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유산아카이브 오래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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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유산아카이브 오래된 미래 - EP25. 용두산공원

등록일 : 2026-07-06 13:59:44.0
조회수 : 138
용두산공원, 일제강점기부터 피란수도까지…부산 역사를 품은 언덕


용두산공원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산업화를 거쳐 오늘날 부산을 대표하는 시민공원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1930년대 일제는 용두산에 신사를 세우고 국폐소사로 승격해 관공서와 전차 이용객들에게 참배를 강요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일본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일본인들이 신사에 모였고, 이를 본 한 시민이 신사를 불태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원 소장은 당시 시민들이 나라를 빼앗긴 설움과 신사 참배 강요에 대한 울분을 품고 있었으며, 신사가 불탔다는 소식에 속이 후련하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설명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피란민들이 용두산 일대에 판자촌을 이루며 삶을 이어갔습니다.

1953~1954년 부산에 근무했던 미군 클리포드 씨는 당시 용두산 주변 판자촌 모습을 컬러 사진으로 기록했습니다.

사진에는 미화당 뒤편까지 빼곡히 들어선 판자촌의 모습이 담겨 당시 부산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용두산 곳곳에는 대화재 당시 뜨거운 열과 물로 인해 표면이 갈라진 돌도 남아 전쟁과 화재의 흔적을 전하고 있습니다.

전쟁 이후 용두산은 시민들의 생활과 교육 공간으로도 활용됐습니다.

당시 학교는 한 학급에 약 60명이 공부할 정도로 학생 수가 많았고, 중부 지역 인구도 크게 늘었습니다.

이후 용두산공원은 부산 시민들의 대표적인 휴식 공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부산타워는 남포동에서 데이트를 즐기던 시민들이 찾는 명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20m 높이 전망대로 오르는 경험은 당시 시민들에게 특별한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여름이면 가족들이 도시락을 들고 공원을 찾아 더위를 피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오래된 건물을 활용한 공간들이 여행객들의 관심을 받으며 새로운 관광 명소로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용두산공원은 일제강점기와 피란수도 부산의 기억, 그리고 시민들의 일상이 함께 쌓인 공간으로 부산의 역사를 품은 상징적인 장소로 남아 있습니다.

-용두산아 용두산아~
너만은 변치 말자~
-6.25사변 났잖아요.
피난민들이 내려오면서 막 하꼬방 짓고 여기도 하꼬방을 짓고.
거기 있는 사람은 이쪽으로 또 오고.
-판자촌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요.
-남포동에서 미팅하고 동반자와 부산타워 전망대에  올라가는 게 하나의 큰 행사였죠.
아주 멋진 추억이었습니다.
-1930년대에 들어서 신사를 국폐소사로 승격을 시켜서 모든 관공서는 아침 일정 시간 되면
신사를 향해서 요배를 하고 이곳을 지나는 전차들도 신사 앞을 지나면 전차 차장이 신사전 이러고
종을 땡땡땡 치면 자리에서 일어나서 요배를 하던 공간으로 조성했던 거죠.
해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사는 그대로 있고 전국 각지에서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모였던 일본인들이 시내를 돌아다니다가는 봉변을 당할까 싶어서 신사 관리사무소에 모여서
희희낙락거리고 있는 것을 이 사람이 발견하고는 그 울분에 다음 날 시너를 한 병을 들고 와서
신사를 불을 태워버렸어요.
굉장히 나라를 뺏긴 것도 서러운데 그들이 모시는 신에 대해서 참배, 요배를 강요하니까
그에 대한 반발이 굉장히 심하고 있었는데 드러내놓고 표를 못 하고 있었죠.
그러던 과정에서 신사가 불났다고 하니까 시민들은 속이 후련하다라는
표현들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6.25사변 났잖아요.
피난민들이 내려오면서 하꼬방 짓고 여기도 하꼬방을 짓고 거기 있는 사람은 이쪽으로 또 오고.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은 바깥 산에 점령을 해 있고.
-이분은 1953년부터 54년까지 지금 용두산공원 밑에 자갈치시장 지금 하나로마트
자리에 44공병여단 본부에 근무를 하셨어요.
그런데 그분이 주말마다 그 당시에 코닥 칼라필름이 처음으로 나왔었는데
그 당시 부산의 모습을 촬영하게 되었죠.
클리포드 씨의 사진에 그 당시에 판자촌의 모습들이 있죠.
미화당 뒤가 판자촌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사진들을 지금 볼 수가 있습니다.
마치 꽃돌인양 보이는데 저 돌들은 화재로 인해 순식간에 돌이 달궈졌다가
물을 뿌리게 되면 이게 식잖아요.
그러면 껍질이 벌겋게 달궈졌던 돌들이 식으면서 박피, 즉 껍질이 일어나는 그런 형태가
마치 꽃처럼 보이는데 용두산 대화재 흔적들이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1층이 양호실, 서무실이었고 2층이 강당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기 생활을 했던 이 교실이 오른쪽 편에 있었고 저쪽의 건너편에 있었고
저 위에는 가교사가 설치가 돼 있었죠.
졸업할 때 14학급이 졸업했는데 한 반에 한 60명씩 졸업했어요.
그 당시에 우리 지금 중부 인구가 12만이었습니다.
지금 한 4배 정도 돼요.
-용두산아 용두산아~
그리운 용두산아~ 세월 따라 변하는 게~ 사람들의 마음이냐~ 둘이서 거닐던 194계단에~
-제 기억으로는 대학에 입학을 하고 78년도에 여기 처음 올라갔던 것 같아요.
남포동에서 미팅하고 동반자하고 타워를 올라갔는데 부산타워 전망대에 올라가는 게
하나의 큰 행사였죠.
1분이 안 되는 시간 동안에 120m 위로 올라가니까 정말 신기하고 새로운 느낌이었죠.
-부모님하고 거의 매일 왔죠.
집에 있으면 더우니까. 여름에는 도시락 조금 싸가지고 와서 생활 공간이 되었던 곳입니다.
저도 애들이 마흔 다 넘어서 성장을 했는데 그 애들 데리고 여기 와서 앉아 놀고 하는
그런 장소였죠.
-이 건물을 발견하는 순간 진짜 소중한 보물을 발견한 듯한 그런 느낌이었어요.
보기 힘든 형태의 건물이었기 때문에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창문 저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합니다.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그래서 많은 분들도 이 창문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특히 최근에는 프랑스인 가이드분이 어떻게 알고 오셨다가 여행 코스의 마지막이
저희 가게가 될 정도로 일주일에 최근 들어서는 서너 번 오실 정도로 많이 오시고.
-즐거웠던 그 시절은~
그 어디로 가버렸나~ 잘 있거라 나도 간다~ 꽃 피던 용두산~ 아아아 용두산 엘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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