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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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味 첫 회

등록일 : 2024-11-11 16:19:03.0
조회수 : 1094
-할아버지.
-강아지.
-나 가출했어.
-왜 또 그래.
-할아버지 딸은 왜 그래?
-네 엄마가 뭐라 그러는데?
-내일모레 스물이면 곧 성인 아냐?
-그런 셈이지.
-그렇지?
-응.
-그럼 나도 엄마도성인 대 성인이잖아. 그럼 내 의견 존중해 줘야지.
-무슨 의견?
-나 문창과 가는 거.
-결정했어? 잘됐다, 잘했다 강아지. 아주 내 속이 다 시원하다, 야.
-봐 봐. 할아버지 반응이 정상이지. 아무튼 엄마 뭐라는 줄 알아?
나보고 독단적으로 결정했대. 내 꿈 내가 정하는데 거기다가
독단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말이나 돼? 아무튼 나 여기서 살 거야.
말리지 마.
-그래. 이 할아버지 하고 여기서 살자. 그런데. 월세 내야 해.
-응?
-이 다섯 개가 오가재비야.
-그런데 할아버지.
-응.
-왜 홍합이야? 전복도 있고 소라도 있는데.
-여기 비산도가 자연산 홍합이 많이 나거든.
오죽하면 홍합 팔아서 부자 된 사람 많다고 돈섬이라고 했대.
-자연산 홍합.
-이 홍합을 맛있게 잘 말려서 보관하는 게 오가재비.
-그럼 이거 구워 먹는 거야?
-바닷바람에 잘 말린 오가재비를 말이야. 참 많은 음식에 넣어 먹었어.
탕국에 넣어서 끓였고 밥 지을 때 넣었고 또 간장에 조려서 산적으로도 먹었지.
-그럼 섬사람들한테 홍합은 엄청 중요한 식재료였겠네.
-그럼.
-끝. 뭐야. 끝난 거 아니었어요, 할아버지?
-누가 끝이래?
-(해설) 강아지, 이 홍합은 하나도 버릴 게 없어.
사실 내 진짜 목적은 이 가마솥 안에 담겨 있어.
합자장이야.
이거 만드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하거든.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 이 시간이 안 지루하더라.
여기서 얼마나 더 맛있어질까. 이번에는 얼마나 더 깊은 바다를 품었을까.
기다리는 시간이 그렇게 신이 나더라.
이 합자장은 홍합을 5번 삶고 그 삶은 물을 한데 모아 졸이고 졸여 엑기스로 만든 거다.
천연 조미료인 셈이지.
이 합자장 하나 넣으면 국도 밥도 나물무침도 다 맛있어지는데 안 만들 이유가 없지 않냐.
그리고 강아지, 네가 무지 좋아했지 않냐.
이 합자장 넣은 계란밥.
-(해설) 그게 할아버지의 마지막 합자장이었다.
사람은 왜 그럴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가슴이 미어지는 이 와중에도 배는 고프다.
할아버지, 나 배고파. 달걀밥.
-있어, 좀만 기다려.
-(해설) 할아버지의 합자장 달걀밥이 먹고 싶다.
없다. 없다. 마지막 합자장이 없다.
-더 일찍 찾아뵀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해설) 그때는 슬프지 않았다. 모든 게 거짓말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안다. 당장이라도 합자장 만들어줄 할아버지가 세상에 없다는 거.
-짜증나.
-(해설) 할아버지는 사랑꾼이었다. 다만 그 사랑의 기간이 짧고 대상이 자주 바뀌었다.
우리 가족은 사랑이 많은 할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할아버지의 사랑은 늘 한 방향으로 흘렀다는 걸.
그건 바로 맛이다. 나는 그런 할아버지가 좋았다.
무언가를 솔직하게 사랑하는 어른은 드무니까.
내가 작가가 된다고 했을 때 할아버지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무언가를 원하는 마음은 삶을 변화시킬 동력이라고.
그래서 내 삶이 어떻게 변할지 기대된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괴짜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뚜렷하게 아는 사람이었다.
-(해설) 우리 밥상에서 장은 핵심 식재료다.
조선시대 식생활 문화를 기록한 고식품서 증보산림경제에도 장을 이렇게 소개한다.
장은 모든 맛의 으뜸이오 장맛이 좋지 않으면 좋은 요리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우리 통영에는 홍합 삶은 물로 만든 합자장이 있다.
비산도 섬사람들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오가제비를 만들고 또 이 합자장까지 내다 팔았다.
가마솥에 홍합과 물을 넣고 끓인다. 홍합은 완전히 익기 전에 건져낸다.
이 과정을 반복한다. 홍합 삶은 물을 전부 모아 가마솥에서 푹 졸인다.
합자장을 끓일 때는 불 조절이 가장 중요하다.
진액이 타기 전에 불을 꺼야 한다.
-(해설) 홍합을 가마솥에 반 정도 채운다. 합자장 만드는 법이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뭘 드릴까요?
-이거 주세요.
-1만 원입니다.
-감사합니다.
-(해설) 홍합을 끓일 때는 불 조절이 가장 중요하다.
물이 넘치지 않을 만큼 적당한 불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이게 다 무슨 그림이지? 할아버지는 왜 이런 걸 그려놨지?
뭘 놓치고 있는 걸까. 홍합 껍데기?
껍데기다. 할아버지가 그랬다. 홍합은 껍데기까지 버릴 게 하나도 없다고.
홍합을 껍데기째로 삶는다.
홍합 껍데기에 붙은 바다의 부산물이 충분히 우러나야 합자장의 감칠맛이 완성된다.
먹기 위해 이토록 긴 시간을 기다린 적이 있을까?
모든 게 간편하고 빨라진 요즘 같은 시대에 합자장은 어울리지 않은 식재료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게 부모에서 자식으로, 섬사람들에게 이어져 온 합자장이 사라지는 이유.
간장 계란밥은 5분 만에 만들 수 있는 한국인의 소울푸드.
여기에 이 합자장 한 숟가락이 들어간다면?
이건 축제다.
달큰한 훈연향과 바다의 감칠맛이 힘을 합치는 고소한 풍미의 축제.
-정말 맛있다.
-(해설) 할아버지는 합자장이 사라져가는 걸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노트에 적어둔 것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 맛이 영영 사라질까 봐.
그 맛을 기억하고 싶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올해 합자장을 비우는 동안 이 노트에 적힌 할아버지의 맛들을 한번 찾아보고 싶다고.
도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할아버지가 이렇게 남겨 두었는지 궁금해서.
할아버지는 봄이 시작할 때 떠났다.
산나물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길래.
할아버지의 노트에 적힌 산나물을 찾아
산청으로 왔다.
-강하지 씨!
-(해설) 심히 범상치 않군.
-여기는 금남 구역. 잠깐 스톱! 엄청 귀한 거야.
-그냥 풀인데요.
-전혀 달라요.
-(해설) 어쩌면 다들 음식의 향을 잊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산나물 같은 사람이란 제 멋대로인 사람인 기라.
-(해설) 달콤하고 향긋한 봄의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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