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기
테마스페셜 - 동학군 지도자가 어머니께 보낸 SOS, 한달문 편지
등록일 : 2024-10-18 13:40:22.0
조회수 : 571
-(해설) 130년 전 한 동학농민군이
감옥에서 다급하게 편지를 쓴다.
-(해설) 어머니, 300냥만 있다면 살아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제발 잊지
마시고 돈을 꼭 보내주세요.
-(해설) 감옥에서의 가혹했던 구타와
배고픔 그리고 추위를 견디다 못해
생사의 갈림길에서 어머니께 편지를 쓴
오늘의 주인공.
그는 바로 나주에서 활동하던 동학농민군
지도자 한달문이다.
그가 어머니께 보낸 이 편지는 몇 안
되는 농민군 측 기록물이자 유일무이한
농민군 한글 편지 기록물이다.
-세계기록유산 기록물을 등재하는
과정에서 다른 여러 가지 동학농민혁명
기록물보다 농민군이 직접 생산한
기록물, 이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해서
그 한달문 편지가 그 기록물 목록 첫
번째로 들어가 있습니다.
-(해설) 한달문이라는 인물과 그가 남긴
편지를 통해 당시 농민군이 겪어야 했던
가혹한 현실을 한번 들여다보자.
한달문 편지의 작성자 한달문의 묘는
그의 고향 전남 화순에 위치해 있습니다.
1859년에 태어난 그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앞날이 창창한 35살의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동시에 나주에서 활동하던
동학농민군 접주, 한마디로 지도자급
간부였는데요.
한달문은 나주에서 농민군 지도자로
활동하던 도중 1894년 12월 민보군에
의해 체포당하게 됩니다.
-이쪽 영아암 쪽에서 12월쯤에 전투를
벌이다 체포가 돼요.
그러다가 12월 20일경에 나주 감옥으로
이감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당시 감옥 상황이
아비규환이었거든요.
전라도 각지에서 체포된 이 적주급
동학농민군들은 일본군의 지시에 의해서
거의 나주감옥으로 보내졌습니다.
-(해설) 당시 한달문이 수감되었던 곳은
나주에 설치된 호남초토영의
감옥이었습니다.
이곳은 보통 감옥이 아니었습니다.
일본군과 관군은 우금치 전투를 끝내고
남은 동학농민군을 소위 싹쓸이하러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일본군과 관군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
나주였고 그곳에 본부 초토영에 설치된
감옥이었기 때문입니다.
동학군 토벌의 총사령관 미나미 고시로는
호남의 각 수령들에게 이런 지시 사항을
보냅니다.
-모든 농민군을 잡아들이되 두령은
특별히 현지에서 처형하지 말고 나주로
보내라.
-(해설) 즉 나주로 압송된 농민군은
대부분 호남의 군현에서 특별히 선별된
지도자급 인물이었던 겁니다.
-나주 감옥이 비좁다 보니까 토굴을
만들어서 임시로 수용했고 그 시기가 또
한겨울이었기 때문에 환경이 추위와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먹을 것도 제대로 못
입고 이런 상황이었죠.
게다가 구타와 고문을 받았기 때문에
나주감옥에 갇혀 있었던 그 많은
동학농민군이 거의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습니다.
-(해설) 당시 나주의 감옥 인근은
난장판이었습니다.
나주 감옥으로 압송된 혐의자들은
수성군 수백 명에게 둘러싸여
몽둥이질과 집단 린치를 당했습니다.
잡혀 온 농민군은 짐승처럼 끌려다녔고
그들을 구하러 온 가족과 친지들은
찢어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지옥을 방불케 하는 이곳에서
수감자들의 친지들은 뇌물을 바치기
위해 돈 꾸러미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고 합니다.
당시 나주 감옥에 수감돼 이 현장을
직접 경험한 농민군 지도자 김낙철은 그
전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해설) 군교들이 몽둥이, 철편, 주장을
들고 세 시간 동안 발로 차고 때리는데
그 광경은 입으로 옮길 수 없는
지경이었다.
토굴에 들어간 사람들이 인삼 줄기처럼
묶여 있었다.
사람들은 어깨가 부러지고 옆구리 뼈가
부서져 피가 냇물처럼 흘렀다.
-(해설) 당시 나주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한달문 역시도 이와 같은 상황을
겪고 있었을 텐데요.
어쩌면 퀘퀘한 토굴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몰래 써내려
갔을 그 편지.
이 편지는 그에게 유일한 희망이었을
겁니다.
-(해설) 어머님께 올립니다.
어머니와 헤어진 후로 소식이 없어
막막했습니다.
멀리 가셨으니 돌아가신 줄만 알고
답답했습니다.
나주에서 죽을 고생하다가 한 사람을
통해 소자의 토시를 동봉하여 보내어
어머님 함께 오시길 기다렸더니 12월
20일 오늘 나주 옥으로 오게 되니
소식이 끊어지고 노자 한 푼 없어 굶어
죽게 되어서 너무 원통합니다.
돈 300냥이 있다면 어진 사람을 통해 살
묘책이 있어서 급히 사람을 보내니
어머님 불효한 자식을 급히
살려주십시오.
그간 집안 유고를 몰라 기록하니 어머님
혹 편찮으시거든 다른 사람이라도 와야
하겠습니다.
부디부디 명심하고 잊지 마시고 즉시
오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드릴 말씀이 많지만 만나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그만 적습니다.
의복 상하벌, 보신 한 벌, 토시 한 벌,
주의 한 벌, 망건, 노자 3냥을 이
사람과 함께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시 오실 수 없으시다면 의복을 지어
한기수를 통해 보내주십시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이 있으면 소위
말하는 백이 있으면 더 빠져나올 수
있는 여지는 상당히 많이 있었죠.
-(해설) 그렇다면 당시 300냥은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졌을까요?
-(해설) 넉넉한 살림을 갖춘 지방 양반
출신으로 추정되는 한달문.
그렇다면 여기에 두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첫째 양반 지주층이었던 한달문은 왜
관군이 아닌 농민들의 편에서
싸웠을까요?
둘째 유학과 한자를 기본으로 공부하는
양반층이 왜 한글로 편지를 썼을까요?
-당시 한달문의 어머니 입장에서 잠시
생각해 보면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 아들
걱정에 밤잠 이룰 새 없었을 겁니다.
-(해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한달문 편지의 기증자이자 한달문의
친손자 한우회 씨를 찾았습니다.
-저분이 어머님한테 보낸 서신이 돈
300냥을 보내주면 어진 사람 만나서
나올 수 있다고 돈을 좀 보내주라고
그러셨더라고요.
그래도 그 골짜기에서 살면 여름에 쌀밥
먹으려면 우리 집 일을 왔다 간다고
말이 그래요.
그 골짜기에서 제일 살았어요, 거기서.
그 살 일을 삭 벗겨버리고 역적으로
몰리니까 그때 말로는 3대를 멸한다고
했지 않아요, 죄를 지으면.
실은 우리가 그렇게 해서 뺏겨버리고
2월이 올 때는 아무것도 없이 몸만
왔어요, 우리.
여기 와서 몸뚱이로 벌어서 먹고살았죠.
-(해설) 동학농민군 후손들 중에는 주로
증손자와 고손자가 많은데요.
한우회 씨는 그중 흔치 않은 직계
손자입니다.
올해로 만 88살에 접어든 한우회 씨는
아버지에게도 친척들에게도 할아버지
한달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전남 화순에 기반을 잡고 있던 한달문의
가문 친척들은 동학농민혁명 이후 모두
뿔뿔이 흩어졌는데요.
역적의 오명을 피해 떠나온 한달문의
손자.
한우회 씨의 가족은 그렇게 이곳 나주에
무일푼으로 정착하게 됐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왜냐 그러면
할아버지가 죄를 많이 지어서 이러고
사니까 그런 줄 알으라고만 해.
그러고 말을 안 했어요, 더.
그러니까 빈 몸뚱이로 나와서 형편이
거지처럼 하다시피 하고 살았지.
그때는.
그러다가 이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데
그때 피신하면서 우리 족보만 챙긴다고
고리짝이 있더구먼요.
거기에다가 족보하고 옥중 서신하고 전부
새로 들어 있었어.
한 30년이 되었나 20년 되었나 모르겠어.
큰아버지가 쓴 서책이 있어, 글씨를 쓴
책이.
그랬더니 그 속에 들어 있었어, 옥중
서신이.
-(해설) 평생 존재조차 몰랐던
할아버지의 편지가 발견돼 세상에 나온
건 불과 3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한우회 씨 큰아버지가 남긴 책 속에서
우연히 발견된 할아버지의 한달문의
편지.
한달문의 편지는 당시 옥중 서신이라는
이름으로 학계를 떠들썩하게 했는데요.
그제서야 한우회 씨도 할아버지가
죄인이 아니라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지도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평생 역적의 오명을 쓸까 두려워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야기조차 입에
담을 수 없었을 한우회 씨의 가족들.
할아버지 한달문의 사연을 비로소 알게
됐을 당시의 감정을 한우회 씨가
회상합니다.
-그때는 나도 그때 알았다 해도 별
관심도 없고 그러니까 먹고 살기만
열심히 힘쓰고 그러지 뭐 그런 생각도
못 할, 기회도 없었고 생각도 안 나고
그랬었어요.
그렇게 세상을 살다가 이제서야 지금
이렇게라도 사니까 다행이라고 보지.
-(해설) 나주 감옥에 수감된 자들은
물을 마실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죄인의 가족이 뇌물을 바쳐야 비로소
밥을 먹을 수 있었고 장작을 사와야
온돌을 데워줬다고 합니다.
토시와 버선을 부탁한 한달문 역시도
12월의 매서운 추위를 버티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겁니다.
뇌물을 바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운명을 겪었을지는
불 보듯 뻔할 수 있습니다.
제때 구명 받지 못한 자들은 가차 없이
형장의 이슬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한 일본군 병사의
일기에 따르면 일본군이 나주에 머무는
한 달 동안 무려 680명의 농민군이
처형당했다고 합니다.
그 시체는 이곳저곳에 버려져 당시 나주
전역이 시체 썩는 냄새로 가득했고 이름
없는 묘가 주변을 뒤덮었다고 합니다.
그 끔찍했던 나주 감옥은 현재 흔적조차
사라지고 없는데요.
-처음에는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토벌
작전은 한마디로 토끼 사냥
작전이었습니다.
하나는 동로중대, 서로중대, 중로중대로
나누어서 남쪽으로 진군을 해
들어갑니다.
동학농민군을 서남단으로 몰기 위해서는
어떠한 중대를 먼저 내보내야겠어요?
동쪽에 있는 일본군이 먼저 출발해야
하죠.
그래서 이 동로중대는 충주로 해서
제천으로 해서 경상도로 해서 밀어내는
전략이었거든요.
동학농민군을 전라도 서남단으로 몰아간
것이죠.
-(해설) 마치 토끼몰이 사냥을 하듯
동학농민군을 전라도 서남단으로
쫓아가며 토벌한 일본군의 전략.
그들은 농민군이 다른 지역이나 외국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세 방향으로 포위해서
내려오며 이른바 싹쓸이를 해
나갔습니다.
바로 이 과정에서 동학농민혁명 최대의
전면전 우금치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이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무서운
기세로 남쪽으로 내려와 남은 농민군
세력을 해체하고 체포했습니다.
-전라도 서남단으로 쫓겨 내려간
동학농민군을 마지막 진압하는 데 있어서
본거지 역할을 한 것이 나주입니다.
그러면 일본군은 왜 나주에 어떤
진압 본부를 설치했느냐 하면 나주 같은
경우에는 동학농민군한테 함락당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나주성은
안전 지역이었습니다.
-(해설) 당시 전라도에서 전주 다음으로
큰 도시 나주.
농민군은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지만 나주는 결코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일본군이 나주로 진군하자 일본군
대대장 미나미 고시로는 나주의 금성관에
토벌 본부를 치합니다.
조선시대 왕을 모시던 의례 공간이자
지방에 출장 온 사신이 지냈던 공간이
일본군의 토벌 본부가 된 겁니다.
동학농민군의 세력은 우금치 전투 이후
크게 꺾이지만 일본군의 추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농민군을 끝까지 토벌하려고
했을까요?
-후환을 방지하는 거였죠.
워낙 동학농민군 세력이 막강했고 당시
그 일본군은 청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이었는데 이때 일본이 가장 신경을
많이 쓴 것은 다른 나라들의
정세였습니다.
특히 다른 나라 중에서도 러시아가
청일전쟁에 개입을 하면 안 되기 때문에
러시아의 동정을 예의주시했거든요.
특히 동학농민군이 북쪽으로 올라가서
러시아와 결탁해서 일본군에 대항을 하지
않을까.
이런 걱정들을 많이 했습니다.
이 때문에 후환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
싹을 미리 예방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예방 학살이죠.
-(해설) 또한 당시 청나라와 전쟁
중이던 일본은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조선에 전초기지를 설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방 곳곳에 자리 잡은 농민군
세력은 일본군의 보급 기지를 파괴하기도
했고 물자 수송을 방해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조선을
점령하고 이를 발판으로 대륙으로
진출하려던 일본에게 동학농민군은
반드시 싹을 잘라야 할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싹을 자르는 과정은
예상했듯이 비인간적이고
잔인했습니다.
-가장 흔한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은
총 개머리판 있죠.
개머리판으로 때려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더라고요.
전라도 같은 경우에는 불태워 죽이거나
아니면 총검술을 하기 위해서 총검
연습용으로 동학농민군을 죽이기도 하고
조선 정부에서 처형한 방식은 목을 베서
죽이는 방식이라든가 이게 가장
많고요.
그다음 일부 지역 같은 경우에는 작두로
목을 잘랐다는 지역도 있는데 충남
태안이라든가 몇 군데 지역에서 확인이
되는 것 같아요.
-(해설) 동학농민군은 그렇게 끔찍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찔려 죽고 불타서 죽고 목이 잘려 죽고
맞아서 죽고.
누군가는 갇힌 채로 추위와 배고픔에
말라 죽었습니다.
부유한 양반이었고 지켜야 할 집안과
식구들이 있었을 아버지이자 남편
한달문.
그에게는 많은 선택지가 있었을
겁니다.
누군가는 많은 재산과 선택지를 활용해
관직을 얻기도 했고 누군가를 줄을 대어
친일파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뒤에는 부귀영화가 따랐습니다.
하지만 한달문이 선택한 길의 끝에는
본인의 죽음과 한순간에 길바닥으로
내몰려 역적이라는 오명을 견뎌야 했을
자식과 손주들의 모진 세월이
있었습니다.
이제 내일모레 아흔을 바라보는 한우회
씨는 그 세월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원망스럽지는 않으셨나요?
원망스럽지는 않으셨어요?
-원망이요?
원망은 안 했죠.
내가 그 사실을 안다고 하더라도 내가
어려서 모르는 일이었고 아버지도 이리
오셔서 뭣도 없이 살다 보니까 일하다가
공사판에 일하러 가셔서 흙차를 밀다가
허벅다리가 부러져 버렸어요.
그래서 그때 병원도 별로 없지만 돈도
없고 그러니까 병원에도 못 가고 그러고
계시다가 돌아가시고.
세상사를 얼척 없이 살았어요.
할아버지 묘에 비를 해서 비석을 다
세워놨으니까 내가 할 일은 다 했구나
싶어요.
-(해설)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
유광화라는 인물이 썼던 편지 한 장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동학농민군의 치열한 전투 현장에서
농민군 측 지휘관이 동생에게 보낸
편지인데요.
-(해설) 번거로운 인사말을 접어두고
동생 광팔 보시게.
나라가 환난에 처하면 백성도 근심해야
한다네.
집을 나와 수년을 떠돌아다니며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으니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네.
광팔이 자네가 형 대신 집안을 돌보고
있으니 다행이라 하겠네.
우리가 왜군과 함께 오랫동안 싸운 것은
나라에 입은 은혜를 갚고자 함이라네.
그러나 상황이 몹시 어려워서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자리 삼는 고초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네.
전에 보내준 얼마간의 재물은 유용하게
썼다네.
근래 사정이 그전보다 어려워서 다시
한번 돈을 이 인편에 보내주길 청하니
다시 살펴 보내주게.
아주 급하네.
바라고 또 바라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뜻에 달려 있네.
나라의 운명과 뒷일은 맏동생에게
부탁하겠네.
몹시 바빠 예를 갖추지 못했네.
-(해설) 2023년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는데요.
이 편지는 등재된 총 185건의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동학농민군이 남긴 기록으로써 한문
편지로써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편지입니다.
그래서 유광화 편지 내용에는
동학농민군이 어떻게 군자금을
조성했는지 전투 중에 어떤 처지에
있었는지 이런 것들을 좀 알 수 있는
사료적인 가치도 있기 때문에 그것이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이렇게 볼 수
있고 그런 중요성을 인정받아서
문화재청에서 지정하는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고.
-(해설) 오늘은 이 편지의 작성자
유광화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가 남긴 이 기록은 농민군이 남긴
유일한 한문 편지인데요.
유려한 문장을 한문으로 썼다는 사실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소위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본인이 남긴 편지의 문장으로 봤을
때도 상당히 수준이 높은 한문
문장이어서 유학을 제대로 공부한
유학자, 양반 출신이고 아버지가
통정대부 이렇게 직품을 받은 그게
실직인지 여부는 더 확인이 필요하지만
상당히 높은 벼슬을 받은 기록들이
족보나 비문이 나오기 때문에 전통적인
양반가에서 성장했고 바로 앞이 영산강
줄기가 이렇게 있는 평야 지대가,
지금은 나주호가 들어서 있지만.
그래서 어떤 농업 생산량이 높았던
지역이고.
-(해설) 부유한 지주이자 양반집
후손이었던 유광화.
아쉬울 것 하나 없이 살 수 있었던
유광화.
그는 왜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자리
삼는 고초를 겪어가며 농민군의 편에서
싸웠을까요?
-1894년 유광화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유광화는 글 꽤 쓴다는 양반들
사이에서도 문장가로 이름난 지방의
유명한 유생이었습니다.
평상시였다면 양반인 유광화는 과거
시험을 준비하며 입신양명을 꿈꿨을
겁니다.
반면 나라가 위기에 처했다면 의병이
되어 나라를 위해 싸웠을 겁니다.
여기서 유광화는 민중의 편에 서서
외세에 맞서 싸웁니다.
-(해설) 유광화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게 된 정확한 계기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1894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통해
짐작해 볼 수는 있는데요.
1894년에는 탐관오리의 횡포와 수탈.
그리고 나라의 과도한 세금에 견디다
못해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납니다.
농민군은 이때 한양에서 보낸 왕의
군대까지 격파하고 전라도의 수부,
전주성을 점령하는데요.
이 시기를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라고
부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동학농민혁명은
구시대적 봉건주의를 없애는 게 주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1894년 6월 21일을 분기점으로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6월 21일 경복궁은 일본군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일본 공사관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파견된 일본군은 경복궁을 공격하는 것도
모자라 왕 고종을 포로로 잡게
됩니다.
바로 이 사건을 계기로 동학농민군에게는
외세를 몰아내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가
생기게 됩니다.
반봉건을 외쳤던 동학농민혁명이
구국운동의 성격마저 띠면서 지배층인
양반층도 대거 참여할 계기가 된
것입니다.
-시적 또는 시기에 따라서 좀 달라지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1차 봉기의 경우에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고 그것을 추진한 사람들이 1차
봉기의 주도 세력으로서 자리매김했고
2차 봉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왜적
또는 왜놈들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 가장
중요한 어떤 관점이었고 특히 유광화도
그런 경우에 포함된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편지의 내용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보면
1차 봉기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고 2차 봉기에 참여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입니다.
-(해설) 우리가 왜군과 함께 오랫동안
싸운 것은 나라에 입은 은혜를 갚고자
함이라네.
편지에 등장하는 이 문장은 유광화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이유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왜군, 즉 일본군을 몰아내고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
나라의 제도를 바꾸는
혁명군이라기보다는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의병으로서의 의도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죽고 사는 것은 나라와 함께해야
한다.
왜군과 싸워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
유광화의 편지에는 나라를 위해 근심하는
그의 진심이 잘 담겨 있는데요.
유교의 충을 실천하고자 하는
양반으로서의 자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유광화처럼 양반층 내에서 농민군의 편에
서서 함께 싸운 사례를 적잖이 볼 수
있는데요.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어떤 동기가
있었을까요?
-(해설) 유교에서의 충은 국가 혹은 왕에
대한 정성을 다해야 하는 도덕 규범을
뜻합니다.
이는 유교의 핵심 가치 중 하나이기도
한데요.
하지만 동학농민군은 1차 봉기 당시 왕의
군대에 직접 맞서기도 했던 엄연한
혁명군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유교의 핵심 가치인 충과
상충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유광화는 조금 유교적 소양을 갖지만
어떻게 보면 진보적인 또는 앞서나가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1차 봉기, 그러니까 일본이 우리를
침범하고 이런 과정에서 고종을 중점으로
한 왕의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조선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더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해서 이런 왜적을 몰아내는 데 어떤
역할을 했다.
이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설) 유학을 공부한 양반층 중에서는
민보군을 조직하거나 민보군에 가담한
사례도 많습니다.
민보군은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유생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군대였습니다.
민보군이 되어 농민군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 중에는 훗날 의병이 되어
순국한 사례도 적잖이 있습니다.
유광화는 양반층으로서는 민보군이 되어
농민군의 진압에 앞장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신분적 질서보다는
나라와 공동체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더 우선순위에 있었을 겁니다.
-사실은 2차 봉기가 일어날 때 많은
유생들에게 참여를 요청했지만 참여하지
않은 사람도 많이 있었거든요.
그 사람들이 생각할 때 지금 상황에서
조선의 역사 속에서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교 성리학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민보군을 조직해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했다.
이렇게 볼 수 있겠고 그것보다는
조선이라고 하는 공동체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 가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동학에
참여한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그러한
두 가지 관점에서 어떤 입장과 태도를
가질 것인지.
이것에 대한 가치 판단이 들어갔을
것이다.
이런 부분이 들고...
-(해설) 당시의 시대 상황을 짐작해 보면
양반층 내에서도 상당한 갈등이 있었을
겁니다.
가치관에 따라 함께 싸울 수도, 서로에게
총과 칼 끝을 들이밀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같은 스승 아래에서 공부한
죽마고우끼리도 이런 상황을 겪었다고
하는데요.
동학농민군 대접주 이방언과 유학자
김한섭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방언 장군이라고 대접주가 있습니다.
본명이 이정석입니다.
그런데 그 이정석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편지를 제가 찾았습니다.
동학에 1892년에 들어가는데 들어가기
전 1890년에 면암 최익현 선생한테 보낸
편지입니다.
면암 선생한테 편지를 보낼 정도 되면
보통 이상의 유학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시기에 똑같이 자흥에 살고 있던
친구들이 편지를 같이 보냅니다.
한 분은 이방언 대접주 그리고 한 명은
학자로 유명한 오남 김한섭 그리고 또
한 명은 사복재 송진봉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 분은 유학자로 한 분은
동학으로 나가죠.
같이 공부를 했는데, 같은 선생님
밑에서 공부를 했는데 오남 김한섭
선생이나 아까 그런 분들이 동학으로
가지 말고 다시 오라고 계속 회유를
하고 어쩔 때는 약간 협박을 했겠죠.
그런데 결국은 동학을 따라서 갑니다.
그러니까 동문록에서 말하자면 제자들
명단에서 오려내는 것을 삭적이라고
하거든요.
그런 것을 이렇게 했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습니다.
결국은 두 사람 다 싸우게 되죠.
그래서 동학군하고 싸우다가 오남
김한섭 선생은 먼저 동학군한테 절명을
하고 이방언 장군, 이정석 선생은 한번
잡혔다가 풀려났다가 그다음에 5월에
아들하고 두 분이 처형을 당합니다.
-지금까지 첩첩 고개 다 넘었는데...
-(해설) 유광화의 휘하에는 700명의
농민군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요.
그는 농민군의 군수 물자와 보급을
담당하는 지휘관이었습니다.
고초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당시의 상황은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유광화가 이 편지를 쓴 시기는 1894년
11월경으로 추정되는데요.
11월의 추운 날씨에 허허벌판에서 이불
하나 없이 잠을 청하는 건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보급이었습니다.
700명의 농민군을 이끄는 대장,
유광화의 입장에서 이들을 무장시키고
먹여 살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농민군은 이 문제를 어떤
방법으로 해결했을까요?
-(해설)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당시에
농민군 주력 부대는 공주를 거쳐 서울로
북상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손화중과 최경선이 이끄는
부대는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는데요.
나주가 여전히 점령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광화는 손화중과 최경선이 이끄는
농민군에 합류해 나주 일대에서
활동했습니다.
-나주 같은 경우에는 7월 5일 무렵에
나주읍성 서성문에서 109명의
동학농민군이 현장에서 총살을 당하는,
그럴 만큼의 대규모 말하자면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 편지가 써진 9월쯤에는 이미 상당
규모의 전쟁, 접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때라 이렇게 보입니다.
-여러 자료나 기록을 보더라도 이게
군자금을 또는 실제 군수 물자를 어떻게
조달했는지 별로 그렇게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은데 지금 이 편지를 통해서
내가 일전에 한번 군수 물자를 요청해서
잘 받았다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이번에 다시 한번 요청하니까
어렵지만 군수 물자를 조달해 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약탈하고 또는 재산을 함부로 탈취하고
이런 것을 취하지 않았다고 보여져요.
그래서 가능하면 자체적으로 물자를
조달했다, 이렇게 보여집니다.
-(해설) 집안의 도움을 통해서라도
힘겹게 군대를 이끌어가던 유광화.
혼란한 전시 상황이었음에도 백성을
약탈하거나 남의 것을 뺏지는
않았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공동체를 지키고자
했던 유광화의 진심을 엿볼 수
있는데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편지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농민군은 혹독한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에게 처참하게 패하게
되는데요.
이후에 전투에도 계속해서 패하며
대부분의 농민군은 결국 해산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유광화는 최경선과 함께
끝까지 저항을 이어 나가게 됩니다.
-1894년 12월 1일, 손화중과 최경선은
광주에서 군대를 해산합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서도 최경선은 농민군
200명을 이끌고 끝까지 저항을 이어
나가는데요.
대부분의 농민군은 여기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유광화 역시도 이때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요.
그 날짜는 1894년 12월 10일이었습니다.
-내가 집을 나와 수년을 떠돌아다니며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으니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네.
광팔이 자네가 형 대신 집안을 돌보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하겠네.
우리가...
-(해설)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개인의 안위를 포기하고 목숨을 던진
유광화가 남긴 편지.
그의 손자 고 유길홍 선생이 소중히
간직해온 덕분에 이 편지는 오늘날 그
원본이 무사히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저로서는 증조할아버지 되시죠,
증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기념비 하셨을 때인
2006년 10월경에 저는 알았죠.
그 모든 일을 아버지가 손수 다 하셨기
때문에 저희한테는 야, 이런 일이 있다
정도.
그 이상은 저희한테 이야기를 많이 안
하셨습니다.
-(해설) 유상영 씨가 증조부 유광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인데요.
2006년 유광화기념비를 설립할 때
비로소 증조부가 동학농민혁명군
참여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유광화기념비를 설립하는 데
앞장섰던 분은 바로 유상영 씨의
아버지, 고 유길홍 선생이었습니다.
-돌아가신 부친께서 10대 때부터 고향을
떠나서 객지 생활을 하셨거든요.
식구들 생계를 위해서는 객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죠.
지금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그래도
동학 농민을 하셨던 분이라고 정부에서
인정을 해주셨잖아요.
그러니까 본인 입장에서는 굉장히
즐거우셨고 고맙고 그래서 보존하고
싶었던 거죠.
기념비를 세우셨죠, 시골에.
-(해설) 유상영 씨의 아버지, 고 유길홍
선생은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어릴
적부터 객지 생활을 했는데요.
조부 유광화의 기념비를 건립하는
일부터 조부의 희생과 진심을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반대급부적으로 더 본인이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컸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집안을 일으켜야겠다는.
-네, 그것이 제일 컸죠.
그래서 위선 사업도 많이 하시고 이런
기념비하고 유적비를 다 세우셨죠.
기념비를 세우시기 1년 전부터 굉장히
아버지가 바쁘시더라고요.
그리고 이 유적비하고 기념비를 세우신
후 몇 년 안 있다가 돌아가셨어요.
2006년도인데, 1년 있다가 돌아가셨네.
-어찌 보면 아버님께는 이 숙원, 평생을
갈 숙원 사업...
-그렇죠.
-같은 거겠네요, 진짜 보면.
-제가 생각할 때는 완전히 숙원
사업이에요.
-(해설)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선조의 자랑스러운 이야기.
그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해질
수 있었던 건 평생에 걸친 후손들의
노력 덕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오랜 세월만큼이나 남은
과제들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당연히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이 생기고
동학기념의 날이 생기고 그러면서 많은
인식 전환이 되고 있지만 아직도 항일
독립이라는 이것에 대한 인식은 조금
약한 측면이 있습니다.
2차 봉기 같은 경우는 민비 황후
시해라든지 청일전쟁이라든지 이런
것하고도 연결돼서 분명히 대상이
정확한 일본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국제
전쟁입니다.
독립유공자 서훈이 1895년 의병을
기준으로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1895년 초에 의병이 일어났으면 그 한
3개월이나 4개월 전에 1894년 12월,
10월에 3, 4개월 차이잖아요.
그 3, 4개월 차이를 동학하고 의병
독립하고 개입이 없이 연결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연계를 안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뭔가 독립 의병 하면 더 의미가 있는
거로 생각하고 동학 그러면 같은 의미가
있고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차등이 있는 것처럼
인식하는 우리 일반의 그거는
교육하고도 관련이 되겠죠.
올해가 130주년인데 이렇게 130년 세월
그러면 엄청나게 오랜 세월입니다.
기록이나 자료도 인멸되고 없애버리고
숨겨버리고 했었는데 지금에 와서
그것을 하려면 더 어렵겠지만
지금부터라도 더 체계적으로 찾고
정리하고 모으고 현창하고 명예를
회복해 주고 이런 것을 계속했으면
좋겠습니다.
감옥에서 다급하게 편지를 쓴다.
-(해설) 어머니, 300냥만 있다면 살아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제발 잊지
마시고 돈을 꼭 보내주세요.
-(해설) 감옥에서의 가혹했던 구타와
배고픔 그리고 추위를 견디다 못해
생사의 갈림길에서 어머니께 편지를 쓴
오늘의 주인공.
그는 바로 나주에서 활동하던 동학농민군
지도자 한달문이다.
그가 어머니께 보낸 이 편지는 몇 안
되는 농민군 측 기록물이자 유일무이한
농민군 한글 편지 기록물이다.
-세계기록유산 기록물을 등재하는
과정에서 다른 여러 가지 동학농민혁명
기록물보다 농민군이 직접 생산한
기록물, 이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해서
그 한달문 편지가 그 기록물 목록 첫
번째로 들어가 있습니다.
-(해설) 한달문이라는 인물과 그가 남긴
편지를 통해 당시 농민군이 겪어야 했던
가혹한 현실을 한번 들여다보자.
한달문 편지의 작성자 한달문의 묘는
그의 고향 전남 화순에 위치해 있습니다.
1859년에 태어난 그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앞날이 창창한 35살의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동시에 나주에서 활동하던
동학농민군 접주, 한마디로 지도자급
간부였는데요.
한달문은 나주에서 농민군 지도자로
활동하던 도중 1894년 12월 민보군에
의해 체포당하게 됩니다.
-이쪽 영아암 쪽에서 12월쯤에 전투를
벌이다 체포가 돼요.
그러다가 12월 20일경에 나주 감옥으로
이감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당시 감옥 상황이
아비규환이었거든요.
전라도 각지에서 체포된 이 적주급
동학농민군들은 일본군의 지시에 의해서
거의 나주감옥으로 보내졌습니다.
-(해설) 당시 한달문이 수감되었던 곳은
나주에 설치된 호남초토영의
감옥이었습니다.
이곳은 보통 감옥이 아니었습니다.
일본군과 관군은 우금치 전투를 끝내고
남은 동학농민군을 소위 싹쓸이하러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일본군과 관군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
나주였고 그곳에 본부 초토영에 설치된
감옥이었기 때문입니다.
동학군 토벌의 총사령관 미나미 고시로는
호남의 각 수령들에게 이런 지시 사항을
보냅니다.
-모든 농민군을 잡아들이되 두령은
특별히 현지에서 처형하지 말고 나주로
보내라.
-(해설) 즉 나주로 압송된 농민군은
대부분 호남의 군현에서 특별히 선별된
지도자급 인물이었던 겁니다.
-나주 감옥이 비좁다 보니까 토굴을
만들어서 임시로 수용했고 그 시기가 또
한겨울이었기 때문에 환경이 추위와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먹을 것도 제대로 못
입고 이런 상황이었죠.
게다가 구타와 고문을 받았기 때문에
나주감옥에 갇혀 있었던 그 많은
동학농민군이 거의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습니다.
-(해설) 당시 나주의 감옥 인근은
난장판이었습니다.
나주 감옥으로 압송된 혐의자들은
수성군 수백 명에게 둘러싸여
몽둥이질과 집단 린치를 당했습니다.
잡혀 온 농민군은 짐승처럼 끌려다녔고
그들을 구하러 온 가족과 친지들은
찢어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지옥을 방불케 하는 이곳에서
수감자들의 친지들은 뇌물을 바치기
위해 돈 꾸러미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고 합니다.
당시 나주 감옥에 수감돼 이 현장을
직접 경험한 농민군 지도자 김낙철은 그
전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해설) 군교들이 몽둥이, 철편, 주장을
들고 세 시간 동안 발로 차고 때리는데
그 광경은 입으로 옮길 수 없는
지경이었다.
토굴에 들어간 사람들이 인삼 줄기처럼
묶여 있었다.
사람들은 어깨가 부러지고 옆구리 뼈가
부서져 피가 냇물처럼 흘렀다.
-(해설) 당시 나주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한달문 역시도 이와 같은 상황을
겪고 있었을 텐데요.
어쩌면 퀘퀘한 토굴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몰래 써내려
갔을 그 편지.
이 편지는 그에게 유일한 희망이었을
겁니다.
-(해설) 어머님께 올립니다.
어머니와 헤어진 후로 소식이 없어
막막했습니다.
멀리 가셨으니 돌아가신 줄만 알고
답답했습니다.
나주에서 죽을 고생하다가 한 사람을
통해 소자의 토시를 동봉하여 보내어
어머님 함께 오시길 기다렸더니 12월
20일 오늘 나주 옥으로 오게 되니
소식이 끊어지고 노자 한 푼 없어 굶어
죽게 되어서 너무 원통합니다.
돈 300냥이 있다면 어진 사람을 통해 살
묘책이 있어서 급히 사람을 보내니
어머님 불효한 자식을 급히
살려주십시오.
그간 집안 유고를 몰라 기록하니 어머님
혹 편찮으시거든 다른 사람이라도 와야
하겠습니다.
부디부디 명심하고 잊지 마시고 즉시
오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드릴 말씀이 많지만 만나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그만 적습니다.
의복 상하벌, 보신 한 벌, 토시 한 벌,
주의 한 벌, 망건, 노자 3냥을 이
사람과 함께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시 오실 수 없으시다면 의복을 지어
한기수를 통해 보내주십시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이 있으면 소위
말하는 백이 있으면 더 빠져나올 수
있는 여지는 상당히 많이 있었죠.
-(해설) 그렇다면 당시 300냥은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졌을까요?
-(해설) 넉넉한 살림을 갖춘 지방 양반
출신으로 추정되는 한달문.
그렇다면 여기에 두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첫째 양반 지주층이었던 한달문은 왜
관군이 아닌 농민들의 편에서
싸웠을까요?
둘째 유학과 한자를 기본으로 공부하는
양반층이 왜 한글로 편지를 썼을까요?
-당시 한달문의 어머니 입장에서 잠시
생각해 보면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 아들
걱정에 밤잠 이룰 새 없었을 겁니다.
-(해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한달문 편지의 기증자이자 한달문의
친손자 한우회 씨를 찾았습니다.
-저분이 어머님한테 보낸 서신이 돈
300냥을 보내주면 어진 사람 만나서
나올 수 있다고 돈을 좀 보내주라고
그러셨더라고요.
그래도 그 골짜기에서 살면 여름에 쌀밥
먹으려면 우리 집 일을 왔다 간다고
말이 그래요.
그 골짜기에서 제일 살았어요, 거기서.
그 살 일을 삭 벗겨버리고 역적으로
몰리니까 그때 말로는 3대를 멸한다고
했지 않아요, 죄를 지으면.
실은 우리가 그렇게 해서 뺏겨버리고
2월이 올 때는 아무것도 없이 몸만
왔어요, 우리.
여기 와서 몸뚱이로 벌어서 먹고살았죠.
-(해설) 동학농민군 후손들 중에는 주로
증손자와 고손자가 많은데요.
한우회 씨는 그중 흔치 않은 직계
손자입니다.
올해로 만 88살에 접어든 한우회 씨는
아버지에게도 친척들에게도 할아버지
한달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전남 화순에 기반을 잡고 있던 한달문의
가문 친척들은 동학농민혁명 이후 모두
뿔뿔이 흩어졌는데요.
역적의 오명을 피해 떠나온 한달문의
손자.
한우회 씨의 가족은 그렇게 이곳 나주에
무일푼으로 정착하게 됐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왜냐 그러면
할아버지가 죄를 많이 지어서 이러고
사니까 그런 줄 알으라고만 해.
그러고 말을 안 했어요, 더.
그러니까 빈 몸뚱이로 나와서 형편이
거지처럼 하다시피 하고 살았지.
그때는.
그러다가 이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데
그때 피신하면서 우리 족보만 챙긴다고
고리짝이 있더구먼요.
거기에다가 족보하고 옥중 서신하고 전부
새로 들어 있었어.
한 30년이 되었나 20년 되었나 모르겠어.
큰아버지가 쓴 서책이 있어, 글씨를 쓴
책이.
그랬더니 그 속에 들어 있었어, 옥중
서신이.
-(해설) 평생 존재조차 몰랐던
할아버지의 편지가 발견돼 세상에 나온
건 불과 3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한우회 씨 큰아버지가 남긴 책 속에서
우연히 발견된 할아버지의 한달문의
편지.
한달문의 편지는 당시 옥중 서신이라는
이름으로 학계를 떠들썩하게 했는데요.
그제서야 한우회 씨도 할아버지가
죄인이 아니라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지도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평생 역적의 오명을 쓸까 두려워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야기조차 입에
담을 수 없었을 한우회 씨의 가족들.
할아버지 한달문의 사연을 비로소 알게
됐을 당시의 감정을 한우회 씨가
회상합니다.
-그때는 나도 그때 알았다 해도 별
관심도 없고 그러니까 먹고 살기만
열심히 힘쓰고 그러지 뭐 그런 생각도
못 할, 기회도 없었고 생각도 안 나고
그랬었어요.
그렇게 세상을 살다가 이제서야 지금
이렇게라도 사니까 다행이라고 보지.
-(해설) 나주 감옥에 수감된 자들은
물을 마실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죄인의 가족이 뇌물을 바쳐야 비로소
밥을 먹을 수 있었고 장작을 사와야
온돌을 데워줬다고 합니다.
토시와 버선을 부탁한 한달문 역시도
12월의 매서운 추위를 버티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겁니다.
뇌물을 바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운명을 겪었을지는
불 보듯 뻔할 수 있습니다.
제때 구명 받지 못한 자들은 가차 없이
형장의 이슬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한 일본군 병사의
일기에 따르면 일본군이 나주에 머무는
한 달 동안 무려 680명의 농민군이
처형당했다고 합니다.
그 시체는 이곳저곳에 버려져 당시 나주
전역이 시체 썩는 냄새로 가득했고 이름
없는 묘가 주변을 뒤덮었다고 합니다.
그 끔찍했던 나주 감옥은 현재 흔적조차
사라지고 없는데요.
-처음에는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토벌
작전은 한마디로 토끼 사냥
작전이었습니다.
하나는 동로중대, 서로중대, 중로중대로
나누어서 남쪽으로 진군을 해
들어갑니다.
동학농민군을 서남단으로 몰기 위해서는
어떠한 중대를 먼저 내보내야겠어요?
동쪽에 있는 일본군이 먼저 출발해야
하죠.
그래서 이 동로중대는 충주로 해서
제천으로 해서 경상도로 해서 밀어내는
전략이었거든요.
동학농민군을 전라도 서남단으로 몰아간
것이죠.
-(해설) 마치 토끼몰이 사냥을 하듯
동학농민군을 전라도 서남단으로
쫓아가며 토벌한 일본군의 전략.
그들은 농민군이 다른 지역이나 외국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세 방향으로 포위해서
내려오며 이른바 싹쓸이를 해
나갔습니다.
바로 이 과정에서 동학농민혁명 최대의
전면전 우금치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이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무서운
기세로 남쪽으로 내려와 남은 농민군
세력을 해체하고 체포했습니다.
-전라도 서남단으로 쫓겨 내려간
동학농민군을 마지막 진압하는 데 있어서
본거지 역할을 한 것이 나주입니다.
그러면 일본군은 왜 나주에 어떤
진압 본부를 설치했느냐 하면 나주 같은
경우에는 동학농민군한테 함락당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나주성은
안전 지역이었습니다.
-(해설) 당시 전라도에서 전주 다음으로
큰 도시 나주.
농민군은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지만 나주는 결코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일본군이 나주로 진군하자 일본군
대대장 미나미 고시로는 나주의 금성관에
토벌 본부를 치합니다.
조선시대 왕을 모시던 의례 공간이자
지방에 출장 온 사신이 지냈던 공간이
일본군의 토벌 본부가 된 겁니다.
동학농민군의 세력은 우금치 전투 이후
크게 꺾이지만 일본군의 추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농민군을 끝까지 토벌하려고
했을까요?
-후환을 방지하는 거였죠.
워낙 동학농민군 세력이 막강했고 당시
그 일본군은 청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이었는데 이때 일본이 가장 신경을
많이 쓴 것은 다른 나라들의
정세였습니다.
특히 다른 나라 중에서도 러시아가
청일전쟁에 개입을 하면 안 되기 때문에
러시아의 동정을 예의주시했거든요.
특히 동학농민군이 북쪽으로 올라가서
러시아와 결탁해서 일본군에 대항을 하지
않을까.
이런 걱정들을 많이 했습니다.
이 때문에 후환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
싹을 미리 예방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예방 학살이죠.
-(해설) 또한 당시 청나라와 전쟁
중이던 일본은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조선에 전초기지를 설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방 곳곳에 자리 잡은 농민군
세력은 일본군의 보급 기지를 파괴하기도
했고 물자 수송을 방해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조선을
점령하고 이를 발판으로 대륙으로
진출하려던 일본에게 동학농민군은
반드시 싹을 잘라야 할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싹을 자르는 과정은
예상했듯이 비인간적이고
잔인했습니다.
-가장 흔한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은
총 개머리판 있죠.
개머리판으로 때려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더라고요.
전라도 같은 경우에는 불태워 죽이거나
아니면 총검술을 하기 위해서 총검
연습용으로 동학농민군을 죽이기도 하고
조선 정부에서 처형한 방식은 목을 베서
죽이는 방식이라든가 이게 가장
많고요.
그다음 일부 지역 같은 경우에는 작두로
목을 잘랐다는 지역도 있는데 충남
태안이라든가 몇 군데 지역에서 확인이
되는 것 같아요.
-(해설) 동학농민군은 그렇게 끔찍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찔려 죽고 불타서 죽고 목이 잘려 죽고
맞아서 죽고.
누군가는 갇힌 채로 추위와 배고픔에
말라 죽었습니다.
부유한 양반이었고 지켜야 할 집안과
식구들이 있었을 아버지이자 남편
한달문.
그에게는 많은 선택지가 있었을
겁니다.
누군가는 많은 재산과 선택지를 활용해
관직을 얻기도 했고 누군가를 줄을 대어
친일파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뒤에는 부귀영화가 따랐습니다.
하지만 한달문이 선택한 길의 끝에는
본인의 죽음과 한순간에 길바닥으로
내몰려 역적이라는 오명을 견뎌야 했을
자식과 손주들의 모진 세월이
있었습니다.
이제 내일모레 아흔을 바라보는 한우회
씨는 그 세월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원망스럽지는 않으셨나요?
원망스럽지는 않으셨어요?
-원망이요?
원망은 안 했죠.
내가 그 사실을 안다고 하더라도 내가
어려서 모르는 일이었고 아버지도 이리
오셔서 뭣도 없이 살다 보니까 일하다가
공사판에 일하러 가셔서 흙차를 밀다가
허벅다리가 부러져 버렸어요.
그래서 그때 병원도 별로 없지만 돈도
없고 그러니까 병원에도 못 가고 그러고
계시다가 돌아가시고.
세상사를 얼척 없이 살았어요.
할아버지 묘에 비를 해서 비석을 다
세워놨으니까 내가 할 일은 다 했구나
싶어요.
-(해설)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
유광화라는 인물이 썼던 편지 한 장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동학농민군의 치열한 전투 현장에서
농민군 측 지휘관이 동생에게 보낸
편지인데요.
-(해설) 번거로운 인사말을 접어두고
동생 광팔 보시게.
나라가 환난에 처하면 백성도 근심해야
한다네.
집을 나와 수년을 떠돌아다니며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으니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네.
광팔이 자네가 형 대신 집안을 돌보고
있으니 다행이라 하겠네.
우리가 왜군과 함께 오랫동안 싸운 것은
나라에 입은 은혜를 갚고자 함이라네.
그러나 상황이 몹시 어려워서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자리 삼는 고초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네.
전에 보내준 얼마간의 재물은 유용하게
썼다네.
근래 사정이 그전보다 어려워서 다시
한번 돈을 이 인편에 보내주길 청하니
다시 살펴 보내주게.
아주 급하네.
바라고 또 바라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뜻에 달려 있네.
나라의 운명과 뒷일은 맏동생에게
부탁하겠네.
몹시 바빠 예를 갖추지 못했네.
-(해설) 2023년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는데요.
이 편지는 등재된 총 185건의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동학농민군이 남긴 기록으로써 한문
편지로써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편지입니다.
그래서 유광화 편지 내용에는
동학농민군이 어떻게 군자금을
조성했는지 전투 중에 어떤 처지에
있었는지 이런 것들을 좀 알 수 있는
사료적인 가치도 있기 때문에 그것이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이렇게 볼 수
있고 그런 중요성을 인정받아서
문화재청에서 지정하는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고.
-(해설) 오늘은 이 편지의 작성자
유광화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가 남긴 이 기록은 농민군이 남긴
유일한 한문 편지인데요.
유려한 문장을 한문으로 썼다는 사실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소위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본인이 남긴 편지의 문장으로 봤을
때도 상당히 수준이 높은 한문
문장이어서 유학을 제대로 공부한
유학자, 양반 출신이고 아버지가
통정대부 이렇게 직품을 받은 그게
실직인지 여부는 더 확인이 필요하지만
상당히 높은 벼슬을 받은 기록들이
족보나 비문이 나오기 때문에 전통적인
양반가에서 성장했고 바로 앞이 영산강
줄기가 이렇게 있는 평야 지대가,
지금은 나주호가 들어서 있지만.
그래서 어떤 농업 생산량이 높았던
지역이고.
-(해설) 부유한 지주이자 양반집
후손이었던 유광화.
아쉬울 것 하나 없이 살 수 있었던
유광화.
그는 왜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자리
삼는 고초를 겪어가며 농민군의 편에서
싸웠을까요?
-1894년 유광화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유광화는 글 꽤 쓴다는 양반들
사이에서도 문장가로 이름난 지방의
유명한 유생이었습니다.
평상시였다면 양반인 유광화는 과거
시험을 준비하며 입신양명을 꿈꿨을
겁니다.
반면 나라가 위기에 처했다면 의병이
되어 나라를 위해 싸웠을 겁니다.
여기서 유광화는 민중의 편에 서서
외세에 맞서 싸웁니다.
-(해설) 유광화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게 된 정확한 계기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1894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통해
짐작해 볼 수는 있는데요.
1894년에는 탐관오리의 횡포와 수탈.
그리고 나라의 과도한 세금에 견디다
못해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납니다.
농민군은 이때 한양에서 보낸 왕의
군대까지 격파하고 전라도의 수부,
전주성을 점령하는데요.
이 시기를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라고
부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동학농민혁명은
구시대적 봉건주의를 없애는 게 주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1894년 6월 21일을 분기점으로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6월 21일 경복궁은 일본군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일본 공사관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파견된 일본군은 경복궁을 공격하는 것도
모자라 왕 고종을 포로로 잡게
됩니다.
바로 이 사건을 계기로 동학농민군에게는
외세를 몰아내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가
생기게 됩니다.
반봉건을 외쳤던 동학농민혁명이
구국운동의 성격마저 띠면서 지배층인
양반층도 대거 참여할 계기가 된
것입니다.
-시적 또는 시기에 따라서 좀 달라지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1차 봉기의 경우에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고 그것을 추진한 사람들이 1차
봉기의 주도 세력으로서 자리매김했고
2차 봉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왜적
또는 왜놈들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 가장
중요한 어떤 관점이었고 특히 유광화도
그런 경우에 포함된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편지의 내용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보면
1차 봉기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고 2차 봉기에 참여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입니다.
-(해설) 우리가 왜군과 함께 오랫동안
싸운 것은 나라에 입은 은혜를 갚고자
함이라네.
편지에 등장하는 이 문장은 유광화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이유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왜군, 즉 일본군을 몰아내고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
나라의 제도를 바꾸는
혁명군이라기보다는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의병으로서의 의도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죽고 사는 것은 나라와 함께해야
한다.
왜군과 싸워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
유광화의 편지에는 나라를 위해 근심하는
그의 진심이 잘 담겨 있는데요.
유교의 충을 실천하고자 하는
양반으로서의 자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유광화처럼 양반층 내에서 농민군의 편에
서서 함께 싸운 사례를 적잖이 볼 수
있는데요.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어떤 동기가
있었을까요?
-(해설) 유교에서의 충은 국가 혹은 왕에
대한 정성을 다해야 하는 도덕 규범을
뜻합니다.
이는 유교의 핵심 가치 중 하나이기도
한데요.
하지만 동학농민군은 1차 봉기 당시 왕의
군대에 직접 맞서기도 했던 엄연한
혁명군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유교의 핵심 가치인 충과
상충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유광화는 조금 유교적 소양을 갖지만
어떻게 보면 진보적인 또는 앞서나가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1차 봉기, 그러니까 일본이 우리를
침범하고 이런 과정에서 고종을 중점으로
한 왕의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조선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더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해서 이런 왜적을 몰아내는 데 어떤
역할을 했다.
이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설) 유학을 공부한 양반층 중에서는
민보군을 조직하거나 민보군에 가담한
사례도 많습니다.
민보군은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유생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군대였습니다.
민보군이 되어 농민군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 중에는 훗날 의병이 되어
순국한 사례도 적잖이 있습니다.
유광화는 양반층으로서는 민보군이 되어
농민군의 진압에 앞장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신분적 질서보다는
나라와 공동체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더 우선순위에 있었을 겁니다.
-사실은 2차 봉기가 일어날 때 많은
유생들에게 참여를 요청했지만 참여하지
않은 사람도 많이 있었거든요.
그 사람들이 생각할 때 지금 상황에서
조선의 역사 속에서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교 성리학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민보군을 조직해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했다.
이렇게 볼 수 있겠고 그것보다는
조선이라고 하는 공동체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 가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동학에
참여한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그러한
두 가지 관점에서 어떤 입장과 태도를
가질 것인지.
이것에 대한 가치 판단이 들어갔을
것이다.
이런 부분이 들고...
-(해설) 당시의 시대 상황을 짐작해 보면
양반층 내에서도 상당한 갈등이 있었을
겁니다.
가치관에 따라 함께 싸울 수도, 서로에게
총과 칼 끝을 들이밀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같은 스승 아래에서 공부한
죽마고우끼리도 이런 상황을 겪었다고
하는데요.
동학농민군 대접주 이방언과 유학자
김한섭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방언 장군이라고 대접주가 있습니다.
본명이 이정석입니다.
그런데 그 이정석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편지를 제가 찾았습니다.
동학에 1892년에 들어가는데 들어가기
전 1890년에 면암 최익현 선생한테 보낸
편지입니다.
면암 선생한테 편지를 보낼 정도 되면
보통 이상의 유학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시기에 똑같이 자흥에 살고 있던
친구들이 편지를 같이 보냅니다.
한 분은 이방언 대접주 그리고 한 명은
학자로 유명한 오남 김한섭 그리고 또
한 명은 사복재 송진봉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 분은 유학자로 한 분은
동학으로 나가죠.
같이 공부를 했는데, 같은 선생님
밑에서 공부를 했는데 오남 김한섭
선생이나 아까 그런 분들이 동학으로
가지 말고 다시 오라고 계속 회유를
하고 어쩔 때는 약간 협박을 했겠죠.
그런데 결국은 동학을 따라서 갑니다.
그러니까 동문록에서 말하자면 제자들
명단에서 오려내는 것을 삭적이라고
하거든요.
그런 것을 이렇게 했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습니다.
결국은 두 사람 다 싸우게 되죠.
그래서 동학군하고 싸우다가 오남
김한섭 선생은 먼저 동학군한테 절명을
하고 이방언 장군, 이정석 선생은 한번
잡혔다가 풀려났다가 그다음에 5월에
아들하고 두 분이 처형을 당합니다.
-지금까지 첩첩 고개 다 넘었는데...
-(해설) 유광화의 휘하에는 700명의
농민군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요.
그는 농민군의 군수 물자와 보급을
담당하는 지휘관이었습니다.
고초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당시의 상황은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유광화가 이 편지를 쓴 시기는 1894년
11월경으로 추정되는데요.
11월의 추운 날씨에 허허벌판에서 이불
하나 없이 잠을 청하는 건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보급이었습니다.
700명의 농민군을 이끄는 대장,
유광화의 입장에서 이들을 무장시키고
먹여 살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농민군은 이 문제를 어떤
방법으로 해결했을까요?
-(해설)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당시에
농민군 주력 부대는 공주를 거쳐 서울로
북상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손화중과 최경선이 이끄는
부대는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는데요.
나주가 여전히 점령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광화는 손화중과 최경선이 이끄는
농민군에 합류해 나주 일대에서
활동했습니다.
-나주 같은 경우에는 7월 5일 무렵에
나주읍성 서성문에서 109명의
동학농민군이 현장에서 총살을 당하는,
그럴 만큼의 대규모 말하자면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 편지가 써진 9월쯤에는 이미 상당
규모의 전쟁, 접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때라 이렇게 보입니다.
-여러 자료나 기록을 보더라도 이게
군자금을 또는 실제 군수 물자를 어떻게
조달했는지 별로 그렇게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은데 지금 이 편지를 통해서
내가 일전에 한번 군수 물자를 요청해서
잘 받았다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이번에 다시 한번 요청하니까
어렵지만 군수 물자를 조달해 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약탈하고 또는 재산을 함부로 탈취하고
이런 것을 취하지 않았다고 보여져요.
그래서 가능하면 자체적으로 물자를
조달했다, 이렇게 보여집니다.
-(해설) 집안의 도움을 통해서라도
힘겹게 군대를 이끌어가던 유광화.
혼란한 전시 상황이었음에도 백성을
약탈하거나 남의 것을 뺏지는
않았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공동체를 지키고자
했던 유광화의 진심을 엿볼 수
있는데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편지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농민군은 혹독한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에게 처참하게 패하게
되는데요.
이후에 전투에도 계속해서 패하며
대부분의 농민군은 결국 해산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유광화는 최경선과 함께
끝까지 저항을 이어 나가게 됩니다.
-1894년 12월 1일, 손화중과 최경선은
광주에서 군대를 해산합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서도 최경선은 농민군
200명을 이끌고 끝까지 저항을 이어
나가는데요.
대부분의 농민군은 여기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유광화 역시도 이때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요.
그 날짜는 1894년 12월 10일이었습니다.
-내가 집을 나와 수년을 떠돌아다니며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으니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네.
광팔이 자네가 형 대신 집안을 돌보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하겠네.
우리가...
-(해설)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개인의 안위를 포기하고 목숨을 던진
유광화가 남긴 편지.
그의 손자 고 유길홍 선생이 소중히
간직해온 덕분에 이 편지는 오늘날 그
원본이 무사히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저로서는 증조할아버지 되시죠,
증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기념비 하셨을 때인
2006년 10월경에 저는 알았죠.
그 모든 일을 아버지가 손수 다 하셨기
때문에 저희한테는 야, 이런 일이 있다
정도.
그 이상은 저희한테 이야기를 많이 안
하셨습니다.
-(해설) 유상영 씨가 증조부 유광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인데요.
2006년 유광화기념비를 설립할 때
비로소 증조부가 동학농민혁명군
참여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유광화기념비를 설립하는 데
앞장섰던 분은 바로 유상영 씨의
아버지, 고 유길홍 선생이었습니다.
-돌아가신 부친께서 10대 때부터 고향을
떠나서 객지 생활을 하셨거든요.
식구들 생계를 위해서는 객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죠.
지금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그래도
동학 농민을 하셨던 분이라고 정부에서
인정을 해주셨잖아요.
그러니까 본인 입장에서는 굉장히
즐거우셨고 고맙고 그래서 보존하고
싶었던 거죠.
기념비를 세우셨죠, 시골에.
-(해설) 유상영 씨의 아버지, 고 유길홍
선생은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어릴
적부터 객지 생활을 했는데요.
조부 유광화의 기념비를 건립하는
일부터 조부의 희생과 진심을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반대급부적으로 더 본인이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컸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집안을 일으켜야겠다는.
-네, 그것이 제일 컸죠.
그래서 위선 사업도 많이 하시고 이런
기념비하고 유적비를 다 세우셨죠.
기념비를 세우시기 1년 전부터 굉장히
아버지가 바쁘시더라고요.
그리고 이 유적비하고 기념비를 세우신
후 몇 년 안 있다가 돌아가셨어요.
2006년도인데, 1년 있다가 돌아가셨네.
-어찌 보면 아버님께는 이 숙원, 평생을
갈 숙원 사업...
-그렇죠.
-같은 거겠네요, 진짜 보면.
-제가 생각할 때는 완전히 숙원
사업이에요.
-(해설)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선조의 자랑스러운 이야기.
그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해질
수 있었던 건 평생에 걸친 후손들의
노력 덕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오랜 세월만큼이나 남은
과제들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당연히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이 생기고
동학기념의 날이 생기고 그러면서 많은
인식 전환이 되고 있지만 아직도 항일
독립이라는 이것에 대한 인식은 조금
약한 측면이 있습니다.
2차 봉기 같은 경우는 민비 황후
시해라든지 청일전쟁이라든지 이런
것하고도 연결돼서 분명히 대상이
정확한 일본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국제
전쟁입니다.
독립유공자 서훈이 1895년 의병을
기준으로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1895년 초에 의병이 일어났으면 그 한
3개월이나 4개월 전에 1894년 12월,
10월에 3, 4개월 차이잖아요.
그 3, 4개월 차이를 동학하고 의병
독립하고 개입이 없이 연결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연계를 안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뭔가 독립 의병 하면 더 의미가 있는
거로 생각하고 동학 그러면 같은 의미가
있고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차등이 있는 것처럼
인식하는 우리 일반의 그거는
교육하고도 관련이 되겠죠.
올해가 130주년인데 이렇게 130년 세월
그러면 엄청나게 오랜 세월입니다.
기록이나 자료도 인멸되고 없애버리고
숨겨버리고 했었는데 지금에 와서
그것을 하려면 더 어렵겠지만
지금부터라도 더 체계적으로 찾고
정리하고 모으고 현창하고 명예를
회복해 주고 이런 것을 계속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