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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유산아카이브 오래된 미래 - EP19. 동항성당
등록일 : 2026-05-26 14:23:05.0
조회수 : 15
-우암동 사람이라 하면 신부님께 뭐라도 혜택 안 받은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하 신부님을 다시 만나면 우리 동항을 위해서 너무 많이 일을 하시고
고생 많으셨고 애도 많이 태우고 이렇게 높은 상에 올려드리고 싶어요.
-저희 부모가 6.25 때 메러디스 빅토리아호를 타고 온 피난민.
화물선이니까 짐 싣는 기중기로 사람을 실었다고 그래요.
망을 타고 막 올라가거든요. 안전 이런 게 있을 거 아닙니까?
빠지면 안 건져준데. 빠지면 겨울이니까 바로 빠져 죽는 걸 봤답니다.
그래서 화물선에 1만 4천 명이 타고 온다.
지하부터 탁탁탁 실어 가지고 갑판까지 딱 실어 가지고 한 2, 3일 오거든요.
-우리 시아버지 가서 두 달만 있으면 온다.
그러니까 가서 우리 엄마 보고 두 달 있으면 데리러 온다 하니까 엄마 집 안에서
내가 사돈을 따라서 피란 가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이지.
너나 가서 잘 있다 오라고.
나는 그 시집이라고 뭔지 엄마를 버리고 온 생각하면 맨날 눈물이 나고.
-피란을 오고 어려운 시절 우암동 이 지역의 사람들이 서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나누는 그런 공간이 되었었던 것이죠.
이곳에서 자그마한 천막을 짓고 또 이곳에서 미군 구호 활동으로 군대에서 사용하는 그런 천막
이런 것들을 구해서 함께 모여서 살았던 것이죠.
-다 그 도랑에 시궁창이며 오만 거 다 있고.
-식구 많은 데는 한 10명씩 살았습니다. 그 조그마한 집에.
-다락을 이어 가지고 애들 위에서 자고 하거든요.
-흙벽에 대나무 얼금얼금 이어서 흙벽을 바르다 보니까 개미가 살든지 바퀴벌레가 살든지.
장마철에 비가 엄청 온 적이 있습니다, 여기 소막마을에.
정말 소막마을에 집집마다 안방까지 물이 찬 경우가 있거든요.
아마 옆집하고 통과된 집도 많을 겁니다.
-언덕 밑에 솥가마를 큰 거를 하나 걸고 거기다 죽을 하나씩 끓여가지고 타 먹으라고
양재기 들고 가서 줄 서면 많이도 안 줍니다. 한 사발 정도. 그래도 그걸로 연명을 했습니다.
-저는 동생 밥을 챙기려고 줄을 서다가 제가 뜨거운 걸 들고 성당에서 내려오다가 제가 넘어집니다.
그래서 엉엉 울고 그게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엉엉 울고 있으니까 수녀님이 다시 제 손을 잡고 마지막에 듬뿍.
-우암동장 하면서는 신부님이 내려와서 동장아, 가자 하고 말이죠. 플래카드 들고 구호 활동 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시장통으로 동네를 돌면서 모금을 하죠. 그래서 모금해서 또 불쌍한 아이들을 전부 다 돌봐주고 말이죠.
대단한 분이에요, 그분. 그분이 우암동 살렸어요.
-3살 때 홍역을 앓았어요. 피란 가고 이럴 때 6.25가 났어요.
혼자 너무 심심해서 앉아서 대문 열고 나와서 길을 잃어버렸어요.
무섭고 그렇게 있는데 신부님이 안 되겠다고 하면서 고무신 사서 신부님 뒤에 밖에 나가서 자전거 타고 이 동항성당에 온 생각이.
부모, 자꾸 엄마 생각이 나서 울고 그러니까 생각이 자꾸. 진짜 다 좋았어요, 고마웠어요. 다 좋아요.
-길거리에 걸어 다니다가 양재기 하나, 숟가락 하나 들고 밥 얻어먹는 애들이 있으면
그런 애들을 하나씩 하나씩 주워 오는데 12명을 데려온 거예요.
그러니까 저 사제관 안에다 저래 좁은 데다가 고아원처럼 이제 그 애들을 우리가 밥을 해서 밥을 주라고 그래서 밥을 해서 주죠.
-어느 날 한 부인이 찾아왔어요. 와서 한 신부님께 돈을 500원만 빌려달라고 이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집도 가난한데 아이들이 많아서 태중에 있는 이 아기를 낙태를 시켜야 되겠다고 이렇게 한 겁니다.
신부님께서 그러면 내가 500원짜리 100번도 줄 수가 있다. 그러니 아기를 낳으라고 이렇게 했어요.
임산부가 아기를 낳아서 이 아이가 그래도 낙태되지 않고 태어난 것에 굉장히 기뻐하셨습니다.
생명을 굉장히 소중하게 여기신 분이십니다.
-결혼을 해서 애들 둘을 거기서 교회 조산소에서 애들 둘을 거기서 출생을 했죠.
그 당시에는 의료보험도 없고 그러다 보니까 성당에 다니는 성도가 아니더라도 일반 주민도 많이 아기들 태어났거든요.
-수녀님들과 함께 업무적인 이야기를 하시더라도 가난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먼저 들어오게,
사무실에 들어오게 하시는 이런 분이었습니다.
-이번 5개년 계획에서는 농지를 확장하는 해간과 간척 사업이.
-나의 어머니 죽었습니다. 나의 어머니 죽었습니다 하면서 이 가슴을 치고 발로 벽을 차요.
독일로 가야 되는데 비행기 삯이 없잖아요. 돈은 다 갖다 한국 사람 다 풀어 먹이고.
그래 주교관에서 돈이 와서 그 돈을 받아서 독일 가서 초상을 치르고 오셨어요.
우리들은 또 이 성당 안에서 검은 리본 달고 상주 노릇한다고 신부님 오실 때까지 그렇게 했습니다.
-선종하실 때 함께 있었습니다. 2017년 10월 14일 생신날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남천성당 장례식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오셔서 장례식에 참여했는데
그 오신 분들의 마음이 누구나 다 아버지를 잃었다는 생각을 다 하게 됩니다. 저 역시도 그랬고.
-장례 미사를 하는데 진짜 눈물 나더라고요. 내 부모가 돌아가신 것처럼 마음이 참 찡하더라고요.
-나는 한 아버지로서 이 불쌍하고 못 사는 교우들을 살릴 수 있도록 마침내 20년 다 지나가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많은 일, 말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었는데
첫째, 사랑도 마지막 사랑도 본당 안에, 곁에 살고 있으니 계속해서 이 본당을 위하여 기도하고
한국을 잘 왔다고 그렇게 마음을 아주 기쁘게 하게 하는 것입니다.
-절망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는 일.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도와 새로이 살아갈 힘을 얻게 하는 일.
더 큰 믿음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하 신부님을 다시 만나면 우리 동항을 위해서 너무 많이 일을 하시고
고생 많으셨고 애도 많이 태우고 이렇게 높은 상에 올려드리고 싶어요.
-저희 부모가 6.25 때 메러디스 빅토리아호를 타고 온 피난민.
화물선이니까 짐 싣는 기중기로 사람을 실었다고 그래요.
망을 타고 막 올라가거든요. 안전 이런 게 있을 거 아닙니까?
빠지면 안 건져준데. 빠지면 겨울이니까 바로 빠져 죽는 걸 봤답니다.
그래서 화물선에 1만 4천 명이 타고 온다.
지하부터 탁탁탁 실어 가지고 갑판까지 딱 실어 가지고 한 2, 3일 오거든요.
-우리 시아버지 가서 두 달만 있으면 온다.
그러니까 가서 우리 엄마 보고 두 달 있으면 데리러 온다 하니까 엄마 집 안에서
내가 사돈을 따라서 피란 가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이지.
너나 가서 잘 있다 오라고.
나는 그 시집이라고 뭔지 엄마를 버리고 온 생각하면 맨날 눈물이 나고.
-피란을 오고 어려운 시절 우암동 이 지역의 사람들이 서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나누는 그런 공간이 되었었던 것이죠.
이곳에서 자그마한 천막을 짓고 또 이곳에서 미군 구호 활동으로 군대에서 사용하는 그런 천막
이런 것들을 구해서 함께 모여서 살았던 것이죠.
-다 그 도랑에 시궁창이며 오만 거 다 있고.
-식구 많은 데는 한 10명씩 살았습니다. 그 조그마한 집에.
-다락을 이어 가지고 애들 위에서 자고 하거든요.
-흙벽에 대나무 얼금얼금 이어서 흙벽을 바르다 보니까 개미가 살든지 바퀴벌레가 살든지.
장마철에 비가 엄청 온 적이 있습니다, 여기 소막마을에.
정말 소막마을에 집집마다 안방까지 물이 찬 경우가 있거든요.
아마 옆집하고 통과된 집도 많을 겁니다.
-언덕 밑에 솥가마를 큰 거를 하나 걸고 거기다 죽을 하나씩 끓여가지고 타 먹으라고
양재기 들고 가서 줄 서면 많이도 안 줍니다. 한 사발 정도. 그래도 그걸로 연명을 했습니다.
-저는 동생 밥을 챙기려고 줄을 서다가 제가 뜨거운 걸 들고 성당에서 내려오다가 제가 넘어집니다.
그래서 엉엉 울고 그게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엉엉 울고 있으니까 수녀님이 다시 제 손을 잡고 마지막에 듬뿍.
-우암동장 하면서는 신부님이 내려와서 동장아, 가자 하고 말이죠. 플래카드 들고 구호 활동 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시장통으로 동네를 돌면서 모금을 하죠. 그래서 모금해서 또 불쌍한 아이들을 전부 다 돌봐주고 말이죠.
대단한 분이에요, 그분. 그분이 우암동 살렸어요.
-3살 때 홍역을 앓았어요. 피란 가고 이럴 때 6.25가 났어요.
혼자 너무 심심해서 앉아서 대문 열고 나와서 길을 잃어버렸어요.
무섭고 그렇게 있는데 신부님이 안 되겠다고 하면서 고무신 사서 신부님 뒤에 밖에 나가서 자전거 타고 이 동항성당에 온 생각이.
부모, 자꾸 엄마 생각이 나서 울고 그러니까 생각이 자꾸. 진짜 다 좋았어요, 고마웠어요. 다 좋아요.
-길거리에 걸어 다니다가 양재기 하나, 숟가락 하나 들고 밥 얻어먹는 애들이 있으면
그런 애들을 하나씩 하나씩 주워 오는데 12명을 데려온 거예요.
그러니까 저 사제관 안에다 저래 좁은 데다가 고아원처럼 이제 그 애들을 우리가 밥을 해서 밥을 주라고 그래서 밥을 해서 주죠.
-어느 날 한 부인이 찾아왔어요. 와서 한 신부님께 돈을 500원만 빌려달라고 이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집도 가난한데 아이들이 많아서 태중에 있는 이 아기를 낙태를 시켜야 되겠다고 이렇게 한 겁니다.
신부님께서 그러면 내가 500원짜리 100번도 줄 수가 있다. 그러니 아기를 낳으라고 이렇게 했어요.
임산부가 아기를 낳아서 이 아이가 그래도 낙태되지 않고 태어난 것에 굉장히 기뻐하셨습니다.
생명을 굉장히 소중하게 여기신 분이십니다.
-결혼을 해서 애들 둘을 거기서 교회 조산소에서 애들 둘을 거기서 출생을 했죠.
그 당시에는 의료보험도 없고 그러다 보니까 성당에 다니는 성도가 아니더라도 일반 주민도 많이 아기들 태어났거든요.
-수녀님들과 함께 업무적인 이야기를 하시더라도 가난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먼저 들어오게,
사무실에 들어오게 하시는 이런 분이었습니다.
-이번 5개년 계획에서는 농지를 확장하는 해간과 간척 사업이.
-나의 어머니 죽었습니다. 나의 어머니 죽었습니다 하면서 이 가슴을 치고 발로 벽을 차요.
독일로 가야 되는데 비행기 삯이 없잖아요. 돈은 다 갖다 한국 사람 다 풀어 먹이고.
그래 주교관에서 돈이 와서 그 돈을 받아서 독일 가서 초상을 치르고 오셨어요.
우리들은 또 이 성당 안에서 검은 리본 달고 상주 노릇한다고 신부님 오실 때까지 그렇게 했습니다.
-선종하실 때 함께 있었습니다. 2017년 10월 14일 생신날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남천성당 장례식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오셔서 장례식에 참여했는데
그 오신 분들의 마음이 누구나 다 아버지를 잃었다는 생각을 다 하게 됩니다. 저 역시도 그랬고.
-장례 미사를 하는데 진짜 눈물 나더라고요. 내 부모가 돌아가신 것처럼 마음이 참 찡하더라고요.
-나는 한 아버지로서 이 불쌍하고 못 사는 교우들을 살릴 수 있도록 마침내 20년 다 지나가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많은 일, 말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었는데
첫째, 사랑도 마지막 사랑도 본당 안에, 곁에 살고 있으니 계속해서 이 본당을 위하여 기도하고
한국을 잘 왔다고 그렇게 마음을 아주 기쁘게 하게 하는 것입니다.
-절망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는 일.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도와 새로이 살아갈 힘을 얻게 하는 일.
더 큰 믿음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