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기
지역유산아카이브 오래된 미래 - EP4. 부산진시장
등록일 : 2025-08-04 14:56:23.0
조회수 : 233
"부산진시장, 명실상부 부산 최대의 전통시장… 112년 부산의 혼수이자 삶의 기록"
부산의 역사와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부산진시장, 부산 사람이라면 그 왁자지껄한 풍경 속에서 저마다의 추억을 쌓아본 적 있지 않나요?
-혼수와 삶의 터전: 112년 역사를 잇다-
'지역유산아카이브 오래된 미래 - EP4. 부산진시장' 편에서 112년 역사를 자랑하는 부산진시장의 깊은 이야기가 공개됐습니다.
조선시대 부산장의 명맥을 이은 이곳은 한때 전국 3대 혼수시장으로 이름을 날리며 "부산의 백화점"이라 불렸습니다.
6.25 전쟁 당시 피난 온 유경식 씨('ㅂ'직물 운영)는 1950년대 부산진시장의 목조 건물에서 피난민들이 서로 의지하며 장사를 시작했던 아픈 역사를 증언했습니다.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등 각 지역 출신 상인들이 모여 품목을 다양화하며 생계를 이어갔던 이곳은, 원단이 귀했던 시절 전국에서 보따리째 돈을 들고 물건을 사러 오던 이들로 북적였습니다.
-번성했던 황금기, 부산의 중심이었던 시장-
부산진시장 번영회 정윤호 회장은 부산진시장이 동구청에서 가장 많은 세수를 걷던 곳이었다고 회고합니다.
조방상권의 호황과 인접한 버스 터미널 덕분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손님들이 모여들며 시장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신철주 씨('ㅅ'라사 운영)는 80년대만 해도 70~80곳에 달했던 양복 원단 판매점이 현재는 25곳으로 줄고, 손바느질 양복점은 단 2곳만 남았다는 안타까운 현실을 전했습니다.
그럼에도 정수점 씨('ㅈ'주단 운영)는 부산진시장이 백화점이 없던 시절 부산 사람들의 꿈의 자리였다며 시장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습니다.
-변화하는 결혼 문화, 변치 않는 시장의 정(情)-
김말련 씨('ㄱ'주단 운영)는 부산진시장이 한복으로는 전국 최고였다고 회상합니다.
하지만 폐백 문화가 사라지면서 한복 착용이 줄어드는 등 결혼 문화의 변화가 시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럼에도 40년 단골 왕순분 씨는 과거 90%의 사람들이 한복, 그릇, 이불은 물론 생선과 음식까지 없는 것이 없었던 부산진시장을 이용했다며 변치 않는 시장의 매력을 이야기했습니다.
-오래된 미래: 진화하는 부산진시장의 꿈-
오늘날 부산진시장은 1,629개의 점포가 밀집한 부산 최대의 전통시장으로, 그 화려한 멋과 넘치는 정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20세부터 장사를 시작해 19년째 'ㅂ'비즈 매장을 운영하는 황방울 씨는 온라인과는 다른 오프라인 시장의 장점(직접 보고 만지며 저렴하고 자유로운 디자인)을 강조합니다. 또한 청년 대표로서 시장 활성화를 위해 먹거리 도입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ㅇ'이불 가게를 운영하는 최명자 씨는 직접 공장을 운영하며 고객 맞춤형 이불을 제공하기에, "이만큼의 이불은 진시장에 와야 해결된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유경식 씨는 60년 세월 동안 시장에서 일하며 이곳을 "내 직장"으로 여기며 즐겁게 나온다고 말합니다. 정수점 씨 역시 "열심히 살아서 아이들 공부시키고 집도 샀다. 부산진시장은 저의 인생"이라며 자신의 희로애락이 담긴 시장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부산진시장의 이야기는 오늘도 계속 쌓여가고 있습니다.
부산의 역사와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부산진시장, 부산 사람이라면 그 왁자지껄한 풍경 속에서 저마다의 추억을 쌓아본 적 있지 않나요?
-혼수와 삶의 터전: 112년 역사를 잇다-
'지역유산아카이브 오래된 미래 - EP4. 부산진시장' 편에서 112년 역사를 자랑하는 부산진시장의 깊은 이야기가 공개됐습니다.
조선시대 부산장의 명맥을 이은 이곳은 한때 전국 3대 혼수시장으로 이름을 날리며 "부산의 백화점"이라 불렸습니다.
6.25 전쟁 당시 피난 온 유경식 씨('ㅂ'직물 운영)는 1950년대 부산진시장의 목조 건물에서 피난민들이 서로 의지하며 장사를 시작했던 아픈 역사를 증언했습니다.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등 각 지역 출신 상인들이 모여 품목을 다양화하며 생계를 이어갔던 이곳은, 원단이 귀했던 시절 전국에서 보따리째 돈을 들고 물건을 사러 오던 이들로 북적였습니다.
-번성했던 황금기, 부산의 중심이었던 시장-
부산진시장 번영회 정윤호 회장은 부산진시장이 동구청에서 가장 많은 세수를 걷던 곳이었다고 회고합니다.
조방상권의 호황과 인접한 버스 터미널 덕분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손님들이 모여들며 시장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신철주 씨('ㅅ'라사 운영)는 80년대만 해도 70~80곳에 달했던 양복 원단 판매점이 현재는 25곳으로 줄고, 손바느질 양복점은 단 2곳만 남았다는 안타까운 현실을 전했습니다.
그럼에도 정수점 씨('ㅈ'주단 운영)는 부산진시장이 백화점이 없던 시절 부산 사람들의 꿈의 자리였다며 시장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습니다.
-변화하는 결혼 문화, 변치 않는 시장의 정(情)-
김말련 씨('ㄱ'주단 운영)는 부산진시장이 한복으로는 전국 최고였다고 회상합니다.
하지만 폐백 문화가 사라지면서 한복 착용이 줄어드는 등 결혼 문화의 변화가 시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럼에도 40년 단골 왕순분 씨는 과거 90%의 사람들이 한복, 그릇, 이불은 물론 생선과 음식까지 없는 것이 없었던 부산진시장을 이용했다며 변치 않는 시장의 매력을 이야기했습니다.
-오래된 미래: 진화하는 부산진시장의 꿈-
오늘날 부산진시장은 1,629개의 점포가 밀집한 부산 최대의 전통시장으로, 그 화려한 멋과 넘치는 정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20세부터 장사를 시작해 19년째 'ㅂ'비즈 매장을 운영하는 황방울 씨는 온라인과는 다른 오프라인 시장의 장점(직접 보고 만지며 저렴하고 자유로운 디자인)을 강조합니다. 또한 청년 대표로서 시장 활성화를 위해 먹거리 도입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ㅇ'이불 가게를 운영하는 최명자 씨는 직접 공장을 운영하며 고객 맞춤형 이불을 제공하기에, "이만큼의 이불은 진시장에 와야 해결된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유경식 씨는 60년 세월 동안 시장에서 일하며 이곳을 "내 직장"으로 여기며 즐겁게 나온다고 말합니다. 정수점 씨 역시 "열심히 살아서 아이들 공부시키고 집도 샀다. 부산진시장은 저의 인생"이라며 자신의 희로애락이 담긴 시장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부산진시장의 이야기는 오늘도 계속 쌓여가고 있습니다.
-손님들이 그냥 여기만 오면 웬만한 건 다 구입을 하거든.
-시장에 발 디딜 틈이 없다고 할 정도로 손님 많이 오셨어요.
전국에서 오시다시피 하셨으니까.
이 부산진시장이 부산의 백화점이었습니다.
황해도 해주가 가깝거든 여기 연평도하고.
백령도하고. 배 타고 거기로 월남했지.
고생 많았지.
그쪽에 뭐 전부 피란민이 여기 부둣가에 그냥 막노동하려고 줄을 서고.
참 비참했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거지.
내가 들어올 때는 목조 건물이었어, 2층. 품목이 다양하지 못했지.
모직 취급하는 라사 그다음에 양모부, 주단, 포목부, 작업복 개통.
제일 많은 게 평안도 사람이 제일 많았고.
그다음에 함경도 사람이고 황해도 사람도 좀 있고 저희끼리 평안도
사람끼리 모임하고 함경도 사람끼리 모임하고 황해도 사람끼리 모임하고 그렇게 모임들이 있었지.
그 당시에는 음력 명절이나 추석 때는 옷을 못 맞춰서 60벌, 70벌씩 밀렸어요.
지방에서 와서 원단이 없으니까 돈은 보따리로 싸와서 여관에서 며칠씩 자고 그렇게 물건 해 가고 그랬지.
조방상권이 그때는 좋았습니다.
고속버스터미널도 있었고 시외버스터미널도 조방 앞 근처에 다 있다 보니까.
양복 맞추는 집은 양복점은 한 10개 점포 정도 있었고 밖에 외곽에요.
지금 현재는 양복, 양장 파는 데 전부 다 합쳐야 25군데밖에 안 됩니다.
그리고 양복점 손바느질이라고 하죠.
그런 건 지금 딱 두 군데밖에 없어요, 이 시장 안에.
이 부산진시장이 부산의 백화점이었습니다.
아무나 들어오고 싶다고 들어오는 자리가 아니어서 저도 처음에 여기를
소개를 해서 들어오긴 들어왔는데 저녁에 보따리를 싼 적도 있었고.
그 정도로 이 자리가 힘든 자리였습니다.
옛날에는 내려오던 관습이 있었습니다.
예복을 해야 내가 편안하게 복 받고 잘 산다.
웃옷을 제일 먼저 했습니다. 이불이나 그릇이나 이런 거는 후순위로.
요즘에는 집이 제일 먼저잖아요.
그 당시에는 집이 그렇게 많이 비중을 안 차지했거든요.
우리 시대는 그랬습니다.
장남은 뭐 한 우리나라의 90%는 같이 살았을 겁니다, 어른들하고.
-한복이라고 하면 전국에서 부산진시장을 알아줬거든요.
-지금은 결혼 문화가 다 달라져서 이런데 그때는 거의 중매결혼을 많이 해서.
가을이 되면 어르신들이 각자 동네 사랑방이라든지 이런 데서 어느 댁에
좋은 신붓감 있다 이렇게 하면 서로가 이렇게 소개를 해서 그렇게 짝을 맞춰서 이렇게 참 그런 문화였습니다.
-주단이라고 하면 부산진시장을 제일 크게 여겨줬고.
여기 오면 없는 게 없었으니까.
밑에는 그릇도 있고 속옷, 큰상 차리는데 생선 음식.
양장이나 이런 게 없는 게 없었으니까 그 시절에는 한 90%는 진시장을 이용한다고 봐야죠.
제일 큰 시장이 진시장이었으니까요, 젊었을 때는.
그때 그 좋은 시절에 그 좋은 시기에 옷을 여기 와서 맞췄기 때문에 그분들도
여기 복을 많이 받아 가셔서 잘 살고 계시리라 믿고요.
또 곳곳에 좋은 주역들이 돼서 우리나라 이끄는 데 한몫을 할 거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20살 때부터 장사를 시작했고요. 올해로 19년 됐습니다.
저희 가족이 서울에서 부산을 제가 20살 때쯤 내려오게 됐는데 어머니가 원래
이쪽으로 업을 하고 계셨어서 같이 어머니랑 여기서 장사를 시작하게 됐어요.
아무래도 와서 직접 보시는 거랑 인터넷에서 구입하시는 거랑 다르거든요.
저희랑 소통하면서 또 만드는 방법이나 그런 걸 저희가 가르쳐 드리기도 하고.
-가격이 한 두세 배 정도 낮아져서 자유롭게 디자인해서 직접 착용하거나
아니면 선물하는 용도로 여기 바지에 달고 있는 이것도 직접 디자인을 해서
만든 거고 실패 없이 제작할 수 있다는 게 직접 와서 사는 거의 장점인 것 같아요.
-시장에 먹거리가 좀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먹거리 하는 매장들 조금 생기면 손님들이 물건 보시고 안에서 또
음식 먹으시고 조금 더 시장을 볼 수 있지 않으실까, 편하게.
-백화점에 가면 이만큼 물건이 많이 없습니다.
모텔 같은 데, 호텔 같은 데 또 학교 기숙사 같은 데 전부 진시장에 와서 해결이 됩니다, 그런 건.
-힘든 건 없어요. 즐거운 마음으로 나오죠.
많이 팔든 못 팔든 내가 60년이라는 세월을 여기서 살았기 때문에 불만도
없고 항상 이건 내 직장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여기서 열심히 살아서 애들 공부도 시키고 또 집도 사고 그래서 참 좋은
추억, 모든 제 희로애락이 여기 다 들어가 있거든요.
그래서 부산진시장은 저의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