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산책
토요일 오전 8시 30분
TV
종영

다시보기

마음의 산책

등록일 : 2018-02-12 17:34:01.0
조회수 : 299
-참회의 삶은 최고의 행복.
행복은 형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삶의 진면목은 행복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줍니다.
자신에게 충실한 삶이 진정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 복된 삶을 영위하려면 반드시 지나야
할 관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자신에게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군가 나를 즐겁게
해주면 호감을 보이고 누군가 좋으면
뭐든 주고 싶어 합니다.
이유 없이 주고 싶은 마음이 참된
공양입니다.
그래서 일체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
참회 공양이라고 합니다.
참회는 자기 발전과 변화의 시작입니다.
옛날에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얼굴이 언청이였습니다.
신체에 결함이 있는 사람은 그 아픔
때문에 감정이 폭발하면 감당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더구나 여성이 자기 외모에 결함이
있으니 그 아픔이 작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시집을 가서 아이를
가졌습니다.
산달이 점점 다가올수록 이 여인은
초조하고 두려웠습니다.
이윽고 캄캄한 밤 중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몸을 움직이기 어렵고 그 혼미한
와중에도 등불을 들어 아이의 얼굴을
비춰봤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혹여 자신을 닮지는 않았을까 하고
쳐다본 것입니다.
뉘우칠 참은 산스크리트 크샤마를
음역한 것으로 뉘우치다, 참다라는
뜻이고 역시 뉘우칠 회는 이것을 의역한
것입니다.
불가에서는 죄를 참회하는 방법으로
포살과 자자 등의 필수적인 의식을
치릅니다.
자자는 매년 여름 안거 마지막 날에
수행자들이 모여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서로 죄를 비판하며 참회하는
의식입니다.
참회를 할 때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는데 이를 참회의 5연이라고 합니다.
이 5연이란, 첫째 시방의 불보살을
영접하고 둘째 참회의 주문을 암송하고
셋째 자기의 죄명을 고백하고 넷째
서원을 세우고 다섯째 붓다의
가르침대로 증명을 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참회란 지은 죄를
뉘우치고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말합니다.
복불가사진, 이 말의 의미는 복을 다
받지 말라.
이 말은 설사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재력이나 기타 의식주 문제에 있어서
넉넉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다 쓰면서
살지 말고 언제나 절약하고 검소하며
다른 사람의 사정도 살펴 가며 살라는
뜻입니다.
만약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복이라고
해서 그것을 다 쓴다면 반드시 그
복력은 고갈되어 곧 바닥이 나고 마는
것을 스스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인연은 외롭고 곤궁할
것입니다.
설사 흘러가는 시냇물이 무한하다
하더라도 내가 쓸 물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흘러가는 물마저 아껴 써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사람들의 삶의
참모습입니다.
심오한 철학이든 평범한 진리이든 간에
눈으로 읽고 가슴으로 느끼고 몸으로
실천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세상살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절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마음의 변화는 눈 깜짝할 사이에 십만
팔천 리를 간다고 했습니다.
나는 마음보다 빠른 어떤 것도 보지
못했다.
비유하려면 비유할 수가 없다.
마치 원숭이가 나뭇가지를 타고
그사이를 다닐 때 하나를 놓자마자 다른
하나를 잡고 쉼 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마음도 그와 같아서 앞생각, 뒷생각이
동일하지 않는 것이 어떠한 방편으로도
모색할 수가 없다.
이처럼 마음은 진실로 빠르게
돌아다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네 범부로서는 마음을
쉽게 관찰할 수가 없습니다.
항상 마음을 잘 다스려 전쟁과 테러,
빈부격차, 폭력, 정신적 공황이 없는
원융무애한 대자비와 대자유의 세계를
인류에게 선물해야 하겠습니다.
행주자와 어묵동정을 실천하자.
우리 중생은 무시 이래로 내려오면서 한
생각이 미흡하여 본래 청정한 성품을
어기고 허망한 육근에 얽매어 악업의
인과를 짓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생은 우선 악업을 벗어나야 자기의
행복을 개척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각자 노력에 달려있지만
시간적으로는 현실의 노력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득히 먼 과거로부터
내려오면서 업을 지어온 인과의 업장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든 차별을 속세로부터 지어온
자기 업력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원인을 먼저 알아야 자신의 업장을
벗어나는 길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바로 고행에 얽힌 업을 벗어나
행복의 길을 개척하는 자신의 길을
가르친 것입니다.
불법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고 가장
가까운 자신에게 있습니다.
책에서는 마음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마음으로 만 가운데 불법이 있고
용으로는 행주자와 어묵동정에 있습니다.
특히 불교의 신앙을 행주자와
어묵동정인 자기 행위의 힘을 믿는
것이고 심적불인 자기 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 마음과 자기 행위를
믿고 자신의 부처가 되고자 우선 불법성
삼불을 믿는 것입니다.
삼불을 신앙하는 데는 신의 행정으로
믿어 불법을 알고 보면 불법성 삼보와
자신이 둘이 아닌 하나 된 진리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불교의 신앙 목적은 자기 마음과
자기 행위를 믿는 것입니다.
오타성을 가진 타율적인 종교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서 힘을 찾는 자율적인
종교입니다.
우리 중생의 본성은 업장에 얽혀있어
눈먼 장님과 같이 어두운 구렁텅이에
빠져 있습니다.
이 업장을 해탈하고 나면 스스로 광명의
길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업장이 되는 것은 바로 행주자와
어묵동정에 있는 자기 행위를 바로 하고
못하는 데 달려있습니다.
즉 몸으로 짓는 살생, 도둑질, 오명,
악구, 기여, 양설 등의 행위와 마음으로
짓는 탐심, 진심, 치심 등으로 일어나는
행위가 자성, 자기를 얽어매어 업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 업장을 벗어나려면 스스로 모든
행위에서 지은 잘못된 허물을 늘
참회하고 행주자와 어묵동정을
생활화하여 선업을 지어야 하고 나아가
본성을 밝히는 마음의 공부를 잠시도
쉬지 않고 늘 닦아야 합니다.
불교의 목적은 밖으로는 착한 선업을
닦고 안으로는 마음을 연마하여
일체중생이 다 함께 성불하는 데 그
가치가 있습니다.
원효대사는 의상대사와 같이 중국에
가서 법을 가지고 길을 떠났다가 중도에
날이 저물어 고총사에서 잠을 자는데
갈증이 나 물을 찾다가 그릇에 담긴
물을 달게 마시고 갈증을 면하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물이 담겨있던
그릇은 바로 해골 바가지여서 돌연
구역질이 났습니다.
그러다 문득 생각해보니 어젯밤을 물을
마실 적에 시원하고 마음이 편하던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까닭이오, 해골을
보고서야 비로소 더러운 생각에 구토가
나니 이른바 심생적종종법생하고
심멸적종종법멸이니라.
상대가 오직 마음이오, 만법이 또한
식이라는 말이 어찌 우리를 속이랴.
만밖에는 법이 없거늘 어찌 따로 법을
고할 것이 있으랴 하고 그곳에서 의상과
이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함경을
세웠습니다.
사람 마음마다 본래 한 부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부처를 알면 언제 어디서라도
부처를 늘 볼 것입니다.
인생이란 꿈과 같습니다.
꿈속에 있는 동안 한 생각이라도
긍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고통과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번뇌, 망상으로부터 편해질 수 있는
비결입니다.
역지사지와 수처작주하는 삶을 살자.
가소기우자 기우갱멱우.
작래무영수 소진해중구.
우습다.
소를 탄 자여,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구나.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다가 저 바다의
거품을 다 태워버리라.
선가에서는 마음을 찾는 일을 소를 찾는
일에다 비유하였습니다.
마음의 소라 하여 심우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소를 찾는 과정을 그린
심우도라는 그림이 유명합니다.
소를 탄 사람, 소를 찾는 사람, 소를
먹이는 사람 등으로 부릅니다.
난행고행을 하면서 소를 찾아 나섰지만
소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정작 자신이
타고 있습니다.
찾아 나설 줄 아는 일이 벌써 그
찾으려는 소가 하는 일입니다.
소가 아니면 그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 글은 조선 시대 소요 태능 스님의
게송입니다.
알고 보니 소를 타고 소를 찾는 일을
하였습니다.
참 너무나 가소로운 일이었습니다.
마치 토끼의 뿔과 같은 것이며 거북의
털과 같은 일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다가 바다의 물거품을 다
태워버린다니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아예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죠.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찾는다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온 천지가 마음이며 우주만유가 다
마음인데 무엇을 찾는다는 말인가요.
진실로 가소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천하를 지휘하며 마음을 찾는다는
나그네들은 이 말이 가진 뜻을 잘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불교인들의 모든 신앙행위가 실은
모두 이 마음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마음을 찾는 일이
실로 이와 같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내무실덕 외의무익.
안으로 실다운 덕이 없으면 밖으로도
위의를 세워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뜻입니다.
균형과 조화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한 개인에 있어서나 가정이나 단체나
국가에 있어서도 이러한 조건은 모두
적용됩니다.
심지어 불문에서 수행을 하여 남의
사표가 되려는 입장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안과 밖의 균형과
조화입니다.
산이나 들에는 정말 다양한 동식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냇가나 바다도 마찬가지이죠.
사람 또한 생긴 모습과 생각들도
제각각입니다.
이러한 다양함 속에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살자면 우선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최우선이며 필수적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조사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이익과 만족을 추구하는 생각이
일상생활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자신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사에 마음을 기울여
자신의 생각과 가치 기준의 균형을 위해
깨어있지 않으면 어느새 한쪽으로 쏠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이로 인해 인간관계가 갈등과
불화로 복잡해지면서 대립각을 세우게
됩니다.
이러한 시간이 지속되면 편견과
고집으로 함께하기 어려운 사람,
일관성이 없이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 신의가 없어 거래가 어려운
사람 등으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한마디로 현실 감각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되어 비난을 피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전락되고 맙니다.
심리학에서는 어린아이는 한 사람 안에
좋음과 나쁨이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좁은 마음과 넓은 마음이 한 뿌리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사람은 대단한 동시에
대단하지 않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성인이 되어도 이러한 극단적인 증상이
지속되는 것을 경계선 인격장애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인격 장애인은 어느 특정인을
거의 신처럼 숭배하다가도 아주 사소한
이유로 극도의 증오심과 적개심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자기감정, 자기 생각, 자기 가치 기준이
곧 현실이라는 명제는 인간이 가진 현실
감각의 본능적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적 사고로 생기는
자신의 행동은 현상적 시각으로
상대방의 행동은 동기적 시각을 갖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입장 차이 또한 당연한 것임을 인지하고
상대방은 아량으로 포용하고 자신은
겸손으로 성찰하는 역지사지.
즉, 상대방의 입장에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의 자세가 건강한 개인과 건강한
사회를 위한 정화의 바다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처하는 곳마다 내가
주인 됨을 잃지 않으면 내가 임하는 곳
모두가 진실한 삶이 된다는 뜻입니다.
다가오는 무술년, 새해부터는 존재적
삶의 방식을 소유하려고 갈망하기보다는
즐거워하고 자신의 재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며 세계와 하나가 되도록
살아가도록 해야겠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날마다 고운 날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사이트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