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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조선통신사 위대한 유산 - 8부 조엄 <해사일기>
등록일 : 2024-05-20 12:50:04.0
조회수 : 620
-조엄은 1763년 통신사행에 정사로 참여했던 인물입니다.
1757년에 조엄은 이미 동래 부사를 역임한 적이 있습니다.
그 기간이 무려 1년 6개월이나 되고요.
그 뒤에는 경상도 관찰사도 같이 지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일본과의 외교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가장 적임자라고 파악했던 것이죠.
조선통신사는 조선 국왕의 국서를 소지한 사신이 한양을 떠나서
일본의 에도 오늘날의 도쿄에 가서 쇼군에게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하고
일본 쇼군의 회답서를 가지고 다시 한양으로 되돌아와서 회답서를
조선 국왕에게 바치는 것으로 모든 일정이 끝나게 됩니다.
그런데 1763년 통신사는 에도로 갔던 마지막 통신사였다고 하는 데
상당히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특히 이때는 문화적인 상황이 이미
어느 정도 절정기에 이르렀기 때문에 아주 다양한 시문 창화를 하고
필담을 나누어서 지금도 이 시기의 필담창화집이 제일 많이 남아 있습니다.
조엄의 해사일기는 일반적인 사행록과 마찬가지로 일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사행 명단이라든지 배가 어떻게 도열해서 가는가 그다음에 배의 방향은
또 어떻게 되는가라는 거, 너무도 상세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조선통신사의 출발과 전체의 과정을 보는 데는 사실상 조엄의 해사일기만큼 완벽한 것은 없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조엄이 위대하다고 하는 이유는 다른 것보다도 대마도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데가 사스나라고 하는 항구입니다.
거기에서 시골인데 고구마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쪽 사람들이 먹고 있는 풀뿌리가 있는데 이게 생으로도 먹을 수 있고
구워서 먹을 수 있고 그다음에 삶아 먹을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들을 먹여살리는 데 이만한 것이 없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자마자 부산진으로 고구마 종자를 보내버립니다, 빠른 배로.
그리고 나중에 귀국할 때는 고구마 종자를 가지고 돌아와서 동래부 아전에게 나눠주고
재배법도 가르쳐주고 저장법도 가르쳐주고 그렇게 실천으로 옮겼던 거죠.
기본적 바탕에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나라를 위하는 마음, 그 큰 그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일단 조엄은 제가 볼 때 상당히 유연한 외교관이었다고 그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조선통신사 배가 오사카에 갈 것 같으면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일본의 영주가 타던 가와고자부네라고 아주 휘황찬란한 배로 옮겨 타게 되는데
그때 요도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엄청난 수차를 보게 됩니다.
수차가 성 안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모습을 보고 논에 물 대기에 사용하면 우리도 되겠다라고 해서
그걸 자세히 알아서 그림으로 묘사하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다음에 도쿄 쪽으로 가다 보니까 배로 다리를 만든 게 있습니다.
배를 가로로 이어서.
그래서 이분은 제방 둑을 쌓는데 저런 식으로 해서 둑을 쌓으면 상당히 효과적이겠다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됐다는 이야기죠.
그래서 이와 같은 것들이 어떻게 보면 조엄의 실학자들인 면모가
너무도 투철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분은 분명히 외교 사절로서 가서 접대 문화에만 익숙해 있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머릿속에는 나라와 백성이라고 하는 부분.
그 애민정신이 워낙 바탕이 되어 있다 보니까 그게 방금 말한
실학적인 부분과 같이 연결돼서 실용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비록 일본 땅에 있긴 하지만 우리 쪽에서 응용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1757년에 조엄은 이미 동래 부사를 역임한 적이 있습니다.
그 기간이 무려 1년 6개월이나 되고요.
그 뒤에는 경상도 관찰사도 같이 지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일본과의 외교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가장 적임자라고 파악했던 것이죠.
조선통신사는 조선 국왕의 국서를 소지한 사신이 한양을 떠나서
일본의 에도 오늘날의 도쿄에 가서 쇼군에게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하고
일본 쇼군의 회답서를 가지고 다시 한양으로 되돌아와서 회답서를
조선 국왕에게 바치는 것으로 모든 일정이 끝나게 됩니다.
그런데 1763년 통신사는 에도로 갔던 마지막 통신사였다고 하는 데
상당히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특히 이때는 문화적인 상황이 이미
어느 정도 절정기에 이르렀기 때문에 아주 다양한 시문 창화를 하고
필담을 나누어서 지금도 이 시기의 필담창화집이 제일 많이 남아 있습니다.
조엄의 해사일기는 일반적인 사행록과 마찬가지로 일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사행 명단이라든지 배가 어떻게 도열해서 가는가 그다음에 배의 방향은
또 어떻게 되는가라는 거, 너무도 상세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조선통신사의 출발과 전체의 과정을 보는 데는 사실상 조엄의 해사일기만큼 완벽한 것은 없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조엄이 위대하다고 하는 이유는 다른 것보다도 대마도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데가 사스나라고 하는 항구입니다.
거기에서 시골인데 고구마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쪽 사람들이 먹고 있는 풀뿌리가 있는데 이게 생으로도 먹을 수 있고
구워서 먹을 수 있고 그다음에 삶아 먹을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들을 먹여살리는 데 이만한 것이 없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자마자 부산진으로 고구마 종자를 보내버립니다, 빠른 배로.
그리고 나중에 귀국할 때는 고구마 종자를 가지고 돌아와서 동래부 아전에게 나눠주고
재배법도 가르쳐주고 저장법도 가르쳐주고 그렇게 실천으로 옮겼던 거죠.
기본적 바탕에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나라를 위하는 마음, 그 큰 그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일단 조엄은 제가 볼 때 상당히 유연한 외교관이었다고 그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조선통신사 배가 오사카에 갈 것 같으면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일본의 영주가 타던 가와고자부네라고 아주 휘황찬란한 배로 옮겨 타게 되는데
그때 요도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엄청난 수차를 보게 됩니다.
수차가 성 안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모습을 보고 논에 물 대기에 사용하면 우리도 되겠다라고 해서
그걸 자세히 알아서 그림으로 묘사하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다음에 도쿄 쪽으로 가다 보니까 배로 다리를 만든 게 있습니다.
배를 가로로 이어서.
그래서 이분은 제방 둑을 쌓는데 저런 식으로 해서 둑을 쌓으면 상당히 효과적이겠다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됐다는 이야기죠.
그래서 이와 같은 것들이 어떻게 보면 조엄의 실학자들인 면모가
너무도 투철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분은 분명히 외교 사절로서 가서 접대 문화에만 익숙해 있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머릿속에는 나라와 백성이라고 하는 부분.
그 애민정신이 워낙 바탕이 되어 있다 보니까 그게 방금 말한
실학적인 부분과 같이 연결돼서 실용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비록 일본 땅에 있긴 하지만 우리 쪽에서 응용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