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프로그램
KNN 특집 다큐멘터리 - 폐허속에 핀 희망, 리차드위트컴 장군
등록일 : 2023-12-26 17:57:40.0
조회수 : 1231
-위트컴 장군님의 조형물을 건립하고 제막하게 된 것을 매우 뜻깊고 온몸을 바쳤던 그분이야말로 인류애의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위트컴 장군님의 인자한 모습을 뵙게 되어 대단히 반갑고 또 기쁜 마음입니다.
-동상 건립을 위한 모금에 동참해 주신 3만여 명의 부산 시민들과 동참해 주신 시민 여러분의...
-(해설) 지난 11월 11일, 조형물건립시민위원회 발족 1년 만에 그 모습을 드러낸 동상.
바로 리차드 위트컴 장군인데요. 지금부터 우리는 1953년 유엔군 부산군수지기 사령관 부임 후 부산 재건에 모든 역량을 쏟아낸 푸른 눈의 한 부산 사나이에 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부산을 상징하는 말은 참 많습니다. 국내 도시 브랜드 평판 1위. 창의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제1의 항구도시.
밤이면 생기 가득한 불빛들이 도시 대동맥을 타고 흐르는 곳.
이런 괄목상대할 발전 덕분에 70년 전 부산이 아비규환의 임시 피란 수도였다는 사실을 종종 간과합니다.
누군가의 희생 없이는 또 누군가가 선도적 리더십을 발휘하지 않으면 재건의 틀조차 세우기 불가능했던 한국전쟁 직후의 부산.
그런데 그 불가능 속에서 우리는 낯익은 이름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1982년 7월 23일 부산 소재의 한 신문에 실린 한 토막의 부고 기사.
그런데 제목이 범상치 않습니다. 본국인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한민국 유엔기념공원에 묻힌 유일한 장군, 리차드 위트컴.
왜 그는 본국 송환 대신 대한민국 부산에 남았을까?
그는 왜 부산 재건 역사 곳곳 이름이 새겨져 있는 걸까?
한국전쟁 막바지였던 1953년, 미군 제2군수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한 위트컴 장군은 당시 한국군 재건과 증강을 추진했던 밴 플리트 장군을 돕고
유엔군의 군수물자 확보와 수송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해설) 부산에서 200만 톤에 달하는 장비와 군수물자를 최전방으로 실어 날랐고 후방 지역 치안 유지, 전쟁 포로와 피란민 관리 임무도 맡았는데요.
-(해설) 한국전쟁 당시 부산은 총성 한 발 울리지 않은 후방 지역이라 전국 각지에서 생면부지의 피란민들이 몰렸고 휴전 협정으로 전쟁은 멈췄지만, 인구
40만을 겨우 껴안은 도시는 전쟁 직후 그 숫자가 2배를 넘어가면서 혼돈과 아수라장 그 자체가 돼버렸습니다.
얼기설기 판자를 엮을 수만 있어도 휴, 살았구나 싶은 폐허라고 할 만큼 도시 기반이 전무했고 모든 것이 절박했고 절실했던 시절이었는데요.
-(해설) 그런데 그때 부산을 더 절망 끝으로 내몰았던 것이 또 있었습니다.
부산의 산마다 꼭대기까지 피란민 판자촌들이 빽빽하게 생겨나자, 큰불이 여러 번 발생한 것인데요.
화재 관리에 속수무책이었던 당시 추위를 막고자 피웠던 불이 번져 걷잡을 수 없었고 도시 전체를 마비시킬 만큼 초대형 화재로 이어져 막대한 피해를 낳았습니다.
-화재에 취약한 목재 그리고 천막 아니면 종이류 이런 걸로 집을 짓다 보니까 화재가 나면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그러니까 순식간이라는 표현처럼
한 집에 화재가 나면 불과 10, 20분 만에 수십 채가 불이 나는 이런 현상들이 있었어요.
-(해설) 영도 대평동 대화재, 국제시장 대화재, 용두산 대화재까지 불은 전쟁만큼이나 잔인한 상처를 남겼는데요.
너무나 자주 큰 화재가 발생하다 보니 부산이 아니라 불산이라는 오명까지 얻게 됩니다.
-(해설) 1953년 11월 27일 밤 발생한 일명 부산 역전 대화재.
전쟁 후 재건을 일구려는 부산을 한순간에 삼킨 화재가 또다시 발생한 겁니다.
이 화재로 3만여 명의 이재민과 29명의 사상자, 전소된 집만 332채. 피해 규모를 따져보니 현재 가치로 1조 8000억 원에 달했습니다.
-(해설) 지금도 그 흔적이 부산 동광동 일대에 남아 있는데요.
-갑자기 식으면서 이렇게 돌이 소위 껍질 벗겨지듯이 박피 되는 이런 걸 볼 수가 있어요.
이 집이 완전히 목조 건물이었던 것이 불에 타면서 떨어지고 이 목조들이 담 옆으로 쌓여서 불이 계속 나니까 여기가 달궈졌고 끄려고 물을 부으니까 돌이
갑자기 식으면서 저렇게 튀어나온 것이다, 이렇게 보는 거죠.
-(해설) 화마가 삼켜버린 부산. 잿더미가 된 산 터를 망연자실 바라보던 피란민들의 심정은 절망과 참혹 그자체였습니다.
-(해설) 벼랑 끝으로 치닫던 그때. 어디선가 문이 열리며 군수 물품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재민들이 잠을 잘 천막들이 생겼고 매일 2만 3100여 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과 옷가지, 이불 등이 배급됐는데요.
부산 주둔 미군들이 써야 할 군수품 창고를 열어 이재민들에게 긴급 지원한 이는 바로 리차드 위트컴
제2군수 사령부 사령관. 그는 화재 발생 다음 날 바로 공병 부대를 투입해 지역을 정리했고 4만 명이 지낼 임시 천막촌을 지었습니다.
또 모두에게 지원이 갈 수 있도록 하겠다며 복구 계획도 상세히 밝혔는데요.
-(해설) 미국 의회의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즉각적인 지원과 재건에 나선 리차드 위트컴 군수 기지 사령관, 이 일로 결국 그는 미 의회 청문회에 소환됩니다.
-(해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장기적인 부산 재건 프로젝트를 세우고 폐허가 된 부산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듭니다.
-(해설) 군을 동원한 임시 복구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 지속 가능한 도시 기능을 갖추도록 했다는 건데요.
이 화재로 부산역과 우체국이 소실됐지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당시 건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수출입의 통관을 담당했던 부산 세관. 화재 발생 70년 후 지금은 몰라볼 정도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해설) 당시 부산역과 100m 인근에 마주했던 부산 세관. 그 매섭던 화마에도 부산 세관 청사만 살아남았는데요.
-(해설) 필사적 방어로 화마에서 살아남은 부산 세관. 위트컴 장군은 부산으로 향하는 재건 물자를 들여오기 위해선 세관 기능 회복이 최우선이라 판단하고 AFAK
미군대한원조 프로그램을 활용해 부산 세관 청사 반환에 나섭니다.
-(해설) 칼 같은 결단과 신속한 행정 실행. 그 덕분에 부산 세관의 기능은 빠르게 복구됐는데요.
군수 업무 책임자였던 위트컴 장군은 세관 청사 반환이야말로 재건의 첫 삽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위드컴 사령관이 애민 정신이라든가 또는 우리나라의 어려운 국민들을 도와준, 대화재 때 도와준 그런 고마움은 우리가 세관을 통해서 모든
업무를 수행하면서 그 고마움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해설) 사령관으로서 사명을 다해낸 리차드 위트컴. 59세에 부산으로 부임한 그의 지난 행적들은 과연 어땠을까.
1894년 미국 켄자스주 토피카에서 태어난 위트컴은 미국 엘리트 교육을 받고 선교사의 꿈을 키우며 성장했는데요.
-토피카에 있는
-(해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보병 장교로 참전하면서 군인의 길을 걷게 된 위트컴.
이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병력과 물자 수송 작전을 성공시키며 군수 전략가로서의 면모를 구축합니다.
-(해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 재건 작전까지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미군 최고 군수 전문가의 위치에 올라선 위트컴 장군.
부산 역전 대화재에 신속 조치를 취한 전문성도 바로 세계대전 참전 당시 성공한 재건 전략이 뒷받침됐던 것이죠.
1954년 그 고마움을 담아 시민들은 공덕비를 세웠는데요.
-(해설) 1954년부터 위트컴 장군은 미군대한원조프로젝트를 적극 활용, 병원을 짓고 학교 부지를 확보하고 전쟁고아를 돕고 도로를 건설하며 도시 재건을 위한 총체적 지원에 돌입합니다.
-(해설) 이 그림 본 적 있으신가요? 큰 종 모양을 스케치한 듯한 이 그림.
바로 부산대학교 동래 캠퍼스 평면도라는 제목의 설계도입니다. 그림의 원작자는 윤인구 부산대 초대 총장.
세상을 울리는 큰 배움이 있는 학교라는 꿈을 담았는데요.
-(해설) 1946년 해방 직후 부산 대연동에서 단과대학으로 개교한 부산대는 이후 부산 충무동과 대신동 교사에서 수업을 이어가다가 1953년 9월 국립종합대학으로 승격됩니다.
당시 윤인구 총장은 그 위상에 걸맞은 캠퍼스 부지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애썼지만 녹록지가 않았는데요.
-1946년에 부산대학이 세워졌으니까 해방되자 1년 만에 세워진 거거든요.
1년이 채 안 되죠, 5월에 세웠으니까. 그런데 그 당시에는 세금 시스템이 없었습니다.
국가는 예산이 없었죠. 그러면 어떻게 국립대학을 세웁니까?
-(해설) 1954년 6월 미군대한원조프로젝트가 한참 진행되고 있던 그때, 총장은 위트컴 장군 소식을 듣고 곧바로 그를 만나 그림을 꺼내 들었습니다.
-(해설) 부산의 역사. 나아가 한국 대학 교육사에 길이 남을 통 큰 거래.
위트컴 장군은 곧바로 한국 정부를 설득해 부지를 확보했습니다. 여기에 공사비까지 AFAK를 통해 지원했는데요.
-(해설) 가난했던 한 대학 총장의 그림에 힘을 실어준 세계 최강국의 군수 지기 사령관.
그의 결단과 추진력으로 부산은 교육의 기틀을 조성하게 됐지만, 안타깝게도 그 공적은 오랜 시간 잊혀져 있었습니다.
-(해설) 1954년 10월 25일 자, 미국 격주간지 라이프지에 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한복 차림의 미군 장군과 부대원들, 또 수녀들이 부산 시내를 돌며 캠페인을 벌인다는 건데요.
캠페인의 목적은 메리놀병원 신축 기금 모금. 한 푼이 귀했던 그때, 위트컴 장군이 구상해 낸 아이디어였던 겁니다. 당시 부산은 병원과 진료소가 전무한 상태였는데요.
여기에 부산역전 대화재 직후 화상 환자까지 하루 2000여 명이 몰려들면서 병원 기능이 마비될 정도였습니다.
이 급박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위트컴 장군은 AFAK 지원을 통해 종합병원 신축을 결정합니다.
-(해설) 1954년 7월 29일 기공식과 함께 공사에 착수했지만 예산은 턱없이 부족했고 이에 위트컴 장군은 가장행렬로 모금 활동을 하며 예하 미군 장병들에게는
월급의 1%를 기부하도록 했는데요. 당시 모인 금액이 약 6만 달러가 넘었다고 합니다.
-(해설) 1953년 11월부터 1958년 11월까지 한국 재건 비용으로 투입된 AFAK 예산은 약 600만 달러.
1954년 6월까지 부산에서만 300만 달러를 투입해 재건에 쏟아부었습니다.
소방 장비 진입로가 확보됐고 도로도 새롭게 정비했는데요.
위트컴 장군 지위 아래 부산 재건 프로젝트가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겁니다.
-(해설) 이 동상을 다시 한번 볼까요? 아이들의 손을 꼭 잡은 장군의 모습이 인상적인데요.
5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를 외면하지 않고 보육원과 고아원을 짓는데 역량을 쏟았던 위트컴 장군.
1954년 퇴역 후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한미재단을 통해 고아원을 돕는 공공, 민간 지원의 다리 역할을 했는데요.
-(해설) 그런데 이렇게 설립한 한미재단을 통해 위트컴 장군은 아주 특별한 인연을 만나게 됩니다.
-(해설) 충남 천안에서 홀로 두 아이를 키우며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 보육시설인 익선원을 운영했던 한묘숙 여사.
두 손 가득 선물을 들고 익선원을방문하던 장군과 인연이 돼 1964년 부부의 연을 맺은 건데요.
두 사람 모두 재혼이었지만 새로 얻은 두 아이도 무척 아꼈던 위트컴 장군.
미국에서 유학하는 딸 태정에게 편지를 쓰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했을 만큼 자식 사랑도 남달랐다고 합니다.
-(해설) 아이들을 누구보다 애틋하게 챙겼던 위트컴 장군.
그런 그가 한국에 남아야 할 숙명의 사업이 또 있었는데요.
위트컴 장군은 이를 생의 마지막 임무로 여겼고 아내 한묘숙 여사와 함께 송환 일에 매진합니다.
당시 공인이었던 위트컴 장군이 직접 중국이나 북한에 입국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대신 자신과의 결혼으로 미국 시민권자가 된 한묘숙 여사를 통해 유해발굴사업을 시작했는데요.
-(해설) 1982년 7월 12일. 중국에 머물고 있던 여사에게 위트컴 장군의 임종 소식이 전해집니다. 유해발굴사업 때문에 남편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는데요.
하지만 남편의 죽음 이후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눈을 감기 직전까지 위트컴 희망재단을 통해 미군 유해 송환 사업에 끝까지 헌신했는데요.
군수 물품을 풀어서 사람을 먼저 챙겼던 남편과 장진호 전투 전사자의 유해 송환에 삶의 전부 바쳤던 아내.
2017년 1월 1일 새해 첫날, 아흔 살에 생을 마감한 여사는 그렇게 남편 위트컴 장군 묘역에 함께 안장됐습니다.
-(해설) 조형물 제막실을 하루 앞둔 지난 11월 10일. 부산대학교 장전 캠퍼스에 한 버스가 도착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는 그녀들의 정체는 바로 재미동포들로 구성된 위트컴 여성합창 단원들.
공연을 하며 위트컴 장군을 알리고 있는데요.
장군의 결단과 추진력으로 조성됐다는 부산대 장전 캠퍼스에 직접 와 보니 그가 일군 부산 재건의 역사들이 새삼 기적 같기만 합니다.
-한국에 와서 했더니 AFK 프로그램이라고 미군 원조 한국 지원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거를 설계해서 그 프로그램을 만들고 그 프로그램 속에서 한국 전체를 다시 살려내는.
-(해설) 한국전쟁 당시 숭고하게 희생된 유엔군의 정신과 가치를 전하는 유엔평화기념관.
이곳에는 아주 특별한 공간이 있습니다.
바로 리차드 위트컴 전시관인데요. 전쟁의 상흔을 지우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던 시간들.
그러다 보니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은 잊고 지내왔는데요.
-(해설) 전시관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위트컴 장군의 재조명 작업이 활발한데요.
지난가을 부산문화회관에서는 아주 특별한 공연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바로 위트컴 장군을 주제로 한 오페라 갈라 추모음악회인데요.
그의 일대기를 오페라로 제작해서 관객들과 만난 겁니다.
-전쟁은 총, 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승리는 그 나라 국민을 돕는 것이다.
-(해설) 오페라로 만나는 위트컴은 어떤 감동일까?
이번 공연에서는 전체 3막 중 프롤로그와 1막을 선보였는데요.
-(해설) 막이 오르자 피아노 연주에 맞춘 배우들의 열연이 펼쳐졌습니다.
-안 계십니다~
-(해설) 오페라로 보고 듣는 위트컴 장군과 한묘숙 여사의 러브스토리. 그 감동이 더욱 배가 됐는데요.
-(노래) 나를 찾아와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당신이
-(해설) 군복보다 사람이 먼저였고 그 나라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전쟁의 승리자라고 믿었던 진정한 장군.
리차드 위트컴 장군의 재조명은 바로 우리 부산의 전후 복구와 재건의 역사를 찾는 작업이기도 한데요.
오페라와 책으로, 또 전시와 세미나로 그를 추모하는 방식은 다 다르지만 우리가 그를 잊지 않아야 할 이유는 같습니다.
-6.25 전쟁 영웅이자 부산을 너무나 사랑하신.
-위트컴 장군을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보다 많은 분들께서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잊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위트컴 장군님, 사랑해요.
-(함께) 위트컴, 장군님. 감사합니다.
-(함께) 위트컴 장군님, 사랑해요.
-(해설) 전쟁 피해 복구를 넘어 누구 하나 소외되는 이 없이 정책과 혜택이 돌아갈 수 있게 살피고 돌봤던 리차드 위트컴 장군.
그렇게 묵묵히 인류의 가치를 실천한 그의 행보가 부산 재건의 씨앗이 되었음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데요.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그의 이름을 기억해야 할 이유입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위트컴 장군님의 인자한 모습을 뵙게 되어 대단히 반갑고 또 기쁜 마음입니다.
-동상 건립을 위한 모금에 동참해 주신 3만여 명의 부산 시민들과 동참해 주신 시민 여러분의...
-(해설) 지난 11월 11일, 조형물건립시민위원회 발족 1년 만에 그 모습을 드러낸 동상.
바로 리차드 위트컴 장군인데요. 지금부터 우리는 1953년 유엔군 부산군수지기 사령관 부임 후 부산 재건에 모든 역량을 쏟아낸 푸른 눈의 한 부산 사나이에 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부산을 상징하는 말은 참 많습니다. 국내 도시 브랜드 평판 1위. 창의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제1의 항구도시.
밤이면 생기 가득한 불빛들이 도시 대동맥을 타고 흐르는 곳.
이런 괄목상대할 발전 덕분에 70년 전 부산이 아비규환의 임시 피란 수도였다는 사실을 종종 간과합니다.
누군가의 희생 없이는 또 누군가가 선도적 리더십을 발휘하지 않으면 재건의 틀조차 세우기 불가능했던 한국전쟁 직후의 부산.
그런데 그 불가능 속에서 우리는 낯익은 이름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1982년 7월 23일 부산 소재의 한 신문에 실린 한 토막의 부고 기사.
그런데 제목이 범상치 않습니다. 본국인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한민국 유엔기념공원에 묻힌 유일한 장군, 리차드 위트컴.
왜 그는 본국 송환 대신 대한민국 부산에 남았을까?
그는 왜 부산 재건 역사 곳곳 이름이 새겨져 있는 걸까?
한국전쟁 막바지였던 1953년, 미군 제2군수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한 위트컴 장군은 당시 한국군 재건과 증강을 추진했던 밴 플리트 장군을 돕고
유엔군의 군수물자 확보와 수송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해설) 부산에서 200만 톤에 달하는 장비와 군수물자를 최전방으로 실어 날랐고 후방 지역 치안 유지, 전쟁 포로와 피란민 관리 임무도 맡았는데요.
-(해설) 한국전쟁 당시 부산은 총성 한 발 울리지 않은 후방 지역이라 전국 각지에서 생면부지의 피란민들이 몰렸고 휴전 협정으로 전쟁은 멈췄지만, 인구
40만을 겨우 껴안은 도시는 전쟁 직후 그 숫자가 2배를 넘어가면서 혼돈과 아수라장 그 자체가 돼버렸습니다.
얼기설기 판자를 엮을 수만 있어도 휴, 살았구나 싶은 폐허라고 할 만큼 도시 기반이 전무했고 모든 것이 절박했고 절실했던 시절이었는데요.
-(해설) 그런데 그때 부산을 더 절망 끝으로 내몰았던 것이 또 있었습니다.
부산의 산마다 꼭대기까지 피란민 판자촌들이 빽빽하게 생겨나자, 큰불이 여러 번 발생한 것인데요.
화재 관리에 속수무책이었던 당시 추위를 막고자 피웠던 불이 번져 걷잡을 수 없었고 도시 전체를 마비시킬 만큼 초대형 화재로 이어져 막대한 피해를 낳았습니다.
-화재에 취약한 목재 그리고 천막 아니면 종이류 이런 걸로 집을 짓다 보니까 화재가 나면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그러니까 순식간이라는 표현처럼
한 집에 화재가 나면 불과 10, 20분 만에 수십 채가 불이 나는 이런 현상들이 있었어요.
-(해설) 영도 대평동 대화재, 국제시장 대화재, 용두산 대화재까지 불은 전쟁만큼이나 잔인한 상처를 남겼는데요.
너무나 자주 큰 화재가 발생하다 보니 부산이 아니라 불산이라는 오명까지 얻게 됩니다.
-(해설) 1953년 11월 27일 밤 발생한 일명 부산 역전 대화재.
전쟁 후 재건을 일구려는 부산을 한순간에 삼킨 화재가 또다시 발생한 겁니다.
이 화재로 3만여 명의 이재민과 29명의 사상자, 전소된 집만 332채. 피해 규모를 따져보니 현재 가치로 1조 8000억 원에 달했습니다.
-(해설) 지금도 그 흔적이 부산 동광동 일대에 남아 있는데요.
-갑자기 식으면서 이렇게 돌이 소위 껍질 벗겨지듯이 박피 되는 이런 걸 볼 수가 있어요.
이 집이 완전히 목조 건물이었던 것이 불에 타면서 떨어지고 이 목조들이 담 옆으로 쌓여서 불이 계속 나니까 여기가 달궈졌고 끄려고 물을 부으니까 돌이
갑자기 식으면서 저렇게 튀어나온 것이다, 이렇게 보는 거죠.
-(해설) 화마가 삼켜버린 부산. 잿더미가 된 산 터를 망연자실 바라보던 피란민들의 심정은 절망과 참혹 그자체였습니다.
-(해설) 벼랑 끝으로 치닫던 그때. 어디선가 문이 열리며 군수 물품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재민들이 잠을 잘 천막들이 생겼고 매일 2만 3100여 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과 옷가지, 이불 등이 배급됐는데요.
부산 주둔 미군들이 써야 할 군수품 창고를 열어 이재민들에게 긴급 지원한 이는 바로 리차드 위트컴
제2군수 사령부 사령관. 그는 화재 발생 다음 날 바로 공병 부대를 투입해 지역을 정리했고 4만 명이 지낼 임시 천막촌을 지었습니다.
또 모두에게 지원이 갈 수 있도록 하겠다며 복구 계획도 상세히 밝혔는데요.
-(해설) 미국 의회의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즉각적인 지원과 재건에 나선 리차드 위트컴 군수 기지 사령관, 이 일로 결국 그는 미 의회 청문회에 소환됩니다.
-(해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장기적인 부산 재건 프로젝트를 세우고 폐허가 된 부산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듭니다.
-(해설) 군을 동원한 임시 복구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 지속 가능한 도시 기능을 갖추도록 했다는 건데요.
이 화재로 부산역과 우체국이 소실됐지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당시 건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수출입의 통관을 담당했던 부산 세관. 화재 발생 70년 후 지금은 몰라볼 정도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해설) 당시 부산역과 100m 인근에 마주했던 부산 세관. 그 매섭던 화마에도 부산 세관 청사만 살아남았는데요.
-(해설) 필사적 방어로 화마에서 살아남은 부산 세관. 위트컴 장군은 부산으로 향하는 재건 물자를 들여오기 위해선 세관 기능 회복이 최우선이라 판단하고 AFAK
미군대한원조 프로그램을 활용해 부산 세관 청사 반환에 나섭니다.
-(해설) 칼 같은 결단과 신속한 행정 실행. 그 덕분에 부산 세관의 기능은 빠르게 복구됐는데요.
군수 업무 책임자였던 위트컴 장군은 세관 청사 반환이야말로 재건의 첫 삽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위드컴 사령관이 애민 정신이라든가 또는 우리나라의 어려운 국민들을 도와준, 대화재 때 도와준 그런 고마움은 우리가 세관을 통해서 모든
업무를 수행하면서 그 고마움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해설) 사령관으로서 사명을 다해낸 리차드 위트컴. 59세에 부산으로 부임한 그의 지난 행적들은 과연 어땠을까.
1894년 미국 켄자스주 토피카에서 태어난 위트컴은 미국 엘리트 교육을 받고 선교사의 꿈을 키우며 성장했는데요.
-토피카에 있는
-(해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보병 장교로 참전하면서 군인의 길을 걷게 된 위트컴.
이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병력과 물자 수송 작전을 성공시키며 군수 전략가로서의 면모를 구축합니다.
-(해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 재건 작전까지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미군 최고 군수 전문가의 위치에 올라선 위트컴 장군.
부산 역전 대화재에 신속 조치를 취한 전문성도 바로 세계대전 참전 당시 성공한 재건 전략이 뒷받침됐던 것이죠.
1954년 그 고마움을 담아 시민들은 공덕비를 세웠는데요.
-(해설) 1954년부터 위트컴 장군은 미군대한원조프로젝트를 적극 활용, 병원을 짓고 학교 부지를 확보하고 전쟁고아를 돕고 도로를 건설하며 도시 재건을 위한 총체적 지원에 돌입합니다.
-(해설) 이 그림 본 적 있으신가요? 큰 종 모양을 스케치한 듯한 이 그림.
바로 부산대학교 동래 캠퍼스 평면도라는 제목의 설계도입니다. 그림의 원작자는 윤인구 부산대 초대 총장.
세상을 울리는 큰 배움이 있는 학교라는 꿈을 담았는데요.
-(해설) 1946년 해방 직후 부산 대연동에서 단과대학으로 개교한 부산대는 이후 부산 충무동과 대신동 교사에서 수업을 이어가다가 1953년 9월 국립종합대학으로 승격됩니다.
당시 윤인구 총장은 그 위상에 걸맞은 캠퍼스 부지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애썼지만 녹록지가 않았는데요.
-1946년에 부산대학이 세워졌으니까 해방되자 1년 만에 세워진 거거든요.
1년이 채 안 되죠, 5월에 세웠으니까. 그런데 그 당시에는 세금 시스템이 없었습니다.
국가는 예산이 없었죠. 그러면 어떻게 국립대학을 세웁니까?
-(해설) 1954년 6월 미군대한원조프로젝트가 한참 진행되고 있던 그때, 총장은 위트컴 장군 소식을 듣고 곧바로 그를 만나 그림을 꺼내 들었습니다.
-(해설) 부산의 역사. 나아가 한국 대학 교육사에 길이 남을 통 큰 거래.
위트컴 장군은 곧바로 한국 정부를 설득해 부지를 확보했습니다. 여기에 공사비까지 AFAK를 통해 지원했는데요.
-(해설) 가난했던 한 대학 총장의 그림에 힘을 실어준 세계 최강국의 군수 지기 사령관.
그의 결단과 추진력으로 부산은 교육의 기틀을 조성하게 됐지만, 안타깝게도 그 공적은 오랜 시간 잊혀져 있었습니다.
-(해설) 1954년 10월 25일 자, 미국 격주간지 라이프지에 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한복 차림의 미군 장군과 부대원들, 또 수녀들이 부산 시내를 돌며 캠페인을 벌인다는 건데요.
캠페인의 목적은 메리놀병원 신축 기금 모금. 한 푼이 귀했던 그때, 위트컴 장군이 구상해 낸 아이디어였던 겁니다. 당시 부산은 병원과 진료소가 전무한 상태였는데요.
여기에 부산역전 대화재 직후 화상 환자까지 하루 2000여 명이 몰려들면서 병원 기능이 마비될 정도였습니다.
이 급박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위트컴 장군은 AFAK 지원을 통해 종합병원 신축을 결정합니다.
-(해설) 1954년 7월 29일 기공식과 함께 공사에 착수했지만 예산은 턱없이 부족했고 이에 위트컴 장군은 가장행렬로 모금 활동을 하며 예하 미군 장병들에게는
월급의 1%를 기부하도록 했는데요. 당시 모인 금액이 약 6만 달러가 넘었다고 합니다.
-(해설) 1953년 11월부터 1958년 11월까지 한국 재건 비용으로 투입된 AFAK 예산은 약 600만 달러.
1954년 6월까지 부산에서만 300만 달러를 투입해 재건에 쏟아부었습니다.
소방 장비 진입로가 확보됐고 도로도 새롭게 정비했는데요.
위트컴 장군 지위 아래 부산 재건 프로젝트가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겁니다.
-(해설) 이 동상을 다시 한번 볼까요? 아이들의 손을 꼭 잡은 장군의 모습이 인상적인데요.
5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를 외면하지 않고 보육원과 고아원을 짓는데 역량을 쏟았던 위트컴 장군.
1954년 퇴역 후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한미재단을 통해 고아원을 돕는 공공, 민간 지원의 다리 역할을 했는데요.
-(해설) 그런데 이렇게 설립한 한미재단을 통해 위트컴 장군은 아주 특별한 인연을 만나게 됩니다.
-(해설) 충남 천안에서 홀로 두 아이를 키우며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 보육시설인 익선원을 운영했던 한묘숙 여사.
두 손 가득 선물을 들고 익선원을방문하던 장군과 인연이 돼 1964년 부부의 연을 맺은 건데요.
두 사람 모두 재혼이었지만 새로 얻은 두 아이도 무척 아꼈던 위트컴 장군.
미국에서 유학하는 딸 태정에게 편지를 쓰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했을 만큼 자식 사랑도 남달랐다고 합니다.
-(해설) 아이들을 누구보다 애틋하게 챙겼던 위트컴 장군.
그런 그가 한국에 남아야 할 숙명의 사업이 또 있었는데요.
위트컴 장군은 이를 생의 마지막 임무로 여겼고 아내 한묘숙 여사와 함께 송환 일에 매진합니다.
당시 공인이었던 위트컴 장군이 직접 중국이나 북한에 입국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대신 자신과의 결혼으로 미국 시민권자가 된 한묘숙 여사를 통해 유해발굴사업을 시작했는데요.
-(해설) 1982년 7월 12일. 중국에 머물고 있던 여사에게 위트컴 장군의 임종 소식이 전해집니다. 유해발굴사업 때문에 남편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는데요.
하지만 남편의 죽음 이후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눈을 감기 직전까지 위트컴 희망재단을 통해 미군 유해 송환 사업에 끝까지 헌신했는데요.
군수 물품을 풀어서 사람을 먼저 챙겼던 남편과 장진호 전투 전사자의 유해 송환에 삶의 전부 바쳤던 아내.
2017년 1월 1일 새해 첫날, 아흔 살에 생을 마감한 여사는 그렇게 남편 위트컴 장군 묘역에 함께 안장됐습니다.
-(해설) 조형물 제막실을 하루 앞둔 지난 11월 10일. 부산대학교 장전 캠퍼스에 한 버스가 도착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는 그녀들의 정체는 바로 재미동포들로 구성된 위트컴 여성합창 단원들.
공연을 하며 위트컴 장군을 알리고 있는데요.
장군의 결단과 추진력으로 조성됐다는 부산대 장전 캠퍼스에 직접 와 보니 그가 일군 부산 재건의 역사들이 새삼 기적 같기만 합니다.
-한국에 와서 했더니 AFK 프로그램이라고 미군 원조 한국 지원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거를 설계해서 그 프로그램을 만들고 그 프로그램 속에서 한국 전체를 다시 살려내는.
-(해설) 한국전쟁 당시 숭고하게 희생된 유엔군의 정신과 가치를 전하는 유엔평화기념관.
이곳에는 아주 특별한 공간이 있습니다.
바로 리차드 위트컴 전시관인데요. 전쟁의 상흔을 지우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던 시간들.
그러다 보니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은 잊고 지내왔는데요.
-(해설) 전시관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위트컴 장군의 재조명 작업이 활발한데요.
지난가을 부산문화회관에서는 아주 특별한 공연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바로 위트컴 장군을 주제로 한 오페라 갈라 추모음악회인데요.
그의 일대기를 오페라로 제작해서 관객들과 만난 겁니다.
-전쟁은 총, 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승리는 그 나라 국민을 돕는 것이다.
-(해설) 오페라로 만나는 위트컴은 어떤 감동일까?
이번 공연에서는 전체 3막 중 프롤로그와 1막을 선보였는데요.
-(해설) 막이 오르자 피아노 연주에 맞춘 배우들의 열연이 펼쳐졌습니다.
-안 계십니다~
-(해설) 오페라로 보고 듣는 위트컴 장군과 한묘숙 여사의 러브스토리. 그 감동이 더욱 배가 됐는데요.
-(노래) 나를 찾아와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당신이
-(해설) 군복보다 사람이 먼저였고 그 나라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전쟁의 승리자라고 믿었던 진정한 장군.
리차드 위트컴 장군의 재조명은 바로 우리 부산의 전후 복구와 재건의 역사를 찾는 작업이기도 한데요.
오페라와 책으로, 또 전시와 세미나로 그를 추모하는 방식은 다 다르지만 우리가 그를 잊지 않아야 할 이유는 같습니다.
-6.25 전쟁 영웅이자 부산을 너무나 사랑하신.
-위트컴 장군을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보다 많은 분들께서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잊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위트컴 장군님, 사랑해요.
-(함께) 위트컴, 장군님. 감사합니다.
-(함께) 위트컴 장군님, 사랑해요.
-(해설) 전쟁 피해 복구를 넘어 누구 하나 소외되는 이 없이 정책과 혜택이 돌아갈 수 있게 살피고 돌봤던 리차드 위트컴 장군.
그렇게 묵묵히 인류의 가치를 실천한 그의 행보가 부산 재건의 씨앗이 되었음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데요.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그의 이름을 기억해야 할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