.
탐내는 마음을 버리고 보시의 마음으로
생활하겠습니다.
아홉, 부진에.
성내는 마음을 내지 않고 자비의
마음으로 생활하겠습니다.
열, 불사견.
삿된 견해를 갖지 말고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매일매일 거울을 보고 이 열 가지를
읊으시기 바랍니다.
이 열 가지만 실생활에 적용한다면 나쁜
행동을 미리 예방할 수도 있고 행여
나쁜 일을 저질렀다고 해도 금세
반성하고 참여할 마음 가짐을 갖게
됩니다.
십선수행은 어려운 수행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릴 때 모두 도덕과 윤리를
공부했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해치는 것이 나쁜 일임을
모르는 사람도 없고 거짓말이 나쁘다는
것도 다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남을 쉽게 해하고 나쁜
마음도 내고 욕심도 부립니다.
너무 쉽게 습관적으로 하는 나쁜
행동이라 도덕적 해이가 만연해진
겁니다.
십선수행은 나쁜 일이 나쁘다는 것을
계속해서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열 가지의 수행법을 매일매일 읽으면서
나쁜 생각을 조금씩 줄여나가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십선수행이 습관처럼 자리
잡으면 자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줄
알게 되고 보다 견고한 마음을 가지게
됨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견고한 마음자리에 삿된
욕망이나 나쁜 생각은 바늘구멍 하나
내지 못합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겠죠?
그렇기에 매일 반복하고 이해하고
습득하고 몸에 완전히 배일 때까지
끊임없이 노력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반복하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수행이라고 하는 겁니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조금 어려운 부처님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항상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생각이
나쁜 업을 짓지 않도록 경계하고
다스려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나쁜 죄를 지을 때 그것이 죄인
줄 알고 짓는 것과 모르고 짓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알고도 죄를 짓는 자는 최소한 마음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잘못되었음을
인식할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르고 짓는 죄는 모르기 때문에
마음에 거리낄 것도 없어서 다음에
똑같은 죄를 반복하기 쉬운 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삼업을
경계하라고 일러 드렸습니다.
이렇게 배우셨으니 이제 여러분은 문득
내 입이 나쁜 말을 내뱉을 때 이것이
구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
또 함부로 나쁜 생각을 갖기를
두려워하실 겁니다.
이 정도면 수행의 절반을 익힌 셈입니다.
나쁜 것임을 알고 옳지 않은 것임을
아는 것만으로도 나쁜 업을 지을
가능성을 절반이나 줄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술과 담배, 음식물 쓰레기
말고도 수많은 폐악으로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의 구성원은 결국 개개인인
겁니다.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은 사회 자체가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인
겁니다.
다만 사회를 치유하는 것도 우리
개개인인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식이 변하면
사회는 자연스럽게 치유되고 정화될 수
있습니다.
십선수행을 통해 개인의 의식을
변화시킨다면 우리 사회는 더욱 살기
좋은 세상, 행복한 사회로 변할
것입니다.
부산 시민 경남 도민 여러분, 시청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열심히, 행복하게 잘 삽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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