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유산아카이브 오래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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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유산아카이브 오래된 미래 - EP29. 흥남철수 기념관

등록일 : 2026-08-03 15:21:41.0
조회수 : 259
흥남철수, 피란민들이 남긴 삶의 기억


흥남철수는 수많은 피란민의 삶을 바꾼 한국전쟁의 대표적인 피란 작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피란민들은 영하 40도를 밑도는 혹한 속에서 흥남부두에 모여 배를 기다리며 가족과 함께 생존을 위한 시간을 버텨야 했습니다.

당시 어린 자녀들을 잃지 않기 위해 새끼줄로 몸을 서로 묶고 피란길에 올랐다는 가족들의 증언도 전해졌습니다.

또 일부 가족은 북한에 남겨진 가족과 영영 이별하게 되면서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왔다고 회상했습니다.

흥남철수를 경험한 가족들은 당시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 이북식 순대를 만들거나 흥남부두를 떠올리는 노래를 부르며 고향을 기억해 왔다고 말했습니다.

흥남철수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은 승선 인원의 120배가 넘는 1만4천500명의 피란민을 태우며 더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현봉학 박사는 피란민을 함께 태워야 한다고 여러 차례 건의했고, 결국 알몬드 장군의 승인이 이뤄지면서 대규모 피란이 가능했다고 소개됐습니다.

당시 배 안에서는 화물칸과 갑판은 물론 모든 공간에 피란민이 탑승했고, 한 명이라도 더 구조하기 위해 질서를 유지하며 승선이 이어졌습니다.

피란 이후 거제도와 부산에 정착한 가족들은 사진관과 상회, 정육점 등을 운영하며 새로운 삶을 일궈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가족을 지키기 위한 희생과 기억은 세대를 거쳐 이어지고 있습니다.

흥남철수를 경험한 가족들은 같은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아버지 고향 함경도에서 흥남 부두까지 내려오는 동안에 추운 데서 3일 동안은 배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어린 동생 안 잃어버리려고 할머니가 새끼줄 해 가지고 그때 얼마나 추웠겠습니까?
-아버지가 3대 독자입니다.
할머니는 북한에 계셨다고요.
미군 따라 피란 갔다가 한 일주일이면 돌아오겠느냐 그리고 내려왔는데 그게 영원한 이별 됐습니다.
-할머니, 아버지, 우리 가족들 그 하여튼 전 가족들이 내려오셨는데 간판 이름이 우리 가족의 역사이기도 하고
특이하기도 하고 기억하기도 좋고 순대는 이제 할머니 기억 때문에 하는 거죠.
어릴 때 할머니가 직접 집에서 순대를 직접 다 해줬어요.
어차피 피란 간판인데 이북 순대를 만들어 보자 그래서 하게 된 계기죠.
힘들기도 해도 아버지, 할머니 기억 때문에 만드는 거니까 끝까지 열심히 만들려고 해요.
-겨울이 영하 40도 내려가니까 총이라든지 탱크에 손 대면 동상 걸린대요.
그때 영하 45도 중공군 7만 명, 미군 1만 명이 거기서 후퇴는 했지만 그거 막아주는 바람에 중공군 막아주는 바람에
피란 온 게 맞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그때 당시 내려올 때 17살이었답니다.
그러면 뭐 학도병이라는 뭐 끌려갈 수도 있는 나이잖아요.
기차역에서 아버지가 기차까지 탔었대요.
그런데 할머니가 이제 아들을 빼와야 되겠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 아들 밥만 잠깐 먹여서 기차 태워 주겠다 그랬는데
할머니가 우리 아버지를 바로 밥 먹이러 가는 척하면서 이제 피란을 내려오게 됐답니다.
정말 극적이었습니다.
할머니가 그 자식들을 다 데리고 그 가족들이 다 흥남 부두까지 피란 내려오는 과정에 우리 제일 큰고모가
우리 제일 막내 삼촌을 업고 오다가 큰고모는 그 포탄 맞아서 돌아가시고 우리 막내 삼촌만 살고 위로부터 해가지고
잃어버릴까 봐 새끼줄을 묶어 갖고 애들을 그렇게 해서 피란 와서 그 흥남 부두에서 3일 동안 그 추운 데서
3일 동안 견뎌가지고 그 배를 타고 왔다는 그게 너무 신기해요.
그 어린 자식들을 어떻게 다 태우고 왔을까
-배를 둘러본 라루 선장님은 더 태워라, 더 태워라.
16시간 동안 승선 인원의 120배가 넘는 1만 4500명을 태우게 됩니다.
팔레트를 만들어서 사람을 올려 화물칸에 내려놓기를 반복하게 됩니다.
더 많이 더 촘촘히 화물칸뿐만 아니라 갑판, 층계 그리고 모든 공간이라는 공간에는 모든 사람, 피란민을 태웠고요.
그리고 누워있지도 못한 상황에서 모두 서서 한 명이라도 더 태울 수 있도록 다들 질서정연하게 승선을 하셨습니다.
통역을 맡고 있었던 현봉학 박사님은 이 사람들이 어디로 갈 것인가 포기할 수 없다 배에 피란민들을 태워서 같이
가자 어려운 상황에서도 여러 번 수송을 건의를 하게 됩니다.
마침내 알몬드 장군은 피란민의 승선을 허락을 하게 되고 현봉학 박사님의 힘겨운 또 어려운 선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라루 사무장의 그 별명이 김치 김치로 대한민국 김치로 유명하다.
다섯 번째로 태어났기 때문에 애칭이 김치5입니다.
아마 내려오면서 스트레스도 받고 그래서 조산한 것 같아요.
근데 애를 태어나서 그 탯줄은 이빨로 잘랐습니다.
그래 갖고 여자도 그 속치마 벗어서 닦아줬다고 그러더라고요.
북한 백두사진관에서 카메라 2대를 갖고 넘어 오셨거든요.
길흉사 사람들 사진을 찍어야 될 거 아닙니까?
거기 가서 사진 찍어주고 이제 먹을 거 얻어오고 그래서 아버지가 포로수용소 경비로 갔을 때 경비했었습니다.
미군들 통해 가지고 옷, 군복 옛날처럼 미국 군복 사제 아닙니까?
그 옷, 그것을 수거해 와서 까만 물 들여서 파는 게 국제시장입니다.
그때 엄마가 뭘 했는가 하면 평화상회 전쟁 아니고 평화롭게 좀 살면 좋겠다.
그래서 평화상회를 했고요. 피란 와가지고 참 어렵게 살았습니다.
거제도 온 게 한 12만쯤 되거든요. 주먹밥을 줬답니다. 뭐라고 그게 꿀맛 같더래요.
거제도 오니까 초등학교는 있고 중고등학교가 없어요. 그래 갖고 이제 신부님이 애들 공부시켜 갖고
신부님이 진짜 생명의 은인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돼지 키우는 동네가 아무래도 비탈길이고 안 좋은 위치에 있었잖아요.
그러면 아버지가 그 리어카 돼지 한 마리를 싣고 그 도살장까지 끌고 올라가서 작업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할머니 부산에 팔게끔 그걸 갖고 이제 우리 삼촌들 대학 다 보내고 정육점을 차려놓자마자 아버지가 그 해에
돌아가셨어요.
아버지 생각하면 그냥 내 편 나를 너무 좋아했던 사람 어릴 때부터 난 기억이 나거든요.
아버지가 뭐 맛있는 거 있으면 나만 몰래 살짝 주기도 하고 나를 이제 큰 딸이니까 또 제가 아버지를 많이 닮아서
유독 저를 좋아하셨대요.
술만 드시고 오시면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천 흥남 부두의 그 노래를 항상 불렀어요.
술만 채우면. 그 기억이 엄청 났던가 봐요.
얼마나 슬프고 괴롭고 뭐 그런 일이었겠습니까?
아버지는 하여튼 그 노래가 우리 집에 아버지 18번이었어요.
그 노래 부르시는 게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 그 시절 그,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다. 그랬으면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죠.
네. 저희 할아버지 그때 얼마나 춥고 배고프고 하셨었겠어요.
그래 가지고 같이 타고 오신 분들 그냥 저희 할머니가 해줬던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반복돼서는 안 되는 그런 역사니까 기억을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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