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특집

기획특집 고려대장경 천년을 넘어서

등록일 : 2022-12-21 09:34: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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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해인사 장경판전. 우리나라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봉안되어 있다.
 800년 전 보물을 영접하기 위해 두 손 모아 기다리는 탐방객들. 드디어 떨리는 순간이다.
-이게 정말 800년 전에 파진 겁니다. 800년 전에 이렇게 어떻게 팠지?
-(해설) 초조대장경을 시작으로 1000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영롱하게 살아있는 부처님의 말씀.
우리는 이것을 1000년의 보물 고려대장경이라 부른다.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진 불보 사찰 통도사.
남해 망운사 주지 성각스님이 통도사 서운암을 찾았다.
선서화를 통해 깨달음을 전하는 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도자대장경이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해인사의 고려대장경을 도자기에 새긴 도자대장경.
현재 조계종 종정이신 성파 대종사께서 20여 년에 걸쳐 완성한 대불사이다.
평소 고려대장경에 관심이 많은 종정 예하께서 성각 스님에게 시간을 내주었다.
-(해설) 고요한 산사에 비가 내린다. 성각스님의 마음에 조용한 파문이 인다.
평소 사형으로 모시는 법산스님을 찾아와 종종 큰스님이 내린 말씀과 뜻을 함께 헤아려본다.
-(해설) 무명의 삶에 한 줄기 빛이 되어주는 부처님의 말씀.
2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말씀은 어떻게 전해왔을까?
석가모니가 열반하신 후 그가 했던 말씀은 암송을 통해 전해졌다.
500년 후 승려들은 야자수 나무에 부처님의 말씀을 새기기 시작했고 중국
당나라의 고승 현장법사는 인도에서 구해온 불경들을 한자로 번역한다.
한동안 필사본으로 퍼져 나가던 불교 경전은 목판 인쇄 기술의 발달로
10세기경 북송에서는 13만 장의 목판에 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했다.
-(해설) 세계 최초의 목판 대장경인 북송판대장경이 고려에 전해지자 불교
국가였던 고려는 커다란 자극을 받는다. 그리하여 1011년 우리나라 최초로
대장경을 제작하는데 이를 초조대장경이라 부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구 부인사에 보관돼
있던 초조대장경은 몽골족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버린다.
고려는 유달리 북방 민족의 침략을 많이 받은 국가였다.
초조대장경을 제작한 이유는 부처님의 가피로 거란군을 물리치기 위함이었다.
그런 고려인들에게 초조대장경의 소실은 커다란 충격과 상실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려는 다시 한번 대장경을 판각하기로 한다.
-(해설) 해인삼매. 고요한 해면이 만상을 비추듯 번뇌를 없애고 우주의 이치를 깨닫게 하는
부처님의 도량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와 더불어 한국의 삼보사찰로 불리는 이곳에는 법보가 모셔져 있다.
우리나라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고려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 해인사장경판전.
사전 예약을 통해 탐방 프로그램을 신청한 관람객들이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온다.
이게 팔만대장경입니다.
-(함께) 법보전.
-(해설) 800년 동안 부식되지 않고 잘 보존돼 있는 고려대장경. 그 비결은 바로 장경판전에 있다.
-위에.
-(함께) 해석을 한다.
-(해설) 창문의 크기를 달리하여 풍압의 차이로 바람을 일으키는 장경판전.
바닥 또한 그 속에 숱과 횟가루 소금을 차례로 다져 경판이 썩지 않도록 살게 되었다.
-(해설) 800여 년의 세월 동안 부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고려대장경판.
지금까지 온전함을 유지하는 데에는 경판 자체에도 비밀이 있다. 우선 경판의 윗면과 아랫면에 평편하지
않고 둥글게 마무리되어 있고 글자도 경사를 두어 비스듬히 판각했다.
이는 먼지가 쌓이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경판 좌우에는 손잡이식으로 마구리를
덧대었는데 보관할 때 경판끼리 부딪히지 않게 해 마모율을 줄였다.
경판의 마모와 훼손을 고민하고 글자의 예술성까지 염두에 둬서 제작된 고려대장경.
볼수록 신비하고 경이로운 8만여 장의 경판 안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해설) 아쉽게도 북송대장경과 거란대장경은 현존하지 않는다.
오직 고려대장경만이 13세기까지의 현역 대장경을 모두 담고 있는 유일한 대장경인 것이다.
또한 현역 대장경 중에서 오탈자가 거의 없는 가장 정확한 경판으로 평가받는다.
그 이유는 수기대사를 비롯한 승려들이 모든 불교 경전을 철저히 비교해 오류를 교정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수기대사가 쓴 고려국신조 대장교정별록 30권에 기록되어 있다.
-(해설) 고려대장경 제작을 주도했던 수기대사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안타깝게도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몇몇 문헌들을 통해 교종 계열에서 가장
높은 승통이었고 개태사의 주지였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다.
완벽함에 대한 그의 고집과 열린 사상은 지금의 고려대장경을 낳았고 후대 다른
나라의 대장경 제작에 저본이 되었다. 특히 일본에서는 고려대장경을 높이 사
80여 차례 인쇄본과 경판을 유고하기도 했다. 생사가 오가는 전란 속에서도 불심에
의지해 대장경을 만든 고려인들. 그들의 흔적은 대장경판 곳곳에 남아 있다.
자신의 이름을 경판에 새긴 것이다. 사회 지배층은 물론이고 승려, 사미, 동자, 신녀 등 대장경 대불사 앞에서는
신분의 차이도 남녀의 구분도 없었다. 간혹 드물지만 경판에 개인의 염원을 새긴 경우도 있었다.
요원수라는 승려가 새긴 글귀다. 내자공덕력 영탈윤회보 엄부여자당 우유극락향.
-(해설) 오랜 전란 속에서 고려인들은 비통하게 부모, 형제를 잃었을 것이다.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새겨 넣은 글귀 속에서 부모를 향한 절절한 마음이 느껴진다.
-(해설) 전란을 극복하고 모두의 평화를 위해 대장경 제작에 참여한 고려의 민초들.
동입 극락향. 모두 함께 극락으로 향하자. 고려대장경에는 불교의 공유 의식이 깃들어 있다.
고려대장경을 제작한 판각지는 어디일까. 성각 스님이 고려대장경에 출발지라 할 수 있는 강화도를 찾았다.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 이규보. 그는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을 통해 임금을
비롯한 문무백관들과 함께 대장경 판각을 하늘에 고했다.
강화도로 천도한 최우는 자신의 원찰로써 선원사를 짓는다. 고려대장경 제작 당시 수도는 강화도였고
선원사는 최우의 원찰이었기에 이곳에서 고려대장경의 판각이 진행됐을 거라는 추측이 일었다.
이에 동국대학교에서는 1976년도에 강화도 학술조사단을 꾸려 선원사지 발굴에 들어갔고.
그 후 1996년 동국대 박물관을 주도로 다시 한번 발굴이 이루어졌다.
-(해설) 1977년 사적지로 지정된 이곳에서는 사찰과 관련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중에서도 인상적인 것은 사경편이었다.
-(해설) 강화도 선원사지 옆에는 아담한 사찰이 하나 있다.
선원사지의 복원을 기원하며 팔만대장경 박물관도 운영 중이다.
두 차례의 발굴로 강화도 선원사지가 큰 절터였다는 것은 증명이 되었으나 대장경
판각지라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 또한 선원사가 완공된 1245년에 고려대장경판의 90%가 판각되었다는
사실은 판각지로써의 가능성을 멀게 만든다.
하지만 완성된 경판이 강화도에서 있었다는 기록들이 문헌에 남아 있다.
-(해설) 임금께서 용산강에 거둥하였다.
대장경판을 강화의 선원사로부터 운반하였다. 임금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성의
서문 밖 대장경 판당에 행차하여 낙성 기념회를 열었다.
-(해설) 고려대장경 판각 당시 수도가 강화도였다는 사실과 대장경판당이 있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강화도가
판각지라는 추측은 할 수 있다. 하지만 판각지에 대한 기록이 없고 선원사지의 발굴 성과가 부족한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 남해. 오래전부터 대장경 판각지로 거론된 곳이다.
대장경 제작을 주도했던 최우의 처남인 정안이 남해에 머물렀다는 기록과 대장경을 제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해설) 정안은 최우가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면서 남의 재능을 시샘하는 것을
보고 해로움과 멀리 떨어지려고 남해로 피하여 살았다. 정안이 사재를 희사하여 나라와 반씩
부담하기로 약속하고 대장경을 간행하였다.
-(해설) 이를 바탕으로 고려대장경의 남해 제작설이 제기된 가운데 새로운 근거가 발견된다.
정미세고려국분사남해대장도감개판. 대장경 외장인 종경록, 권27에 판각된 간행 기록이다.
예를 들면 고려국대장도감봉칙조조. 또는 고려국분사대장도감봉칙조조라고 나와 있습니다.
-(해설) 종경록 권27의 간행 기록이 발간된 이후 남해군은 분사남해대장도감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1991년부터 2012년까지 세 차례 문화재 조사를 진행했다.
-망덕사지.
-안타골.
-선원사지.
-(해설) 큰 절이 있어 대사리. 탑이 많아서 탑동, 불교 용어 안타에서 유래된 안타골처럼 남해군 고현면에는
불교와 관련한 지명이 많다. 고현면 일대를 조사한 결과 극동문화재연구원에서는 망덕사지에서
고려시대 절토로 추정되는 건물지를 발굴했고 경남연구원에서는 관음포의 바닷물이 관당성지의 들판까지
들어왔다는 사실을 밝히고 11세기 화폐도 출토했다.
-기반 시설 이런 것들이.
-고고학적으로 성지가 있었다.
-운반이나, 지형적인 여건에.
-부합하다.
-이 세 가지만 엮어도.
-충분한.
-판각, 사지가. 사지로서는 아주.
-이곳으로.
-적격한 곳이다.
-(해설) 2017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된 전 선원사지.
고려 문인의 신분을 나타내는 유물이 출토되는 등 귀족이 기거했던 별서로 추정하지만
조각칼 등 구체적인 판각 도구는 찾지 못했다.
하지만 자재의 이동을 쉽게 하기 위해 건물을 고쳐 지은 정황이 확인되어
판각지로서의 가능성을 주목하고 있다.
남해의 마지막 판각 추정지, 안타골로 향하는 두 사람.
-여기가 그렇게 안타골이라고 하는...
-(해설) 낮은 구릉이 둘러싸고 있는 지형과 불교적 색채의 지명으로 인해
정안이 머물렀던 정림사지가 아니었을까, 추정되는 곳이었다.
-(해설) 하지만 발굴 당시 현장 책임자였던 김미영 연구원은
안타골이 아닌 전 선원사지가 정안이 기거했던 정림사지였을 거라고 추측한다.
-(해설) 판각지에 대한 비밀이 한 겹 벗겨진 상황에서 2012년 발굴 조사를 끝으로
유적지는 또다시 흙에 덮여 버렸다. 보다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계획 아래
발굴이 다시 진행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불교 서지학의 대가이자
고려대장경 연구의 권위자로 불리는 박상국 교수. 그가 발견한 종경록 권 27의 간행 기록으로 인해
대장경이 남해에서 판각되었다는 사실은 국내에서 인정받고 있다.
고려대장경의 간기에는 대장도감, 분사 대장도감이라는 판각 장소가 명시돼 있는데
6570권의 간기 중 500권에만 분사 대장도감이라고 판각돼 있다.
박상국 교수는 이를 연구하던 중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500권의 간기 중
473권에서 분사 대장도감이라는 글씨가 상감 기법으로 수정된 걸 확인한 것이다.
즉 대장도감 네 글자를 파내고 분사 대장도감, 여섯 글자를 집어넣은 것이다.
박 교수는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 경판 가장자리에 새겨진 각수의 이름을 찾고 조사하기 시작했다.
-(해설) 박상국 교수는 종경록 권27에 고려국 분사 남해대장도감을 새겨놓은
각수 최동이 1244년에 법원주림 권49와 95를 분사 대장도감에서 판각하고 법원주림 권72와
근본설일체유부백일갈마 권5는 대장도감에서 판각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각수 인경, 윤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 명의 각수가 한 해 동안 한 권은
강화도에서, 다른 한 권은 남해에서 판각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박상국 교수는 대장도감과 분사 대장도감은 같은 장소이며 고려대장경의 판각지는 중경록 권27에
명시되어 있는 남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분사 대장도감의 분사를 새롭게 해석했다.
-(해설) 하지만 고려대장경이 남해에서만 판각되었을 거라는 그의 주장에 의문을
갖는 학자들도 많다. 최동을 비롯한 동명이인 각수들이 많고 지금까지 확인된 1000여 명의 각수
중에서 그런 양상을 보이는 각수가 많지 않아 그 주장을 일반화시키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경전 안에 대장도감판과 분사 대장도감판이 섞여 있는 이유와
500권의 분사 대장도감판 중 473권의 간기가 수정되어 있는 이유 그리고 남해라는 지명만이 명시되어 있는
이유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2000년대 이후 대장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활동하면서 판각지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등장했다.
-(해설)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는 사찰에서 불교 경전을 간행하는 일이 많았다.
각 사찰마다 출판사가 하나씩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해인사 사간판전에 보관되어 있는 불설범석사천왕다라니경.
우리나라 보물 제734-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간행 기록을 보면 해인사 조조라고 판각되어 있다.
그 말미 간기 부분에 보면 해인사 조조 각수 대승이라고 나옵니다. 법명이죠, 해인사에 있으니까.
-(해설) 각수 대승 외에도 사찰에서 불교 경전을 판각했던 각수들이 이후
고려대장경 판각에 참여했었다는 기록은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판각 공간은 사찰마다 이미 존재했으며 강화도의 대장도감을
각 지방의 대읍사에 분사 대장도감을 설치하면서 판각 공간을 그 안으로 재편성한 것이라 추측한다.
-(해설) 판각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2016년 간행 기록의 지명이
적힌 경판 하나가 해인사에서 발견된다. 중국 당나라 시선집 당현시범을 판각한 목판.
병오세 개령 분사 대장도감 개판이라는 강기가 명시되어 있다.
고종 43년 개령에 있는 분사 도감에서 판각되었다는 뜻이다.
개령 분사 대장도감의 위치를 알아보기 위해 경북 김천시 개령면을 찾아가 보았다.
엄밀히 말해 당현시범 경판은 고려대장경이 아니다.
국가에서 제작한다는 의미의 고려국과 봉칙 주조라는 문구도 빠져 있다.
하지만 고려대장경을 제작했던 시기에 판각되었고 개령이라는 지명이 명시되어
있기에 판각지를 찾는데 큰 의미가 크다.
-(해설) 반평생 고려대장경을 연구했고 어느덧 퇴직을 바라보고 있는 최영호 교수.
그는 그동안의 연구를 바탕으로 분사 대장도감은 대읍사를 중심으로 한 남해,
개령, 진주, 경주에 존재했고 최근 제자의 논문을 통해 전주에도
분사 대장도감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고려대장경 판각지에 대한 진실. 일각에서는 이런 논쟁을 불편해하지만
고려대장경 판각지를 밝히는 일은 그 의미가 크다.
-(해설) 남해군 고현면에 위치한 전통 사찰 화방사.
남해를 대장경 판각지로 성역화하고자 하는 발원을 담아 해마다 산빛 문화제를 열고 있다.
올해로 11회째를 맡고 있는 이 축제는 남해가 판각지라는 사실과 고려대장경의
정신을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해설) 종경록 권 27회 간기. 고려국 분사 남해 대장도감의 발견은 남해군에게 큰 화두였다.
그리고 판각지를 찾기 위해 1994년부터 세 차례 문화재 조사를 진행했으며
일말의 성과도 있었다. 고현면 일대가 고려대장경 판각 성지로
복원되기 바라며 30년 가까이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남해군.
남해군의 활동은 불교계와 다른 지자체에도 자극을 주고 있다.
-(해설) 한국인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문화유산인 고려대장경.
어떻게 하면 그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을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성각 스님이 한국관광공사를 방문했다.
한국관광공사 사장은 고려대장경에 관한 콘텐츠의 부재를 아쉬워하며 역사적
유물을 문화적으로 해석해 관광 자원화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해설) 선사에서 내려와 젊은이들에게 부처님의 지혜를 전하고 있는 성각 스님.
요즘은 학생들에게 고려대장경의 가치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이것을 지난번에 제가...
-(해설) 오늘날 젊은이들은 고려대장경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봤던 국보 32호. 오랜 유물로만 인식하지 않을까.
-해서 완성을 했습니다.
-(해설) 온라인이 익숙한 요즘 세대에게 인터넷 검색은 지식의 창구다.
하지만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만든 일본이 신수대장경이 세계인들에게
더 많이 검색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문제점들을 의논하고자 동국대학교를 찾았다.
-(해설) 고려대장경을 위한 여정을 떠났던 성각 스님이 오랜만에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선 수행을 통한 깨달음을 오롯이 먹으로 드러낸 선서화전.
붓끝을 통해 부처님의 말씀을 나누는 자리에서 성각 스님은 고려대장경의
가치 또한 더 많은 사람이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해설) 초조대장경을 시작으로 재조대장경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1000년이라는 위대한 여정을 걷고 있는 고려대장경.
우리는 지금 고려대장경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찬란한 세계기록문화유산의 가치를
살려 이제는 지나온 1000년보다 앞으로의 1000년을 고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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