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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스페셜 - 이두황, 민족 학살로 출세 가도를 달리다. 양호우선봉일기
등록일 : 2024-08-19 14:40:55.0
조회수 : 253
-(해설) 총으로 쏘아 죽인 자가 40명.
찾아내어 체포한 자가 100여 명이었다.
난리를 피해 달아나는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이 사방으로 달아나 들을 뒤덮고 계곡을 메웠다.
-소위 동학도가 많은 마을은 거의 불바다가 돼요.
주민들 모아놓고 그 앞에서 목을 잘라버립니다.
그런데 이 강도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세져요.
-(해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려는 동학농민군을 무참히 탄압한 남자.
그는 바로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 이두황이었습니다.
-이두황 뒤에는 일본이 버티고 있으니까 그런 무자비한 행동을 했는지 모르죠.
-(해설) 동학농민군 토벌대장 이두황.
그 잔인한 행적은 그가 쓴 동학농민군 토벌대 일기, 양호우선봉 일기에 담겨 있습니다.
-1894년 9월, 일제가 조선을 삼키려는 야욕을 드러내자
동학농민군은 2차 봉기를 통해 항일 투쟁을 벌입니다.
조선 관군과 일본군의 탄압 역시 시작되는데요.
그 중심에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한 인물, 바로 이두황입니다.
이두황은 토벌대장으로 임명된 직후부터 일본군과 합세해
동학농민군을 학살하고 그 행적을 일지로 남깁니다.
오늘 더 1894에서는 잔혹했던 피해 기록, 양호우선봉 일기를 통해
처절하게 짓밟힌 동학농민군의 비극에 한걸음 더 다가갑니다.
-(해설) 잔혹한 기록은 이두황이 토벌대장으로 임명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왕명을 받은 이두황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동학농민군 토벌 작전에 나섭니다.
무자비하게 동학농민을 진압하며 능력을 인정받은 이두황.
그는 일생을 군인으로 살아 온 인물이었습니다.
-이두황은 서울에서 출생하죠.
아주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을 합니다.
그래서 1882년, 무과 과거에 급제하게 되죠.
장교로 출발한 겁니다.
-(해설) 평범한 군인이었던 이두황.
그가 일본에 자신의 존재를 알린 건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이 발발한 1894년이었습니다.
-이두황이 출세욕이 상당히 강했던 것 같아요.
청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일본 사령관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자기도 청일전쟁에 참여하게끔 해달라.
그래서 일본인 군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잖아요.
그래서 수용을 해 줍니다.
주로 했던 역할은 통역이나 정보 입수해서 건네주는 그 역할을 했는데
이두황은 궂은일 청국군을 땅에 묻어주는 그런 그 역할까지.
-(해설) 청일 전쟁 때 일본군 앞잡이 노릇을 한 이두황은 공적을 인정받아 동학농민군 토벌 대장이 됩니다.
조선의 군인이었던 그가 친일 군인으로 변신에 성공한 배경에는 바로 일본이 있었습니다.
1894년 음력 9월.
항일 투쟁을 위해 2차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합니다.
조선을 지배하려 한 일본은 동학농민군을 위험한 세력으로 판단하고 본격적인 토벌에 나섭니다.
당시 일본 총감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군 후비 보병 19대대를 투입하고 동학농민군을 섬멸하는 작전을 펼치는데요.
이두황의 조선군 부대 역시 그들의 지휘권 아래 놓입니다.
-(해설) 일본군 중위 사라키 세이타로와 소위 미야모노 다케타로가 내일 아침에 출발한다고 하니
그들을 맞이해 대접하고 힘을 합하여 기필코 큰 공을 세워 아뢰는 것이 좋겠다.
-(해설) 일본군과 합세한 이두황.
그는 먼저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진압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많은 동학농민군을 학살하고 토벌 임무에 성공합니다.
이두황이 쓴 양호우선봉일기에는 당시 상황을 보고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해설) 동학농민군 강동희와 이희영은 함께 집강을 맡은 자들이었습니다.
여관 앞에서 총포로 쏘아 죽이고 마을 집들은 모두 불을 질러 동학농민군의 소굴을 태워버렸습니다.
동학농민군 수십 명은 우리 관군의 행진을 보고 산으로 달아났습니다.
수색하여 3명을 찾아 죽이고 그들이 생활하던 초막 400여 곳과 민가 200여 호를 전부 불살랐습니다.
-이두황이 동학농민군을 말살한 사례는 이루 말할 수가 없죠.
소위 동학도가 많은 마을은 많은 사람이 처형됐을 뿐만 아니라 거의 불바다가 돼요.
-(해설) 보은군 장내리를 초토화시킨 후 이두황이 향한 곳.
천안 세성산이었습니다.
세성산은 교통로와 보루가 있어 전략적 군사적 요충지였는데요.
이곳에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의 무장 투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이두황에게도 불안 요소였는데요.
-(해설) 서울 통로와 가까워 선봉군의 앞길에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먼저 서울 가까이에 있는 적을 쳐부수어 우리 군사의 사기를 북돋은 후에 계속 남으로 내려갈 것입니다.
-(해설) 서울과 가까이에 있는 적을 먼저 격파하기 위해 1894년 음력 10월 21일.
천안에 도착한 이두황은 동학농민군을 향해 기습 공격을 퍼붓습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동학농민군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집니다.
-(해설) 패배해 달아나는 동학농민군을 추격하였습니다.
수십 리를 뒤쫓으면서 더러는 쏘아 죽이고 포로로 잡아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동학농민군이 많게는 한 300에서 400명 정도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투 과정에서 죽은 동학농민군보다는 세성산 전투 이후에 주변 일대 마을을 샅샅이 뒤져요.
그래서 많은 동학농민군을 체포해서 바로 처형하게 되죠.
이것이 대규모 첫 전투였습니다.
-(해설) 정부군과 동학농민군 사이에 벌어진 2차 봉기 최초의 대규모 전투.
세성산 전투의 패배로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희생됩니다.
-그 이후로 계속 동학농민군이 전라도로 후퇴하고 후퇴하면서 한 모든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패배하죠.
내몰린 거죠.
이것이 일본군의 어떤 전략이기도 했고.
전라도 사람 다루듯 동학농민군을 몰아서 토끼 사냥하듯이 싹쓸이 하는 것이
일본군의 처음부터 전략이었습니다.
-(해설) 장흥 석대들의 너른 들판.
동학농민군은 이곳을 최후의 격전지로 삼습니다.
1894년 음력 12월 15일, 석대들에 총성이 울려 퍼집니다.
일본군과 맞붙은 3만여 동학농민군.
빈약한 무기로 전투에 나선 그들은 일본군의 신식 무기에 무참히 쓰러져갑니다.
-숫자로 따지면 동학농민군이 절대적으로 많았죠.
그런데 어떤 무기와 그다음에 심리적인 사기 면에서는 훨씬 떨어져 있는 상태였죠.
음력으로 12월 15일이니까 한겨울이에요.
그러니 어떤 상황이었겠어요.
처참했죠.
제대로 먹지도 못 하고 제대로 입지도 못 하고 날씨는 춥고.
석대 전투 이후에 일본군은 나주로 돌아갔고 마지막 뒷정리를 한 것은 이두황 부대입니다.
잔여 동학농민군을 수색해서 처형하고 무자비한 학살이 이루어져나갔죠.
-5명을 이날에 쏘아죽였습니다.
그중 1명은 목을 베어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주고 머리를 나무 상자에 넣어
장교에게 보내어 바치게 했습니다.
동학농민군 50여 명을 잡아 두목 3명은 목을 베었고 나머지는 쏘아죽였으며
시신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거로 얻은 게 있을까요?
-일본군의 신임이죠.
일본군 편에 서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 데 1등 공신을 했기 때문에
그 결과 그다음 해에 훈련대대장을 맡았잖아요.
이두황 입장에서는 성공을 한 거죠.
-(해설) 장흥공설공원묘지 4묘역.
비석 하나 제대로 세우지 못한 이름 없는 묘들이 가득합니다.
바로 장흥 일대에서 희생된 1700여 명의 동학농민군 유골이 이곳에 잠들어 있습니다.
수많은 동학농민군을 학살하며 자신의 야욕을 실현시켜나간 이두황.
광기로 치닫는 그와 일본군의 학살에 동학농민혁명은 사실상 막을 내립니다.
이두황의 동학농민군 토벌 일기인 양호우선봉일기 역시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1895년 음력 2월 18일에 멈춥니다.
-장흥 석대들 적투 이후 이두황은 살인과 약탈을 일삼으며 동학농민군을 찾아내 처형합니다.
그 잔악함은 일본군까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하죠.
이두황은 그 일로 오히려 일본의 신임을 얻게 됩니다.
이후 이두황은 본격적인 친일의 길에 들어서며 더 큰 만행을 저지릅니다.
-(해설)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 자객들이 기습적으로 경복궁에 들이닥칩니다.
그들은 건청궁으로 들어가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당시 일본 자객이 왕비 처소에 진입하는 데 걸린 시간은 30분.
시해 사건에 가담한 내부자들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그들 중 한 명이 바로 이두황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명성황후를 살해할 때 이두황은 그 길잡이를 했다고 합니다.
당시에 조선의 정비, 왕의 부인이 일본군들을 그리고 거기에 빌붙은 조선인들에 의해서
살해됐다는 것이 전국적으로 알려질 거 아닙니까?
이들을 참형에 처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어요.
그러다 보니까 아들 이진백과 더불어서 일본으로 변복을 하고 부산항에서 밀항을 합니다.
을미사변으로 망명한 자들을 조선으로 넘기라고 조정에서는 계속 요청했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일본에서는 이것은 우리 주권 권한이다.
이러면서 이걸 거부했던 것이죠.
그렇다 보니까 이두황은 일본에서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었고 오히려 이두황은 일본에 가서
노름을, 도박을 좋아하고 여색을 탐하고 그다음에 술 먹고 흥청망청하는 이런 행태를 보였다고 그래요.
-(해설) 1907년 이두황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강제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킨 겁니다.
-1907년에 왕이 고종에서 순종으로 바뀌잖아요.
이토가 압력을 집어넣어서 민비 시해 사건에 관련된 인물을, 대사면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1907년 하반기에 이두황이 일본에서 서울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돌아오자, 특별 채용을 해서 전라북도 관찰사로 임명을 하잖아요, 1908년에.
전북이 어떤 곳이에요?
이두황이 동학농민군을 토벌했던 핵심적인 지역이잖아.
그곳에 관찰사로 임명한 겁니다.
-(해설)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를 업은 이두황.
조선에 돌아온 후에도 적극적으로 친일 행각을 이어갑니다.
1909년 일본군은 일본에 대항한 호남 지역 의병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펼치는데요.
이두황도 작전에 합류해 의병을 초토화하는 데 앞장섭니다.
-남한 대토벌이라고 하는 한마디로 호남 의병을 싹쓸이하는 것들을 찾고 있었어요.
전라 관찰사로서 의병의 활동 지금 현재 처치 상황 그다음에 얘들의 움직임 이런 것들을 계속 보고합니다.
정미의병이 처참하게 붕괴되면서 한일 병합이 오고 실제로 이두황은 태평성대죠.
자기가 좋아하는 일본에게 병합이 됐고 그러니까 태평성대가 됩니다.
조선토지조사사업 위원장으로서 여기 전라북도에 있는 땅들을 일본이 잠식하는 데
모종의 역할들을 한다거나 이런 식으로 하면서 그냥 친일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게 1916년 사후까지 이렇게 가게 되는 거죠.
-(해설) 이두황의 전라북도 도장관으로 재적하며 말년을 보낸 전주.
이곳 기린봉 명당터에 이두황의 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친일파답게 일본식으로 조성된 묘지.
묘명은 초대 조선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비문은 친일파들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제 그 무덤은 초라하게 자리하고 있지만 여전히 청산해야 할 이두황의 친일 잔재는 남아 있습니다.
기린봉에 자리한 이두황의 묘 주변으로 펼쳐진 4만 282제곱미터에 달하는 넓은 임야.
친일파 이두황의 재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가치만 수십억 원에 달하는데요.
여전히 국고로 환수되지 못한 채 이두황의 후손들이 상속받아 공동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두황이 1만 평이 넘는 땅에 편안히 누워 있잖아요.
아직도 그 땅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 후손들이.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두황에 대해서 우리가 사후 100년간이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올 3월에 친일파 발굴 및 친일 잔재 청산에 관한 지원 조례가 도의회를 통과했어요.
이런 조례 도입이 만들어진 상황이기 때문에 이두황 땅 찾기는
그 어떤 일보다도 전라북도 지자체가 시급히 서둘러야 한다.
-(해설) 지난 2016년 전주시 기린봉 입구에 친일파 이두황의 단죄비가 세워졌습니다.
이두황이 죽은 지 100년 만에 처음으로 이루어진 단죄.
하지만 그의 죄를 묻는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려는 동학농민군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이두황.
그의 잔혹한 행적은 양호 우선봉 일기 속 기록으로 남아 친일파 이두황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금 이곳은 이두황의 묘입니다.
그는 나라를 지키려 했던 동학농민군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그 행적을 양호 우선봉 일기에 남겼습니다.
이후 을미사변에 가담하고 죽는 순간까지도 일본의 편에 섰던 민족의 반역자였습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살았던 이두황.
그가 떠난 지도 108년이 다 되어 갑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그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습니다.
동학농민군을 탄압하고 친일을 일삼았던 이두황.
그의 이야기는 단지 과거사가 아니라 오늘의 문제이며
반드시 청산해야 할 일제의 잔재임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해설) 농민군 하나가 들어오면 하나를 베고 둘이 들어오면 둘을 베었다.
그렇게 동학농민군 16인의 목을 베는 것을 끝냈다.
문석봉 의산유고 중.
-(해설) 우금치전투 이후 대대적인 동학농민군 토벌이 이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과 민보군은 잔인하게 동학농민군을 학살합니다.
1894년 겨울.
토벌대를 피해 대둔산으로 올라간 동학농민군.
그들은 민보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최후의 항전을 벌입니다.
-글자 그대로 엄동설한이죠.
1년 중에 가장 추운 시기에 그런 엄동설한을 그 절벽 꼭대기에서 견뎌낸다고 하는 건.
-(해설)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기록물.
토벌대를 이끈 문석봉의 문집 의산유고입니다.
대둔산 최후의 항쟁과 그날 이후 자행된 동학농민군 토벌 상황이 자세히 기록돼 있는데요.
그 기록을 따라 잔혹했던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시간을 되짚어봅니다.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의산유고를 쓴 문석봉이 묻혀 있는 곳입니다.
동학농민군 토벌대의 대장이었지만 1993년 독립유공자가 된 문석봉.
그 사연은 그의 생을 담은 묘지 비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뚜렷하게 새겨진 두 개의 직책.
동학농민군 토벌대 대장 양호소모사.
그리고 을미의병 의병장입니다.
-민보군으로 활동을 했다가 충청도 일대 농민군 진압의 공로가 인정돼서 공주병영의 영장이 됐어요.
바로 그다음 해에 이제 일본군의 경복궁 침략과 명성황후 살해 사건.
이런 걸 경험하면서 반일 항쟁의 의병을 모읍니다.
을미의병 의병장으로 독립유공자로 지정이 됐습니다.
-(해설) 1893년 무과에 합격한 문석봉.
2차 동학농민혁명이 한창이던 1894년 음력 11월.
양호소모사로 임명되는데요.
그의 임무는 동학농민군 토벌이었습니다.
충청도 일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대둔산 항전 이후 남아 있던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면서 큰 공을 세운 문석봉.
당시 그는 자신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국립중앙도서관.
이곳에서 문석봉의 기록이 담긴 의산유고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문집 속에 문석봉의 활동 가운데 동학농민혁명 대둔산 농민군을 토벌한 기록이 들어 있습니다.
-(해설) 1894년 음력 11월.
동학농민군이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이후 대둔산이 항전의 격전지로 떠오릅니다.
남쪽으로 퇴각하던 동학농민군.
그리고 충남 진산과 연산, 전북 고산 등지에 동학농민군이
끝까지 항쟁하기 위해 대둔산으로 찾아 들었기 때문이죠.
-대둔산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들어간 것은 아니라고 봐요.
적어도 그 지형을 상세하게 잘 아는 사람이니까 거기를 들어갈 수 있다고 보고
고산, 연산, 진산 사람들 외에는 알기 어렵죠.
안전하게 숨어서 항전을 계속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라고 하면 그 지역 사람들은
대둔산 절벽 위를 생각했을 것 같아요.
-(해설) 동학농민군은 대둔산 미륵바위 정상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마지막 항쟁을 준비합니다.
모여든 동학농민군의 수는 서른 남짓.
어린아이와 임산부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지난 3월 13일,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 직원들과 더 1894 제작진이 대둔산에 모였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최후의 항전지에 오르기 위해서입니다.
동학농민군의 피로 얼룩진 대둔산 항전지를 처음으로 찾아낸 것은 신순철 이사장이었습니다.
-이규만이라고 하는 할아버지가 계셨어요.
그 할아버지는 원래 대둔산 중간에 올라가면 휴게소가 몇 개가 있죠?
그 매점 하나를 운영하고 계신 분이었어요.
이제 그분하고 여러 차례 대화를 하면서 쭉 들어보고 동학농민혁명 이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고
사람이 많이 죽었다고 하는데 그게 저기다.
그래서 우리가 나무하러 갈 때도 어려서 거기는 절대 어른들이 올라가지 말라고 했다.
-(해설) 130년 전 동학농민군의 자취를 따라 산행에 나섭니다.
미륵바위 정상으로 가는 길은 평소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험난한 산길을 헤치며 한참을 올라야 하는 탓에 금세 숨이 차고 다리가 무거워집니다.
-여기, 여기 지금 거의 그래서...
-(해설) 1894년 겨울, 동학농민군을 쫓던 토벌대장 문석봉도 대둔산에 올랐습니다.
문석봉은 자신이 경험한 대둔산의 험한 산새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해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오르는 것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단 한 명만 있다면 방어할 수 있고 1만 명이 있어도 공격하지 못하는 곳입니다.
-(해설) 신식 무기로 무장한 문석봉과 토벌 대원들은 결국 대둔산의
험준한 산세를 넘지 못하고 헛총질만 하다 물러납니다.
-(해설) 산 위로 동학군의 바위 소굴을 쳐다보니 새도 넘어가기 힘든 길이라 할 만합니다.
열 걸음을 가면 아홉 번 넘어졌습니다.
겨우 산꼭대기에 도착하여 연이어 서양 총을 쏘는 것 외에 달리할 수 있는 계책이 없었습니다.
-(해설) 문석봉의 부대가 총을 발사했던 장소로 향합니다.
-문헌 기록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관군이 농민군 주둔지에
가장 근접하게 접근할 수 있는 장소가 이 장소입니다.
저 소나무 밑에 좌우로 돌무덤이 보이는데 저 돌무덤을 육안으로 보고 저기가 유적지가 아닐까, 최초로.
-왜 돌무더기인데 유적지라고...
-여기 모두가 자연석인데 인공을 가한 흔적이니까.
다른 어디에도 저렇게 돌을 높게 쌓아놓은 데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왜, 누가 왜 돌 쌓았을까.
올라가 보면 이제 확인이 되는 거죠.
-(해설) 절벽 쪽으로 마주 서니 동학농민군의 근거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우리는 여기 지금 사격 준비를 하고 있다.
다 보이네, 다 보여.
-(해설) 마침내 동학농민군의 근거지였던 미륵 바위 정상으로 향합니다.
깎아지른 절벽을 오르는 유일한 방법.
바로 사다리를 이용하는 건데요.
힘들게 올라선 대둔산 최후의 항전지.
130년 전 머물렀던 동학농민군의 흔적을 여전히 찾아볼 수 있는데요.
-여기 지금도 남아있는데 기와 파편들이 있고요.
그다음에 옹기 파견은 굉장히 많아요.
겨울이니까, 물을 보관해야 하니까 옹기가 필요했을 거고 그다음에 여기 노출되어 있는 돌들은
집터인데 위에 어떤 집이 있었는지는 이 바닥을 자세히 발굴을 해 보면
어떤 집을 있었을지 조금 짐작은 할 수 있을 거예요.
저 돌의 목적은 공격용이에요.
그래서 끝 쪽에, 유적지 끝 쪽에 쌓아놨고 여기 아래도 쌓아놨고.
-(해설) 관군도 공격하기 힘들 만큼 높은 절벽에 위치한 동학농민군의 근거지.
한겨울 이곳에서 서른 남짓의 동학농민군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걸까요?
-글자 그대로 엄동설한이죠.
1년 중에 가장 추운 시기에 그런 엄동설한을 그 절벽 꼭대기에서 견뎌낸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혹한이기 때문에 그런 식량이나 물을 어떻게 옮겨 왔을 건지.
이런 게 굉장히 중요하죠.
그래서 나는 그거를 뒤에 염정골을 통해서 몰래 지원받았을 거라고 봐요.
-(해설) 대둔산 능선으로 이어진 충남 금산군 진산면 염정동.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활동했던 지역으로 대둔산에 머물던 농학농민군들은 이곳을 통해 물자를 조달한 걸로 전해집니다.
물은 샘물을 이용한 걸로 보입니다.
대둔산에 있는 오래된 절터.
동학농민군은 이곳에 있는 샘에서 물을 길어 마시며 항쟁에 나섰습니다.
-여기가 지금 대둔산 항전지하고 한 20분에서 30분 정도 거리가 되는데 거기 대둔산 항전지에는
식수로 사용할 만한 것이 없는데 아마 여기 식수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여기가 원래 절터가 있었는데 절이 없어진 것은 오래된 것 같고 그러나 이 식수가 있었기 때문에
이 식수를 농민군들이 충분히 활용했을 것이고 물이 생각보다 깨끗해요.
지금도 이게 잘 조절하면 물이 충분히 지금도 맑은 물이 나오는 거 보니까.
-(해설) 환경은 열악했지만 천혜의 요새였던 대둔산.
관군과 민보군이 동학농민군을 향해 수 차례 공격을 퍼붓지만 번번히 실패로 끝납니다.
-(해설) 공주의 군대가 16일 전에 와서 3일 동안 공격했지만 함락시킬 수 없어 공주로 되돌아갔다.
또 2, 3일 전부터 전주에 군사가 와서 공격하고 있다.
-(해설) 하지만 정세가 급변한 건 일본군이 개입하면서부터.
대둔산의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에게 꽤나 위협적인 존재였는데요.
인근 동학농민군과 결합해 세력을 키울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대둔산 진지가 그 일대의 농민군의 희망이고 사기니까.
농민군은 철저하게 이 불씨를 꺼트리지 않아야 하고 광군이랑 일본군 입장에서는 이거를 어떻게든 섬멸해야 하니까.
-(해설) 1895년 음력 1월 21일.
일본의 동학농민군 진압 부대는 대둔산의 동학농민군을 모조리 죽여 없애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대둔산 근거지로 출병한 일본군.
먼발치에서 공격했던 조선 광군과 달리 동학농민군의 후방을 공격하는 전략을 세웁니다.
일부 대원들이 정면에서 발포를 계속하며 동학농민군의 시선을 빼앗는 사이
또 다른 대원들이 절벽으로 기어 올라가 기습 공격을 퍼부은 겁니다.
대둔산 항전지 아래 일본군이 올랐던 절벽이 있습니다.
-(해설) 사람 사다리를 만들어서 한 사람씩 올라가게 했으며 15분간을 소비해서 겨우 전 분대원을 등반시켰다.
그런데 적은 오직 산이 험한 것만 믿고 배후에 대해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으며
계속 전면의 관군 머리 위에만 맹렬한 사격을 하였다.
우리 일본군은 전부 올라와 두 차례 일제 사격을 가한 다음 그 불의를 틈타 소리를 지르며 돌격하였다.
적의 소굴에 28, 9세쯤 되는 임신한 부인이 있었는데 총알에 맞아 죽었다.
접주 김석순은 한 살쯤 되는 여자아이를 안고 천 길이나 되는 계곡으로 뛰어들다
암석에 부딪혀 박살이나 즉사했다.
그 참상을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여기가 그 유적지 뒤편인데 이 정도 위치에, 이 정도 위치에 탄피가 육안으로 볼 수 있게 노출돼 있었어요.
그런데 그 탄피가 19세기 한국에서 만든 탄피로는 유일하게, 유일하다는 게 확인이 됐어요.
-(해설)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퍼붓는 총탄에 쓰러져 간 대둔산의 동학농민군.
3개월의 항전은 그렇게 끝을 맺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마지막에 남아있던 사람이 한 25, 6명.
대부분이 희생이 됐고 12살 난 아이 하나가 생존해서 여기에 누가 있었는지를 알려줘서 그게 기록에 남아 있어요.
-(해설) 그들의 혁명이 끝나는 데 걸린 시간은 오후 1시 40분에서 2시.
고작 20분이었습니다.
-(해설) 오후 2시 적의 소굴을 모두 함락시키고 그 집도 불태웠다.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하고 산을 내려왔다.
이때가 오후 3시였다.
-(해설) 그런데 일본군과 관군의 막강한 습격에도 빠져나간 동학농민군이 있었습니다.
대둔산 항전을 이끌었던 최공우.
그는 충남 금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접주였습니다.
토벌대장 문석봉은 최공우가 살아있다는 걸 확인한 뒤 그를 없애기 위해 뒤를 쫓습니다.
-(해설) 24일 관군과 일본 군사들이 도착하여 함께 산 위에 적들의 바위 소굴을 공격하였다.
많은 동학군을 죽였지만 모두 최공우를 보지 못하였다.
산에 뒤편을 따라 내려가서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곧바로 그들이 있는 곳으로 따라가서 죽이려 하였다.
-(해설) 최공우가 찾아든 곳은 대둔산 항전을 지원하던 염정동이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수백 명의 동학농민군을 모아 다시 한번 항쟁을 도모합니다.
하지만 최공우의 계획을 눈치챈 문석봉.
그 역시 병력을 이끌고 염정동으로 향합니다.
문석봉은 동학농민군이 잠든 틈을 타 집을 포위하고 기습 공격을 퍼붓습니다.
속수무책으로 당한 동학농민군.
수많은 사람이 사살당하고 체포됩니다.
-농민군 하나가 들어오면 하나를 베고.
둘이 들어오면 둘을 베었다.
남은 무리들을 모두 포박하였으며.
투항한 자들은 모두 400여 명이었다.
-(해설) 문석봉의 대대적인 토벌로 염정동 일대의 동학농민군이 모두 섬멸되면서
대둔산에서 이어진 항쟁의 불씨는 꺼지고 맙니다.
1894년 부정부패로부터 민중의 삶을 지키고.
일본군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려고 한 동학농민군.
대둔산엔 못다 이룬 혁명의 꿈과 항전의 애환이 잠들어있습니다.
그들이 끝까지 항전하다 목숨을 잃은 미륵바위 정상에서 동학농민군의 넋을 위로하는 제의가 펼쳐졌습니다.
-같이 묵념하겠습니다.
-(해설) 나라를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쓰러져간 목숨들.
하지만 그들의 숭고한 정신은 불씨가 되어 의병 항쟁으로.
독립운동으로, 그리고 민중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 목적지에 오니까 정말 이런 곳에서 산이 험하니까 여기서 숨어서 은거하기에는
좋은 장소다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여기서 어떻게 생존했을까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아녀자도 있고 아기도 있었잖아요.
참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동학농민군이 살려고 온 곳이니까 아무래도 험한 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이 평상시에 오르내릴 수 없는 곳으로 밀려서 밀려서 들어왔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 계셨던 분들의 심정을 한번 그 자리에서 느껴보자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올라왔던 심정.
또 여기에서 자기들 공격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심정.
그런 것들을 직접 그 자리에서 생각하면 좀 남다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이 작은 공간에서 그리고 이렇게 높은 공간에서 그분들이 그것도 한겨울에
여기서 3개월 동안 견뎠다는 자체만으로도 되게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함께 잘 살아가는 세상.
그런 세상의 염원이, 또 그런 신념이 이 자리에서 그런 고초를 겪어내게 하지 않았을까.
-(해설) 한겨울 1000개의 낭떠러지 위에서 3개월 동안 항전을 이어간 동학농민군.
그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처절한 삶을 선택했던 걸까요.
쏟아지는 총성에 두려움이 엄습하고 추위와 배고픔에 힘들었어도 동학농민군이 대둔산에서 보낸 3개월은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왜쇄와 권력의 억압 없이 자유롭고 모든 사람이 평등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요.
동학농민군의 애환과 희망이 깃든 대둔산.
그곳에서 그들이 그토록 바랐던 세상을 그려봅니다.
찾아내어 체포한 자가 100여 명이었다.
난리를 피해 달아나는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이 사방으로 달아나 들을 뒤덮고 계곡을 메웠다.
-소위 동학도가 많은 마을은 거의 불바다가 돼요.
주민들 모아놓고 그 앞에서 목을 잘라버립니다.
그런데 이 강도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세져요.
-(해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려는 동학농민군을 무참히 탄압한 남자.
그는 바로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 이두황이었습니다.
-이두황 뒤에는 일본이 버티고 있으니까 그런 무자비한 행동을 했는지 모르죠.
-(해설) 동학농민군 토벌대장 이두황.
그 잔인한 행적은 그가 쓴 동학농민군 토벌대 일기, 양호우선봉 일기에 담겨 있습니다.
-1894년 9월, 일제가 조선을 삼키려는 야욕을 드러내자
동학농민군은 2차 봉기를 통해 항일 투쟁을 벌입니다.
조선 관군과 일본군의 탄압 역시 시작되는데요.
그 중심에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한 인물, 바로 이두황입니다.
이두황은 토벌대장으로 임명된 직후부터 일본군과 합세해
동학농민군을 학살하고 그 행적을 일지로 남깁니다.
오늘 더 1894에서는 잔혹했던 피해 기록, 양호우선봉 일기를 통해
처절하게 짓밟힌 동학농민군의 비극에 한걸음 더 다가갑니다.
-(해설) 잔혹한 기록은 이두황이 토벌대장으로 임명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왕명을 받은 이두황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동학농민군 토벌 작전에 나섭니다.
무자비하게 동학농민을 진압하며 능력을 인정받은 이두황.
그는 일생을 군인으로 살아 온 인물이었습니다.
-이두황은 서울에서 출생하죠.
아주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을 합니다.
그래서 1882년, 무과 과거에 급제하게 되죠.
장교로 출발한 겁니다.
-(해설) 평범한 군인이었던 이두황.
그가 일본에 자신의 존재를 알린 건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이 발발한 1894년이었습니다.
-이두황이 출세욕이 상당히 강했던 것 같아요.
청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일본 사령관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자기도 청일전쟁에 참여하게끔 해달라.
그래서 일본인 군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잖아요.
그래서 수용을 해 줍니다.
주로 했던 역할은 통역이나 정보 입수해서 건네주는 그 역할을 했는데
이두황은 궂은일 청국군을 땅에 묻어주는 그런 그 역할까지.
-(해설) 청일 전쟁 때 일본군 앞잡이 노릇을 한 이두황은 공적을 인정받아 동학농민군 토벌 대장이 됩니다.
조선의 군인이었던 그가 친일 군인으로 변신에 성공한 배경에는 바로 일본이 있었습니다.
1894년 음력 9월.
항일 투쟁을 위해 2차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합니다.
조선을 지배하려 한 일본은 동학농민군을 위험한 세력으로 판단하고 본격적인 토벌에 나섭니다.
당시 일본 총감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군 후비 보병 19대대를 투입하고 동학농민군을 섬멸하는 작전을 펼치는데요.
이두황의 조선군 부대 역시 그들의 지휘권 아래 놓입니다.
-(해설) 일본군 중위 사라키 세이타로와 소위 미야모노 다케타로가 내일 아침에 출발한다고 하니
그들을 맞이해 대접하고 힘을 합하여 기필코 큰 공을 세워 아뢰는 것이 좋겠다.
-(해설) 일본군과 합세한 이두황.
그는 먼저 충청도 지역 동학농민군 진압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많은 동학농민군을 학살하고 토벌 임무에 성공합니다.
이두황이 쓴 양호우선봉일기에는 당시 상황을 보고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해설) 동학농민군 강동희와 이희영은 함께 집강을 맡은 자들이었습니다.
여관 앞에서 총포로 쏘아 죽이고 마을 집들은 모두 불을 질러 동학농민군의 소굴을 태워버렸습니다.
동학농민군 수십 명은 우리 관군의 행진을 보고 산으로 달아났습니다.
수색하여 3명을 찾아 죽이고 그들이 생활하던 초막 400여 곳과 민가 200여 호를 전부 불살랐습니다.
-이두황이 동학농민군을 말살한 사례는 이루 말할 수가 없죠.
소위 동학도가 많은 마을은 많은 사람이 처형됐을 뿐만 아니라 거의 불바다가 돼요.
-(해설) 보은군 장내리를 초토화시킨 후 이두황이 향한 곳.
천안 세성산이었습니다.
세성산은 교통로와 보루가 있어 전략적 군사적 요충지였는데요.
이곳에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의 무장 투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이두황에게도 불안 요소였는데요.
-(해설) 서울 통로와 가까워 선봉군의 앞길에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먼저 서울 가까이에 있는 적을 쳐부수어 우리 군사의 사기를 북돋은 후에 계속 남으로 내려갈 것입니다.
-(해설) 서울과 가까이에 있는 적을 먼저 격파하기 위해 1894년 음력 10월 21일.
천안에 도착한 이두황은 동학농민군을 향해 기습 공격을 퍼붓습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동학농민군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집니다.
-(해설) 패배해 달아나는 동학농민군을 추격하였습니다.
수십 리를 뒤쫓으면서 더러는 쏘아 죽이고 포로로 잡아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동학농민군이 많게는 한 300에서 400명 정도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투 과정에서 죽은 동학농민군보다는 세성산 전투 이후에 주변 일대 마을을 샅샅이 뒤져요.
그래서 많은 동학농민군을 체포해서 바로 처형하게 되죠.
이것이 대규모 첫 전투였습니다.
-(해설) 정부군과 동학농민군 사이에 벌어진 2차 봉기 최초의 대규모 전투.
세성산 전투의 패배로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희생됩니다.
-그 이후로 계속 동학농민군이 전라도로 후퇴하고 후퇴하면서 한 모든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패배하죠.
내몰린 거죠.
이것이 일본군의 어떤 전략이기도 했고.
전라도 사람 다루듯 동학농민군을 몰아서 토끼 사냥하듯이 싹쓸이 하는 것이
일본군의 처음부터 전략이었습니다.
-(해설) 장흥 석대들의 너른 들판.
동학농민군은 이곳을 최후의 격전지로 삼습니다.
1894년 음력 12월 15일, 석대들에 총성이 울려 퍼집니다.
일본군과 맞붙은 3만여 동학농민군.
빈약한 무기로 전투에 나선 그들은 일본군의 신식 무기에 무참히 쓰러져갑니다.
-숫자로 따지면 동학농민군이 절대적으로 많았죠.
그런데 어떤 무기와 그다음에 심리적인 사기 면에서는 훨씬 떨어져 있는 상태였죠.
음력으로 12월 15일이니까 한겨울이에요.
그러니 어떤 상황이었겠어요.
처참했죠.
제대로 먹지도 못 하고 제대로 입지도 못 하고 날씨는 춥고.
석대 전투 이후에 일본군은 나주로 돌아갔고 마지막 뒷정리를 한 것은 이두황 부대입니다.
잔여 동학농민군을 수색해서 처형하고 무자비한 학살이 이루어져나갔죠.
-5명을 이날에 쏘아죽였습니다.
그중 1명은 목을 베어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주고 머리를 나무 상자에 넣어
장교에게 보내어 바치게 했습니다.
동학농민군 50여 명을 잡아 두목 3명은 목을 베었고 나머지는 쏘아죽였으며
시신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거로 얻은 게 있을까요?
-일본군의 신임이죠.
일본군 편에 서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 데 1등 공신을 했기 때문에
그 결과 그다음 해에 훈련대대장을 맡았잖아요.
이두황 입장에서는 성공을 한 거죠.
-(해설) 장흥공설공원묘지 4묘역.
비석 하나 제대로 세우지 못한 이름 없는 묘들이 가득합니다.
바로 장흥 일대에서 희생된 1700여 명의 동학농민군 유골이 이곳에 잠들어 있습니다.
수많은 동학농민군을 학살하며 자신의 야욕을 실현시켜나간 이두황.
광기로 치닫는 그와 일본군의 학살에 동학농민혁명은 사실상 막을 내립니다.
이두황의 동학농민군 토벌 일기인 양호우선봉일기 역시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1895년 음력 2월 18일에 멈춥니다.
-장흥 석대들 적투 이후 이두황은 살인과 약탈을 일삼으며 동학농민군을 찾아내 처형합니다.
그 잔악함은 일본군까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하죠.
이두황은 그 일로 오히려 일본의 신임을 얻게 됩니다.
이후 이두황은 본격적인 친일의 길에 들어서며 더 큰 만행을 저지릅니다.
-(해설)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 자객들이 기습적으로 경복궁에 들이닥칩니다.
그들은 건청궁으로 들어가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당시 일본 자객이 왕비 처소에 진입하는 데 걸린 시간은 30분.
시해 사건에 가담한 내부자들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그들 중 한 명이 바로 이두황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명성황후를 살해할 때 이두황은 그 길잡이를 했다고 합니다.
당시에 조선의 정비, 왕의 부인이 일본군들을 그리고 거기에 빌붙은 조선인들에 의해서
살해됐다는 것이 전국적으로 알려질 거 아닙니까?
이들을 참형에 처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어요.
그러다 보니까 아들 이진백과 더불어서 일본으로 변복을 하고 부산항에서 밀항을 합니다.
을미사변으로 망명한 자들을 조선으로 넘기라고 조정에서는 계속 요청했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일본에서는 이것은 우리 주권 권한이다.
이러면서 이걸 거부했던 것이죠.
그렇다 보니까 이두황은 일본에서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었고 오히려 이두황은 일본에 가서
노름을, 도박을 좋아하고 여색을 탐하고 그다음에 술 먹고 흥청망청하는 이런 행태를 보였다고 그래요.
-(해설) 1907년 이두황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강제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킨 겁니다.
-1907년에 왕이 고종에서 순종으로 바뀌잖아요.
이토가 압력을 집어넣어서 민비 시해 사건에 관련된 인물을, 대사면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1907년 하반기에 이두황이 일본에서 서울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돌아오자, 특별 채용을 해서 전라북도 관찰사로 임명을 하잖아요, 1908년에.
전북이 어떤 곳이에요?
이두황이 동학농민군을 토벌했던 핵심적인 지역이잖아.
그곳에 관찰사로 임명한 겁니다.
-(해설)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를 업은 이두황.
조선에 돌아온 후에도 적극적으로 친일 행각을 이어갑니다.
1909년 일본군은 일본에 대항한 호남 지역 의병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펼치는데요.
이두황도 작전에 합류해 의병을 초토화하는 데 앞장섭니다.
-남한 대토벌이라고 하는 한마디로 호남 의병을 싹쓸이하는 것들을 찾고 있었어요.
전라 관찰사로서 의병의 활동 지금 현재 처치 상황 그다음에 얘들의 움직임 이런 것들을 계속 보고합니다.
정미의병이 처참하게 붕괴되면서 한일 병합이 오고 실제로 이두황은 태평성대죠.
자기가 좋아하는 일본에게 병합이 됐고 그러니까 태평성대가 됩니다.
조선토지조사사업 위원장으로서 여기 전라북도에 있는 땅들을 일본이 잠식하는 데
모종의 역할들을 한다거나 이런 식으로 하면서 그냥 친일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게 1916년 사후까지 이렇게 가게 되는 거죠.
-(해설) 이두황의 전라북도 도장관으로 재적하며 말년을 보낸 전주.
이곳 기린봉 명당터에 이두황의 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친일파답게 일본식으로 조성된 묘지.
묘명은 초대 조선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비문은 친일파들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제 그 무덤은 초라하게 자리하고 있지만 여전히 청산해야 할 이두황의 친일 잔재는 남아 있습니다.
기린봉에 자리한 이두황의 묘 주변으로 펼쳐진 4만 282제곱미터에 달하는 넓은 임야.
친일파 이두황의 재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가치만 수십억 원에 달하는데요.
여전히 국고로 환수되지 못한 채 이두황의 후손들이 상속받아 공동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두황이 1만 평이 넘는 땅에 편안히 누워 있잖아요.
아직도 그 땅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 후손들이.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두황에 대해서 우리가 사후 100년간이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올 3월에 친일파 발굴 및 친일 잔재 청산에 관한 지원 조례가 도의회를 통과했어요.
이런 조례 도입이 만들어진 상황이기 때문에 이두황 땅 찾기는
그 어떤 일보다도 전라북도 지자체가 시급히 서둘러야 한다.
-(해설) 지난 2016년 전주시 기린봉 입구에 친일파 이두황의 단죄비가 세워졌습니다.
이두황이 죽은 지 100년 만에 처음으로 이루어진 단죄.
하지만 그의 죄를 묻는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려는 동학농민군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이두황.
그의 잔혹한 행적은 양호 우선봉 일기 속 기록으로 남아 친일파 이두황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금 이곳은 이두황의 묘입니다.
그는 나라를 지키려 했던 동학농민군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그 행적을 양호 우선봉 일기에 남겼습니다.
이후 을미사변에 가담하고 죽는 순간까지도 일본의 편에 섰던 민족의 반역자였습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살았던 이두황.
그가 떠난 지도 108년이 다 되어 갑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그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습니다.
동학농민군을 탄압하고 친일을 일삼았던 이두황.
그의 이야기는 단지 과거사가 아니라 오늘의 문제이며
반드시 청산해야 할 일제의 잔재임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해설) 농민군 하나가 들어오면 하나를 베고 둘이 들어오면 둘을 베었다.
그렇게 동학농민군 16인의 목을 베는 것을 끝냈다.
문석봉 의산유고 중.
-(해설) 우금치전투 이후 대대적인 동학농민군 토벌이 이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과 민보군은 잔인하게 동학농민군을 학살합니다.
1894년 겨울.
토벌대를 피해 대둔산으로 올라간 동학농민군.
그들은 민보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최후의 항전을 벌입니다.
-글자 그대로 엄동설한이죠.
1년 중에 가장 추운 시기에 그런 엄동설한을 그 절벽 꼭대기에서 견뎌낸다고 하는 건.
-(해설)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기록물.
토벌대를 이끈 문석봉의 문집 의산유고입니다.
대둔산 최후의 항쟁과 그날 이후 자행된 동학농민군 토벌 상황이 자세히 기록돼 있는데요.
그 기록을 따라 잔혹했던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시간을 되짚어봅니다.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의산유고를 쓴 문석봉이 묻혀 있는 곳입니다.
동학농민군 토벌대의 대장이었지만 1993년 독립유공자가 된 문석봉.
그 사연은 그의 생을 담은 묘지 비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뚜렷하게 새겨진 두 개의 직책.
동학농민군 토벌대 대장 양호소모사.
그리고 을미의병 의병장입니다.
-민보군으로 활동을 했다가 충청도 일대 농민군 진압의 공로가 인정돼서 공주병영의 영장이 됐어요.
바로 그다음 해에 이제 일본군의 경복궁 침략과 명성황후 살해 사건.
이런 걸 경험하면서 반일 항쟁의 의병을 모읍니다.
을미의병 의병장으로 독립유공자로 지정이 됐습니다.
-(해설) 1893년 무과에 합격한 문석봉.
2차 동학농민혁명이 한창이던 1894년 음력 11월.
양호소모사로 임명되는데요.
그의 임무는 동학농민군 토벌이었습니다.
충청도 일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대둔산 항전 이후 남아 있던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면서 큰 공을 세운 문석봉.
당시 그는 자신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국립중앙도서관.
이곳에서 문석봉의 기록이 담긴 의산유고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문집 속에 문석봉의 활동 가운데 동학농민혁명 대둔산 농민군을 토벌한 기록이 들어 있습니다.
-(해설) 1894년 음력 11월.
동학농민군이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이후 대둔산이 항전의 격전지로 떠오릅니다.
남쪽으로 퇴각하던 동학농민군.
그리고 충남 진산과 연산, 전북 고산 등지에 동학농민군이
끝까지 항쟁하기 위해 대둔산으로 찾아 들었기 때문이죠.
-대둔산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들어간 것은 아니라고 봐요.
적어도 그 지형을 상세하게 잘 아는 사람이니까 거기를 들어갈 수 있다고 보고
고산, 연산, 진산 사람들 외에는 알기 어렵죠.
안전하게 숨어서 항전을 계속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라고 하면 그 지역 사람들은
대둔산 절벽 위를 생각했을 것 같아요.
-(해설) 동학농민군은 대둔산 미륵바위 정상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마지막 항쟁을 준비합니다.
모여든 동학농민군의 수는 서른 남짓.
어린아이와 임산부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지난 3월 13일,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 직원들과 더 1894 제작진이 대둔산에 모였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최후의 항전지에 오르기 위해서입니다.
동학농민군의 피로 얼룩진 대둔산 항전지를 처음으로 찾아낸 것은 신순철 이사장이었습니다.
-이규만이라고 하는 할아버지가 계셨어요.
그 할아버지는 원래 대둔산 중간에 올라가면 휴게소가 몇 개가 있죠?
그 매점 하나를 운영하고 계신 분이었어요.
이제 그분하고 여러 차례 대화를 하면서 쭉 들어보고 동학농민혁명 이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고
사람이 많이 죽었다고 하는데 그게 저기다.
그래서 우리가 나무하러 갈 때도 어려서 거기는 절대 어른들이 올라가지 말라고 했다.
-(해설) 130년 전 동학농민군의 자취를 따라 산행에 나섭니다.
미륵바위 정상으로 가는 길은 평소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험난한 산길을 헤치며 한참을 올라야 하는 탓에 금세 숨이 차고 다리가 무거워집니다.
-여기, 여기 지금 거의 그래서...
-(해설) 1894년 겨울, 동학농민군을 쫓던 토벌대장 문석봉도 대둔산에 올랐습니다.
문석봉은 자신이 경험한 대둔산의 험한 산새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해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오르는 것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단 한 명만 있다면 방어할 수 있고 1만 명이 있어도 공격하지 못하는 곳입니다.
-(해설) 신식 무기로 무장한 문석봉과 토벌 대원들은 결국 대둔산의
험준한 산세를 넘지 못하고 헛총질만 하다 물러납니다.
-(해설) 산 위로 동학군의 바위 소굴을 쳐다보니 새도 넘어가기 힘든 길이라 할 만합니다.
열 걸음을 가면 아홉 번 넘어졌습니다.
겨우 산꼭대기에 도착하여 연이어 서양 총을 쏘는 것 외에 달리할 수 있는 계책이 없었습니다.
-(해설) 문석봉의 부대가 총을 발사했던 장소로 향합니다.
-문헌 기록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관군이 농민군 주둔지에
가장 근접하게 접근할 수 있는 장소가 이 장소입니다.
저 소나무 밑에 좌우로 돌무덤이 보이는데 저 돌무덤을 육안으로 보고 저기가 유적지가 아닐까, 최초로.
-왜 돌무더기인데 유적지라고...
-여기 모두가 자연석인데 인공을 가한 흔적이니까.
다른 어디에도 저렇게 돌을 높게 쌓아놓은 데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왜, 누가 왜 돌 쌓았을까.
올라가 보면 이제 확인이 되는 거죠.
-(해설) 절벽 쪽으로 마주 서니 동학농민군의 근거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우리는 여기 지금 사격 준비를 하고 있다.
다 보이네, 다 보여.
-(해설) 마침내 동학농민군의 근거지였던 미륵 바위 정상으로 향합니다.
깎아지른 절벽을 오르는 유일한 방법.
바로 사다리를 이용하는 건데요.
힘들게 올라선 대둔산 최후의 항전지.
130년 전 머물렀던 동학농민군의 흔적을 여전히 찾아볼 수 있는데요.
-여기 지금도 남아있는데 기와 파편들이 있고요.
그다음에 옹기 파견은 굉장히 많아요.
겨울이니까, 물을 보관해야 하니까 옹기가 필요했을 거고 그다음에 여기 노출되어 있는 돌들은
집터인데 위에 어떤 집이 있었는지는 이 바닥을 자세히 발굴을 해 보면
어떤 집을 있었을지 조금 짐작은 할 수 있을 거예요.
저 돌의 목적은 공격용이에요.
그래서 끝 쪽에, 유적지 끝 쪽에 쌓아놨고 여기 아래도 쌓아놨고.
-(해설) 관군도 공격하기 힘들 만큼 높은 절벽에 위치한 동학농민군의 근거지.
한겨울 이곳에서 서른 남짓의 동학농민군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걸까요?
-글자 그대로 엄동설한이죠.
1년 중에 가장 추운 시기에 그런 엄동설한을 그 절벽 꼭대기에서 견뎌낸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혹한이기 때문에 그런 식량이나 물을 어떻게 옮겨 왔을 건지.
이런 게 굉장히 중요하죠.
그래서 나는 그거를 뒤에 염정골을 통해서 몰래 지원받았을 거라고 봐요.
-(해설) 대둔산 능선으로 이어진 충남 금산군 진산면 염정동.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활동했던 지역으로 대둔산에 머물던 농학농민군들은 이곳을 통해 물자를 조달한 걸로 전해집니다.
물은 샘물을 이용한 걸로 보입니다.
대둔산에 있는 오래된 절터.
동학농민군은 이곳에 있는 샘에서 물을 길어 마시며 항쟁에 나섰습니다.
-여기가 지금 대둔산 항전지하고 한 20분에서 30분 정도 거리가 되는데 거기 대둔산 항전지에는
식수로 사용할 만한 것이 없는데 아마 여기 식수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여기가 원래 절터가 있었는데 절이 없어진 것은 오래된 것 같고 그러나 이 식수가 있었기 때문에
이 식수를 농민군들이 충분히 활용했을 것이고 물이 생각보다 깨끗해요.
지금도 이게 잘 조절하면 물이 충분히 지금도 맑은 물이 나오는 거 보니까.
-(해설) 환경은 열악했지만 천혜의 요새였던 대둔산.
관군과 민보군이 동학농민군을 향해 수 차례 공격을 퍼붓지만 번번히 실패로 끝납니다.
-(해설) 공주의 군대가 16일 전에 와서 3일 동안 공격했지만 함락시킬 수 없어 공주로 되돌아갔다.
또 2, 3일 전부터 전주에 군사가 와서 공격하고 있다.
-(해설) 하지만 정세가 급변한 건 일본군이 개입하면서부터.
대둔산의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에게 꽤나 위협적인 존재였는데요.
인근 동학농민군과 결합해 세력을 키울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대둔산 진지가 그 일대의 농민군의 희망이고 사기니까.
농민군은 철저하게 이 불씨를 꺼트리지 않아야 하고 광군이랑 일본군 입장에서는 이거를 어떻게든 섬멸해야 하니까.
-(해설) 1895년 음력 1월 21일.
일본의 동학농민군 진압 부대는 대둔산의 동학농민군을 모조리 죽여 없애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대둔산 근거지로 출병한 일본군.
먼발치에서 공격했던 조선 광군과 달리 동학농민군의 후방을 공격하는 전략을 세웁니다.
일부 대원들이 정면에서 발포를 계속하며 동학농민군의 시선을 빼앗는 사이
또 다른 대원들이 절벽으로 기어 올라가 기습 공격을 퍼부은 겁니다.
대둔산 항전지 아래 일본군이 올랐던 절벽이 있습니다.
-(해설) 사람 사다리를 만들어서 한 사람씩 올라가게 했으며 15분간을 소비해서 겨우 전 분대원을 등반시켰다.
그런데 적은 오직 산이 험한 것만 믿고 배후에 대해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으며
계속 전면의 관군 머리 위에만 맹렬한 사격을 하였다.
우리 일본군은 전부 올라와 두 차례 일제 사격을 가한 다음 그 불의를 틈타 소리를 지르며 돌격하였다.
적의 소굴에 28, 9세쯤 되는 임신한 부인이 있었는데 총알에 맞아 죽었다.
접주 김석순은 한 살쯤 되는 여자아이를 안고 천 길이나 되는 계곡으로 뛰어들다
암석에 부딪혀 박살이나 즉사했다.
그 참상을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여기가 그 유적지 뒤편인데 이 정도 위치에, 이 정도 위치에 탄피가 육안으로 볼 수 있게 노출돼 있었어요.
그런데 그 탄피가 19세기 한국에서 만든 탄피로는 유일하게, 유일하다는 게 확인이 됐어요.
-(해설)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퍼붓는 총탄에 쓰러져 간 대둔산의 동학농민군.
3개월의 항전은 그렇게 끝을 맺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마지막에 남아있던 사람이 한 25, 6명.
대부분이 희생이 됐고 12살 난 아이 하나가 생존해서 여기에 누가 있었는지를 알려줘서 그게 기록에 남아 있어요.
-(해설) 그들의 혁명이 끝나는 데 걸린 시간은 오후 1시 40분에서 2시.
고작 20분이었습니다.
-(해설) 오후 2시 적의 소굴을 모두 함락시키고 그 집도 불태웠다.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하고 산을 내려왔다.
이때가 오후 3시였다.
-(해설) 그런데 일본군과 관군의 막강한 습격에도 빠져나간 동학농민군이 있었습니다.
대둔산 항전을 이끌었던 최공우.
그는 충남 금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접주였습니다.
토벌대장 문석봉은 최공우가 살아있다는 걸 확인한 뒤 그를 없애기 위해 뒤를 쫓습니다.
-(해설) 24일 관군과 일본 군사들이 도착하여 함께 산 위에 적들의 바위 소굴을 공격하였다.
많은 동학군을 죽였지만 모두 최공우를 보지 못하였다.
산에 뒤편을 따라 내려가서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곧바로 그들이 있는 곳으로 따라가서 죽이려 하였다.
-(해설) 최공우가 찾아든 곳은 대둔산 항전을 지원하던 염정동이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수백 명의 동학농민군을 모아 다시 한번 항쟁을 도모합니다.
하지만 최공우의 계획을 눈치챈 문석봉.
그 역시 병력을 이끌고 염정동으로 향합니다.
문석봉은 동학농민군이 잠든 틈을 타 집을 포위하고 기습 공격을 퍼붓습니다.
속수무책으로 당한 동학농민군.
수많은 사람이 사살당하고 체포됩니다.
-농민군 하나가 들어오면 하나를 베고.
둘이 들어오면 둘을 베었다.
남은 무리들을 모두 포박하였으며.
투항한 자들은 모두 400여 명이었다.
-(해설) 문석봉의 대대적인 토벌로 염정동 일대의 동학농민군이 모두 섬멸되면서
대둔산에서 이어진 항쟁의 불씨는 꺼지고 맙니다.
1894년 부정부패로부터 민중의 삶을 지키고.
일본군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려고 한 동학농민군.
대둔산엔 못다 이룬 혁명의 꿈과 항전의 애환이 잠들어있습니다.
그들이 끝까지 항전하다 목숨을 잃은 미륵바위 정상에서 동학농민군의 넋을 위로하는 제의가 펼쳐졌습니다.
-같이 묵념하겠습니다.
-(해설) 나라를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쓰러져간 목숨들.
하지만 그들의 숭고한 정신은 불씨가 되어 의병 항쟁으로.
독립운동으로, 그리고 민중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 목적지에 오니까 정말 이런 곳에서 산이 험하니까 여기서 숨어서 은거하기에는
좋은 장소다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여기서 어떻게 생존했을까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아녀자도 있고 아기도 있었잖아요.
참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동학농민군이 살려고 온 곳이니까 아무래도 험한 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이 평상시에 오르내릴 수 없는 곳으로 밀려서 밀려서 들어왔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 계셨던 분들의 심정을 한번 그 자리에서 느껴보자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올라왔던 심정.
또 여기에서 자기들 공격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심정.
그런 것들을 직접 그 자리에서 생각하면 좀 남다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이 작은 공간에서 그리고 이렇게 높은 공간에서 그분들이 그것도 한겨울에
여기서 3개월 동안 견뎠다는 자체만으로도 되게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함께 잘 살아가는 세상.
그런 세상의 염원이, 또 그런 신념이 이 자리에서 그런 고초를 겪어내게 하지 않았을까.
-(해설) 한겨울 1000개의 낭떠러지 위에서 3개월 동안 항전을 이어간 동학농민군.
그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처절한 삶을 선택했던 걸까요.
쏟아지는 총성에 두려움이 엄습하고 추위와 배고픔에 힘들었어도 동학농민군이 대둔산에서 보낸 3개월은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왜쇄와 권력의 억압 없이 자유롭고 모든 사람이 평등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요.
동학농민군의 애환과 희망이 깃든 대둔산.
그곳에서 그들이 그토록 바랐던 세상을 그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