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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유산아카이브 오래된 미래 - EP34. 통영 윤이상 기념관
등록일 : 2026-09-07 10:40:24.0
조회수 : 56
동양의 떨림을 서양음악에 담다…통영에 뿌리 둔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
윤이상은 동양적인 철학과 음악 어법을 서양음악과 조화시키며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한 세계적인 작곡가입니다.
유소년기 오광대와 유랑극단 등을 통해 전통음악을 경험했고, 학교와 교회에서는 서양음악을 접했습니다.
해방 이후 통영에서는 시인 유치환과 윤이상에게 교가 제작 요청이 많이 들어왔고, 이때 만들어진 교가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이후 서울시문화상을 받은 윤이상은 상금을 바탕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유학 3년 만에 ‘일곱 악기의 음악’이 현대음악의 실험장으로 소개된 다름슈타트 음악제에서 초연되며 빠른 성취를 이뤘습니다.
당시 초연을 맡은 지휘자 브루노 마데르나는 공연이 끝난 뒤 서양음악이 하지 못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했다는 기록도 전해집니다.
윤이상은 음의 떨림과 농담 등 동양적인 음악 어법을 서양음악과 조화시키며 새로운 표현을 시도했습니다.
그의 음악은 연주자들에게도 쉽지 않은 도전이었습니다.
함부르크 공연에서는 연주자들이 연주가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자 윤이상이 직접 첼로를 잡고 원하는 표현을 시범 보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1967년 큰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윤이상은 그해 6월 17일 베를린에서 서울로 납치됐고, 이후 반공법 위반으로 10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자료에서는 월북한 친구를 만나고 고구려 사신도를 보기 위해 방문했던 일이 간첩죄로 인지됐다고 설명합니다.
이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들의 구명운동과 서독 정부의 도움으로 풀려났다는 설명도 나왔습니다.
이 사건을 겪은 뒤 윤이상의 음악은 이전보다 규모가 훨씬 커졌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독일인으로 귀화한 뒤에도 각종 행사에서 자신을 한국인으로 소개했고,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한국인이 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증언도 전해집니다.
윤이상은 자신이 충무에서 자라며 얻은 모든 요소를 정신과 예술적 기량에 담아 평생의 작품을 썼다고 회고했습니다.
1994년에는 윤이상의 귀국 음악회가 추진되면서 고국 방문에 대한 기대가 커졌지만 결국 무산됐습니다.
당시 윤이상은 귀국하면 그리워하던 고국의 흙을 만지고 변함없는 사랑과 충성을 말하겠다는 뜻을 편지에 담았습니다.
윤이상의 작품은 이를 연주한 한 첼리스트에게도 새로운 음악적 경험을 안겼습니다.
이 첼리스트는 윤이상의 곡을 연습하며 테크닉뿐 아니라 음악적인 요소까지 함께 익힐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또 윤이상이 음과 음 사이의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다며, 그의 작품을 공부하면서 현대음악의 재미를 느끼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충무에서 쌓은 경험과 동양적인 음악 어법은 서양음악과 어우러지며 윤이상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로 이어졌습니다.
윤이상은 동양적인 철학과 음악 어법을 서양음악과 조화시키며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한 세계적인 작곡가입니다.
유소년기 오광대와 유랑극단 등을 통해 전통음악을 경험했고, 학교와 교회에서는 서양음악을 접했습니다.
해방 이후 통영에서는 시인 유치환과 윤이상에게 교가 제작 요청이 많이 들어왔고, 이때 만들어진 교가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이후 서울시문화상을 받은 윤이상은 상금을 바탕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유학 3년 만에 ‘일곱 악기의 음악’이 현대음악의 실험장으로 소개된 다름슈타트 음악제에서 초연되며 빠른 성취를 이뤘습니다.
당시 초연을 맡은 지휘자 브루노 마데르나는 공연이 끝난 뒤 서양음악이 하지 못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했다는 기록도 전해집니다.
윤이상은 음의 떨림과 농담 등 동양적인 음악 어법을 서양음악과 조화시키며 새로운 표현을 시도했습니다.
그의 음악은 연주자들에게도 쉽지 않은 도전이었습니다.
함부르크 공연에서는 연주자들이 연주가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자 윤이상이 직접 첼로를 잡고 원하는 표현을 시범 보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1967년 큰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윤이상은 그해 6월 17일 베를린에서 서울로 납치됐고, 이후 반공법 위반으로 10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자료에서는 월북한 친구를 만나고 고구려 사신도를 보기 위해 방문했던 일이 간첩죄로 인지됐다고 설명합니다.
이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들의 구명운동과 서독 정부의 도움으로 풀려났다는 설명도 나왔습니다.
이 사건을 겪은 뒤 윤이상의 음악은 이전보다 규모가 훨씬 커졌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독일인으로 귀화한 뒤에도 각종 행사에서 자신을 한국인으로 소개했고,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한국인이 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증언도 전해집니다.
윤이상은 자신이 충무에서 자라며 얻은 모든 요소를 정신과 예술적 기량에 담아 평생의 작품을 썼다고 회고했습니다.
1994년에는 윤이상의 귀국 음악회가 추진되면서 고국 방문에 대한 기대가 커졌지만 결국 무산됐습니다.
당시 윤이상은 귀국하면 그리워하던 고국의 흙을 만지고 변함없는 사랑과 충성을 말하겠다는 뜻을 편지에 담았습니다.
윤이상의 작품은 이를 연주한 한 첼리스트에게도 새로운 음악적 경험을 안겼습니다.
이 첼리스트는 윤이상의 곡을 연습하며 테크닉뿐 아니라 음악적인 요소까지 함께 익힐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또 윤이상이 음과 음 사이의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다며, 그의 작품을 공부하면서 현대음악의 재미를 느끼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충무에서 쌓은 경험과 동양적인 음악 어법은 서양음악과 어우러지며 윤이상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윤이상 선생님이 천재적인 음악가 현대 음악의 세계적인 거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윤이상 선생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고 동양적인 철학과 어법을 서양음악과 조화시킨
크로스오버적인 작곡가다.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네요.
-윤이상 선생님은 유소년기에 오광대라든가 유랑극단이라든가 이런 어떤 전통 음악에 대한
체험을 많이 하신 데다가 학교나 교회를 통해서 서양음악을 또 많이 접하셨어요.
선생님이 만든 곡이 영화와 영화 사이에 그 인터미션 시간에 연주가 되는 걸 선생님이 관객석에서
들으신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거를 듣고 굉장히 감명이 깊었다고 하시더라고요.
1945년 이후에 해방 이후에 학교에서 교가짓기가 유행을 했는데 그 당시 통영에는 유명한 유치환
시인과 윤이상 작곡가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 두 분께 교가 요청이 많이 있었고 지금 그 교가들이 보물들이 되었습니다.
-제가 알기에 서울시문화상이 1948년에 제정됐고 그 당시로서는 최고의 상이었죠.
문화계에 주는 최고의 상이었는데 그때 이제 받은 상금이 10만 환이었어요.
그걸 제가 현재 가격으로 계산을 해 봤어요. 한 천에서 1500만 원 정도 되더라고요.
그때로서는 엄청난 금액이었죠.
그 상금을 가지고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을 한 겁니다 일곱 악기의 음악이 다름슈타트 음악제에서
초연이 됐는데 그 다름슈타트 음악제라는 게 전 세계에 가장 첨예한 현대 음악의 실험장 같은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이제 윤이상 선생이 유학 간 지 3년 만에 그 곡을 발표하게 된 거죠.
굉장히 빠른 성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브루노 마데르나라는 지휘자가 그때 초연을 맡았는데 끝나고 나서 서양 음악이 하지 못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말하면서 껴안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서양음악을 좀 이해하셔야 되는데 서양음악이 1, 2차 세계대전이 지나면서 굉장히 수학적이고 차가운
지성에 호소하고 있었을 때예요.
출구를 못 찾고 있을 땐데 동양에서 온 윤이상이라는 작곡가가 서양의 음악에 없는 기법들, 음의 떨림,
음의 농담 이런 걸 가지고 서양음악과 조화시켜서 새로운 출구를 만들어 놓은 거죠.
굉장한, 신선한 활력이었을 거예요
무엇보다 특히 연주자들이 굉장히 난색을 표현했죠.
함부르크 공연 때 연주자들이 이거 연주 못하겠다고 난리를 친 적이 있었어요.
서양 음악적으로는 이 동양적인 어법을 비브라토라든가 아니면 글리산도 정도로 표현하는데 윤이상 선생이
요구한 것은 그것보다 훨씬 더 동양적인 떨림을 요구했죠.
그래서 이거는 불가능하다고 연주자들이 그러는데 윤이상 선생이 직접 첼로를 잡고 이런 식으로 연주해
주시기 바란다고 시범을 보였다는 그런 기록도 있습니다.
-윤이상 선생님이 1967년 06월 17일 중앙정보부에서 베를린에서 서울로 바로 납치가 됩니다.
친한 친구가 월북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친구도 만나고 싶고 또 고구려 사신도를 보기 위해서 방문했던
것이 간첩죄로 인지가 되어서 반공법 위반으로 10년을 선고를 받게 되는데요.
이제 마지막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들의 구명운동과 서독정부의 도움으로 선생님이 풀려나게 되시죠.
-아무래도 워낙 큰 사건을 치렀잖아요.
그러면서 음악의 그 규모가 그 전보다 훨씬 더 커지게 돼요.
-독일인으로 귀화를 하셨지만 항상 모든 행사에서 본인을 한국인으로 소개하셨고 언제든 좋은 상황이 오면
다시 한국인으로 귀화하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계셨습니다.
-나는 충무에서 자랐고 충무에서 모든 요소를 내 몸에 지니고 그것을 내어 정신과 예술적 기량으로 나의
평생 작품을 써봤습니다.
-1994년에 마지막으로 윤이상의 귀한 음악회를 추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땐 정말로 윤이상 선생님께서 오실 것으로 말했고 그렇게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결국 무산되긴 했죠.
그때 보냈던 편지의 구절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지금도 보면 그 구절을 보면 울컥해요. 그래서 잘 읽지를 못합니다.
-나는 귀국하면 내가 그리워하던 고국의 흙을 만지게 된다.
그때 흙에 가까이 입을 대고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의 충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윤이상 선생님의 곡은 테크닉적인 요소들을 공부하면서 연습하면서 또 음악적인 요소까지도 같이 연습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저희가 줄을 이렇게 타고 올라가고 또 내려오고 하면서 느껴지는 그 자연스러운 것들이 다 음악으로
표현이 돼서 테크닉을 연습하면서 자연스럽게 음악까지 이해가 되게 되는 곡은 저도 처음이었어가지고
윤이상 선생님은 음과 음 사이의 그 공간을 참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 같아요.
저도 윤이상 선생님의 작품을 공부하면서 현대 음악이라는 거에 너무 재미를 느끼게 되어가지고 다양한
레퍼토리의 곡들을 할 수 있는 첼리스트로 성장하는 게 목표입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예술적 감각을 사랑하는 분이 되게 뭔가 본받고 싶고 닮고 싶었어요.
저도 그림 그리기도 좋아하고 저도 좀 더 잘하고 싶었는데 이게 잘하는 것보단 누군가를 위하는 게 좀
더 중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