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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유산아카이브 오래된 미래 - EP2. 산복도로
등록일 : 2025-07-28 13:55:32.0
조회수 : 212
"삶의 역경을 이겨낸 터전: 산복도로에 새겨진 부산의 희망과 기억"
역사가 남긴 충돌의 흔적들이 뒤섞여있는 도시, 부산.
산복도로에는 과거의 상처를 딛고 일상의 터전을 지켜온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의 시작-
"너무너무 가난하게 살아서 우리 6남매 키운다고 고생한 거 너무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국전쟁이 남긴 아픈 상처는 부산 산복도로의 시작점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피란 수도가 된 부산은 흥남철수작전으로 내려온 10만여 명의 피란민으로 가득 찼습니다.
피란민 이금순 씨는 당시 미군에게 빨래를 해주고 번 미국 돈을 남한에서 쓰기 위해 북한 돈으로 바꿨으나, 결국 무용지물이 되어 버려야 했던 비참한 기억을 전했습니다.
숟가락조차 없어 홍합 껍데기로 밥을 먹으며 생존했고, 영주동에서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로 하루 아홉 동의 물을 길어 올려 불을 끄는 고단한 삶을 이어갔습니다.
-미군 부대와 시장, 억척스럽게 삶을 일궈낸 사람들-
한국전쟁 이후 부산에 주둔한 미군 부대는 고단했던 이들의 새로운 생계 수단이 되었습니다.
70년대에 부산으로 이주한 이우년 씨는 군인 남편의 부대 앞에서 건빵과 빵을 팔며 많은 돈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남편의 전역 후에 두 사람은 초량동 45번지로 향했고, 70년대 산복도로는 일자리를 찾아온 이주민도 품었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 귀환 동포, 산복도로에 깃든 애환-
귀환 동포 일제강점기 강제노역 2세인 이계자 씨의 이야기는 또 다른 역사의 아픔을 증언합니다.
1941년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침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고, 이 전쟁의 종전과 해방 직후 이계자 씨의 가족은 약 140만 명의 동포들과 함께 부산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6남매를 키우며 친정에서 쌀과 간장을 얻어 오고, 때로는 한 끼를 굶기도 하며 고단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계자 씨는 "어떻게 살았는지 까마득하다"며 눈시울을 붉혔지만, 어머니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산복도로는 이처럼 고난을 견뎌낸 억척 엄마들의 삶이 녹아 있는 공간입니다.
-격동의 시대와 고단한 삶-
산복도로 토박이 김재란 씨는 일제강점기에 배운 봉제 기술로 군복을 만들었고, 해방 후에는 낙하산 천을 염색해 옷으로 만드는 등 강인한 생활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화장품 장사부터 아파트를 짓는 일, 식당까지 5년 동안 수많은 일을 하며 33평 아파트를 구매했을 정도로 격동의 시대를 억척스럽게 살아냈습니다.
산복도로 사진작가 윤창수 씨는 산복도로를 "원초적 부산, 오리진 부산"이자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곳"이라 말하며 그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살아 숨 쉬는 산복도로의 삶과 추억-
55년째 산복도로를 지키고 있는 'ㄷ' 약국 정승엽 약사님은 "나이 많은 분들이 이 약국이 없어지면 밑으로 내려가야 한다"며 주민들을 위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오르막길을 힘겹게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며 세월의 흐름에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공기 좋고 정 많은 동네에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았다는 말을 잊지 않습니다.
산복도로는 일제강점기 귀환 동포, 한국전쟁 피란민, 산업화 시대 이주 노동자들이 모여 시간의 층을 쌓아 올린 곳입니다.
단순히 구불구불한 길이 아니라, 역사의 풍랑을 이겨낸 부산 시민들의 굳건한 삶과 기억이 깃든 소중한 풍경입니다.
역사가 남긴 충돌의 흔적들이 뒤섞여있는 도시, 부산.
산복도로에는 과거의 상처를 딛고 일상의 터전을 지켜온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의 시작-
"너무너무 가난하게 살아서 우리 6남매 키운다고 고생한 거 너무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국전쟁이 남긴 아픈 상처는 부산 산복도로의 시작점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피란 수도가 된 부산은 흥남철수작전으로 내려온 10만여 명의 피란민으로 가득 찼습니다.
피란민 이금순 씨는 당시 미군에게 빨래를 해주고 번 미국 돈을 남한에서 쓰기 위해 북한 돈으로 바꿨으나, 결국 무용지물이 되어 버려야 했던 비참한 기억을 전했습니다.
숟가락조차 없어 홍합 껍데기로 밥을 먹으며 생존했고, 영주동에서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로 하루 아홉 동의 물을 길어 올려 불을 끄는 고단한 삶을 이어갔습니다.
-미군 부대와 시장, 억척스럽게 삶을 일궈낸 사람들-
한국전쟁 이후 부산에 주둔한 미군 부대는 고단했던 이들의 새로운 생계 수단이 되었습니다.
70년대에 부산으로 이주한 이우년 씨는 군인 남편의 부대 앞에서 건빵과 빵을 팔며 많은 돈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남편의 전역 후에 두 사람은 초량동 45번지로 향했고, 70년대 산복도로는 일자리를 찾아온 이주민도 품었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 귀환 동포, 산복도로에 깃든 애환-
귀환 동포 일제강점기 강제노역 2세인 이계자 씨의 이야기는 또 다른 역사의 아픔을 증언합니다.
1941년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침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고, 이 전쟁의 종전과 해방 직후 이계자 씨의 가족은 약 140만 명의 동포들과 함께 부산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6남매를 키우며 친정에서 쌀과 간장을 얻어 오고, 때로는 한 끼를 굶기도 하며 고단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계자 씨는 "어떻게 살았는지 까마득하다"며 눈시울을 붉혔지만, 어머니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산복도로는 이처럼 고난을 견뎌낸 억척 엄마들의 삶이 녹아 있는 공간입니다.
-격동의 시대와 고단한 삶-
산복도로 토박이 김재란 씨는 일제강점기에 배운 봉제 기술로 군복을 만들었고, 해방 후에는 낙하산 천을 염색해 옷으로 만드는 등 강인한 생활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화장품 장사부터 아파트를 짓는 일, 식당까지 5년 동안 수많은 일을 하며 33평 아파트를 구매했을 정도로 격동의 시대를 억척스럽게 살아냈습니다.
산복도로 사진작가 윤창수 씨는 산복도로를 "원초적 부산, 오리진 부산"이자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곳"이라 말하며 그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살아 숨 쉬는 산복도로의 삶과 추억-
55년째 산복도로를 지키고 있는 'ㄷ' 약국 정승엽 약사님은 "나이 많은 분들이 이 약국이 없어지면 밑으로 내려가야 한다"며 주민들을 위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오르막길을 힘겹게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며 세월의 흐름에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공기 좋고 정 많은 동네에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았다는 말을 잊지 않습니다.
산복도로는 일제강점기 귀환 동포, 한국전쟁 피란민, 산업화 시대 이주 노동자들이 모여 시간의 층을 쌓아 올린 곳입니다.
단순히 구불구불한 길이 아니라, 역사의 풍랑을 이겨낸 부산 시민들의 굳건한 삶과 기억이 깃든 소중한 풍경입니다.
-너무너무 가난하게 살아서 우리 6남매 키운다고 고생한 거. 너무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참 잘 살았구나. 이 동네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흥남부두에 오니까 이 미국 돈 가지고 가면 남한에 가면 못 쓴다.
북한 돈 바꿔가라고 해서 그거를 거기서 다 바꿔서 LST 타고 오는데.
거제도 바닷가에 수용소를 지어둔 거를 우리는 피란민이 돼서 못 산다고 난리
쳐서 거기서 나라에서 조금 주는 거하고 숟가락도 없고 하니까 쌀을 가져와서
거기서 불을 때서 밥해서 홍합 껍데기로 숟가락을 하고요.
그래서 영주동 왔는데 영주동에서 또 불이 나서.
-대통령 각하께서는 12월 2일 경보처장, 육군총참모장을 대동하시고 미...
-세상에 물이 없으니까요. 물을 하루에 9동 길렀다고요.
그 물 퍼서 빨래해서 도로 붓고 또 그 물 퍼서 하고는 그래 갖다 또 널고.
고생을 말도 못 했어요. 우리 아저씨가 결혼해서 애 하나 배어 놓고 군대에 간 거야.
부산으로 배치됐어요. 사모님 그 빵 외상 좀 주세요.
어떻게 알고 외상을 주냐 하면 휴가 가서 돈 갖다드릴게요. 알았다.
거기서 내가 돈을 엄청 벌었습니다.
45번지에 가면 큰 배가 들어오면 거기서 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여자들 깡깡이 한다고 하면서 막 망치를 가지고 배에 녹난 거 두드려서 이래서
하루 얼마씩 받고 있는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이 사 먹으러 나올 수가 없어요.
한 번 배에 들어가면 못 나와요. 저녁이 돼야 나오지.
가서는 비행기 만드는 공장에 아버지가 만드는 거는 비행기 날개 쪽만 계속 만들었다고 그래요.
해방이 되고 나니까 아버지 어머니가 무서워서 못 살아서 도망을 왔다 합니다.
아주 큰 배인데 우리를 줄로 세워놓고 주먹밥을 한 개씩 주더라고.
그거 얻어먹고 배 타고 왔어요. 아이고 한국에 와서 힘들게 살았지요.
어머니가 6남매를 데리고 여기 와서 못 사니까 친정에 가서 쌀도 얻어오고 간장,
된장도 얻어오고 하루에 세 끼 먹어야 하는 거 두 끼 먹으면 잘 먹는 거고 한
끼씩은 굶고 그 시절에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살았는지 제가 까마득합니다.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은요. 너무너무 가난하게 살아서 우리 6남매 키운다고 고생한 거.
너무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시절에 살기 힘들지요.
그러니까 내가 14살, 15살 때 일제강점기 때 일본 사람 회사에 봉제 기술 미싱하는
기술 배워서 15살 때부터 미싱해서 일제강점기 때 군복을 만들었단 말이야.
여기 개돌이 딱 치고.
배워서 할 만할 때 해방이 돼서 전부 안 돌아갔거든, 우리 한국에 있는 공장이.
그러고 있는데 낙하산 있지요.
낙하산이 흰색이고 되게 두꺼운 방수천이더라고 면도칼로 그거로 일일이 바느질밥을 따서 그거를 염색을 해.
아무것도 일할 게 없으니까 그렇게 옷 만들어서 애들 원피스, 남자분들 와이셔츠 참 고생 많이 했어.
화장품 장사도 해봤고 아이를 업고 진주, 사천으로 경주, 의성, 포항, 흥해, 영해.
국제시장 제품 하는데 가죽점퍼도 팔고 원피스고 바지고 아파트 짓는 데도 일하러 다니고.
식당을 했어요. 5년, 만 5년 해서 내가 아파트 33평짜리 하나 사고 참 고생 많이 했어.
-지금의 수정아파트가 있는 곳이 그곳이야말로 저는 원초적 부산, 오리진 부산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내 20대 청춘이 녹아 있던 그곳에서의 내 인생이 시작되었던 곳이고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곳이 아닐까.
안녕하세요, 약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반갑습니다.
-제가 산복도로 작업하고 있잖아요. 산복도로 이야기에서는 동일약국이 빠질 수 없는 곳이라.
-나이 많은 분이 여기는 많은데 우리 약국이 없어지면 진짜 밑으로 내려가야 하거든요.
제발 다른 데 가지 말고 이 약국을 계속해서 꼭 해야 한다고.
이 공간이 어쨌든 너무 좋습니다.
너무 좋고 여기서 쫙 쳐다보면 옛날에는 그냥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전부 다 그냥
올라갔는데 지금은 다리가 아파서 뒤로 가는 사람도 있고 앞으로 가는 사람도
있고 여러 사람을 지금 보고 있거든요.
그러면 너무 안타까워요. 참 잘 살았구나.
그리고 동네가 경치는 없어도 공기가 좋고 그러니까 이 동네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곳을 봐. 하나, 둘, 김치. 잠깐만요. 다시 한번 더 찍을게요.
오케이, 다시 한번, 여기 보시고 하나, 둘.
아름답습니다. 어머니들 너무 오늘 아름답네요.
제가 생각하는 산복도로는 특별하지 않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행복을 찾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