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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스페셜 - 선화공주
등록일 : 2025-02-10 15:31:35.0
조회수 : 468
-(해설) 삼국유사에 남겨진 국경을 뛰어넘는 세기의 러브스토리.
그 주인공은 백제 30대 무왕입니다.
어린 시절 마를 캐던 백제 서동이 적국이었던 신라에 잠입한 뒤 빼어난 지략을 발휘해 아름답기로 소문난
선화 공주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는 이야기인데요.
대한민국 사람 가운데 서동과 선화 이야기를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익산에 자리한 두 기의 왕릉급 무덤.
쌍릉으로 불리던 이 무덤은 서동 설화의 주인공인 무왕과 선화 공주의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 미륵사지 사탑을 발언해 만든 이가 선화 공주가 아닌 백제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인 왕비로 확인되면서
1000년이 넘는 이야기는 한순간에 의구심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렇다면 사라져 버린 선화 공주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녀가 묻힌 것으로 알려진 익산의 소왕릉.
지난 2019년 마침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게 되죠.
-두 왕릉 가운데 먼저 발굴한 대왕릉은 그 안에 놓여 있던 인골을 분석한 결과
서동 설화의 주인공인 무왕의 영원한 안식처였음이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이 소왕릉에서는 무덤 주인을 명확히 알 수 있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요. 다행히도 선화 공주를 떠올릴 수 있는 단서가 이 안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익산 천도를 단행했던 백제 30대 무왕과 선화 공주 그녀의 실체를 밝히는 여정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해설) 고대 도성이 갖춰야 할 모든 요소가 가장 잘남아 있는 곳.
바로 전북특별자치도의 익산입니다. 백제 왕궁터의 흔적이 명확히 드러난 유네스코 세계유산 왕궁리 유적.
고대 궁궐의 원형이 모범 답안처럼 남아 있습니다.
남북으로 길쭉한 축구장 모양을 한 왕궁터에 정중앙에 자리한 정원은 백제 왕실의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설이죠.
자연적인 구릉에 인공적인 물길을 만들고 수입한 정원석으로 꾸민 기술력과 화려함의 극치라 말할 수 있죠.
마치 초콜릿 바처럼 생긴 이 특이한 돌은 중국에서 들여와 정원을 장식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궁궐 건축의 백미라고 말할 수 있는 정원은 아마도 이런 모습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익산에 자리한 또 하나의 세계유산인 미륵사지.
백제의 사상적인 구심점 역할을 했던 국가 사찰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규모 또한 최대를 자랑하는 미륵사지 서탑은
1400여 년 전 익산의 위상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죠.
이 미륵사의 창건과 관련된 이야기는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서동 설화라고 부르는 백제 30대 무왕 이야기가 바로 그건데요.
그 뒷부분에 동양 최대라 일컬어질 정도로 웅장한 규모를 자랑했던 미륵사가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알려주는 기원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해설) 미륵사지에 자리한 국립익산박물관.
익산 백제를 말해 주는 유물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곳입니다.
미륵사 승방의 지붕을 장식했던 치미라고 불리는 이 기와는 보는 이를 압도하기에 충분하죠.
그리고 바로 앞에 놓인 이런 기와는 미륵사지에서 나온 것으로 특별히 녹색 유약을 발라 구운 겁니다.
이 특별한 기와는 고대의 국가에서는 왕권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것이죠.
때문에 이 푸르스름한 빛을 띤 반짝이는 기와가 미륵사의 위상을 단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셈이죠.
그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보시는 이것은 미륵사지에서 나온 녹색의 유리입니다.
당시 금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았던 유리를 직접 생산했던 증거인 도가니까지.
미륵사는 과연 어떤 곳이었을지 궁금해집니다.
1974년 동탑이 있던 터에서 첫 삽을 뜬 것을 시작으로 무려 17년에 걸쳐 백제의 타임캡슐을 개봉하게 됩니다.
세 개의 탑과 세 개의 금당이 하나로 합쳐진 대규모 사찰.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독특한 형태였습니다.
삼국유사에 남겨진 미륵사지 창건설을 믿는 사람은 얼마나 됐을까요?
하룻밤 사이에 연못을 메우고 그곳에 미륵사를 지었다는 설화는 허황한 이야기로만 여겨졌던 게 사실이었죠.
그런데 땅속에 잠들어 있던 유물이 하나둘씩 깨어나면서 그 진실이 드러나게 된 거죠.
-삼국유사에 실린 미륵사 창건 설화를 믿기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순식간에 못을 메워? 그렇게 큰 규모의 사찰을 하룻밤 만에 만들 수가 있냐는 거죠.
그런데요. 이는 역사적 사실과 불교적 영험이 결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거대한 미륵사가 조성된 다음에서야 이 창건 설화가 만들어진 것이지 만들 당시 모습을 기록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해설) 그러니까 설화는 역사 그 자체일 수는 없지만 역사를 반영한 기록일 수는 있다는 건데요.
쉽게 말하자면 미륵사가 지어질 당시의 상황을 직접 보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훗날 사람들이 이렇게 거대한 미륵사를 두고 창건과 관련된 이야기를 남겨 놓았다는 거죠.
이를 정리해 보면 서동설화 자체가 바로 역사의 설화화가 진행된 결과물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에 실린 미륵사 창건 설화를 다시 살펴볼까요?
선화공주는 무왕과 함께 사자사로 향하다가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서 미륵삼존을 만나게 됩니다.
부인인 선화는 이곳에 큰 절을 지를 것을 간청하게 되고 무왕이 이를 받아들여 미륵사를 짓게 되는데요.
이 거대한 미륵사의 시작이 바로 선화공주였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선화공주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로 그 미모가 출중해 온 나라에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기록은 삼국유사에만 남아 있습니다.
흔히들 경사라고 말하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선화공주 이야기가 남아 있지 않아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죠.
-(해설) 거기에 더해 선화가 신라의 공주라는 대목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서동설화의 주인공, 무왕은 즉위한 지 불과 2년 만인 서기 602년 신라를 향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섭니다.
기록에 따르면 무왕은 신라와 14번의 크고 작은 전쟁을 벌이는데 대부분 백제의 선제공격이었습니다.
자기네 나라와 이렇게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가정해 본다면
선화가 신라의 공주였을 가능성이 낮다는 거죠.
-(해설) 미륵산 중턱에 자리한 이 작은 사찰의 이름은 사자암.
한동안 이곳은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미륵사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그 사자사가 맞는지를 두고 수많은 알아보시고가 오고 갔던 건데요.
다행히 발굴 조사를 통해 사자사라는 글씨가 확인됨으로써 그간의 논쟁의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사자사의 실제는 서동과 선화 이야기에 더욱 힘을 실어주게 되죠.
세계유산인 익산 미륵사지와 왕궁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사자사는
익산이 백제의 수도였음을 말해주는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하죠.
-(해설) 아름답기로 소문난 선화 공주의 존재를 다르게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뚜렷이 나와 있는 것처럼 미륵사를 짓도록 무왕에게 간청한 이가 바로 선화 공주인데요.
선화 공주의 남편인 무왕의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는 의미도 있지만
불교적인 관념 세계에서 보면 이상적인 제왕의 뜻도 담겨 있습니다.
때문에 모두가 행복한 불국토를 간절히 원했던 무왕의 왕비인 그녀에게
훗날 사람들이 연꽃을 떠올리게 하는 선화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는 거죠.
-(해설) 거대한 2개의 고분이 자리해 쌍릉으로 불렸던 익산왕릉원.
그 가운데 대왕릉 발굴을 통해 확인된 사실은 세상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습니다.
백제 왕릉의 전형적인 형태는 물론 그 안에 놓여 있던 인골 분석을 통해
대왕릉의 주인이 그 모습을 드러낸 건데요.
-그 패턴을 관찰했을 때 남성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해설) 과학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분석했더니 무덤에 잠들어 있던 이는 남성이며
키는 대략 160에서 170cm로 시대상을 고려했을 때 상당히 큰 편에 속했습니다.
나이는 60대가량. 사망 시기는 서기 620년에서 659년 사이로 추정이 가능했습니다.
이는 서기 600년의 주기에 641년 세상을 떠난 백제 30대 무왕의 일대기와 그 시기가 일치합니다.
-삼국사기에는 무왕의 풍채가 훌륭했다고 적어놨는데요.
이런 내용도 조사 결과의 맞아떨어지는 대목이었습니다.
때문에 대왕릉의 주인이 누구일까를 두고 벌어진 역사학계의 오랜 논쟁의 마침표를 찍게 된 거죠.
-(해설) 대왕릉에서 불과 180m 거리에 자리한 소왕릉.
그 규모만 작을 뿐 내부 구조는 무왕릉으로 밝혀진 대왕릉과 동일한 형태였습니다.
당연히 왕비가 묻혔다는 데 학계의 이견은 없는 상태.
그런데 문제는 그 왕비가 누구냐는 거죠.
당연히 삼국유사에 전해 오는 신라의 선화 공주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이를 입증할 수 있는 뚜렷한 증거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소왕릉의 주인이 지난 2009년 미륵사지 서탑 해체 복원 과정에서
명확히 드러난 사택적덕의 딸인 즉 사택왕후일 가능성을 떠올려 보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할 겁니다.
-(해설) 학계에서는 서동설화의 주인공 무왕에게는 최소 2명 이상의 왕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4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왕위를 지켰기에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는데요.
그런데 우리가 흔히 오해하기 쉬운 사실이 있습니다.
-(해설) 이런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소왕릉에 잠들어 있던 이가 서동 설화의 주인공인 선화공주일 수도 있고.
미륵사지사탑을 발원해 만든 사택 왕후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무왕과 왕비 이름으로 알려진 익산 쌍릉의 실체를 밝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이병호 교수.
그는 익산 소왕릉의 주인이 사택 왕비는 아니라고 주장하는데요.
그 근거는 바로 목관에 사용된 금동 장신구.
그 문양과 제작 기법을 살펴보면 대왕릉의 것이 소왕릉의 것보다 훨씬 세련됐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해설) 그러니까 결국 이 화려한 금동 장신구가 왕비가 묻힌 소왕릉이 무왕의 것인 대왕릉보다
먼저 만들어졌음을 말해 주는 결정적 단서라는 거죠.
-(해설) 이런 상황에서 이병호 교수가 생각하는 익산 소왕릉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해설) 이병호 교수가 소왕릉 주인이 사택 왕후가 아닌 선화공주일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는 또 있습니다.
소왕릉에서 나온 산 모양을 한 이 유물의 제작 시기는 7세기 전반.
-(해설) 익산 쌍릉이 부부 묘라고 가정했을 때 무왕이 즉위한 600년 이후.
즉 7세기 전반에 세상을 떠난 또 다른 왕비였던 선화공주를 떠올려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것입니다.
-무왕과 왕비 능이 익산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익산이 무왕 대에 천도한 수도였음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왕비 능이 분명히 소왕릉에서 백제 왕릉에서는 단 한 번도 확인된 적이 없는 유물이 그 모습을 드러내
저를 비롯한 연구자들을 설레게 했는데요.
발굴 당시 확인된 의문의 돌기둥 두 점이 바로 그겁니다.
-(해설) 일제강점기였던 1917년. 일본인들이 파헤쳤던 익산의 쌍릉.
그리고 100년 만에 우리의 손길로 다시 시작된 대왕릉 발굴.
이를 통해 백제 30대 무왕이 대왕릉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함으로써 백제사에 한 획을 긋게 됩니다.
그리고 2년 뒤, 다시 소왕릉의 주인을 찾기 위한 도전장을 던지게 되는데요.
-(해설) 과연 이 왕비 능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요?
2019년 가을, 소왕릉을 굳게 지키고 있던 고인돌을 들어 올리자 정교하게 다듬어진 석실이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많이 뚫렸어요, 저기 위로. 대왕릉보다 더 많이 뚫린 것 같아.
-좀 많이 뚫렸네. 저쪽 저기.
-(해설) 도굴을 당한 흔적이 역력한 돌방 안에는 어떤 부장품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발굴조사단의 이목을 끈 것은 무덤에서 발견된 두 개의 묘표석이었습니다.
첫 번째 것은 길이 1.1m, 너비는 0.5m가 약간 넘는 기둥 모양으로 윗부분은 둥글고 아래쪽은 사각형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묘표석은 석실 입구에서 안쪽으로 약 1m가량 떨어진 곳에서 비스듬한 채로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 높이는 1.25m. 앞면은 매우 정교했고 뒷면은 약간 볼록한 형태였습니다.
이런 돌로 만든 묘표석은 백제 왕릉급 무덤에서는 단 한 번도 확인된 적이 없는 아주 특별한 유물이었죠.
-무덤은 전통성과 보수성이 가장 강력하게 반영되는 고고학적 자료입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일본식이 아닌 우리 공유의 장례 문화를 지켜갔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면 왜 백제 고분에서는 단 한 번도 확인된 적이 없는 묘표석이 익산소왕릉에서 나온 걸까요.
이에 대한 연구가 더 이루어진다면 언젠가는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해설) 사비시대, 백제왕과 왕비가 잠들어 있는 부여왕릉원.
왕궁과 마찬가지로 고대국가에서 능원은 그 나라 수도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 가운데 하나죠.
마찬가지로 익산에 자리한 무왕릉과 왕비능도 익산이 백제의 왕도였음을 분명히 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부여 능산 위에 있는 왕릉왕과 그 형태가 비슷해 백제왕릉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죠.
-(해설) 그렇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소왕릉에 잠들어있는 백제 왕비가 누구일지를 추정해 볼까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소왕릉의 것으로 알려진 유물의 연대를 고려해 볼 때 무덤 주인이 사택왕후일 가능성은
아주 낮습니다.
때문에 서동설화에 나오는 선화공주를 떠올려볼 수 있는 거죠.
여기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소왕릉 옆에 자리한 대왕릉의 주인이
서동설화의 주인공인 백제 30대 무왕이라는 거죠.
지금부터는 무왕이 잠들어 있는 대왕릉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까요.
쌍릉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에 최초로 등장합니다.
고조선의 무강왕과 그 비의 능.
속칭으로 말통대왕릉이라 부르는데 백제 무왕의 어릴 적 이름이 서동이라고 적어놨습니다.
고려사가 쓰여진 것은 조선 초기.
이 거대한 무덤의 주인공을 고조선 무강왕으로 보는 한편 백제 무왕의 능이라고 생각하는
두 가지 인식이 혼재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럼 당시에는 쌍릉을 어떤 이유에서 고조선, 즉 마한 왕의 무덤으로 인식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해설) 1970년대 일본인 학자가 찾아낸 익산천도 문헌에서도 이런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왕대에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내용이 담긴 관세음응험기에도 백제 무왕을 무강왕이라고 적어 놨습니다.
백제 무강왕이 지모밀지, 지금의 익산 땅으로 천도하고 제석 정사를 세웠는데 훗날 화재로 소실됐다는 겁니다.
땅속에 묻혀 있던 제석사의 실체가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 기록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일 사찰로는 백제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제석사를 세운 이가 바로 여기에 잠들어 있는 겁니다.
-백제 30대 왕이 잠들어 있는 대왕릉은 마한의 무강왕 무덤으로도 불려 왔습니다.
그런데요. 공주나 부여에 자리한 백제왕릉에서는 이러한 예를 찾아볼 수가 없죠.
사람들의 기억 속에 마한의 왕이자, 백제의 왕으로 자리하고 있는 서동 설화의 주인공 무왕.
그렇다면 선화 공주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해설) 일반적으로 정사라고 말하는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백제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라고 적어 놨는데요.
그런데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꽤나 많습니다.
-(해설) 그렇다면 여기에서 백제 왕위 계보를 잠깐 살펴볼까요?
부여로 천도를 단행한 성왕의 아들로 4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재위를 지켰던 위덕왕.
그다음 해왕과 법왕이 차례로 즉위를 하죠.
그리고 서동으로 불리던 백제 30대 무왕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눈여겨 볼 대목은 다름 아닌 재위 기간입니다.
선대 왕들이 1년마다 자리를 내주게 되는데 이는 특별한 상황을 떠올리게 하죠.
-(해설) 위태로운 백제 왕실을 지키기 위해 도움의 손길을 내민 상대는 당시 익산을 중심으로 한
마한 토착 세력일 가능성이 있는 겁니다.
유물과 유적을 통해 그려본 백제 영역권 지도를 살펴보면 한강 유역을 빼앗긴 상황에서
마한 세력은 무시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을 겁니다.
서동과 선화의 이야기가 남아 있는 삼국유사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추정해 볼 수 있는 글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서동이 금으로 인심을 얻어 왕이 됐다는 대목입니다.
-(해설) 고대 국가에서 경제력의 상징과도 같은 너른 평야가 펼쳐진 풍요의 땅 익산.
지도를 통해 왕궁성이 있었던 익산 일대를 조망해 보면
예부터 생명의 젖줄인 만경강과 금강이 서해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선진 문물의 교류가 빈번해 경제의 중심지가 됐을 겁니다.
그런 이유에서 고조선 준왕이 배를 타고 내려와 정착한 곳도 바로 이곳 익산이었을 겁니다.
이제 그 화려했던 익산의 역사가 하나둘씩 깨어나면서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무왕의 생가터를 찾던 가운데 백제 왕실에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하 저장고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죠.
이처럼 익산에 잠들어 있는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은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익산 왕비릉에서 확인된 묘표석. 백제 고군에서는 최초의 발견이었죠.
무덤 주인은 여전히 누구라고 명확히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세월을 이겨낸 두 개의 돌기둥이 무덤 주인과 함께 묻힌 이유는 분명할 겁니다.
-지금까지 삼국유사에 실린 서동설화를 중심으로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선화공주와 그녀의 남편인 무왕의 발자취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서동설화는 단순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뛰어 넘는 그 이상의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은
이제 시청자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
백제 30대 무왕과 그의 부인이었던 미륵사의 발언자, 선화 왕비가 백제 중흥의 큰 꿈을 펼쳤던 곳이
마한이 시작된 땅이자 백제의 새로운 수도, 익산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해설) 익산이 백제의 수도였음을 명백히 증언하는 두 개의 왕릉.
그 가운데 왕비릉의 주인공이 누구였을지를 두고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덤 안에서 나온 것이 확실한 목관 장식을 통해
서동설화의 주인공인 선화 공주의 존재를 떠올려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왕릉의 주인인 그녀의 남편 무왕.
무라는 시호에서도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그는 매우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새로운 백제를 건설하고자 했을 겁니다.
자신이 나고 자란 익산에서 말이죠. 선화 공주의 염원을 담아 무왕이 세웠다는 미륵사.
선화와 무왕이라는 그 이름 어딘가에 모두가 행복한 이상 세계, 백제를 바라는 꿈이 담겨 있을 겁니다.
그 주인공은 백제 30대 무왕입니다.
어린 시절 마를 캐던 백제 서동이 적국이었던 신라에 잠입한 뒤 빼어난 지략을 발휘해 아름답기로 소문난
선화 공주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는 이야기인데요.
대한민국 사람 가운데 서동과 선화 이야기를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익산에 자리한 두 기의 왕릉급 무덤.
쌍릉으로 불리던 이 무덤은 서동 설화의 주인공인 무왕과 선화 공주의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 미륵사지 사탑을 발언해 만든 이가 선화 공주가 아닌 백제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인 왕비로 확인되면서
1000년이 넘는 이야기는 한순간에 의구심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렇다면 사라져 버린 선화 공주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녀가 묻힌 것으로 알려진 익산의 소왕릉.
지난 2019년 마침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게 되죠.
-두 왕릉 가운데 먼저 발굴한 대왕릉은 그 안에 놓여 있던 인골을 분석한 결과
서동 설화의 주인공인 무왕의 영원한 안식처였음이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이 소왕릉에서는 무덤 주인을 명확히 알 수 있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요. 다행히도 선화 공주를 떠올릴 수 있는 단서가 이 안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익산 천도를 단행했던 백제 30대 무왕과 선화 공주 그녀의 실체를 밝히는 여정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해설) 고대 도성이 갖춰야 할 모든 요소가 가장 잘남아 있는 곳.
바로 전북특별자치도의 익산입니다. 백제 왕궁터의 흔적이 명확히 드러난 유네스코 세계유산 왕궁리 유적.
고대 궁궐의 원형이 모범 답안처럼 남아 있습니다.
남북으로 길쭉한 축구장 모양을 한 왕궁터에 정중앙에 자리한 정원은 백제 왕실의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설이죠.
자연적인 구릉에 인공적인 물길을 만들고 수입한 정원석으로 꾸민 기술력과 화려함의 극치라 말할 수 있죠.
마치 초콜릿 바처럼 생긴 이 특이한 돌은 중국에서 들여와 정원을 장식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궁궐 건축의 백미라고 말할 수 있는 정원은 아마도 이런 모습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익산에 자리한 또 하나의 세계유산인 미륵사지.
백제의 사상적인 구심점 역할을 했던 국가 사찰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규모 또한 최대를 자랑하는 미륵사지 서탑은
1400여 년 전 익산의 위상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죠.
이 미륵사의 창건과 관련된 이야기는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서동 설화라고 부르는 백제 30대 무왕 이야기가 바로 그건데요.
그 뒷부분에 동양 최대라 일컬어질 정도로 웅장한 규모를 자랑했던 미륵사가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알려주는 기원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해설) 미륵사지에 자리한 국립익산박물관.
익산 백제를 말해 주는 유물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곳입니다.
미륵사 승방의 지붕을 장식했던 치미라고 불리는 이 기와는 보는 이를 압도하기에 충분하죠.
그리고 바로 앞에 놓인 이런 기와는 미륵사지에서 나온 것으로 특별히 녹색 유약을 발라 구운 겁니다.
이 특별한 기와는 고대의 국가에서는 왕권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것이죠.
때문에 이 푸르스름한 빛을 띤 반짝이는 기와가 미륵사의 위상을 단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셈이죠.
그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보시는 이것은 미륵사지에서 나온 녹색의 유리입니다.
당시 금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았던 유리를 직접 생산했던 증거인 도가니까지.
미륵사는 과연 어떤 곳이었을지 궁금해집니다.
1974년 동탑이 있던 터에서 첫 삽을 뜬 것을 시작으로 무려 17년에 걸쳐 백제의 타임캡슐을 개봉하게 됩니다.
세 개의 탑과 세 개의 금당이 하나로 합쳐진 대규모 사찰.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독특한 형태였습니다.
삼국유사에 남겨진 미륵사지 창건설을 믿는 사람은 얼마나 됐을까요?
하룻밤 사이에 연못을 메우고 그곳에 미륵사를 지었다는 설화는 허황한 이야기로만 여겨졌던 게 사실이었죠.
그런데 땅속에 잠들어 있던 유물이 하나둘씩 깨어나면서 그 진실이 드러나게 된 거죠.
-삼국유사에 실린 미륵사 창건 설화를 믿기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순식간에 못을 메워? 그렇게 큰 규모의 사찰을 하룻밤 만에 만들 수가 있냐는 거죠.
그런데요. 이는 역사적 사실과 불교적 영험이 결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거대한 미륵사가 조성된 다음에서야 이 창건 설화가 만들어진 것이지 만들 당시 모습을 기록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해설) 그러니까 설화는 역사 그 자체일 수는 없지만 역사를 반영한 기록일 수는 있다는 건데요.
쉽게 말하자면 미륵사가 지어질 당시의 상황을 직접 보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훗날 사람들이 이렇게 거대한 미륵사를 두고 창건과 관련된 이야기를 남겨 놓았다는 거죠.
이를 정리해 보면 서동설화 자체가 바로 역사의 설화화가 진행된 결과물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에 실린 미륵사 창건 설화를 다시 살펴볼까요?
선화공주는 무왕과 함께 사자사로 향하다가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서 미륵삼존을 만나게 됩니다.
부인인 선화는 이곳에 큰 절을 지를 것을 간청하게 되고 무왕이 이를 받아들여 미륵사를 짓게 되는데요.
이 거대한 미륵사의 시작이 바로 선화공주였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선화공주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로 그 미모가 출중해 온 나라에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기록은 삼국유사에만 남아 있습니다.
흔히들 경사라고 말하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선화공주 이야기가 남아 있지 않아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죠.
-(해설) 거기에 더해 선화가 신라의 공주라는 대목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서동설화의 주인공, 무왕은 즉위한 지 불과 2년 만인 서기 602년 신라를 향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섭니다.
기록에 따르면 무왕은 신라와 14번의 크고 작은 전쟁을 벌이는데 대부분 백제의 선제공격이었습니다.
자기네 나라와 이렇게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가정해 본다면
선화가 신라의 공주였을 가능성이 낮다는 거죠.
-(해설) 미륵산 중턱에 자리한 이 작은 사찰의 이름은 사자암.
한동안 이곳은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미륵사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그 사자사가 맞는지를 두고 수많은 알아보시고가 오고 갔던 건데요.
다행히 발굴 조사를 통해 사자사라는 글씨가 확인됨으로써 그간의 논쟁의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사자사의 실제는 서동과 선화 이야기에 더욱 힘을 실어주게 되죠.
세계유산인 익산 미륵사지와 왕궁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사자사는
익산이 백제의 수도였음을 말해주는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하죠.
-(해설) 아름답기로 소문난 선화 공주의 존재를 다르게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뚜렷이 나와 있는 것처럼 미륵사를 짓도록 무왕에게 간청한 이가 바로 선화 공주인데요.
선화 공주의 남편인 무왕의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는 의미도 있지만
불교적인 관념 세계에서 보면 이상적인 제왕의 뜻도 담겨 있습니다.
때문에 모두가 행복한 불국토를 간절히 원했던 무왕의 왕비인 그녀에게
훗날 사람들이 연꽃을 떠올리게 하는 선화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는 거죠.
-(해설) 거대한 2개의 고분이 자리해 쌍릉으로 불렸던 익산왕릉원.
그 가운데 대왕릉 발굴을 통해 확인된 사실은 세상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습니다.
백제 왕릉의 전형적인 형태는 물론 그 안에 놓여 있던 인골 분석을 통해
대왕릉의 주인이 그 모습을 드러낸 건데요.
-그 패턴을 관찰했을 때 남성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해설) 과학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분석했더니 무덤에 잠들어 있던 이는 남성이며
키는 대략 160에서 170cm로 시대상을 고려했을 때 상당히 큰 편에 속했습니다.
나이는 60대가량. 사망 시기는 서기 620년에서 659년 사이로 추정이 가능했습니다.
이는 서기 600년의 주기에 641년 세상을 떠난 백제 30대 무왕의 일대기와 그 시기가 일치합니다.
-삼국사기에는 무왕의 풍채가 훌륭했다고 적어놨는데요.
이런 내용도 조사 결과의 맞아떨어지는 대목이었습니다.
때문에 대왕릉의 주인이 누구일까를 두고 벌어진 역사학계의 오랜 논쟁의 마침표를 찍게 된 거죠.
-(해설) 대왕릉에서 불과 180m 거리에 자리한 소왕릉.
그 규모만 작을 뿐 내부 구조는 무왕릉으로 밝혀진 대왕릉과 동일한 형태였습니다.
당연히 왕비가 묻혔다는 데 학계의 이견은 없는 상태.
그런데 문제는 그 왕비가 누구냐는 거죠.
당연히 삼국유사에 전해 오는 신라의 선화 공주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이를 입증할 수 있는 뚜렷한 증거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소왕릉의 주인이 지난 2009년 미륵사지 서탑 해체 복원 과정에서
명확히 드러난 사택적덕의 딸인 즉 사택왕후일 가능성을 떠올려 보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할 겁니다.
-(해설) 학계에서는 서동설화의 주인공 무왕에게는 최소 2명 이상의 왕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4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왕위를 지켰기에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는데요.
그런데 우리가 흔히 오해하기 쉬운 사실이 있습니다.
-(해설) 이런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소왕릉에 잠들어 있던 이가 서동 설화의 주인공인 선화공주일 수도 있고.
미륵사지사탑을 발원해 만든 사택 왕후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무왕과 왕비 이름으로 알려진 익산 쌍릉의 실체를 밝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이병호 교수.
그는 익산 소왕릉의 주인이 사택 왕비는 아니라고 주장하는데요.
그 근거는 바로 목관에 사용된 금동 장신구.
그 문양과 제작 기법을 살펴보면 대왕릉의 것이 소왕릉의 것보다 훨씬 세련됐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해설) 그러니까 결국 이 화려한 금동 장신구가 왕비가 묻힌 소왕릉이 무왕의 것인 대왕릉보다
먼저 만들어졌음을 말해 주는 결정적 단서라는 거죠.
-(해설) 이런 상황에서 이병호 교수가 생각하는 익산 소왕릉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해설) 이병호 교수가 소왕릉 주인이 사택 왕후가 아닌 선화공주일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는 또 있습니다.
소왕릉에서 나온 산 모양을 한 이 유물의 제작 시기는 7세기 전반.
-(해설) 익산 쌍릉이 부부 묘라고 가정했을 때 무왕이 즉위한 600년 이후.
즉 7세기 전반에 세상을 떠난 또 다른 왕비였던 선화공주를 떠올려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것입니다.
-무왕과 왕비 능이 익산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익산이 무왕 대에 천도한 수도였음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왕비 능이 분명히 소왕릉에서 백제 왕릉에서는 단 한 번도 확인된 적이 없는 유물이 그 모습을 드러내
저를 비롯한 연구자들을 설레게 했는데요.
발굴 당시 확인된 의문의 돌기둥 두 점이 바로 그겁니다.
-(해설) 일제강점기였던 1917년. 일본인들이 파헤쳤던 익산의 쌍릉.
그리고 100년 만에 우리의 손길로 다시 시작된 대왕릉 발굴.
이를 통해 백제 30대 무왕이 대왕릉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함으로써 백제사에 한 획을 긋게 됩니다.
그리고 2년 뒤, 다시 소왕릉의 주인을 찾기 위한 도전장을 던지게 되는데요.
-(해설) 과연 이 왕비 능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요?
2019년 가을, 소왕릉을 굳게 지키고 있던 고인돌을 들어 올리자 정교하게 다듬어진 석실이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많이 뚫렸어요, 저기 위로. 대왕릉보다 더 많이 뚫린 것 같아.
-좀 많이 뚫렸네. 저쪽 저기.
-(해설) 도굴을 당한 흔적이 역력한 돌방 안에는 어떤 부장품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발굴조사단의 이목을 끈 것은 무덤에서 발견된 두 개의 묘표석이었습니다.
첫 번째 것은 길이 1.1m, 너비는 0.5m가 약간 넘는 기둥 모양으로 윗부분은 둥글고 아래쪽은 사각형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묘표석은 석실 입구에서 안쪽으로 약 1m가량 떨어진 곳에서 비스듬한 채로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 높이는 1.25m. 앞면은 매우 정교했고 뒷면은 약간 볼록한 형태였습니다.
이런 돌로 만든 묘표석은 백제 왕릉급 무덤에서는 단 한 번도 확인된 적이 없는 아주 특별한 유물이었죠.
-무덤은 전통성과 보수성이 가장 강력하게 반영되는 고고학적 자료입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일본식이 아닌 우리 공유의 장례 문화를 지켜갔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면 왜 백제 고분에서는 단 한 번도 확인된 적이 없는 묘표석이 익산소왕릉에서 나온 걸까요.
이에 대한 연구가 더 이루어진다면 언젠가는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해설) 사비시대, 백제왕과 왕비가 잠들어 있는 부여왕릉원.
왕궁과 마찬가지로 고대국가에서 능원은 그 나라 수도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 가운데 하나죠.
마찬가지로 익산에 자리한 무왕릉과 왕비능도 익산이 백제의 왕도였음을 분명히 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부여 능산 위에 있는 왕릉왕과 그 형태가 비슷해 백제왕릉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죠.
-(해설) 그렇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소왕릉에 잠들어있는 백제 왕비가 누구일지를 추정해 볼까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소왕릉의 것으로 알려진 유물의 연대를 고려해 볼 때 무덤 주인이 사택왕후일 가능성은
아주 낮습니다.
때문에 서동설화에 나오는 선화공주를 떠올려볼 수 있는 거죠.
여기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소왕릉 옆에 자리한 대왕릉의 주인이
서동설화의 주인공인 백제 30대 무왕이라는 거죠.
지금부터는 무왕이 잠들어 있는 대왕릉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까요.
쌍릉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에 최초로 등장합니다.
고조선의 무강왕과 그 비의 능.
속칭으로 말통대왕릉이라 부르는데 백제 무왕의 어릴 적 이름이 서동이라고 적어놨습니다.
고려사가 쓰여진 것은 조선 초기.
이 거대한 무덤의 주인공을 고조선 무강왕으로 보는 한편 백제 무왕의 능이라고 생각하는
두 가지 인식이 혼재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럼 당시에는 쌍릉을 어떤 이유에서 고조선, 즉 마한 왕의 무덤으로 인식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해설) 1970년대 일본인 학자가 찾아낸 익산천도 문헌에서도 이런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왕대에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내용이 담긴 관세음응험기에도 백제 무왕을 무강왕이라고 적어 놨습니다.
백제 무강왕이 지모밀지, 지금의 익산 땅으로 천도하고 제석 정사를 세웠는데 훗날 화재로 소실됐다는 겁니다.
땅속에 묻혀 있던 제석사의 실체가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 기록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일 사찰로는 백제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제석사를 세운 이가 바로 여기에 잠들어 있는 겁니다.
-백제 30대 왕이 잠들어 있는 대왕릉은 마한의 무강왕 무덤으로도 불려 왔습니다.
그런데요. 공주나 부여에 자리한 백제왕릉에서는 이러한 예를 찾아볼 수가 없죠.
사람들의 기억 속에 마한의 왕이자, 백제의 왕으로 자리하고 있는 서동 설화의 주인공 무왕.
그렇다면 선화 공주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해설) 일반적으로 정사라고 말하는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백제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라고 적어 놨는데요.
그런데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꽤나 많습니다.
-(해설) 그렇다면 여기에서 백제 왕위 계보를 잠깐 살펴볼까요?
부여로 천도를 단행한 성왕의 아들로 4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재위를 지켰던 위덕왕.
그다음 해왕과 법왕이 차례로 즉위를 하죠.
그리고 서동으로 불리던 백제 30대 무왕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눈여겨 볼 대목은 다름 아닌 재위 기간입니다.
선대 왕들이 1년마다 자리를 내주게 되는데 이는 특별한 상황을 떠올리게 하죠.
-(해설) 위태로운 백제 왕실을 지키기 위해 도움의 손길을 내민 상대는 당시 익산을 중심으로 한
마한 토착 세력일 가능성이 있는 겁니다.
유물과 유적을 통해 그려본 백제 영역권 지도를 살펴보면 한강 유역을 빼앗긴 상황에서
마한 세력은 무시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을 겁니다.
서동과 선화의 이야기가 남아 있는 삼국유사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추정해 볼 수 있는 글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서동이 금으로 인심을 얻어 왕이 됐다는 대목입니다.
-(해설) 고대 국가에서 경제력의 상징과도 같은 너른 평야가 펼쳐진 풍요의 땅 익산.
지도를 통해 왕궁성이 있었던 익산 일대를 조망해 보면
예부터 생명의 젖줄인 만경강과 금강이 서해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선진 문물의 교류가 빈번해 경제의 중심지가 됐을 겁니다.
그런 이유에서 고조선 준왕이 배를 타고 내려와 정착한 곳도 바로 이곳 익산이었을 겁니다.
이제 그 화려했던 익산의 역사가 하나둘씩 깨어나면서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무왕의 생가터를 찾던 가운데 백제 왕실에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하 저장고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죠.
이처럼 익산에 잠들어 있는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은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익산 왕비릉에서 확인된 묘표석. 백제 고군에서는 최초의 발견이었죠.
무덤 주인은 여전히 누구라고 명확히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세월을 이겨낸 두 개의 돌기둥이 무덤 주인과 함께 묻힌 이유는 분명할 겁니다.
-지금까지 삼국유사에 실린 서동설화를 중심으로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선화공주와 그녀의 남편인 무왕의 발자취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서동설화는 단순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뛰어 넘는 그 이상의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은
이제 시청자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
백제 30대 무왕과 그의 부인이었던 미륵사의 발언자, 선화 왕비가 백제 중흥의 큰 꿈을 펼쳤던 곳이
마한이 시작된 땅이자 백제의 새로운 수도, 익산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해설) 익산이 백제의 수도였음을 명백히 증언하는 두 개의 왕릉.
그 가운데 왕비릉의 주인공이 누구였을지를 두고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덤 안에서 나온 것이 확실한 목관 장식을 통해
서동설화의 주인공인 선화 공주의 존재를 떠올려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왕릉의 주인인 그녀의 남편 무왕.
무라는 시호에서도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그는 매우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새로운 백제를 건설하고자 했을 겁니다.
자신이 나고 자란 익산에서 말이죠. 선화 공주의 염원을 담아 무왕이 세웠다는 미륵사.
선화와 무왕이라는 그 이름 어딘가에 모두가 행복한 이상 세계, 백제를 바라는 꿈이 담겨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