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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조선통신사 위대한 유산 - 6부 동래 화가 '변박'
등록일 : 2024-05-07 17:57:13.0
조회수 : 575
-변박은 1740년경에 동래 지금의 부산에서 태어나서 1760년대, 70년대, 80년대까지 활동했던 부산 지역 화가입니다.
조선시대 동래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과 접경하고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특히 군인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이분의 대표적인 그림이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입니다.
이분을 발탁한 것은 조엄이라고 하는 분이었습니다.
조엄은 1763년 통신사행 때 정사로 임명된 분이시죠.
1763년 사행 때 화원으로 정식으로 파견된 분은 김유성이었습니다.
김유성은 중앙의 도화서 화원이었죠.
그런데 일본 사람들이 조선 화가들의 그림을 매우 좋아했어요.
그래서 아마도 조엄은 김유성 한 명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단을 했던 것 같아요.
변박이 그림을 잘 그리고 중앙 화가 못지않은 기량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분을 데리고 갔는데 일본의 조사라든지 기록이라든지 이런 목적을 위해서
변박을 발탁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변박 작품이라고 주로 알려져 있는 작품은 일본에 남아 있는 목죽도라든지
또 유마도라든지 왜관도가 대표적으로 손꼽는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초량왜관도는 수문으로 일본의 사행 일행이 들어와서 왜관에 도착하고 연회를 베풀었던 건물이 있는 곳이 있고
조선의 사람들이 내려와서 들어올 수 있는 설문 아래에 객사가 남아 있어서 그런 공간들의 주 건물을 확인할 수 있고
화면 안에는 일본인들이 돌아다니는 일상의 모습들도 확인할 수 있어서
그때 당시 초량왜관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그걸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 그렸던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요.
유마도 같은 경우는 통신사행을 다녀온 이후에 그려진 작품입니다.
변박을 동래부 화가로서 교역을 위한 수출용 그림을 많이 그리게 되는데 사실은 버드나무 아래에
이렇게 말이 서 있는 그런 장면은 이전에 중국에서부터 유래했었던 그런 도상이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그려졌지만 그때 당시에 아마 일본에서도 변박의 그림에 대한 수요가 있었을 것이고
변박의 화풍은 또 어땠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그런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묵매도는 사군자화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군자화라는 것은 매란국죽을 말하는 거죠.
이 그림의 특징은 색을 쓰지 않고 검은색의 먹으로만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변박이.
그래서 매화 가지가 중앙 하단에서 상단으로 치솟아 오른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요.
그림 상단에는 유명한 성리학자였죠 김종직이라는 분이 매화에 관해서 쓴 시가 적혀 있습니다.
이 사실은 변박이 그림도 잘 그렸지만 글씨도 잘 썼던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런 매란국죽을 그린 그림들이 일본 사람들 사이에서 또 식자층을 드러내는
엘리트의 어떤 상징성을 드러내는 그림이 그려 있기 때문에 매우 사랑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이제 변박의 그림을 보면 동래라고 하는 변경 아주 서울에서 먼 지역 화가의 그림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중앙에서 유행했던 화풍을 바로바로 수용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말하자면 지역 화가로서 뿐만이 아니라 당시 18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그런 화가로서도 지위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저는 평가하고 싶습니다.
조선시대 동래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과 접경하고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특히 군인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이분의 대표적인 그림이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입니다.
이분을 발탁한 것은 조엄이라고 하는 분이었습니다.
조엄은 1763년 통신사행 때 정사로 임명된 분이시죠.
1763년 사행 때 화원으로 정식으로 파견된 분은 김유성이었습니다.
김유성은 중앙의 도화서 화원이었죠.
그런데 일본 사람들이 조선 화가들의 그림을 매우 좋아했어요.
그래서 아마도 조엄은 김유성 한 명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단을 했던 것 같아요.
변박이 그림을 잘 그리고 중앙 화가 못지않은 기량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분을 데리고 갔는데 일본의 조사라든지 기록이라든지 이런 목적을 위해서
변박을 발탁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변박 작품이라고 주로 알려져 있는 작품은 일본에 남아 있는 목죽도라든지
또 유마도라든지 왜관도가 대표적으로 손꼽는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초량왜관도는 수문으로 일본의 사행 일행이 들어와서 왜관에 도착하고 연회를 베풀었던 건물이 있는 곳이 있고
조선의 사람들이 내려와서 들어올 수 있는 설문 아래에 객사가 남아 있어서 그런 공간들의 주 건물을 확인할 수 있고
화면 안에는 일본인들이 돌아다니는 일상의 모습들도 확인할 수 있어서
그때 당시 초량왜관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그걸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 그렸던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요.
유마도 같은 경우는 통신사행을 다녀온 이후에 그려진 작품입니다.
변박을 동래부 화가로서 교역을 위한 수출용 그림을 많이 그리게 되는데 사실은 버드나무 아래에
이렇게 말이 서 있는 그런 장면은 이전에 중국에서부터 유래했었던 그런 도상이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그려졌지만 그때 당시에 아마 일본에서도 변박의 그림에 대한 수요가 있었을 것이고
변박의 화풍은 또 어땠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그런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묵매도는 사군자화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군자화라는 것은 매란국죽을 말하는 거죠.
이 그림의 특징은 색을 쓰지 않고 검은색의 먹으로만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변박이.
그래서 매화 가지가 중앙 하단에서 상단으로 치솟아 오른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요.
그림 상단에는 유명한 성리학자였죠 김종직이라는 분이 매화에 관해서 쓴 시가 적혀 있습니다.
이 사실은 변박이 그림도 잘 그렸지만 글씨도 잘 썼던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런 매란국죽을 그린 그림들이 일본 사람들 사이에서 또 식자층을 드러내는
엘리트의 어떤 상징성을 드러내는 그림이 그려 있기 때문에 매우 사랑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이제 변박의 그림을 보면 동래라고 하는 변경 아주 서울에서 먼 지역 화가의 그림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중앙에서 유행했던 화풍을 바로바로 수용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말하자면 지역 화가로서 뿐만이 아니라 당시 18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그런 화가로서도 지위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저는 평가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