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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스페셜 - 수당 家, 文을 말하다
등록일 : 2023-09-04 14:45:33.0
조회수 : 347
-(해설) 여기 네 남자가 있습니다.
이들의 삶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됐는데요.
4대가 현충원에 안장된 집안.
수당 이남규, 유재 이충구, 평주 이승복, 이장원 중위.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 이런 이야기거든요.
-(해설) 수당 가문의 이야기를 펼쳐줄 오래된 집.
조선 중기에 건립돼 386년 세월 동안 명문대가의 기품을 간직하고 있는 고택입니다.
세월의 풍파를 견딘 단단한 돌계단처럼 수당 가문에도 역사가 쌓이고 그 세월의
끝자락을 지키고 있는 이문원 관장입니다.
-(해설) 명문대가 후손이지만 힘겹게 공부를 한 이문원 관장.
수당기념사업회를 만들고 수당기념관을 지키며 선대의 업적을 알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 양반 가옥의 전형적인 미학을 간직한 수당 고택.
이 집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데요.
-(해설) 조선의 왕족이었던 선대 할머니의 큰 뜻이 담긴 집.
그 할머니의 뜻대로 수당 이남규는20대에 정시 문과에 급제하면서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떠오릅니다.
그리고 외교문서를 다루는 승문원에서 관직을 시작하는데요.
외교문서를 접하며 국제 정세를 잘 알게 된 수당.
그는 고등 관료이자 뛰어난 문장가로 많은 글을 남겼는데요.
서학 교수를 맡으며 후학양성에도 힘썼던 수당은 신채호와 변영만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해설) 수당이 관직에 있던 때는 조선이 무너지기 시작한 격동의시기였는데요.
1894년 일제는 한양 도성을 침입하며 조선을 삼키려는 탐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10여 년간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친 수당은 40살에 정치적 목소리를 냅니다.
-지금 일본인이 군사를 이끌고 도성에 문을 들어왔는데 외무부서의 신하가 힘써 막았으나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만약 저의 제안을 일본이 꼬투리 삼는다면 저의 목과 피를 일본에 뿌리소서.
-(해설) 상소문을 받은 고종은 수당에게 답을 내립니다.
상소는 잘 보았다.
사리를 논한 것이 조리가 있고 말이 또한 개절하니 매우 감탄스럽고 가상하다.
그러나 고종과 수당의 바람과는 달리 일제의 침략은 점점 더 거세지는데요.
1894년 7월 23일 새벽, 일본군은 경복궁을 강제 점령합니다.
이 사건은 사실상 조선 식민지 역사의 슬픈 서막이었는데요.
이렇게 일본에게 지배당하는 나라를 보며 수당의 울분도 깊어집니다.
-멀리는 임진년의 왜란이 있고 가까이는 갑신년의 왜변이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위엄있는 결단을 내리시고 상규를 확고히 지키십시오.
신하들 가운데 현자를 골라 정사를 위임하시고 장수들 가운데 능자를 골라군사를 위임하십시오.
-(해설) 1884년, 급진개화파들이 일으킨 갑신정변.
이때부터 조선에는 근대화 물결이 거세게 일었지만, 외세에 의한
개혁이라는 한계를 남겼는데요.
이렇게 급변하는 나라를 보며 수당은 우리 스스로 결집하고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주장합니다.
-(해설) 거듭되는 상소 때문이었을까요?
중앙 고등 관료였던 수당은 첫 번째 외직인 영흥으로 떠납니다.
영흥으로 가는 길목마다 청일전쟁으로 참혹한 상황이었는데요.
삼천리는 전쟁판으로 전락하고 백성은 삶의 터전을 빼앗겼습니다.
수당은 당시 백성을 향한 애틋함을 글로 남겼는데요.
-한 필 베가 백성에겐 보배보다 귀하다네.
한 조각인들 언제 자기 몸에 둘렀던가.
이웃 장에 팔아서 세금을 내고 나니 때도 없이 다그치는 수탈이 또 걱정이어라.
-(해설) 오직 백성과 나라 생각에 수당의 고뇌는 깊어지고 그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크나큰 변고가 일어납니다.
-(노래) 바다에 에워싸인 이 삼천리 반도가 저들의 큰 감옥이 되었으니 이 한 몸 풀려나도
-(해설) 왕후는 한 나라의 국모로서 30년 동안이나 온 나라의 선민들이 그 옳지 못한 것을 보지 못하였으며
실덕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삼천리 온 나라가 벌벌 떨면서 원수 놈의 종이 되어 왕후에게 죄를 돌려서
드디어 폐하여 서인을 삼으라는 명까지 내린다는 말입니까.
바라건대 처벌을 내리시어 신하 된 자로서 나라를 잊고 살기를 도모하는 자의 경계로 삼으시고
그렇게 된다면 죽는 날이 영원히 사는 날이 될 것입니다.
-(노래) 나를 아끼는 것이 도리어 누리를 끼치는지라 무슨 말인들 덫 없어지네 이내 몸은 보잘 것이 없어 허허 한 푼어치도 못 되네
-(해설) 국모 시해 사건 후 친일 내각은 단발령까지 내립니다.
그 시절 단발령은 단순히 상투를 자르는 게 아니라 민족의 뿌리까지 무참하게
잘라버린 또 하나의 국난이었습니다.
국모 시해에 대한 복수도 못 한 무기력한 자신을 원망하며 스스로를 탄핵한 수당.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 예산으로 돌아오는데요.
그러나 다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안동부 관찰사로 부임하라는 고종의 칙유를 받는데요.
경은 짐이 다친 사람과 어린아이를 보호하듯이 하는 뜻을 체득하여 왕사가
나아가기 전에 각 군으로 가서 정성 된 마음으로 칙유하여 짐의 사랑스럽고
애달픈 적자들이 창검에 상하여 구렁텅이에 빠질 근심에 걸리지 않게
하여 백성의 부모 된 짐의 마음을 위로하라.
이강년 의병 대장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안동.
-(해설) 당시 안동은 유림을 중심으로 한 의병 활동이 거세게 일고 있었습니다.
왕명으로 부임한 관찰사 수당에게 의병들은 호의적일 수가 없었는데요.
-(해설) 본관이 명령을 받고 대궐을 떠날 때에 우리 성상께서 간곡히 영남을 걱정하셨다.
노하지 않고 가르치시며 오직 다칠까를 두려워하셨는데 목석이 아닌 사람이라면 어찌 느껴 알지 못하겠는가.
관군이 이르게 되면 어찌 옥석을 가리랴.
백성은 죄가 없으니 어찌 애달프지 않으랴.
-(해설) 그렇게 수당이 안동을 안정시키고 있을 때 일제는 의병을
빌미로 안동을 불바다로 만드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해설) 안동의 참혹한 일상이 자기 책임이라며 본인의 죄를 탓하는 수당.
관찰사를 사직하는 상소문을 씁니다.
신이 임금의 명령을 허투루 내버린 채 두루 민심을 어루만져 안정시키지
못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이며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채 구제하지 못하였으니
그 죄가 둘이며 관청을 잿더미로 만들면서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였으니
그 죄가 셋이며, 선비들을 함정에 빠뜨리고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그 죄가 넷입니다.
-(해설) 의병들도 수당에게는 소중한 백성이었습니다.
-(해설) 6월 1일은 외세와 맞서싸운 의병의 넋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한법정 기념일.
의병의 날인데요.
전국에서 모인 의병 깃발과 함께 그 시절 의병 정신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올해 기념 행사는 충절의 고장 예산에서 열렸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함께) 만세!
-만세!
-(함께) 만세!
-만세!
-(함께) 만세!
-(해설) 1906년 3월 15일.
예산, 청양, 서산 그리고 홍성과 보령의 선비와 농민들이 광시로 집결합니다.
민종식 의병 대장이 이끄는 항일 의병은 전국에서 가장 강렬히 일제에 저항하는데요.
힘 없는 백성이 의병으로 뜨겁게 봉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나라의 주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해설) 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주권을 상실하게 만든 을사조약.
일제에게 나라를 팔아 먹은 을사오적에 대항하기 위한 민초들의 봉기는 더욱 뜨거워집니다.
1906년 5월 19일.
내포 지역 의병은 1000여 명의 부대를 이끌고 호서 지방 요충지인 홍주성을
점령한 후 열흘이 넘는 기간 동안 홍주성을 사수합니다.
그러자 일본군은 대규모 병력을 앞세워 의병을 무참히 섬멸시키는데요.
그렇게 셀 수 없이 많은 의병이 전사하면서 민종식 의병 부대는 처참히 무너지고 맙니다.
-(해설) 1906년 10월.
수당을 찾아온 특별한 손님이 있었는데요.
얼마 전 홍주성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후퇴한 의병 대장 민종식이었습니다.
이미 의병 선봉장으로 추대된 수당은 물심양면으로 의병을 도와주고있었는데요.
내포 지역 의병 재기를 목표로 예산 관아를 공격해 근거지로 만들 구체적인 계획을 세웁니다.
-(해설) 매천야록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일진회에 참여한 이들은 이남규를 제거하지 않으면 내포에는 편안할 날이
없을 거라고 하니 일본인들은 그 말을 믿고 그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의병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수당도 민종식 의병 대장을 숨겨준 죄로 공주 감옥에 갇힙니다.
함께 끌려간 수당의 아들 이충구는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민종식의 거처를 발설하지 않는데요.
이충구의 그러한 의연함은 어릴 때부터 스며든 아버지의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훗날 이충구는 아버지의 말씀을 이렇게 기록하는데요.
-정유년 2월 17일에 우리 아버지께서 병환이 있으셨는데 불초에게 명하시기를 내가 병이 날로 심해진다.
그러나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다.
다만 순히 받아들일 뿐이다.
만일 불행함이 있더라도 진실로 유감이 없다.
검약을 힘써 따르고 가족 사이에 돈독하며 화목하게 하라.
하녀와 하인을 대하는 데에는 반드시 바르며 엄히 하되 화합한 분위기를 힘써 따르라.
절대로 어긋나게 벼슬을 구해서 안 된다.
오직 문학을 종사하라.
-(해설) 수당 가문에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무단 침입한 일본군을 향해 수당은 한 치도 물러서지를 않는데요.
-(해설) 수당은 그렇게 오형제고개를 넘습니다.
집을 나와 40리 길.
이 길이 이승에서의 마지막이라는 걸 수당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사가살 불가욕.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며 교자를 타고 가는 수당.
죽음을 앞두고도 선비의 위엄을 잃지 않았습니다.
온양 평촌의 냇가.
이충구는 온몸으로 일본군의 칼날을막습니다.
-(해설) 수당 부자의 죽음은 이렇게 기사가 됩니다.
문장에 능하고 지혜가 많으니 필히 의병이라 하고 곧바로 포살을 행함에
그 아들이 크게 울면서 아버지를 붙드니 함께 포살하였다.
한국 사람 마음에 더욱 분노가 격동케 한 일이 아닌가.
이 몸 하나 죽지 못하였네 이런 마당에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을지언정
내북의 도적들과 살 수 없으며
-(해설) 그렇게 수당과 그의 아들 이충구는 국립대전현충원에 나란히 안장됐습니다.
이곳에 오면 수당의 4대손 이문원 관장의 시간은 100년 전으로 돌아가는데요.
-(해설) 수당의 4대손 이문원 관장은 수당의 삶을 책으로 엮으며 아픈 역사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수당이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나라를 잃고도
죽지 못한 비통함과 절절함이 글자마다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100년 전 수당이 쓴 글을 어떤 의미로 읽어야 할까요.
-(해설) 사람은 집을 만들고 집은 사람을 만들 듯 수당 가문의 정신과 철학이 오래된 집을 채우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수당과 아버지 이충구를 한날한시에 잃은 소년 이승복.
집안의 두 대들보가 무너져 내린 비통함을 간직한 채 그는 어떤 길을 걷게될까요?
이승복의 발자취를 찾으러 온 곳.
독립운동사 자료집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해설)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동시에 잃었던 소년 이승복은
역시 수당 가문의 후손이었습니다.
나라는 일제 식민지가 됐지만 이승복은 신교육을 받고 민족 지도자들과 만나며 독립 의식을 고취하는데요.
1915년 19살에 러시아로 망명.
민족 운동을 시작합니다.
러시아와 만주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가 검거되기도 하는데요.
27살 되던 1921년은 상해 임시정부 운동에 참여합니다.
이동녕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의 주요 요인들과 교류하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치는데요.
이승복이 독립지사들과 폭넓게 교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월봉은 퍽 고운 성품의 소유자로 외유내강한 나의 막역지우였고
조소앙 씨와도 퍽 가깝게 지냈어요.
성재 선생은 임시정부의 독립 자금을 도맡아 댄 분이죠.
조완구 씨는 누구보다 퍽 실력 있는 분이었소.
내가 해외에서 만나 뵌 이로 백범이나 도산 같은 이들이 큰 감명을 준 독립지사였어.
-(해설) 이승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통제 조직원으로 활동했는데요.
이 조직을 통해 임시정부는 국내외를 통치하고 연결하며 민주공화국의 초석을 다질 수 있었습니다.
-(해설)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이승복이 서울 한복판에 등장하는데요.
1923년 1월 12일, 김상옥 열사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에 연루됐기때문입니다.
김상옥에게 거처를 제공한 이승복은 일본 경찰에 연행돼 심한 고초를 겪게 되는데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때 나도 혼이 좀 나기는 했지만 김 열사가 열렬해도 그토록 열렬할 줄은 몰랐죠.
-(해설) 이승복의 또 다른 활동을 확인하러 온 곳.
그는 홍명희의 권유로 시대일보 창간에 함께하며 언론 활동을 시작하는데요.
당시 시대일보 기자였던 김기진 옹은 평주 이승복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신문사 경영이 어렵게 되자 어디서 용하게 돈을 끌어다 낸 사람이평주였어요.
어디선가 돈을 한 보따리 가져와 급료를 거뜬히 해결하는 대단한 수완가가 이승복 상무이사였습니다.
1920년대 일제는 식민 통치를 은폐하기 위해 문화정책을 펼치는데요.
이에 따라 신문사가 연이어 창간되고.
하지만 경영난에 부딪힌 신문사는 이승복을 영입하는데요.
이승복은 언론계의 막후 참모로 활동하며 신석우, 한기학, 안재홍과 더불어
신문사에 기반을 마련한 4인방입니다.
-(해설) 1927년 2월 15일 이곳에서 신간회가 출범합니다.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손잡은 신간회는 최대의 민족 협동 전선입니다.
-(해설) 오로지 민족독립을 목표로 대동단결한 신간회.
이승복은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리고 초대 간사를 맡으며 강령을 작성하는 등
신간회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구함.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해설) 신간회는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걸친 민족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창립 후 4년 4개월 만에 지방지회 150개, 참여 인원 4만 명이 넘는 국내 최대
항일운동단체로 성장하는데요.
일제의 차별과 박해에 대항하고 민족 의사를 대변하며 식민지 상황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했습니다.
-(해설) 신간회 안성지회 회원의 후손을 만났습니다.
-(해설) 정동수를 추모하는 글에서 평주 이승복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말은 적되 실행이 많고 궂은일은 자신이 맡고 공은 타인에게 돌렸으니 평주
이승복 선생과도 같은 성행에 일치.
언론 운동과 신간회 활동으로 가족도 돌보지 못했던 이승복.
일제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됩니다.
일본 경찰은 이승복에게 치안유지법위반죄를 적용하고 또 소행조서을 꾸며 기록할 만큼 낱낱이 파악하며 감시했는데요.
시도 때도 없이 이어지는 모진 고문에도 독립을 향한 열정을 접지 않습니다.
-(해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지키지 못한 죄가 평생 한으로 남은 이승복.
그가 정리한 가장을 펼쳐봅니다.
-(해설) 돌아가신 할아버님의 함자는 남규이시다.
을미년이었다.
목숨을 끊을지언정 머리칼은 자르지 못하겠사옵니다라는 글월을 왕에게 올렸다.
경자년에는 영흥군수 이윤재가 재물을 긁어모아 원성이 잦은 죄를 논핵했다.
할아버지께서 화를 당하실 때 불초의 나이 겨우 열세 살이어서 용모는
어렴풋이 기억에 남을 뿐인데 삼가 문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문장은 탁월하고 지조는 맑고 드높았다고들 한다.
계축년, 불초손 승복이.
피눈물로 삼가 아룀.
-(해설) 수당 가문이 목숨 걸고 바랐던 광복.
그날이 왔습니다.
이승복은 안재홍과 국민당을 창당하고 김구의 한독당과 합당하며 건국의 기틀을 다지는 데 열정을 쏟습니다.
-(해설) 민족의 또 다른 수난.
6.25 전쟁이 발발합니다.
-(해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1월.
함경남도 원산 황토도는 우리 군에게 중요한 보급로였습니다.
수당가의 4대 이장원 소위는 수당 이남규가 부사를 지냈던 영흥의 섬 황토도를 지켰습니다.
그러니까 한심하잖아요.
그러니까 먹을 것도 없고 그러니까 밀국수 그냥.
옛 때는 맷돌로 돌려서 한 거니까 밀가루가 좀 있었던지 그거 해서
그 운전수하고 해서 먹고 네가 어쨌든지 아버지를 잘 모시라고.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던가 봐요, 그래서...
-(해설) 그렇게 아버지와 마지막 인사를 한 이장원 소위는 황토도에서 전사합니다.
-(해설) 비석에 새겨진 이름 이장원.
그리고 그 이름을 가슴에 새긴 동생.
-내가 8살 될 때 서울 가서 아현국민학교 입학할 때 집에서 거기 좀 머니까 우리 형이 나를 업고 갔어.
그런 인정이 많고 그러니까 그 후에 전사 소식 듣고 아버지가 대성통곡을 하고
한 6개월 동안은 매일 통곡하고 술만 자시고 식사는 안 하셨지.
-(해설) 23살.
꽃다운 아들을 가슴에 묻은 이승복.
한평생 독립지사로 살았지만, 아들의 죽음 앞에서는 평범한 아버지였습니다.
이장원 중위는 순국 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됩니다.
그리고 27년이 흐른 뒤 그의 아버지 이승복은 그토록 애달파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곁에 나란히 잠드는데요.
이로써 4대가 현충원에 안장된 국내 유일의 집안 수당 가문.
이렇게 수당 가문은 역사에 기록됐고 역사는 그 의미를 기억합니다.
어이야 어이야 어랑어랑 어이야어이야 디야 어랑어랑 어이야 어이야 디야 어랑어랑 어랑어랑
이들의 삶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됐는데요.
4대가 현충원에 안장된 집안.
수당 이남규, 유재 이충구, 평주 이승복, 이장원 중위.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 이런 이야기거든요.
-(해설) 수당 가문의 이야기를 펼쳐줄 오래된 집.
조선 중기에 건립돼 386년 세월 동안 명문대가의 기품을 간직하고 있는 고택입니다.
세월의 풍파를 견딘 단단한 돌계단처럼 수당 가문에도 역사가 쌓이고 그 세월의
끝자락을 지키고 있는 이문원 관장입니다.
-(해설) 명문대가 후손이지만 힘겹게 공부를 한 이문원 관장.
수당기념사업회를 만들고 수당기념관을 지키며 선대의 업적을 알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 양반 가옥의 전형적인 미학을 간직한 수당 고택.
이 집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데요.
-(해설) 조선의 왕족이었던 선대 할머니의 큰 뜻이 담긴 집.
그 할머니의 뜻대로 수당 이남규는20대에 정시 문과에 급제하면서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떠오릅니다.
그리고 외교문서를 다루는 승문원에서 관직을 시작하는데요.
외교문서를 접하며 국제 정세를 잘 알게 된 수당.
그는 고등 관료이자 뛰어난 문장가로 많은 글을 남겼는데요.
서학 교수를 맡으며 후학양성에도 힘썼던 수당은 신채호와 변영만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해설) 수당이 관직에 있던 때는 조선이 무너지기 시작한 격동의시기였는데요.
1894년 일제는 한양 도성을 침입하며 조선을 삼키려는 탐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10여 년간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친 수당은 40살에 정치적 목소리를 냅니다.
-지금 일본인이 군사를 이끌고 도성에 문을 들어왔는데 외무부서의 신하가 힘써 막았으나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만약 저의 제안을 일본이 꼬투리 삼는다면 저의 목과 피를 일본에 뿌리소서.
-(해설) 상소문을 받은 고종은 수당에게 답을 내립니다.
상소는 잘 보았다.
사리를 논한 것이 조리가 있고 말이 또한 개절하니 매우 감탄스럽고 가상하다.
그러나 고종과 수당의 바람과는 달리 일제의 침략은 점점 더 거세지는데요.
1894년 7월 23일 새벽, 일본군은 경복궁을 강제 점령합니다.
이 사건은 사실상 조선 식민지 역사의 슬픈 서막이었는데요.
이렇게 일본에게 지배당하는 나라를 보며 수당의 울분도 깊어집니다.
-멀리는 임진년의 왜란이 있고 가까이는 갑신년의 왜변이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위엄있는 결단을 내리시고 상규를 확고히 지키십시오.
신하들 가운데 현자를 골라 정사를 위임하시고 장수들 가운데 능자를 골라군사를 위임하십시오.
-(해설) 1884년, 급진개화파들이 일으킨 갑신정변.
이때부터 조선에는 근대화 물결이 거세게 일었지만, 외세에 의한
개혁이라는 한계를 남겼는데요.
이렇게 급변하는 나라를 보며 수당은 우리 스스로 결집하고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주장합니다.
-(해설) 거듭되는 상소 때문이었을까요?
중앙 고등 관료였던 수당은 첫 번째 외직인 영흥으로 떠납니다.
영흥으로 가는 길목마다 청일전쟁으로 참혹한 상황이었는데요.
삼천리는 전쟁판으로 전락하고 백성은 삶의 터전을 빼앗겼습니다.
수당은 당시 백성을 향한 애틋함을 글로 남겼는데요.
-한 필 베가 백성에겐 보배보다 귀하다네.
한 조각인들 언제 자기 몸에 둘렀던가.
이웃 장에 팔아서 세금을 내고 나니 때도 없이 다그치는 수탈이 또 걱정이어라.
-(해설) 오직 백성과 나라 생각에 수당의 고뇌는 깊어지고 그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크나큰 변고가 일어납니다.
-(노래) 바다에 에워싸인 이 삼천리 반도가 저들의 큰 감옥이 되었으니 이 한 몸 풀려나도
-(해설) 왕후는 한 나라의 국모로서 30년 동안이나 온 나라의 선민들이 그 옳지 못한 것을 보지 못하였으며
실덕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삼천리 온 나라가 벌벌 떨면서 원수 놈의 종이 되어 왕후에게 죄를 돌려서
드디어 폐하여 서인을 삼으라는 명까지 내린다는 말입니까.
바라건대 처벌을 내리시어 신하 된 자로서 나라를 잊고 살기를 도모하는 자의 경계로 삼으시고
그렇게 된다면 죽는 날이 영원히 사는 날이 될 것입니다.
-(노래) 나를 아끼는 것이 도리어 누리를 끼치는지라 무슨 말인들 덫 없어지네 이내 몸은 보잘 것이 없어 허허 한 푼어치도 못 되네
-(해설) 국모 시해 사건 후 친일 내각은 단발령까지 내립니다.
그 시절 단발령은 단순히 상투를 자르는 게 아니라 민족의 뿌리까지 무참하게
잘라버린 또 하나의 국난이었습니다.
국모 시해에 대한 복수도 못 한 무기력한 자신을 원망하며 스스로를 탄핵한 수당.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 예산으로 돌아오는데요.
그러나 다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안동부 관찰사로 부임하라는 고종의 칙유를 받는데요.
경은 짐이 다친 사람과 어린아이를 보호하듯이 하는 뜻을 체득하여 왕사가
나아가기 전에 각 군으로 가서 정성 된 마음으로 칙유하여 짐의 사랑스럽고
애달픈 적자들이 창검에 상하여 구렁텅이에 빠질 근심에 걸리지 않게
하여 백성의 부모 된 짐의 마음을 위로하라.
이강년 의병 대장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안동.
-(해설) 당시 안동은 유림을 중심으로 한 의병 활동이 거세게 일고 있었습니다.
왕명으로 부임한 관찰사 수당에게 의병들은 호의적일 수가 없었는데요.
-(해설) 본관이 명령을 받고 대궐을 떠날 때에 우리 성상께서 간곡히 영남을 걱정하셨다.
노하지 않고 가르치시며 오직 다칠까를 두려워하셨는데 목석이 아닌 사람이라면 어찌 느껴 알지 못하겠는가.
관군이 이르게 되면 어찌 옥석을 가리랴.
백성은 죄가 없으니 어찌 애달프지 않으랴.
-(해설) 그렇게 수당이 안동을 안정시키고 있을 때 일제는 의병을
빌미로 안동을 불바다로 만드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해설) 안동의 참혹한 일상이 자기 책임이라며 본인의 죄를 탓하는 수당.
관찰사를 사직하는 상소문을 씁니다.
신이 임금의 명령을 허투루 내버린 채 두루 민심을 어루만져 안정시키지
못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이며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채 구제하지 못하였으니
그 죄가 둘이며 관청을 잿더미로 만들면서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였으니
그 죄가 셋이며, 선비들을 함정에 빠뜨리고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그 죄가 넷입니다.
-(해설) 의병들도 수당에게는 소중한 백성이었습니다.
-(해설) 6월 1일은 외세와 맞서싸운 의병의 넋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한법정 기념일.
의병의 날인데요.
전국에서 모인 의병 깃발과 함께 그 시절 의병 정신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올해 기념 행사는 충절의 고장 예산에서 열렸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함께) 만세!
-만세!
-(함께) 만세!
-만세!
-(함께) 만세!
-(해설) 1906년 3월 15일.
예산, 청양, 서산 그리고 홍성과 보령의 선비와 농민들이 광시로 집결합니다.
민종식 의병 대장이 이끄는 항일 의병은 전국에서 가장 강렬히 일제에 저항하는데요.
힘 없는 백성이 의병으로 뜨겁게 봉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나라의 주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해설) 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주권을 상실하게 만든 을사조약.
일제에게 나라를 팔아 먹은 을사오적에 대항하기 위한 민초들의 봉기는 더욱 뜨거워집니다.
1906년 5월 19일.
내포 지역 의병은 1000여 명의 부대를 이끌고 호서 지방 요충지인 홍주성을
점령한 후 열흘이 넘는 기간 동안 홍주성을 사수합니다.
그러자 일본군은 대규모 병력을 앞세워 의병을 무참히 섬멸시키는데요.
그렇게 셀 수 없이 많은 의병이 전사하면서 민종식 의병 부대는 처참히 무너지고 맙니다.
-(해설) 1906년 10월.
수당을 찾아온 특별한 손님이 있었는데요.
얼마 전 홍주성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후퇴한 의병 대장 민종식이었습니다.
이미 의병 선봉장으로 추대된 수당은 물심양면으로 의병을 도와주고있었는데요.
내포 지역 의병 재기를 목표로 예산 관아를 공격해 근거지로 만들 구체적인 계획을 세웁니다.
-(해설) 매천야록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일진회에 참여한 이들은 이남규를 제거하지 않으면 내포에는 편안할 날이
없을 거라고 하니 일본인들은 그 말을 믿고 그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의병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수당도 민종식 의병 대장을 숨겨준 죄로 공주 감옥에 갇힙니다.
함께 끌려간 수당의 아들 이충구는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민종식의 거처를 발설하지 않는데요.
이충구의 그러한 의연함은 어릴 때부터 스며든 아버지의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훗날 이충구는 아버지의 말씀을 이렇게 기록하는데요.
-정유년 2월 17일에 우리 아버지께서 병환이 있으셨는데 불초에게 명하시기를 내가 병이 날로 심해진다.
그러나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다.
다만 순히 받아들일 뿐이다.
만일 불행함이 있더라도 진실로 유감이 없다.
검약을 힘써 따르고 가족 사이에 돈독하며 화목하게 하라.
하녀와 하인을 대하는 데에는 반드시 바르며 엄히 하되 화합한 분위기를 힘써 따르라.
절대로 어긋나게 벼슬을 구해서 안 된다.
오직 문학을 종사하라.
-(해설) 수당 가문에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무단 침입한 일본군을 향해 수당은 한 치도 물러서지를 않는데요.
-(해설) 수당은 그렇게 오형제고개를 넘습니다.
집을 나와 40리 길.
이 길이 이승에서의 마지막이라는 걸 수당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사가살 불가욕.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며 교자를 타고 가는 수당.
죽음을 앞두고도 선비의 위엄을 잃지 않았습니다.
온양 평촌의 냇가.
이충구는 온몸으로 일본군의 칼날을막습니다.
-(해설) 수당 부자의 죽음은 이렇게 기사가 됩니다.
문장에 능하고 지혜가 많으니 필히 의병이라 하고 곧바로 포살을 행함에
그 아들이 크게 울면서 아버지를 붙드니 함께 포살하였다.
한국 사람 마음에 더욱 분노가 격동케 한 일이 아닌가.
이 몸 하나 죽지 못하였네 이런 마당에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을지언정
내북의 도적들과 살 수 없으며
-(해설) 그렇게 수당과 그의 아들 이충구는 국립대전현충원에 나란히 안장됐습니다.
이곳에 오면 수당의 4대손 이문원 관장의 시간은 100년 전으로 돌아가는데요.
-(해설) 수당의 4대손 이문원 관장은 수당의 삶을 책으로 엮으며 아픈 역사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수당이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나라를 잃고도
죽지 못한 비통함과 절절함이 글자마다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100년 전 수당이 쓴 글을 어떤 의미로 읽어야 할까요.
-(해설) 사람은 집을 만들고 집은 사람을 만들 듯 수당 가문의 정신과 철학이 오래된 집을 채우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수당과 아버지 이충구를 한날한시에 잃은 소년 이승복.
집안의 두 대들보가 무너져 내린 비통함을 간직한 채 그는 어떤 길을 걷게될까요?
이승복의 발자취를 찾으러 온 곳.
독립운동사 자료집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해설)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동시에 잃었던 소년 이승복은
역시 수당 가문의 후손이었습니다.
나라는 일제 식민지가 됐지만 이승복은 신교육을 받고 민족 지도자들과 만나며 독립 의식을 고취하는데요.
1915년 19살에 러시아로 망명.
민족 운동을 시작합니다.
러시아와 만주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가 검거되기도 하는데요.
27살 되던 1921년은 상해 임시정부 운동에 참여합니다.
이동녕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의 주요 요인들과 교류하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치는데요.
이승복이 독립지사들과 폭넓게 교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월봉은 퍽 고운 성품의 소유자로 외유내강한 나의 막역지우였고
조소앙 씨와도 퍽 가깝게 지냈어요.
성재 선생은 임시정부의 독립 자금을 도맡아 댄 분이죠.
조완구 씨는 누구보다 퍽 실력 있는 분이었소.
내가 해외에서 만나 뵌 이로 백범이나 도산 같은 이들이 큰 감명을 준 독립지사였어.
-(해설) 이승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통제 조직원으로 활동했는데요.
이 조직을 통해 임시정부는 국내외를 통치하고 연결하며 민주공화국의 초석을 다질 수 있었습니다.
-(해설)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이승복이 서울 한복판에 등장하는데요.
1923년 1월 12일, 김상옥 열사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에 연루됐기때문입니다.
김상옥에게 거처를 제공한 이승복은 일본 경찰에 연행돼 심한 고초를 겪게 되는데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때 나도 혼이 좀 나기는 했지만 김 열사가 열렬해도 그토록 열렬할 줄은 몰랐죠.
-(해설) 이승복의 또 다른 활동을 확인하러 온 곳.
그는 홍명희의 권유로 시대일보 창간에 함께하며 언론 활동을 시작하는데요.
당시 시대일보 기자였던 김기진 옹은 평주 이승복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신문사 경영이 어렵게 되자 어디서 용하게 돈을 끌어다 낸 사람이평주였어요.
어디선가 돈을 한 보따리 가져와 급료를 거뜬히 해결하는 대단한 수완가가 이승복 상무이사였습니다.
1920년대 일제는 식민 통치를 은폐하기 위해 문화정책을 펼치는데요.
이에 따라 신문사가 연이어 창간되고.
하지만 경영난에 부딪힌 신문사는 이승복을 영입하는데요.
이승복은 언론계의 막후 참모로 활동하며 신석우, 한기학, 안재홍과 더불어
신문사에 기반을 마련한 4인방입니다.
-(해설) 1927년 2월 15일 이곳에서 신간회가 출범합니다.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손잡은 신간회는 최대의 민족 협동 전선입니다.
-(해설) 오로지 민족독립을 목표로 대동단결한 신간회.
이승복은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리고 초대 간사를 맡으며 강령을 작성하는 등
신간회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구함.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해설) 신간회는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걸친 민족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창립 후 4년 4개월 만에 지방지회 150개, 참여 인원 4만 명이 넘는 국내 최대
항일운동단체로 성장하는데요.
일제의 차별과 박해에 대항하고 민족 의사를 대변하며 식민지 상황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했습니다.
-(해설) 신간회 안성지회 회원의 후손을 만났습니다.
-(해설) 정동수를 추모하는 글에서 평주 이승복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말은 적되 실행이 많고 궂은일은 자신이 맡고 공은 타인에게 돌렸으니 평주
이승복 선생과도 같은 성행에 일치.
언론 운동과 신간회 활동으로 가족도 돌보지 못했던 이승복.
일제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됩니다.
일본 경찰은 이승복에게 치안유지법위반죄를 적용하고 또 소행조서을 꾸며 기록할 만큼 낱낱이 파악하며 감시했는데요.
시도 때도 없이 이어지는 모진 고문에도 독립을 향한 열정을 접지 않습니다.
-(해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지키지 못한 죄가 평생 한으로 남은 이승복.
그가 정리한 가장을 펼쳐봅니다.
-(해설) 돌아가신 할아버님의 함자는 남규이시다.
을미년이었다.
목숨을 끊을지언정 머리칼은 자르지 못하겠사옵니다라는 글월을 왕에게 올렸다.
경자년에는 영흥군수 이윤재가 재물을 긁어모아 원성이 잦은 죄를 논핵했다.
할아버지께서 화를 당하실 때 불초의 나이 겨우 열세 살이어서 용모는
어렴풋이 기억에 남을 뿐인데 삼가 문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문장은 탁월하고 지조는 맑고 드높았다고들 한다.
계축년, 불초손 승복이.
피눈물로 삼가 아룀.
-(해설) 수당 가문이 목숨 걸고 바랐던 광복.
그날이 왔습니다.
이승복은 안재홍과 국민당을 창당하고 김구의 한독당과 합당하며 건국의 기틀을 다지는 데 열정을 쏟습니다.
-(해설) 민족의 또 다른 수난.
6.25 전쟁이 발발합니다.
-(해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1월.
함경남도 원산 황토도는 우리 군에게 중요한 보급로였습니다.
수당가의 4대 이장원 소위는 수당 이남규가 부사를 지냈던 영흥의 섬 황토도를 지켰습니다.
그러니까 한심하잖아요.
그러니까 먹을 것도 없고 그러니까 밀국수 그냥.
옛 때는 맷돌로 돌려서 한 거니까 밀가루가 좀 있었던지 그거 해서
그 운전수하고 해서 먹고 네가 어쨌든지 아버지를 잘 모시라고.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던가 봐요, 그래서...
-(해설) 그렇게 아버지와 마지막 인사를 한 이장원 소위는 황토도에서 전사합니다.
-(해설) 비석에 새겨진 이름 이장원.
그리고 그 이름을 가슴에 새긴 동생.
-내가 8살 될 때 서울 가서 아현국민학교 입학할 때 집에서 거기 좀 머니까 우리 형이 나를 업고 갔어.
그런 인정이 많고 그러니까 그 후에 전사 소식 듣고 아버지가 대성통곡을 하고
한 6개월 동안은 매일 통곡하고 술만 자시고 식사는 안 하셨지.
-(해설) 23살.
꽃다운 아들을 가슴에 묻은 이승복.
한평생 독립지사로 살았지만, 아들의 죽음 앞에서는 평범한 아버지였습니다.
이장원 중위는 순국 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됩니다.
그리고 27년이 흐른 뒤 그의 아버지 이승복은 그토록 애달파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곁에 나란히 잠드는데요.
이로써 4대가 현충원에 안장된 국내 유일의 집안 수당 가문.
이렇게 수당 가문은 역사에 기록됐고 역사는 그 의미를 기억합니다.
어이야 어이야 어랑어랑 어이야어이야 디야 어랑어랑 어이야 어이야 디야 어랑어랑 어랑어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