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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조선통신사 위대한 유산 - 1부 조선통신사 행렬도

등록일 : 2024-04-01 17:49:25.0
조회수 : 215
-조선통신사는 조선의 왕이 일본의 요청으로 교류를 실현하기 위해서 막부의 쇼군에게 파견했던 외교 사절입니다.
임금을 대신해서 국서를 전달하는 외교 사절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많은 다양한 문화 교류를 포함하고 있는 문화 사절단이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대략 남짓 1년이라는 시간을 부산을 출발해서 에도까지 갔다 오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초기의 세 차례는 회답겸쇄환사라고 해서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뒤에 포로 송환의 목적도 있었습니다.
또 국정을 파악하고 또 우리나라의 문화를 일본에 전달하는 이런 목적을 가진 것이 조선통신사 행렬의 목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조선통신사의 행렬은 청도기, 형명기 깃발을 들던 사람과 그다음 악대와 마상재, 별파진.
전악, 군관 그다음 국서가마, 사자관, 소동, 사령 그다음 정사가마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부사 가마도 숫자만 좀 다르지 구성은 비슷하게 그다음 종사관 가마 다음에 제술관, 양의, 서기 등의 순서로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현재 통신사행렬도로는 인조 2년 1624년까지 가장 오래된 행렬도로 알고 있습니다.
통신사는 300명 정도 파견되었다고 해요.
정사, 정립, 부사는 강홍중으로 종사관은 신계영인데 세 번째까지는일본 새로운 쇼군이 등장했을 때 화답하러 가는 그런 입장도 있었고
그다음에 축하를 하면서도 우리 포로로 갔던 조선인들을 어떻게 하면 송환 다시 돌아올 것인가 그런 것들을 협상하는 그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인조 14년 1636년 통신사행렬도는 478명이 파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행렬의 구성원 위에 그가 맡은 직책이 그 상단에 그려져 있고 이름이 다 적혀 있기 때문에 외교 의례의 현장에 대해서 알려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숙종 37년 1711년은 에도 막부의 정권이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좀 안정기에 들어간 시기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행렬도 중에서는 정말 화룡점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1811년 정도 될 것 같으면 전례의 통신사와 많이 달랐습니다.
정사, 부사, 정사 그중에 종사관이 빠져버립니다.
달리 말하면 통신사를 통한 교류 자체에 대한 의의가 좀 약화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중국과 조선과 일본이 안정적인 관계가 유지되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통신사를 통한 외교는 종지부를 찍었다고 그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
국익을 우선으로 하고 상대국으로 인정해 주려고 노력하는 그런 자세가 오늘날 조선통신사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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