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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유산아카이브 오래된 미래 - EP21. 영도 옛 도선터 물양장
등록일 : 2026-06-08 14:58:20.0
조회수 : 143
영도 옛 도선터 물양장, 피란민의 삶과 부산항의 기억을 품다
한국전쟁 이후 영도 옛 도선터 물양장이 피란민들의 삶과 부산항 발전의 역사를 품은 공간으로 소개됐습니다.
영도 일대에는 전쟁을 피해 내려온 피란민들이 정착하며 천막과 임시 거처를 마련해 생활했습니다.
피란민들은 영도 선창가와 수용소 등에서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고, 서로 의지하며 생계를 꾸렸습니다.
주민들은 원조 물자로 들어온 쌀을 주워 죽을 끓여 먹고 집집마다 음식을 구하며 힘겨운 시절을 버텼다고 회상했습니다.
당시 영도 물양장은 보세창고가 밀집한 부산항의 주요 물류 거점이었습니다.
컨테이너가 없던 시절, 하역 작업은 대부분 인력에 의존해 이뤄졌습니다.
노동자들은 바지선에서 화물을 내려 보세창고까지 직접 운반하며 부산항 물류를 떠받쳤습니다.
영도다리와 영도경찰서 일대는 매립사업을 거치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습니다.
주민들은 과거 대평동과 봉래동 일대 상당수가 바다였다고 증언했습니다.
또 영도에는 부산 최초의 슈퍼마켓으로 알려진 럭키슈퍼체인이 들어서며 당시 활기 있던 상권의 모습도 전해졌습니다.
물양장 주변은 선박과 항만 관련 물품이 오가던 공간으로 부산항 성장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옛 창고들은 당시 항만 물류의 흔적을 보여주는 장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창고를 활용한 문화공간 조성 작업에 참여한 관계자는 세월이 남긴 공간의 질감과 분위기가 특별한 매력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과거의 흔적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담아내는 공간으로 꾸미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프로그램은 영도 옛 도선터 물양장이 피란민의 삶과 부산항 산업화의 기억을 간직한 지역유산이라고 조명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영도 옛 도선터 물양장이 피란민들의 삶과 부산항 발전의 역사를 품은 공간으로 소개됐습니다.
영도 일대에는 전쟁을 피해 내려온 피란민들이 정착하며 천막과 임시 거처를 마련해 생활했습니다.
피란민들은 영도 선창가와 수용소 등에서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고, 서로 의지하며 생계를 꾸렸습니다.
주민들은 원조 물자로 들어온 쌀을 주워 죽을 끓여 먹고 집집마다 음식을 구하며 힘겨운 시절을 버텼다고 회상했습니다.
당시 영도 물양장은 보세창고가 밀집한 부산항의 주요 물류 거점이었습니다.
컨테이너가 없던 시절, 하역 작업은 대부분 인력에 의존해 이뤄졌습니다.
노동자들은 바지선에서 화물을 내려 보세창고까지 직접 운반하며 부산항 물류를 떠받쳤습니다.
영도다리와 영도경찰서 일대는 매립사업을 거치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습니다.
주민들은 과거 대평동과 봉래동 일대 상당수가 바다였다고 증언했습니다.
또 영도에는 부산 최초의 슈퍼마켓으로 알려진 럭키슈퍼체인이 들어서며 당시 활기 있던 상권의 모습도 전해졌습니다.
물양장 주변은 선박과 항만 관련 물품이 오가던 공간으로 부산항 성장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옛 창고들은 당시 항만 물류의 흔적을 보여주는 장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창고를 활용한 문화공간 조성 작업에 참여한 관계자는 세월이 남긴 공간의 질감과 분위기가 특별한 매력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과거의 흔적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담아내는 공간으로 꾸미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프로그램은 영도 옛 도선터 물양장이 피란민의 삶과 부산항 산업화의 기억을 간직한 지역유산이라고 조명했습니다.
-(노래) 울었네 소리 쳤네 몸부림 쳤네 안개 낀 부산 항구 옛 추억만 새롭구나
몰아치는 바람결에 발길이 가로막혀 영도다리 난간 잡고 나는 울었네
-바다 거기서 다 천막 짓고 살던 생각을 하니까 너무 없이 살아가지고
못 먹고 참 울컥거리기도 하고.
-1950년도 여기가 보세 창고거든요. 모든 걸 인력으로 해야 했거든요.
인력으로 하니까 사람들이 많이 오죠.
-어선을 타고 포항까지 왔죠. 도시로 가야 된다. 도시가 부산이다.
그럼 부산이 어디고 하니까 부산은 이 기차 철로를 쭉 따라가서 기차 철로 끝이 부산이다.
제가 그래가지고 이 기차 철로를 따라서 상상하면서 내려오는 게 그게 한 보름 이상 걸어오면서
밥도 얻어먹고 또 어느 집에서 들어가 자기도 하고. 영도 이쪽에 피란민 수용소가 있었어요.
그래 막상 가보니까 이 방이라고 하는 데가 방이 아니고 뭡니까.
가마떼기, 가마떼기. 쌀가마, 쌀가마를 이렇게 걸치면은 이 사람 방이고 이래 걸치고.
그러니까 서로 도와가고 훼손된 배 밑에라든지 위에라든지 비를 안 맞아야 되니까.
-우리가 배 타고 나왔는데 금세 바로 들어가는 줄 알았어요.
근데 38선이 막혔잖아요. 그래서 못 갔죠. 그래서 거제도에서 한 2년 살다가 부산 영도로 왔죠.
바다, 옛날에는 선창가라고 그랬어요, 선창가. 거기에다가 천막을 지었어요.
임시 천막을 짓고 우리가 거기 네 식구가 살았어요.
이제 여기 도기 회사 있잖아요.
그쪽 뒤편에 가면 우리가 막 그릇도 주어 오고 조금 이빨 나가고 그런 그릇 있잖아요.
그런 걸 주어 와서 우리가 사용하기도 하고 막 그랬어요.
-이제 매립이 됐어요.
매립을 해서 이 영도다리하고 현재 영도경찰서 이 거리가 가까워져야 다리 만들기 좋다 해서
이렇게 공사를 하다 보니까 물양장 여기도 생기고 그리고 봉래동 이쪽
여기 앞이 전부 다, 대평동도 다 바다였습니다.
-안남미쌀 같은 거 미국 같은 데서 원조 들어오잖아요.
그러면 트럭에다 싣고 오면 그 트럭 위에 내가 5살짜리하고 우리 엄마하고
그 트럭 위에 올라가서 쌀 흘린 거를 다 쓸어서 집에 와서 엄마하고 나하고 상 펴놓고
돌, 쌀, 돌, 쌀, 이렇게 골라서 그걸로 죽 끓여 먹고 그렇게 살았어요.
조그만 어린 애들도 배가 고프니까 깡통 들고 또 아기 엄마들은 아기 업고 이 그릇 들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많이 얻어먹고 그렇게 동냥을 많이 했어요.
-옛날에는 컨테이너라는 게 없었어요.
1950년도 60년도에 없으니까 보세 창고 열었다가 통과되면 또 끌어내고.
-옛날에 럭키슈퍼체인이라고 부산에서 제일 먼저 슈퍼마켓이 생겼습니다.
그 직장 따라 내가 여기 온 그때가 28살 때 왔는데 지금 82살입니다.
럭키슈퍼체인 이 자리에 있었죠.
그때 슈퍼마켓 문 열면 막 손님들이 너무 많이 와서 아침부터 문 열어달라고 난리 났죠.
보세 창고가 여러 개 있었거든요.
수입 물품 세금 매기기 전에 보세 창고에 일단 넣었다가 관세를 매기거든요, 관세.
그때 노동자들이 발발했고 바지선이라고 동력이 없는 배, 밑바닥만 있는 거.
거기에 있는 화물을 노동자들이 어깨에 메고 보세 창고로 옮기는 그 작업이며 그런 곳입니다.
그 물양장이라는 곳이.
-아버지가 경비를 하셨거든요.
회사 경비를 하시면서 배 안에 손잡고 구경도 시켜주시고 그랬어요.
하시키라고 왜 여기 보면 낮은 배 있잖아요.
납작한 거 아무것도 없는. 회사에 모찌꼬미 넣고. 빌려주는 거 있잖아요.
배를 가지고 어느 회사에다가 소속. 그렇게 하면 한 달에 돈이 얼마씩 들어오고 막 이렇게 하니까.
-선박이나 관련된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의 느낌이라서 굉장히 날것의 느낌이 좀 강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좀 예전에 지어진 창고이다 보니까 이런 천장의 구조 같은 것도 좀 현대식 창고랑은
좀 다른 분위기인 것 같고 색다른 분위기를 좀 많이 보였던 것 같아요.
세월이 주는 그런 질감이나 공간의 분위기 같은 것들이 주는 힘이 좀 있다고 생각을 했고
저희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도 좀 잘 전달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살릴 수 있는 부분들은
최대한 잘 살려서 표현하는 쪽으로 공간을 준비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