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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유산아카이브 오래된 미래 - EP1. 부마 민주항쟁

등록일 : 2025-07-14 15:05:44.0
조회수 : 240
"민주주의의 새벽을 열다: 부마민주항쟁, 부산을 넘어 대한민국을 깨우다"


-쓰러지지 않는 민주화의 불꽃-

"어떤 남학생이 유인물을 확 뿌리면서 '유신철폐 독재 타도'를 크게 외쳤어요."

부산대 79학번 최진아 씨는 46년 전, 1학년 2학기 중간고사 기간이었던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도서관 앞 잔디밭에서 시작된 외침은 곧 수많은 학생들의 동참으로 이어졌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어깨를 걸고 대열을 이었습니다.

"억눌려있던 게 터지면서 우리가 이제 목소리를 낼 때가 됐구나"라고 느꼈던 당시의 상황은, 민주화를 향한 뜨거운 열망이 담긴 부마민주항쟁의 서막을 알리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부마민주항쟁은 왜 시작되었을까요?-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 선포로 국회 해산과 정치 활동 중지 등 유신체제는 민주주의를 억압했습니다.

마침내 1979년 10월 4일, 유신 정권에 대한 민심의 분노가 극에 달하며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제명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는 항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용기 있는 시작, 고통으로 점철된 저항-

부산대학교 78학번 정광민 씨는 46년 전, 우암동 다락방에서 직접 200매의 선언문을 만들어 10월 16일 강의실에 뿌린 당사자였습니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라며 독재에 맞선 그는, 시위가 확산되자 전투경찰의 최루탄 포와 곤봉 세례를 피해 도피해야 했습니다.

자수 후에는 경찰로부터 철봉에 거꾸로 매달리는 물고문과 "너희 아버지가 고정 간첩이지?"라는 협박을 당하며 끔찍한 폭행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때의 트라우마는 오랜 시간 정광민 씨를 괴롭혔습니다.

-시민과 함께한 항쟁, 그리고 무자비한 진압-

학생들의 시위는 부산 시내로 확산되었고, 곧 시민들에게 번져나갔습니다.

정부는 10월 18일 0시, 부산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며 진압에 나섰습니다.

최진아 씨는 미팅 가는 여대생으로 가장해 경찰의 검문을 피하며 시위에 참여하는 학생들을 대피시켜 주는 상가 주민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같은 날 남포동에서 시위 현장을 지켜보다 "함께 싸워야 한다"는 생각에 뛰어들었던 손갑주 씨는 경찰의 무자비한 폭행으로 실신하고 경찰서로 끌려가 무고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는 이틀 밤낮 잠 한숨 못 자고 매 맞던 경험을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못 산다"던 어머니의 슬픈 회유와 함께 떠올렸습니다.

-마산으로 번진 불꽃-

10월 18일, 민주화의 불꽃은 마산으로 번져 경남대 학생들과 노동자 등 8천여 명이 시위에 참가했습니다.

공화당 당사 파괴 등 격렬한 시위가 이어지자 경찰은 폭력 진압과 함께 기이한 수사를 벌였습니다.

마산 창동 빵집에서 일했던 청년 박봉수 씨는 시위대에게 조명탄을 주었을 뿐인데, 언론에서는 이것이 사제 총기가 되었다는 거짓 보도가 나왔다며 허탈해했습니다.

그는 유신 아래에서 용기 있게 나선 당시 학생들이 있었기에 시민들이 호응할 수 있었다고 회상합니다.

-꺼지지 않는 부마 정신-

부마민주항쟁은 독재 정권에 결정타를 날렸고, 결국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유신 독재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그로부터 45년 뒤인 2024년 12월 3일, 또 한 번의 비상계엄이 발표되었고, 정광민 씨는 "역사적 아픈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계엄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2024년 겨울, 시민들은 다시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광장에 모였고, 2025년 4월, 윤석열 대통령은 파면되었습니다.

40년 만인 2019년에야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부마민주항쟁은 여전히 다른 항쟁들에 비해 인지도가 낮고 기념관조차 없지만, "민주주의는 정지된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행진이다"라는 루즈벨트의 말처럼, 그 정신은 끊임없이 현재를 깨우치고 있습니다.


-어떤 남학생이 유인물을 프린트를 확 뿌리면서 유신 철폐 독재 타도 크게 외쳤어요.
울면서 막 뛰었던 것 같아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학생들이.
그러니까 막 눌려 있던 게 터지면서 아, 드디어 우리가 이제 목소리를 낼 때가 됐구나.
-학교를 잘리는 건 물론이고 감방 가고 그런 거 수난을 각오하고 한 행동이었고.
-1979년 10월 16일 화요일 맑음.
도서관에서 겨우 자리를 잡고 공부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공부하던 사람들이 일어섰다.
데모다. 도서관 앞 잔디에 벌써 많은 학생이 모여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점점 사람이 불어나 호응이 크게 된 것이다.
그때 1학년 2학기 중간고사 기간이었거든요.
구 도서관이 있고 이렇게 내려가는 계단 처음에서 어떤 남학생이 유인물을 프린트를 확 뿌리면서 유신 철폐 독재 타도 크게 외쳤어요.
일어섭시다라는 말에 일제히 일어서서 서로 어깨에 손을 겯고 스크럼을 짜서 본관 뒷길로 하여 운동장으로 나가는 긴 대열을 만들었다.
모두가 줄을 잇기에 자신도 한 부분이 되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다 같이. 세이 예! 여러분!
-그야말로 유신 체제의 단말마적인 또는 거의 극한에 다다른 것 같은 젊은 청년 학생들은 이건 도저히 민주주의가 아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저희가 우암동 다락방에서 선언문을 최종적으로 깨끗한 상태로 볼 수 있는 건 한 200매인데 200매를 만들어서 16일
여기 와서 선언문을 뿌리면서 그렇게 시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운동장 전체가 새카맣게 학생들로 가득 차 있는 그래서 여기서 몇 바퀴 돌고 그다음에 정문 쪽으로 나갔죠.
나갔는데 이미 경찰이, 전투경찰이 출동해 있고 그거를 막아선 상태고 그러다가 10시 40분에 경찰들이 최루탄을 쏘면서 학내 진입해 들어왔어요.
그러면서 무차별 그거를 난사하고 또 경찰은 곤봉으로 학생들을 이렇게 때리고.
결국 저를 철봉에 거꾸로 매달아 물고문을 시작했는데 저 고문하면서 물었던 게 제 당시 부친이 이북에서 피난
내려왔는데 너희 아버지 고정 간첩이지?
이러면서 고문하는데 정말 소름 끼치는 고문에 대한 트라우마, 공포 이거는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이 되었고
동래경찰서 앞만 지나가도 그때 그것들이 생각이 나고.
-시청 앞에 버스를 타고 딱 내렸는데 경찰들이 지키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 복장이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치마에 구두 신고 얌전한 여학생 차림을 하고 있어서.
저 미팅하러 왔는데요. 이러니까 한참 이러더니 그냥 보내주더라고요.
그러니까 경찰하고 계속 숨바꼭질하면서 저도 중간에 뒤에 드드드 경찰 발자국 소리, 군홧발 소리 같은 게 들리면
무조건 아무 상가에 무조건 들어갔어요.
들어가면 상가 주인들이 다 대피를 시켜줬어요.
-같은 국민인데 이렇게 해서 안 된다. 내가 내려가서 나도 붙었지.
그래서 곤봉, 그 당시 막대기 같은 거 가지고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군홧발에 차이고 실신했어요. 깨어나 보니까 부산 중부경찰서.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일행들 누구냐 같이 온 사람 몇 명이냐 그래서 나는 아닙니다.
학생들 맞고 있어서 내가 말린다고 이렇게 갔는데 나도 붙잡혀 왔다고.
이틀 동안 잠 한숨 못 자고 피는 흘러서 이도 깨지고 머리 터졌는데도 신문지 이렇게 비벼서 닦아주고
그러더라고요. 그 당시 아예 동네에서는 빨갱이라고 완전 간첩이라고 했거든요.
간첩이라는 말은 안 하고 빨갱이다, 빨갱이.
너도나도 못 산다 빨갱이 소리 들으면.
그리고 어머니가 넘어져서, 작은아버지 배에서 넘어져서 다쳐서 집에 내려온다고.
-경찰서장이 사제 총기를 가지고 폭도들이 사제 총기를 해서 사람을 살상하게 해서 이런 식으로 해서 신문에 크게 나왔대요.
그래서 내가 준 건데 어떻게 저렇게 들어갔지?
그때 다 대단했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어떻게 저렇게 유신 하에서 그렇게 데모를 할 줄 알았는지 대학생들이 하니까 시민들이 호응해 주고 다 그렇게 된 거지.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계엄이라고 하는 것은 본질이 군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건데 우리가 아픈 경험이 있는 역사적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정말 놀라운 일이었고 일어나서 안 되는 그런 일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추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권력은 국민한테 못 이깁니다. 국민이 승리합니다.
-정치는 공기와 같다. 정치도 깨끗하지 않으면 우리가 스스로 나서서 깨끗하게 해야 하는 거예요.
그게 누가 그렇게 해 주는 게 아니고 우리가 나서야지.
우리의 소원은 자유~
꿈에도 소원은 자유~
이 목숨 바쳐서 자유~
자유여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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