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기
지역유산아카이브 오래된 미래 - EP22. 6·25전쟁의료지원기념비
등록일 : 2026-06-15 13:18:38.0
조회수 : 100
전쟁 속 생명을 구한 손길…태종대 의료지원기념비의 의미
부산 영도 태종대 입구에 세워진 ‘6·25 전쟁 의료지원 기념비’는 한국전쟁 당시 한국을 도운 해외 의료지원단의 헌신을 기리는 공간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국내 의료시설이 크게 부족한 상황에서 스웨덴과 덴마크, 노르웨이, 인도, 이탈리아, 독일 등 6개국은 한국에 의료지원단을 파견해 부상자와 피란민 치료에 나섰습니다.
이 가운데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디아호는 1951년 3월부터 1953년 8월까지 활동하며 초기에는 부산항, 이후에는 인천항에서 환자들을 치료했습니다.
평양에서 피란 내려온 김주완 씨는 신문배달을 하다 기차 사고로 왼쪽 발목을 크게 다쳤고, 덴마크 의료진의 도움으로 유틀란디아호에서 수술과 치료를 받았다고 회상했습니다.
김 씨는 당시 유틀란디아호가 전쟁 속 한국 사회와는 전혀 다른, 깨끗하고 친절한 공간처럼 느껴졌다고 말했습니다.
스웨덴은 가장 먼저 한국에 의료지원단을 보낸 나라 가운데 하나로, 옛 부산상고를 징발해 400 병상 규모의 병원을 운영했습니다.
스웨덴 병원에서는 전쟁 중에는 군인을, 휴전 이후에는 부산 시민들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가 이어졌습니다.
스웨덴 병원에서 일했던 김낙규 씨는 당시 시민들이 아침마다 수백 명씩 줄을 서 치료를 받았다고 증언했습니다.
김 씨는 또 병원에서 일하며 학업을 이어갔고, 외과 과장이 대학 등록금을 두 차례 지원해 준 일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습니다.
의료지원단은 전쟁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료 인력과 시설이 부족했던 한국 사회에 실질적인 도움을 남겼습니다.
프로그램은 이들이 살려낸 목숨이 200만 명에 이른다고 전했습니다.
이들의 헌신을 기리기 위해 1972년 태종대에는 의료지원 참전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전쟁 속에서 대가 없이 의료지원을 펼친 해외 의료진의 활동은 휴전 이후 한국 의료기술 발전에도 밑거름이 된 것으로 평가됩니다.
김주완 씨는 훗날 덴마크에서 자신을 구조했던 요한 프리스크를 다시 만나 감사의 뜻을 전했고, 자신이 살아 가족을 이루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도 그 도움 덕분이라고 말했습니다.
‘6·25 전쟁 의료지원 기념비’는 피란수도 부산에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 헌신한 이름 모를 의료진들의 희생과 인도주의 정신을 되새기게 하는 장소로 남아 있습니다.
부산 영도 태종대 입구에 세워진 ‘6·25 전쟁 의료지원 기념비’는 한국전쟁 당시 한국을 도운 해외 의료지원단의 헌신을 기리는 공간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국내 의료시설이 크게 부족한 상황에서 스웨덴과 덴마크, 노르웨이, 인도, 이탈리아, 독일 등 6개국은 한국에 의료지원단을 파견해 부상자와 피란민 치료에 나섰습니다.
이 가운데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디아호는 1951년 3월부터 1953년 8월까지 활동하며 초기에는 부산항, 이후에는 인천항에서 환자들을 치료했습니다.
평양에서 피란 내려온 김주완 씨는 신문배달을 하다 기차 사고로 왼쪽 발목을 크게 다쳤고, 덴마크 의료진의 도움으로 유틀란디아호에서 수술과 치료를 받았다고 회상했습니다.
김 씨는 당시 유틀란디아호가 전쟁 속 한국 사회와는 전혀 다른, 깨끗하고 친절한 공간처럼 느껴졌다고 말했습니다.
스웨덴은 가장 먼저 한국에 의료지원단을 보낸 나라 가운데 하나로, 옛 부산상고를 징발해 400 병상 규모의 병원을 운영했습니다.
스웨덴 병원에서는 전쟁 중에는 군인을, 휴전 이후에는 부산 시민들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가 이어졌습니다.
스웨덴 병원에서 일했던 김낙규 씨는 당시 시민들이 아침마다 수백 명씩 줄을 서 치료를 받았다고 증언했습니다.
김 씨는 또 병원에서 일하며 학업을 이어갔고, 외과 과장이 대학 등록금을 두 차례 지원해 준 일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습니다.
의료지원단은 전쟁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료 인력과 시설이 부족했던 한국 사회에 실질적인 도움을 남겼습니다.
프로그램은 이들이 살려낸 목숨이 200만 명에 이른다고 전했습니다.
이들의 헌신을 기리기 위해 1972년 태종대에는 의료지원 참전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전쟁 속에서 대가 없이 의료지원을 펼친 해외 의료진의 활동은 휴전 이후 한국 의료기술 발전에도 밑거름이 된 것으로 평가됩니다.
김주완 씨는 훗날 덴마크에서 자신을 구조했던 요한 프리스크를 다시 만나 감사의 뜻을 전했고, 자신이 살아 가족을 이루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도 그 도움 덕분이라고 말했습니다.
‘6·25 전쟁 의료지원 기념비’는 피란수도 부산에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 헌신한 이름 모를 의료진들의 희생과 인도주의 정신을 되새기게 하는 장소로 남아 있습니다.
-참 그때가 감사하고 고마워요. 공짜로 수술하고 입원하고 다 돈 안 받고 공짜로 다 해주고.
그래 그때 살아남은 사람들이 참 많았고 스웨덴 병원이 아니면 상상도 못 했지.
-마침 적시에 덴마크 사람들이 찾아와서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죠.
만약에 이 세상에 천국이라고 그런 게 있다고 그러면 이런 데가 천국일 것이다, 난 그렇게 생각을 했지.
-교과서하고 공책 같은 거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내가 신문배달하는 걸 취직을 했는데
옆으로 트럭이 지나가면 트럭 뒤꽁무니에 이렇게 매달려서 가고. 또 기차가 지나가면
기차의 옆구리에 매달려서 가고. 노상 그렇게 지나가는 기차나 트럭에 매달려서 다녔는데
하루는 철계단이 있는데 다리가 거기 못 가고 헛디뎌서 기차 밑으로 다리가 들어가서
왼쪽 다리 발목이 잘려서 피를 흘리고 있던 중에 덴마크 위생병 요한 프리스크하고
칼 요한슨이라고 그러는 두 사람이 지나가다 거기서 나를 구조해서 인천 앞바다에 떠 있던
유틀란디아호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수술을 받고 약 6개월간 거기서 치료를 받았죠.
6.25 당시에 한국 사회는 마치 지옥인 것마냥 그냥 사람끼리 만나기만 하면 싸우고 치고 받고 가서
전 시민의 얼굴을 보면 전부 새까맣게 깜둥이같이 때가 그냥 새까맣게 묻은 사회에서
덴마크 병원선으로 들어가니까 그 환경이 그렇게 깨끗하고 밝고 사람들이 친절하고
깨끗한 데서 자고 그러니까 비록 다리는 하나 없어졌을망정 참 나는 행운아다 그런 느낌을 받았죠.
-스웨덴 사람들이 굉장히 착해요.
착하고 운동장이 넓은데 거기 내놔 텐트 쳐가지고 그게 전부 입원실이에요.
그 건물에는 X-레이에다 기계하고 전쟁 시대니까 군인들 보다가 휴전이 되고는
부산 시민들 누구든지 오면 공짜로 다 차려해 줬지 않습니까.
아침마다 줄을 몇백 명씩 서 있는데 그것도 한 2년 했으니 많았을 거 아닙니까.
하우스 보이로 있으면서 동아고등학교 야간을 다니고 그다음에 부산대학 가고 그랬는데
외과 과장이 등록금을 두 번이나 내줬어요.
미스터 김 한번 보자 가니까 돈 봉투를 줘요.
그 사람한테 두 번이나 등록금을 받았었습니다.
참 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내가 대학병원 나와서 우리 집사람하고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스칸디나비아반도 그까지 여행 갔어요.
혹시나 호기심에 만날까 싶어 그 나라까지 여행 갔다 왔다고.
-내가 덴마크 코펜하겐 카스트럽 국제공항에 도착해서 막 게이트 밖으로 나오니까
그냥 쫓아와서 나를 이렇게 번쩍 안아가지고 하늘로 이렇게 올리면서. 그렇게 얘기해.
당신이 나를 살려놓아서 이 세상에서 결혼해가지고 이남이녀를 다 잘 길러가지고
모두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된 게 파파상, 요한 프리스크의 덕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