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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유산아카이브 오래된 미래 - EP26. 좌천동 방공호
등록일 : 2026-07-13 11:03:32.0
조회수 : 59
좌천동 방공호, 일제의 전쟁 흔적에서 역사의 교훈으로
좌천동 방공호는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 당시 부산항 방어를 위해 조성된 전쟁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원 소장은 군산에서 부산까지 해안 지역에는 포진지가, 부산 내륙에는 방공호가 많이 남아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좌천동 방공호는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한 인명 피해 방지와 부산항 방어를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라고 말했습니다.
김 소장은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1941년 이후 부산요새사령부 산하에서 방공호를 조성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방공호는 산을 깎아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든 뒤 흙을 덮고 나무를 심어 하늘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위장한 형태였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일본은 가덕도를 대륙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로 보고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여겼다고 설명했습니다.
당시 공사에는 강원도 탄광에서 일하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강제로 징용됐으며, 폭파 뒤 암석을 치우는 작업 등을 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가덕도에서는 일본군이 군사적 목적으로 토지를 수용하면서 주민들이 불편을 호소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요구에 따라 주민들의 출입이 제한됐다는 내용이 당시 공문에 기록돼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피란민들이 방공호 안에 칸막이를 설치해 생활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주민들은 당시 방공호 곳곳에서 여러 가구가 함께 생활하며 어려운 시기를 견뎌냈다고 회상했습니다.
현재 방공호에는 ‘역사는 사실대로 기록하되 나라의 부끄러움은 잊지 말자’는 의미를 담은 안내 문구가 사라져 아쉽다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주민들은 좌천동 방공호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또 이러한 공간을 통해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기억하고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좌천동 방공호는 전쟁과 피란의 흔적을 간직한 채 부산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를 전하는 공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좌천동 방공호는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 당시 부산항 방어를 위해 조성된 전쟁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원 소장은 군산에서 부산까지 해안 지역에는 포진지가, 부산 내륙에는 방공호가 많이 남아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좌천동 방공호는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한 인명 피해 방지와 부산항 방어를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라고 말했습니다.
김 소장은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1941년 이후 부산요새사령부 산하에서 방공호를 조성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방공호는 산을 깎아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든 뒤 흙을 덮고 나무를 심어 하늘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위장한 형태였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일본은 가덕도를 대륙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로 보고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여겼다고 설명했습니다.
당시 공사에는 강원도 탄광에서 일하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강제로 징용됐으며, 폭파 뒤 암석을 치우는 작업 등을 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가덕도에서는 일본군이 군사적 목적으로 토지를 수용하면서 주민들이 불편을 호소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요구에 따라 주민들의 출입이 제한됐다는 내용이 당시 공문에 기록돼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피란민들이 방공호 안에 칸막이를 설치해 생활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주민들은 당시 방공호 곳곳에서 여러 가구가 함께 생활하며 어려운 시기를 견뎌냈다고 회상했습니다.
현재 방공호에는 ‘역사는 사실대로 기록하되 나라의 부끄러움은 잊지 말자’는 의미를 담은 안내 문구가 사라져 아쉽다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주민들은 좌천동 방공호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또 이러한 공간을 통해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기억하고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좌천동 방공호는 전쟁과 피란의 흔적을 간직한 채 부산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를 전하는 공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주도라든지 우리나라 남해안에 군이 상륙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방법이겠죠.
-일본의 입장에서 대륙으로 올라오는 교두보 역할을 하는 중요한 자리여서.
-비록 강제 노동은 아니지만 준강제 노동에 가까운 혹사를 하면서 이런 동굴을 만들었던 것으로 그렇게
지금 파악하고 있습니다.
-군산에서 부산에 이르는 해안지역에 포진지, 방공호가 좀 많이 있습니다.
포진지로 해서 해안에 들어온 것도 많이 있고 부산 같은 경우에는 내륙에 방공호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이곳은 어떤 면에서 일제가 당시로서는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한 인명 피해 방지용으로 만든 것인데
부산항 수비하는 데 굉장히 공력을 들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포병부대들도 부산에 산재하고 그러한 흔적들이 포진지와 방공호 이런 것들로
남아 있다, 이렇게 보는 거죠.
아마 제가 볼 때는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1941년 이후에 진해만요새사령부가
부산요새사령부로 들어오면서 부산요새사령부 산하에 소속된 방공호로 만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요새사령부 산하에 산을 깎아내고 콘크리트로 구조를 완성하고 그 위에 흙을 덮고
나무를 심어서 위장한 그런 규모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봐서는 절대 나타나지 않는 그런 공간이었죠.
-일본에서 봤을 때는 일본의 입장에서 대륙으로 올라오는 교두보 역할을 하는
중요한 자리여서 가덕도 쪽으로 맨 처음 선점하게 되는 그런 계기가 되었죠.
-주로 그 당시에 강원도 탄강에 근무하시는 우리나라 선조들을 강제로 징용해 와서
공사를 진행했다고 그럽니다.
물론 여기는 상당히 단단한 바위 암석 지반이 되어서 곡괭이로 다 판 게 아니고요.
폭발을 하고 나서 우리 근로자들은 부석 제거라든지 이런 작업을 하신 걸로 추정이 되고 있습니다.
-대한제국기였지만 일본이 군략상 자기들이 필요한 지점을 수용할 수 있다라고 우리가 도장을 찍었기 때문에
우리 가덕도 주민들이 불편함을 호소하는 공문들이 계속 우리나라로 올라오거든요.
올라오는 공문들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쪽에서 외무대신이나 공문이 내려오면 어쩔 수 없다, 참아라.
혹은 일본군이 싫어하니 너희 이제 출입하지 마라, 이런 기록들이 실제 공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1900년대 초반에.
-피란민들이 그때 당시에 집이 없어가지고 여기에 있는 방공호에다가 칸막이를 치고 베니어판 칸막이를 치고
한 10집 이상 살았어요.
그래서 우리 당시에 이사 올 때는 한 네다섯 가구만 살고 있고 그 외에는 돌아가시고
행방이 묘연하게 돼 있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구멍구멍마다 사람이 다 살고 있었어요.
지금 다시 살아라카면 천금을 줘도 못 살지예. 무섭지요, 밤에는. 옛날에 보리타작, 밀타작 하면
북시기 있잖아요.
말하자면 나무 그거를 밑에다 깔고 가마니를 깔고 그래 생활을 했어요.
지금 같으면 저런 나일론 장판이 있잖아요.
그 시절에는 저게 없었잖아요.
-명기역사 물망국치라는 입간판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역사는 정확하게 사실대로 명기하되 나라의 부끄러움을 잊지 말자 그런 내용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다녀가시는 분들이 가졌으면 좋겠는데 지금 이게 사라지니까.
역사는 역사대로 보존을 하고 그 역사의 부끄러움을 잊지 말자는 이야기를 꼭 하고 싶습니다.
-부산이 역사적으로도 일제강점기 시대나 아니면 6.25 시절에 있었던 그런 역사적인 분위기하고
이런 거를 과거적으로 애들이 배우고.
-이런 거는 많은 사람들이 봐가지고 역사가 이렇게 있다라는 거에 대한 어찌 보면 이게 그 증거잖아요.
이 증거들이 있어야 저희가 잊지 않고 똑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