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조선통신사 위대한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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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조선통신사 위대한 유산 - 19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기

등록일 : 2024-08-12 15:48:11.0
조회수 : 320
-유네스코에서 등재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진정성을 갖춘 유일본일 것.
원본일 것.
보편적 가치를 지닐 것.
관리 체계가 계획이 잘 수립되어 있는 것.
그게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 요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맞추어서 한국과 일본에 현재 소장되어 있는
조선통신사 관련 기록물을 전부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는 외교의 기록.
두 번째는 여정의 기록.
세 번째는 문화, 교류의 기록.
그래서 전체적으로 합쳐서 111건.
333점이 지정될 수 있었습니다.
-조선통신사 기록물 등재하자고 제안을 하면서 제일 큰 문제가
우선은 기록 자체가 한일 간의 서로 소장하고 있는 공유물이었기 때문에
단독 등재를 시도하기보다는 공동 등재로 가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다.
시작은 했지만 그 당시의 상황은 그렇게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일본 측은 조선통신사 연지연락협의회라고 하는 지역 조직을 갖고 있었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부산문화재단이 단독으로 일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고.
행정력이라든지 사무적인 어떤 이런 업무에 있어서 상당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한국과 일본뿐 아니고 세계의 문화사 속에서 이것이 추앙을 받을 수 있는 것이냐,
이 가치에 대해서 서로 그쪽 학자와 이쪽 학자하고 논의를 합니다.
한참 일을 시작할 때는 한 달에 한 번씩 감정의 차별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부산에서 한 번, 일본 후쿠오카에서 한 번.
한국에 오면 한국 사람들이 한국을 주장하고 일본에 가면 일본 거
주장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세심하게 신경을 썼었죠.
-총장님 말씀에 조금 복언을 드리자면 아까 용어 같은 경우가
첫 번째가 인베이젼이라고 하는데 침략이라고 합니다.
일본 측 첫 단어는 뭐냐 하면 출병이었습니다.
출병은 그야말로 군대를 파견한다는 뜻입니다.
이거는 어떻게 보면 선의적으로 파견할 수도 있는 부분이 되어 버리니까 상당히 큰 문제죠.
저희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출병은 절대 안 된다.
침략으로 해야 한다.
그런데 어쨌든 결국은 침략으로 결정됐습니다.
그런데 이게 그 당시 가능했던 거는 한국과 일본 측을 대표하는 학자들이 만났기 때문에
우리는 양심껏 최선을 다하자.
그래서 결과적으로 아까와 같은 어려운 점이 상당히 많이 있었지만, 가능하게 된 거죠.
저는 그 당시에 유네스코 관계자들의 반응에서 우리는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확신을 가졌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한국과 일본은 서로 못 잡아 먹어서 하는 것처럼 하는데 이거는 그게 아니고
서로 공동으로 같이 등재하자고 했으니까
한편으로 제가 봤을 때는 그분들이 아주 홀가분해하는 느낌을 그때 받아들였습니다.
-새벽 2시 몇 분쯤에 연락이 와서 이게 지금 발표가 나서 확실하게 됐다고.
그 전화를 받고 집에서 와 하고 큰소리를 치니까
우리 집사람이 잠자다가 당신 왜 그래요라고 했어요.
그렇게 모두가 다 한덩어리가 됐었던 것 같아요.
한일 간의 관계에서 이런 소중한 문화적인 교류가 싸우지 않고 있었다는 것.
이거는 세계사적으로 참 의미가 있는 거니까 잘 가꿔야 하는 겁니다.
-그동안 여기 관계한 모든 분의 고생이 많았다.
이거를 앞으로 잘 시민에게, 국민에게 또 세계적인 유산으로 잘 가꾸어가야겠다.
-부산 시민들은 조선통신사를 통해서 부산이라고 하는 지역이 한일 관계에 있어서는
가장 긍정적인 기억을 가지고 있는 곳이라고 하는 점을 인식을 해서 조상들이 남긴 것을
내 것으로 남기는 그런 작업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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