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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유산아카이브 오래된 미래 - EP20. 자갈치시장
등록일 : 2026-06-01 14:20:02.0
조회수 : 221
자갈치시장, 피란민의 삶과 함께 자라난 부산의 상징
부산 자갈치시장이 한국전쟁 피란민들의 삶과 함께 성장해 온 부산의 대표 공간으로 소개됐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남쪽으로 피란을 온 주민들에게 자갈치시장은 새로운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피란민들은 자갈치시장 일대에 정착해 빈대떡과 생선, 곰장어 등을 팔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당시 시장은 허가나 정식 시설 없이 대야 하나를 놓고 장사를 시작할 수 있을 만큼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주민들은 하루 한 끼 먹거리를 구하기 위해 시장으로 모여들었고 피란민과 원주민이 함께 어려운 시절을 버텨냈습니다.
현재의 자갈치시장 일대는 과거 바닷가였으며 작은 좌판들이 하나둘 생기면서 오늘날의 시장으로 발전했습니다.
시장 상인들은 한복이나 작업복 차림으로 장사하며 생계를 꾸렸고 시장의 규모도 점차 커졌습니다.
곰장어 장사 역시 몇몇 상인들이 시작한 뒤 점차 늘어나며 자갈치의 대표 먹거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상인들은 단속을 피해 자리를 옮겨가며 장사를 이어가는 등 치열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자갈치시장에는 지금도 피란민들이 생활했던 흔적과 오래된 건물들이 남아 있습니다.
한때 영화 촬영지로 활용될 정도로 당시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었습니다.
시장 관계자는 자갈치시장이 110년이 넘는 전통을 지닌 곳으로 전국의 수산물이 모여드는 중심지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건어물과 멸치, 연안 수산물 등이 부산에 집결해 전국으로 유통됐습니다.
상인들은 시장에서의 장사를 통해 자녀를 키우고 가정을 일구며 삶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자갈치시장 상인들은 변화에 대응하면서도 전통을 지키며 시장을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프로그램은 자갈치시장이 전쟁과 피란의 기억, 가족의 삶과 부산의 정서를 품은 공간이라고 조명했습니다.
부산 자갈치시장이 한국전쟁 피란민들의 삶과 함께 성장해 온 부산의 대표 공간으로 소개됐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남쪽으로 피란을 온 주민들에게 자갈치시장은 새로운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피란민들은 자갈치시장 일대에 정착해 빈대떡과 생선, 곰장어 등을 팔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당시 시장은 허가나 정식 시설 없이 대야 하나를 놓고 장사를 시작할 수 있을 만큼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주민들은 하루 한 끼 먹거리를 구하기 위해 시장으로 모여들었고 피란민과 원주민이 함께 어려운 시절을 버텨냈습니다.
현재의 자갈치시장 일대는 과거 바닷가였으며 작은 좌판들이 하나둘 생기면서 오늘날의 시장으로 발전했습니다.
시장 상인들은 한복이나 작업복 차림으로 장사하며 생계를 꾸렸고 시장의 규모도 점차 커졌습니다.
곰장어 장사 역시 몇몇 상인들이 시작한 뒤 점차 늘어나며 자갈치의 대표 먹거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상인들은 단속을 피해 자리를 옮겨가며 장사를 이어가는 등 치열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자갈치시장에는 지금도 피란민들이 생활했던 흔적과 오래된 건물들이 남아 있습니다.
한때 영화 촬영지로 활용될 정도로 당시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었습니다.
시장 관계자는 자갈치시장이 110년이 넘는 전통을 지닌 곳으로 전국의 수산물이 모여드는 중심지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건어물과 멸치, 연안 수산물 등이 부산에 집결해 전국으로 유통됐습니다.
상인들은 시장에서의 장사를 통해 자녀를 키우고 가정을 일구며 삶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자갈치시장 상인들은 변화에 대응하면서도 전통을 지키며 시장을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프로그램은 자갈치시장이 전쟁과 피란의 기억, 가족의 삶과 부산의 정서를 품은 공간이라고 조명했습니다.
-처음 도착한 것이 자갈치 시장이었습니다. 대단히 놀랐죠. 이런 별천지가 있구나.
팔도에 있는 피난민들이 다 모여 있는. 시끄럽기 한정이 없고 하루 한 끼의 먹거리를 찾기 위해 아우성치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가족 부양을 해야 된다는 그런 책임감도 있고 우리 아저씨가 몸이 안 좋으니까
애들 공부도 시켜야 되고 하는 그런 의무감에 하루도 안 쉬고 그땐 했어요.
생선하고 곰장어 하고. 그때 어떻게 했는가 잘 모르겠어요.
-어머님은 지고 이고 들고 아버님은 이불 보따리 하고 이런 거를 지고 동생을 무등 태우고 나는 걷고.
이래가지고 피란을 내려왔어요.
무조건 피란 행렬을 따라 남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내려오면서 시체도 보고 이게 사람이 죽는 거구나.,
그래가지고 처음 도착한 것이 자갈치 시장이었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무슨 장사를 했냐면은 지금 자갈치 시장 들어가다 보면 오른쪽에 횟집들 있잖아요.
그 앞쪽으로 판잣집을 막 지어가지고 그냥 장사를 해요. 거기서 빈대떡 장사를 했죠.
그때는 누가 허가해 주는 사람도 없고 그냥 앉아가지고 대야 하나 놓고 물건을 놓으면 장사 되는 거예요.
연탄불이었나? 장작불이었지. 프라이팬 하나 놓고 빈대떡을 구워 팔았죠.
그때는 쌀보다 녹두가 엄청 쌌어요. 그때 고마운 거는요.
이 배타적으로 비토하거나 하는 게 없었어요.
방 세 칸 있으면 한 칸 세를 줘봐야 얼마 안 받았거든요.
그래가지고 전부 다 살았잖아요.
지금 토박이 부산 시민들이 상당히 인정이 많고 통이 컸고 손이 컸다는 얘기지.
-매립되기 전에 여기 지금 서 있는 여기는 바다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때는 이런 건물도 없었고 2층 건물도 없었고 몽돌 있는 그런 바닷가에 파도가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그런 상태에서 조금 육지 쪽으로 해서 대야 같은 거,
그런 고무 대야 같은 거 놓고 이래갖고 조금씩 조금씩 한 게 이렇게 형성이 돼 갖고 이만큼 발전해 온 거예요.
많이 변했죠. 지금은 완전히 현대화가 됐고 요새는 이런 앞치마도 있고 작업복도 있고 이랬는데
옛날에는 한복 같은 것도 입고 일바지 같은 거 입고 이렇게 하는 복장부터가 달라졌으니까 많이 다르죠.
-저기 위에서 어패류 시장에서 우리 어머니가 거기서 앞에서 하다가 어패류 시장 안에
돈이 없어서 못 들어가고 있는 사람은 이리로 밀려 왔는 거라.
밀려 와가지고 하나둘, 하나둘 해서 자리를 잡았는데 그래갖고 하게 되었지.
서민들이 먹을거리는 그때 별로 없었잖아요.
그래 한 집, 두 집 생기고 이러니까 그게 맛있어. 그래가지고 그때는 쌌죠.
싸서 많이 먹었다. 한 집, 두 집 생기고 여러 집이 생기니까 곰장어 거리가 됐죠.
파라솔을 치고 하면서 구청에서 막 단속이 나오면 밤에 달리기 바빠요.
탁자 가지고 막 달리기 바빠가 또 가고 나면 그 자리에서 또 하다가.
그러니까 밤 11시까지는 했는데, 그때는 통금이 있으니까.
그래가지고 하다가 차츰차츰 우리가 연구를 해 가지고 이 집도 짓고.
-시장 안에 들어가 보면 옛날 일제시대에 지었던 집들 그런 집들이 아직까지 그대로 형성이 되어 있어요.
우리 시장 안에도 곳곳에 피란민들이 살던 그 표적이 많이 있어가지고 그 당시만 해도 영화 촬영 장소로 많이 애용됐어요.
우리 시장 전통이 한 110년 됐는데 모든 수산물은 부산에 다 모이게 되어 있었어요.
건어물, 멸치, 연안에서 잡은 거는 전부 부산에서 다 해가지고 부산 시내 그라고 경남, 경북, 서울까지 다 팔고 했어요.
물건이 얼추 다 부산에 모이니까 부산에 안 오면 못 사거든.
-배를 물건을 왕래하고 아주 옛날에는 그런 식으로 했죠.
장사에 40년 동안 움직이면서 열심히 했기 때문에 애들도 공부도 시키고 결혼도 시키고
지금 다 정리를 했으니까 원동력이 참 대단한 거죠, 그러니까.
-새로운 변화에 도전하는 거는 좋지만은 기존의 방식을 유지하면서 좀 더 개선하고 성장할 수 있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항상 꾸준하게 자리를 지키면서 성장과 발전을 이루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산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 바로 자갈치 시장입니다.
인정이 넘치고 억세고 살아 있는 1세대, 2세대, 3세대가 한데 어울리는 그런 시장이기 때문에
다른 시장보다도 좀 특이한 어떤 정서가 있는 자갈치 시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전쟁의 중심에 있었던 자갈치 시장의 삶의 현장이기도 하고. 보존돼야 되고 기억해야 되잖아.
그럼 세계 사람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요소가 있잖아요.
전쟁과 죽음, 가족.
과거를 상기하고 발굴하고 문화를 극대화해서 이거를세계인에게 알리는 쪽으로 생각을 바꿔야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