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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스페셜 - 무왕은 왜 익산으로 천도했을까

등록일 : 2024-02-05 16:09:12.0
조회수 : 107
-(해설) 백제 무왕의 생가터로 알려진
익산 마룡지 인근에서 또다시 역사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일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돌을 이용해 만든 저온 저장창고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겁니다.
2개의 창고는 그 규모도 상당히 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지금의 냉장고와 같이 대류현상을 이용한 첨단 시설이었던 거죠.
그 안에서는 참외와 딸기, 들깨와 같은 다양한 식물의 씨앗도 발견이 됐습니다.
이런 시설은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와 부여에서도 확인된 바 있습니다.
때문에 이는 1400년 전 익산이 백제 수도였음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단서인 셈이죠.
-저는 무왕 대에 익산 천도를 단행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서동 생가터로 알려진 바로 이곳에서 확인된 것과 같은 수많은
유적과 유물이 익산 천도를 증언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백제 후기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던 무왕은 왜 이곳 익산으로 왕도를 옮긴 것일까요?
지금부터 그 해답을 찾는 여정을 시작해 볼까 합니다.
-(해설) 한반도 남해안의 중앙에 자리한 섬.
예부터 연안항로의 주요한 길목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가야 이후 삼국 시대에는 신라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곳이죠.
그런데 이곳 남해 남치리의 한 야산에서 뜻밖의 이야기가 세상을 놀라게 합니다.
백제의 전형적인 무덤이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동안 우리가 역사적 사실로
알고 있던 것들에 대한 물음표를 던지게 했죠.
그리고 돌곽무덤 안에서는 그 시기를 특정할 수 있는 단서도 발견이 됐습니다.
관에 부착하는 이 은꽃 장식은 놀랍게도 백제 30대 무왕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익산 미륵사지사탑에서 나온 은꽃 장식과 남해 남치리의 것이 마치 쌍둥이처럼 그 모습이 닮았던 겁니다.
-은화관식이란 머리에 쓰는 관에 부착했던 은으로 만든 꽃 모양 장식인데요.
백제 관등제를 설명해 주는 대표적인 유물 가운데 하나죠.
익산 미륵사지에서 나온 관모 장식이 가야 멸망 이후 줄곧 신라 땅으로
여겨지던 남해 남치리의 것과 그 모양이 일치한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정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무왕이 왜 익산으로 천도했을까라는 질문에 앞서 익산에 남아 있는 도성의 모습을 살펴볼까요?
-(해설) 고대 국가 왕궁터의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익산의 왕궁리유적.
왕궁 북쪽에 자리해 피난성 역할을 했던 오금산성.
완성하는 데만 무려 30년이 넘게 걸린 미륵사지.
그리고 왕궁 인근에 자리했던 왕실 사찰 제석사의 존재.
거기에 서동설화의 주인공인 무왕과 왕비가 잠들어 있는 왕릉원까지.
익산은 도성이 갖춰야 할 모든 필수 요소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이 모든 조건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은 익산이 유일하죠.
그리고 1970년대 일본인 학자가 교토의 한 사찰에서 찾아낸 관세음응험기에는
백제 무왕이 지모밀지 즉 익산으로 천도했다고 뚜렷이 적어 놨습니다.
이 기록에 담긴 불에 탄 제석사의 실체가 발굴을 통해 드러나면서 익산 천도 또한 그 신빙성을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된 거죠.
-그렇다면 왜 무왕은 익산으로 천도를 단행한 것일까요?
최근 행정수도인 세종특별자치시 사례를 보더라도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먼저 백제의 수도 변천사를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해설) 475년 고구려가 한성으로 쳐들어오는데 이 전투에서 백제 개로왕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죠.
혼란 속에서 왕위에 오른 문주왕은 바로 웅진으로 천도를 결정하게 됩니다.
웅진은 북으로 차령산맥과 금강에 둘러싸여 있고 동으로는 계룡산이 막고 있는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이죠.
그런데 웅진 천도 이후 문주왕은 신하였던 좌평 해구에게 피살되고 말죠.
즉위한 지 3년 만에 일어난 귀족 세력의 쿠데타였습니다.
이렇게 약해진 왕권을 바로 세운 것은 백제 25대 무령왕.
521년 갱위강국을 선포하며 백제 주몽의 서막을 열죠.
무령왕의 아들인 성왕은 더 강한 백제를 꿈꾸며 큰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를 단행한 거죠.
즉위한 지 16년 된 해였습니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고치게 되는데 여기에는 어떤 의도가 있었던 걸까요?
-남부여라는 표현이 뭔가 봤더니 백제 왕실의 왕성이었고 또는 그 계보가
결국은 그 고구려와 함께 공통 조상으로 모셨던 동명왕.
부여와의 후손을 자임했던 그 표현을 다시 한번 강조한 것으로 파악이 됩니다.
-저는 성왕이 국호를 남부여라고 한 데에는 고구려와 대결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는 고구려 장수왕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한 성왕의 강력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인 겁니다.
그런데요.
공교롭게도 천도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왕이 바로 장수왕입니다.
-(해설) 고구려의 장수왕이 수도를 국내성으로 평양성으로 옮긴 것은 서기 427년.
산악 지형으로 둘러싸인 국내성에 비해 평양은 대동강 유역의 넓은 평야로,
경제적 기반이 탄탄했고 문화적으로도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또한 육로와 바닷길을 통해 동북아시아의 중심으로 도약이 가능한 곳이었죠.
그런데 장수왕이 평양성을 택한 데에는 숨겨진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랫동안 국내성을 중심으로 힘을 키워온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는데 학계의 의견이 일치하죠.
-(해설) 그렇다면 백제 무왕은 왜 사비를 두고 익산으로 천도를 한것일까요?
먼저 백제왕들의 계보를 살펴봐야겠습니다.
성왕의 아들로 무려 44년 동안 재위를 지켰던 위덕왕 이후 혜왕과 법왕이
차례로 즉위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왕이 등장하죠.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바로 재위 기간입니다.
선대왕들이 모두 1년마다 자리를 내주게 되는데 이는 특별한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해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염원이 담긴 병마용갱.
2000년의 긴 잠에서 깨어난 병마용을 보려는 이들로 이곳은 언제나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천인천색.
제각각 다른 표정과 자세를 취하고 있는 수천의 군인들은 마치 살아 움직일 것만 같습니다.
1974년 첫 삽을 뜬 병마용 발굴은 현재도 진행형인데요.
진시왕의 병마용갱이 자리한 이 도시가 바로 중국의 천년고도인 서안입니다.
중국인들은 시안이라고 부르는 이곳의 옛 이름은 장안.
한 나라의 수도를 지칭하는 대명사 격인 장안은 다들 한 번쯤 들어보셨을 텐데요.
장안의 화제라는 말도 바로 이곳에서 유래했다고 하죠.
또한 동서양을 잇는 고대 실크로드의 시작점이 바로 이 도시였습니다.
이 거대한 조형물이 당시 상단의 모습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는데요.
한마디로 경제와 물류의 중심지가 바로 이곳, 서안이었던 거죠.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이곳 서안 북쪽을 진나라의 수도로 삼았고 한고조
유방은 그 남쪽인 지금의 서안에 새로운 도성을 건설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해설) 서안 인근에 자리한 이 커다란 무덤이 한나라의 건국 조가 잠들어 있는 황제릉입니다.
이 무덤의 주인인 한고조 유방은 일반 평민 출신으로 항우와 패권 경쟁에서
승리하고 황제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죠.
기록에 따르면 한고조의 어머니인 유오가 큰 연못가에서 잠깐 잠든 사이,
천둥이 치고 사방이 어두컴컴해지는데 고룡이 부인의 몸 위에 올라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이가 바로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입니다.
-한고조 유방은 콧날이 높고 이마가 튀어나와 용을 닮았다고 하는데 왕의
얼굴을 뜻하는 용안이 여기에서 유래된 겁니다.
용의 아들로 태어난 한고조 탄생 설화에서 주목할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중국 역사서 가운데 정사로 평가받는 사마천의 사기에 남아있는 기록이라는 거죠.
-(해설) 한고조 탄생 설화와 흡사한 내용이 삼국유사에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서당 설화의 주인공인 백제 무왕의 이야기입니다.
서울 남쪽 연못가에 살던 과부인 어머니가 못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는데 제기와 도랑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죠.
이는 수백 년의 시간 차만 있을 뿐 그 모티브와 서사 구조가 굉장히 일치합니다.
그렇다면 왜 백제 30대 왕인 무왕의 탄생과 관련해 요즘 사람들이 믿기 힘든
이런 이야기를 적어놓은 걸까요?
-(해설) 건국조 끝 탄생 설화의 주인공 백제 무왕.
선대 왕들이 1년마다 교체되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왕위에 올랐죠.
아마도 귀족들 간의 다툼이나 왕권과의 갈등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상황인데요.
용의 아들 탄생 설화를 가진 무왕은 자신의 교향이자 정치적 배경인 익산에
왕궁성을 만들고 천도라는 승부수를 던졌을 겁니다.
-그런데 무왕은 수도였던 사비를 완전히 버리고 새로운 수도인 익산으로 천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여와 익산, 익산과 부여라는 두 개의 도성을 운영한 건데요.
무왕은 사비 도성을 수부라는 이름으로 남겨놓고 익산에 왕궁성을 만들어 새로운 수도로 선포한 거죠.
-(해설) 왕궁리에서 나온 익산 도성의 증거 가운데 글씨나 문양이 새겨진 기와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특히 주목해야 할 게 바로 이겁니다.
흔히 수도를 뜻하는 것으로 알려진 수부라는 글씨가 새겨진 이 기와는 익산
왕궁리와 더불어 부여 관북리 일대에서만 확인되는 특별한 유물입니다.
사비기 왕궁터로 학계가 인정하는 부여 관북리 유적.
그리고 고대 왕궁터가 가장 잘 남아 있는 익산 왕궁리 유적.
수부라는 글자의 숨겨진 비밀은 무엇일까요?
서안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동쪽으로 500km가량 떨어진 낙양을 향합니다.
창밖에는 끝도 없는 평야가 펼쳐집니다.
1시간 30분을 달려 도착한 낙양.
무려 9개나 되는 왕조의 수도였던 중국의 대표적인 역사 문화의 도시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8개 왕조가 제2 수도로 삼았던 곳이죠.
그 역사를 잠깐 살펴보면 수나라는 장안을 수도로 하고 서도라 불렀죠.
그리고 이곳 낙양의 동쪽에 도성을 만들어 동도라고 부르게 되죠.
수나라와 당나라 때 황제들은 서쪽의 도성 장안과 동쪽의 도성인 낙양을
오가며 통치를 하는데 이를 양성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당시 중국 기록에 백제도 동서양성제를 시행하고 있었다고 적어놓은 겁니다.
-중국의 사례를 통해서 보면 부여와 익산, 익산과 부여의 관계가 이해됩니다.
부여가 수도였을 때 익산이 수부가 되고 반대로 익산이 수도가 되면 부여는 수부가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무왕이 천도했을 때 당시 익산이 수도, 부여는 수부였던 겁니다.
-(해설) 그런 내용을 뒷받침해 주는 기록은 삼국사기에도 남아 있습니다.
무왕 31년 사비의 궁궐을 크게 수리했다는 기사죠.
삼국사기에 나오는 궁궐 수리 기사는모두 24건.
대부분 중수궁실, 궁궐을 수리했다고 간략히 적어놨죠.
그런데 궁궐의 이름을 명확하게 써 놓은 것은 무왕 때가 유일합니다.
저자인 김부식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요?
백제가 2개의 도성을 운영했다는 대목에서 그 해답을 떠올릴 수 있죠.
-제가 전주에 살고 있는데 고향인 논산에 시골집이 있다고 가정을 해 볼까요?
전주의 집을 수리할 경우 주변 사람들에게 집 리모델링했다고 말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논산의 집을 수리할 경우 논산이라는 지명이 반드시 들어가야 오해가 없겠죠.
마찬가지로 중수궁실이라고 간략히 썼으면 됐을 텐데 굳이 사비의 궁을
수리했다고 적어놓은 것은 당시 수도가 익산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겁니다.
-(해설) 그런데요, 여기서 왜 익산일까라는 질문을 던져봐야 할 것 같은데요.
무왕의 제위 기간인 7세기 이전부터 익산을 비롯한 전라도 일대는 백제
중앙에서 눈여겨보던 중요한 곳이었죠.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의 뿌리가 된 마한.
그 마한이 시작된 땅이 바로 만경강을 따라 펼쳐진 익산이라는 것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마한은 진한과 변한으로 분화되면서 삼한으로 발전하게 되죠.
근초고왕 때인 4세기 중엽, 백제가 이 마한 땅을 완전히 복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유족과 유물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와는 조금 다르죠.
이 거대한 분구묘는 마한의 존재를 증언하는 대표적인 유적입니다.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수많은 유물은 마한의 존속 시기를 뚜렷이 말해주고 있었죠.
마한인들은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 중엽까지 무려 800년 동안
자신들의 문화를 지켜갔던 겁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커다란 언덕처럼 보이는 이곳은 마한 모로비리국이 남겨 놓은 거대한 고분입니다.
수대에 걸쳐 조성된 이 무덤에서는 마한 전통의 것은 물론 백제의 묘제가 함께 확인이 됐죠.
-안타깝게도 석실 대부분은 도굴로 인해 파괴된 상태였습니다.
다행히도 바로 이 지점에서 온전한 형태의 석실 1개가 발견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석실 내에서 이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마한 모로비리국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던 겁니다.
-(해설) 고창 봉덕리 고분에서 나온 유물 가운데 가장 먼저 살펴볼 것은 바로 이 금동신발입니다.
기하학적 문양은 물론 용과 사람 얼굴을 한 새, 화염 문양과 봉황이 역동적으로
표현된 금속 공예의 백미로 불리죠.
백제 중앙에서 보낸 이 귀한 보물은 무덤 주인이 언제 영면에 들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발의 문양, 그리고 제작 기법, 그리고 같이 출토된 유물의 상황 등을 고려해서
살펴보면 적어도 5세기 후반, 즉 웅진 천도 직후에 제작되어서 부장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해설) 금동신발과 더불어 돌방무덤 안에서 확인된 중국제 청자, 그리고
작은 항아리를 장식으로 붙인 넓은 입을 한 구멍단지와 장식이 있는 큰 칼까지.
이런 유물은 위세품이라고 부르는데 당시 정치적 관계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백제부터 이러한 위세품을 받았다는 점에 있어서는 적어도 백제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해설) 웅진 백제 시기의 것으로 확인된 또다른 금동신발.
익산시 웅포면에 자리한 입점리 고분에서 나온 겁니다.
웅포라는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금강 포구 인근에서 백제식돌방무덤이 확인된 겁니다.
지도를 통해 살펴보면 백제 수도였던 공주와 부여가 금강이라는 큰 물줄기를
따라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후에.
이런 금동신발이 웅진기 초반에 사여 된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익산 지역에 남아 있는 백제 고분 가운데 이곳 입점리 고분은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인 웅진 백제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그 시기인 5세기 후반, 익산 대부분 지역은 마한의 무덤인 분구묘가 주를 이루고 있었죠.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유추해 볼 수 있을까요?
아마도 백제는 이곳 금강 하구를 기반으로 점점 그 세력을 넓혀가지 않을까요?
-(해설) 백제 때 고사부리군으로 불리던 정읍 고부.
옛 고부읍 성토를 발굴하던 과정에서 돌로 만든 백제의 대규모 성곽이 그
모습을 드러내 학계를 놀라게 했죠.
그리고 북문터에서 확인된 뜻밖의 유물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상부, 상항이라고 새겨진 기와.
사비기 수도의 행정 단위로 알려진 5부, 5항와 같은 행정 조직이 정읍 고부에 있었다는 겁니다.
새로운 수도인 사비로 천도를 단행한 성왕.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행정 조직도 개편을 하죠.
수도에는 5부 5항을 두고 지방은 오방성 체제로 운영하게 됩니다.
백제의 동서남북과 중앙에 치서 역할을 하는 거점 성을 만들었던 건데요.
그 가운데 중방성이 정읍 고부의 고사부리성인 겁니다.
-(해설) 그러니까 성왕 때 마한 세력을 포섭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정읍
고부를 택하고 여기에 치소인 중방성을 설치한 겁니다.
이로써 만경강과 영산강을 중심으로 한 마한 땅이 백제 중앙의 직접적인 통치의 대상이 된 거죠.
그렇다면 백제의 남방성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학계에서는 전북 남원의 척문리 산 성일대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인근에서 대규모 백제 고분이 확인된 것뿐만 아니라 백제의 문화관식까지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이는 백제 중앙에서 파견한 고위 관료가 남원에 상주했을 가능성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백제는 지금의 광역시와 같은 오방 가운데 남방성을 남원에 설치한 것일까요?
그것은 백제에 있어 마한과 더불어 중요한 세력이 바로 가야였기 때문입니다.
이 가야 세력을 관리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가 바로 남원이었을 겁니다.
-(해설) 남원에서 가야의 존재가 최초로 확인된 것은 지난 1982년.
이곳 월산리 고분군에서 가야의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부터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야 땅에서는 한 번도 확인 된적이 없는 중국제 청자, 닭의 머리
모양을 한 계수호가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해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원수로 뒤바뀐 6세기 한반도.
한강 유역을 둘러싼 삼국의 각축전이 벌어지는데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성원이 전사하면서 백제는 그 동력을 상실하고 맙니다.
그리고 8년 뒤 백제의 영향력 아래 있던 가야 땅마저 신라의 차지가 되고 말죠.
그런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무왕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영면에 든 백제 30대 무왕.
발굴 조사 결과 무왕릉도 중국 진시황과 마찬가지로 생전에 미리 만들어 놓은 준비된 무덤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근에는 마찬가지로 조성된 왕비릉이 있습니다.
그전에는 쌍릉으로 불리다가 최근 무왕릉과 왕비릉이라는 이름을 되찾았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자신이 나고 자란 익산으로 천도를 단행하고 원대한 꿈을 꾸었던 무왕.
용의 아들 탄생 설화의 주인공인 그가 새로운 왕도로 왜 익산을 선택했는지
보여주는 수많은 단서 가운데 하나는 지금 제가 서 있는 이 땅이 마한이
시작된 땅, 바로 마한의 본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해설) 성왕이 전사한 이후 백제의 영역을 표시한 지도를 다시 살펴볼까요?
만경강과 영산강을 중심으로 한 마한 세력권이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백제 땅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위세품을 통한 간접 지배가 이루어지던 곳이죠.
백제가 정읍 고부에 중방성을 설치한 이유가 바로 마한 세력을 포섭하기 위한
거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시청자 여러분은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그리고 전북 익산은 마한이 시작된 역사적 의미를 지닌 도시죠.
그렇다면 무왕이 익산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던 것은 마한 세력을 적극적으로
품기 위한, 즉 국민 통합을 위한 승부수가 아니었을까요?
-(해설) 그림처럼 펼쳐진 드넓은 대지에 자리한 익산 왕궁성.
바로 인근에는 호남의 3대 수리 시설로 알려진 황등제가 있었습니다.
기원전 3세기에 만들어진 황등제는 지금은 논으로 그 모습을 달리해 우리의 먹을거리를 책임지고 있죠.
익산도성을 지도에서 살펴보면 생명의 젖줄이 돼 주는 만경강과 금강으로 연결돼 있습니다.
때문에 교통이나 물류에 있어서도 유리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일대는 비옥한 농경지를 끼고 있어요.
농사가 잘되는 곳이고 교통의 요충지가 되고 또 신라 지구로 진출하는 데
필요한 그런 거점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 익산 땅이 되는 것입니다.
-(해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산 천도를 위해서는 귀족 세력뿐만 아니라 민심을
얻어야 하는 과제가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무왕이 심혈을 기울인 것은 대규모 사찰을 완공하는 일이었죠.
그것은 결국 백제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도전이었을 겁니다.
-(해설) 42년 동안 왕위를 지킨 백제 30대 무왕.
그는 백제 옛 영토를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정복 군주였습니다.
맞붙어야 하는 상대는 오랜 숙적인 신라였죠.
백제 무왕의 치열한 대신라전의 성과는 그의 시호인 무왕이라는 두 글자에 뚜렷이 남아있습니다.
백제와 신라의 치열했던 전투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 남아 있는 남해 남치리.
1000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백제 고분과 그 안에서 나온 관모 장식이 무왕의
시대를 증언하고 있는 겁니다.
-남치리 고분을 조사하면서
-(해설) 남해 남치리 백제 고분군의
발견은 어떤 이들에게는 보고도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일 겁니다.
반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감춰졌던 사실을 찾아내는 흥미로운 도전이겠죠.
-(해설) 무왕의 원대한 꿈이 깃든 익산 도성.
1400년 전 역사를 알아내기 위한 계속된 도전은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는데요.
사다리 없이는 오르내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깊이 파들어간 이곳의 정체는 저온 저장 창고였습니다.
바닥은 습기를 막기 위해 점토로 다지고 벽면은 돌을 가지런히 쌓아 올렸죠.
가장 눈여겨볼 것은 지면에 만들어 놓은 세 개의 통기구입니다.
찬 공기가 바닥에 깔리고 따뜻한 공기가 위로 올라가는 대류 현상을 이용해
냉장고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거죠.
그리고 함께 발견된 백제시대 유물은 이 시설의 용도를 더욱 뚜렷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해설) 고조선 준왕이 마한을 세운 역사를 간직한 익산.
예부터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이자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땅이었습니다.
용의 아들 탄생 설화의 주인공 무왕은 원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이 나고
자란 이곳 익산으로 천도를 단행했다고 합니다.
묻혀있던 진실을 찾기 위한 계속된 노력은 이제 익산 백제를 부정할 수 없게 만들어 놨습니다.
1974년 미륵사 발굴을 시작으로 백제의 가장 화려했던 왕궁터와
익산 천도 기록을 증언하는 제석사지.
그리고 백제 30대 무왕과 왕비릉의 실체가 그 모습을 명확히 드러내기까지
무려 5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무왕의 익산 천도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글과 논문이 이제 제법 많이 보이는데요.
반세기 만에 얻어낸 장족의 발전입니다.
백제 무왕은 왜 익산으로 천도를 했을까요?
그 해답은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계신 여러분이 이제 더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중국 한나라를 건국한 한고조 유방과
똑같은 서사 구조를 가진 용의 아들 탄생 화의 주인공이 바로 무왕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 숨겨진 비밀은 바로 무왕이 익산 천도를 통해 새로운
백제를 건설하려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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