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기
테마스페셜 - 강정택, 기억과 기록
등록일 : 2025-04-07 17:42:48.0
조회수 : 79
-(해설) 나의 할아버지, 강정택.
-강정택 할아버님이 일단 천재였던 것 같아요.
할아버님의 필체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까 할아버님 일부라도 뵌 것 같습니다, 직접.
-(해설) 농업경제학의 1인자.
-짧은 인생을 사셨지만 큰일을 하셨지 않습니까?
-(해설) 그는 농지 개혁을 주도한 비운의 농정학자였습니다.
-(해설) 기억에는 희미하지만 기록에는 선명한 강정택에 대한 기억과
그의 기록에 관한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해설) 1988년 바로 그 해. 그는 일본 국립민족학박물관에서 뜻밖의 발견을 했습니다.
-저는 울산 출신이고요. 거기서 온 그렇게 많은 민속품들이 어떻게 여기 와 있나.
왜 이렇게 와 있을까. 이게 우리 고향에서 어떤 사연으로 여기 왔을까.
-(해설) 고향인 울산에서 온 수십 점의 민속품.
그걸 확인한 순간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웠던 건 수집자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때 컴퓨터에서는 강정택의 이 정 자가 쇠붙이 정 자인데 이게 일본 컴퓨터에는 없었어요.
그래서 비어 있었어요.
그래서 강O택으로 돼 있는데 여기 와서 처음 이렇게 강정택이라는 이름이 탁 튀어나왔을 때 우리 울산 어른이다.
-(해설) 수집자는 어릴 때 들었던 바로 그 울산의 천재 강정택이었습니다.
-저희가 가만히 있었으면 그냥 많이 있는 유물들의 그냥 하나뿐이었는데.
-(해설) 강정택은 이곳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고 그 이름을 불러준 사람이 바로 이문웅 교수였습니다.
12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인 강정택.
그는 울산 공립보통학교를 졸입하고 농협의 전신인 금융조합에서 약 1년 동안 사환으로 있었습니다.
학업에 뜻이 있었던 그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대구고보에 진학했고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본 교장 선생님의 권유로 일본 도쿄 제1고에 들어갔죠.
-날고 기는 사람들이 가는 데가 바로 1고인데 그 1고를 붙으니까
이건 정말 일본 사람들도 들으면 깜짝 놀랄 거예요.
-(해설) 그리고 보란 듯이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일본 여자의과대학을 나온 이간원과 결혼해 아들 주용을 얻었죠.
하지만 강정택은 자신의 아들 주용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해설) 강정택의 아들은 외삼촌 이종하의 아들이 되어 강주용이 아닌 이주용이 됐습니다.
그렇게 주용은 오롯이 이씨 집안의 후손으로만 살았던 거죠.
그것이 바로 이들의 미래를 바꾼 결정적 순간이었습니다.
-(해설) 자신이 양자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주용은 출생의 비밀을
알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해설) 자신의 운명을 마음대로 바꿔버린 것에 대해 그때 딱 한 번
친아버지인 강정택에게 따지듯 물었을 뿐 더는 그 일에 대해 묻지 않았습니다.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걸 그때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 해도 여보. 너무 그렇게...
-(해설) 아무리 돌이켜 봐도 다정했던 기억은 없고 무섭게만 느껴졌던 단 한 사람.
그가 바로 사촌 형이라 불렀던 주용의 아버지, 강정택이었습니다.
-집이 질서가 어지러워지니까.
-강정택 할아버지가 동경제국대학에서 농정을 갖다 계속...
-(해설) 슬픈 인생 이야기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오랫동안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20살에 가족의 비밀을 알았고 마흔 넘어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 했던 큰아들 상현 씨.
-(해설) 그때부터 기억이든 기록이든 혹은 그 무엇이든 강정택 할아버지의 흔적이라면 그 어디든 찾아 나섰던 거죠.
강정택이 무려 13년 동안 학생으로서 또 학자로서 가장 오랜 시간 머물렀던 일본 도쿄대학.
이곳에서 한국농업사를 전공한 농학부의 마츠모토 타케노리 교수를 만났습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이상현입니다.
-반갑습니다.
-25년.
-그러니까 100년 정도.
-그러면 100년 됐네요. 그럼 여기가 할아버님이 계셨던 건물이네요?
-(해설) 그가 안내한 곳은 졸업 논문 보관실.
-여기가 졸업 논문 서고입니다.
-(해설) 그는 오래전 이곳에서 1933년 농업경제학과를 졸업한 강정택의 졸업 논문을 찾아냈습니다.
-금융조합에 취, 취 뭔가요?
-감해서.
-감해서.
-(해설) 빛바랜 종이 위에 적힌 그의 친필.
-원본이군요.
-많이 쓰셨습니다.
-엄청 쓰셨네요. 거의 박사 논문이네.
-(해설) 금융조합을 주제로 한 그의 졸업 논문은 200쪽이 넘습니다.
-저는 번역한 것을 얼추 봤습니다, 저도. 어려워서.
그런데 원본을 보니까 또 느낌이 새롭네요.
-그렇게 달필은 아니시네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글씨를 잘 쓰시는 것은 아니네.
저희 아버님도 잘 글씨를 못 쓰시는데. 저희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할아버지를 만난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를 만난 것 같습니다.
-먼저 이 연구실이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은 졸업생 명부니까.
-이것은 졸업생 명부군요. 소화 56년.
-81년, 81년에.
-81년에.
-여기 있습니다.
-강정택 할아버님 동기분들이 교수님들이 되게 많으시네요.
-(해설) 도쿄제국대학에서의 강정택을 기억하는 또 한 사람은 그의 여동생, 강금복입니다.
-(해설) 강금복은 강정택과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오른 그의 첫째 여동생이죠.
아버지 이충영은 판사와 변호사를 지낸 법조인으로
강정택과는 대구 고부와 도쿄제대 동문이면서 둘도 없는 친구였습니다.
-(해설) 강정택에 관한 이야기는 여전히 흥미롭고 그의 흔적을 찾는 일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맞아요.
-(해설) 지난 2021년 울산박물관에서 열린 75년만의 귀향, 1936년 울산 달리
특별 기획전 역시 그 신기한 여정에 한 획을 긋는 일이었죠.
때는 1936년. 일본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학생들은 조선 농촌의 위생조사를 기획 중이었습니다.
그 무렵 도쿄제국대학 농학부의 부수였던 강정택은 고향인 울산에서 조선농촌사회
경제 조사를 하던 중이었고 위생조사단은 그의 도움을 받아 울산 달리에서 위생조사를 하기로 한 거죠.
그해 7월과 8월에 이뤄진 조선 농촌의 위생조사.
특별기획전은 그때 당시의 사진과 영상 그리고 마을에서 수집한 민속품이 75년 만에 다시 울산으로 돌아온 거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울산 달리를 권한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그는 일본 문화인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시부사와 게이조.
시부사와 게이조는 1927년 조선인 유학생을 지원하는 모임 자강회에서 강정택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첫 수혜자인 강정택을 단지 식민지의 가난한 유학생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해설) 민속학에 심취해 자신의 대저택 차고 다락방에 아틱뮤지엄을
만든 시부사와 게이조는 특히 서민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죠.
아틱뮤지엄에서 이름을 바꾼 상민문화연구소. 이곳에 1936년 위생조사때 사진이 있습니다.
-(일본어)
-(해설) 그 당시 시부사와 게이조가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면 강정택은
그 나머지 울산에서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해설) 위생조사 당시 조사 단원들의 숙소는 강정택이 살던 외삼촌 이종하의 집.
-여기 우리 누각, 누각이에요. 잠깐만.
-이게 우리 사랑채 위에 있는 누각이에요.
-누각.
-이 밑이 물이었어요. 여기가 이제 저희 울산 집의 본채입니다.
저희가 이게 집이 4채가 이렇게 돌려서 있거든요, 중간에 정원이 있고요.
-(해설)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동사를 조사본부로 하는 위생조사는 울산 달리에서 당시 한 달 넘게 이어졌습니다.
-초가집 같은 거나 빈농, 부농, 중농 이걸 보고서, 대단하다, 어떻게 살았을까.
집이 무너질 것 같은 집도 많이 봤고 사진을 보면서 많이 느꼈습니다.
-(해설) 위생조사단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강정택.
이미 울산에서 평화의원을 열고 산부인과 진료를 시작한 그의 부인 이간원 역시 조사단에 힘을 보탰습니다.
-여기 할머니 얘기가 나옵니다. 울산에서 개혁한 그 강군의 부인 이간원.
거의 갑자기 갑자기 소름이 끼쳤습니다. 너무 기뻤고요.
또 기대도 하지 않은 부분에서 할머니의 함자가 나오니까 너무 갑자기 할머니를 만난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어요.
-(해설) 강정택 부부의 노력으로 위생조사가 끝날 쯤 마을 주민들과
학생들은 함께 막걸리를 나눠 마시며 춤과 노래를 즐길 정도로 가까워졌습니다.
시부사와 게이조 역시 위생조사가 끝날 무렵 울산을 찾았습니다.
(일본어)
-어디가 강형이라고 돼 있어요? 강형 있네.
달리를 떠나기 전에 강형과 정치적 얘기를 했다. 여기 그러면 강정택.
-거기 계시다는 얘기네.
-할아버지가 계신다는 얘기네.
-그렇죠.
-한번 찍어 주세요.
-옆에서 한번 서볼까요? 닮았어요?
멋쟁이네요, 그래도 넥타이도 매시고.
-넥타이도 잘 맸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일본 와서 만나네.
-(일본어)
-찾고 싶죠, 거기 혹시 할아버지의 흔적이 있을까.
저분도 할아버지 같고 저분 할머니 같은데 다 그렇지는 않을 거고
1000km도 넘는 멀리 떨어진 곳에 이렇게 자료가 남아 있다는 거에 너무 감사합니다.
-(해설) 사실 1936년 조사는 세 가지가 한꺼번에 이루어졌습니다.
그 세 가지는 조선 농촌에 대한 강정택의 경제조사, 도쿄대 의학부의
위생조사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아틱뮤지엄의 민속조사였죠.
강정택의 지원으로 조선 농촌의 위생조사는 그 당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울산 달리민속조사에 참여했던 미야모토 케이타로.
여기는 그가 남긴 기록이 있는 미야모토 기념재단입니다.
-(일본어)
-시츠레이시마스.
-시츠레이시마스.
-(일본어)
-들어가시죠.
-시츠레이시마스.
-(일본어)
-신세 많이 졌어요.
-(해설) 16살 때부터 영화를 촬영했던 미야모토 케이타로.
그는 민속학자이기도 했습니다.
-(해설) 그가 남긴 것은 울산 달리마을 사람들과 풍경을 담은 기록 사진과 13분짜리 동영상.
-저도 그때 갔습니다.
-저도 그때 갔었대요.
-그때 오셨어요?
-전시회에 한국 관련 영상을 가지고 울산에 제가 갔어요.
-저도 있었는데.
-그럼 만났을 수도 있겠네요.
-(해설) 아버지가 1936년 울산 달리에서 찍은 그 사진을 들고 75년 만에 울산박물관을 찾았던 아들.
-딱 특징이 정사각형 사진이네요.
-(일본어)
-이게 6X6이라는 이 사진의 크기가 이 카메라예요.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아요.
(일본어)
-보이시냐고.
-잘 보입니다. 필름은 없죠?
-(일본어)
-(일본어)
-(해설) 가로세로 6cm의 이 작은 사진이 없었다면, 미야모토 케이타로가 기록하지 않았다면
달리마을 주민들과 젊은 날의 강정택은 마주할 수 없었을 겁니다.
-왠지 지금 마음이 두근두근거려요.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마음이 두근두근 설레네요.
-저도 제 인생에서 이런 일이 올지 몰랐어요.
-정말 좋은 추억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정말 좋은 추억이 되는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감사합니다.
-(해설) 시부사와 게이조는 강정택에 대해 진실로 강군은 농민들의 보모였고
초등학교의 선생님이고 때로는 마을의 촌장이고 재판관이며 고민해결소였고 또 어떤 때에는 심부름꾼이라고 말했죠.
그러면서 조선 농촌의 위생 조사는 강정택의 열정이 없었다면 실현할 수 없었을 거라고도 했습니다.
젊고 패기 넘치던 강정택. 그는 조선 농촌, 특히 고향인 울산에 남다른 애정을 쏟았습니다.
-(해설) 위생 조사가 끝나갈 무럽 강정택과 조사단이 마을에 남긴 또 하나의 선물은 바로 우물이었습니다.
마을 공동 우물이 단 세 곳뿐이던 그때 두 개를 더 팠고 그중 하나가 동사에 있었습니다.
-(해설) 1960년대까지도 우물 바로 옆 살구나무에는 강정택이 달아 놓은 불종이 있었지요.
-(해설) 그는 달리 의용 소방대와 여성 의용 소방단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낮에는 서당, 밤에는 야학당을 열어 문맹 퇴치에도 앞장선 농촌 계몽의 실천가였습니다.
강정택이 일본과 울산을 오가며 농정학자로서의 길을 걷고 있는 사이
그의 부인 이간원은 아들을 보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다 부부는 주용이 3살 때 어린 딸을 데리고 일본행을 선택했습니다.
-(해설) 윤진백은 강정택의 둘째 여동생인 강소복의 남편.
그는 어린 주용을 데리고 일본에 갔습니다.
-(해설) 하지만 그 꿈만 같았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해설) 일본을 떠나기 전 처음으로 가족사진을 찍었습니다.
마치 영원한 이별이 곧 다가올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가족사진을 찍을 때 경옥은 이제 막 두 돌을 지났을 때였습니다.
-(해설) 아들이 울산으로 돌아간 뒤 쌍둥이를 출산한 이간원.
하지만 갓 태어난 아이들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간원 마저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죠.
강정택에게 그때는 가장 비극적인 시간. 가장 가슴 아픈 이별이었습니다. 세 살 무렵.
가족과 헤어졌던 강경옥. 그녀는 지금 울산 최초의 여의사였던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1948년 강정택은 16년간의 긴 일본 생활을 접고 고국에 돌아와 광복을 맞았습니다.
그 무렵 그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또 다른 과제가 있었습니다.
-(해설) 대지주의 땅을 소작농에서 나눠줌으로써 농지의 소유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했던 대한민국의 농지 개혁.
강정택은 일찌감치 농지 개혁의 적임자로 지목되었습니다.
실제 강정택이 쓴 여덟 편의 논문 중 단 한 편을 제외하면 모두 조선 농촌을 향하고 있죠.
-(해설) 강정택이 최고 실력자임을 단박에 알아본 사람은 바로 초대 농림부 장관 조봉암.
-(해설) 외삼촌 이종하는 당시 대지주였음에도 강정택의 농림부 차관 임명에 더 적극적이었죠.
-(해설) 농림부 차관 강정택이 중심이 된 농지 개혁 실무 초안의 기본 원칙은 유상 매수, 유상 분배.
한 농가당 농지 소유는 2헥타르까지였습니다.
이는 당시 북한의 무상 몰수, 무상 분배보다 민주적이고 농가당 1헥타르로
제한한 일본보다도 더 혁신적인 안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안은 1949년 6월 21일 제정된 농지개혁법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해설) 결국 농지 개혁은 강정택이 그간 조선 농촌 연구에 쏟은 농정학자로서의 열정을 모두 불태운 결과였던 거죠.
-아버님.
-(해설) 주용은 강정택이 농림부 차관이던 시절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해설) 강정택과 주용이 함께한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농림부 차관에서 물러나 그 이듬해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너무나 짧았습니다.
-(해설) 1950년 7월 2일, 인민군에게 납북된 강정택.
그때 나이 마흔셋.
농정학자로서의 큰 꿈을 펼쳐보기도 전에 그의 시간은 완전히 멈춰버렸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여기 누워 있고. 여기 외삼촌은 강원도에 이렇게 돼 있고.
-(해설) 강정택이 납북되고 한 달이 조금 더 지나 이수성의 아버지, 이충영 역시 비슷한 상황과 맞닥뜨렸습니다.
-(해설) 처남, 매제 사이로, 일본 도쿄대 동문으로 젊은 날을 함께했던 농정학자와
법조인은 그렇게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버렸습니다.
-김치도 없이.
-김치가 없어.
-김치 없는 게...
-(해설) 지나온 길을 뒤 돌아보며 주용의 삶을 바꾼 사람은 그의 친부, 강정택이었습니다.
-상희, 상원이 이렇게 네 명이 다 있고.
-(해설) 1950년 미국 국무성에 초청된 강정택.
아들과 함께 더 넓은 세상에서 꿈을 펼치려고 했지만 전쟁으로 그 꿈은 무산되고 말았죠.
-서울에 놀러 갔을 때, 당신이.
-(해설) 그럼에도 그 당시 배운 영어는 훗날 주용이 미국 미시간대 경제학과에 입학하는 하나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해설) 경제학을 전공한 주용은 미시간대 사회과학연구소에서 접한 컴퓨터와의 인연으로
한국인 최초의 IBM 입사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IBM의 한국 대표로 귀국길에 오르며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그가 찾아간 사람은 바로 시부사와 게이조.
-(해설) 주용은 자신을 강정택의 아들이라고 밝혔습니다.
-(해설) 그때가 강정택이 납북되고 무려 13년이 흐른 1963년.
그가 쉰여섯이 되는 해였습니다. 여기가 바로 60여 년 전 아버지가 찾았다는 시부사와 집안의 대저택.
-(해설) 언젠가 고국으로 돌아와 더 큰 꿈을 펼치려 했던 조선인 유학생들.
강정택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게 다리인가? 저기 아니면 저쪽 건너편 같은데요. 여기 같은데.
여기 앉으셔서 호수를 내다보지 않았을까. 여기 보이는 뷰가 딱 제일 좋네요.
여기가 명당이네요.
-(해설) 문학을 전공했던 이인기와 권중휘.
법학도의 길을 간 이충영 그리고 농학부의 강정택.
그들은 대구 고보를 거쳐 일본 도쿄제국대학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하지만 훗날 각각 서울대와 영남대 총장을 역임한 권중휘, 이인기와 달리
낙폭 된 강정택과 이충영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었습니다.
1977년 강정택의 평생의 은인이자 주용의 양부였던 이종하는 종하체육관을 기부했습니다.
그리고 2021년 주용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종하체육관 자리에
다시 종하이노베이션센터를 지어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했죠.
착공한 지 2년여 만에 완공된 새로운 복합문화시설.
이곳에는 강정택의 학문적 업적을 되새기는 아주 특별한 공간도 함께 들어섰습니다.
-(해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파란만장한 한국 사회 중심에서
농정학자로서의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강정택.
-(해설) 비극적이었지만 찬란했고 짧았지만 강렬했던 삶.
-(해설) 고향인 울산과 조선 농촌 연구에 평생을 바친 강정택.
이제 강정택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천재 농정학자로 기억될 것입니다.
-강정택 할아버님이 일단 천재였던 것 같아요.
할아버님의 필체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까 할아버님 일부라도 뵌 것 같습니다, 직접.
-(해설) 농업경제학의 1인자.
-짧은 인생을 사셨지만 큰일을 하셨지 않습니까?
-(해설) 그는 농지 개혁을 주도한 비운의 농정학자였습니다.
-(해설) 기억에는 희미하지만 기록에는 선명한 강정택에 대한 기억과
그의 기록에 관한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해설) 1988년 바로 그 해. 그는 일본 국립민족학박물관에서 뜻밖의 발견을 했습니다.
-저는 울산 출신이고요. 거기서 온 그렇게 많은 민속품들이 어떻게 여기 와 있나.
왜 이렇게 와 있을까. 이게 우리 고향에서 어떤 사연으로 여기 왔을까.
-(해설) 고향인 울산에서 온 수십 점의 민속품.
그걸 확인한 순간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웠던 건 수집자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때 컴퓨터에서는 강정택의 이 정 자가 쇠붙이 정 자인데 이게 일본 컴퓨터에는 없었어요.
그래서 비어 있었어요.
그래서 강O택으로 돼 있는데 여기 와서 처음 이렇게 강정택이라는 이름이 탁 튀어나왔을 때 우리 울산 어른이다.
-(해설) 수집자는 어릴 때 들었던 바로 그 울산의 천재 강정택이었습니다.
-저희가 가만히 있었으면 그냥 많이 있는 유물들의 그냥 하나뿐이었는데.
-(해설) 강정택은 이곳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고 그 이름을 불러준 사람이 바로 이문웅 교수였습니다.
12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인 강정택.
그는 울산 공립보통학교를 졸입하고 농협의 전신인 금융조합에서 약 1년 동안 사환으로 있었습니다.
학업에 뜻이 있었던 그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대구고보에 진학했고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본 교장 선생님의 권유로 일본 도쿄 제1고에 들어갔죠.
-날고 기는 사람들이 가는 데가 바로 1고인데 그 1고를 붙으니까
이건 정말 일본 사람들도 들으면 깜짝 놀랄 거예요.
-(해설) 그리고 보란 듯이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일본 여자의과대학을 나온 이간원과 결혼해 아들 주용을 얻었죠.
하지만 강정택은 자신의 아들 주용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해설) 강정택의 아들은 외삼촌 이종하의 아들이 되어 강주용이 아닌 이주용이 됐습니다.
그렇게 주용은 오롯이 이씨 집안의 후손으로만 살았던 거죠.
그것이 바로 이들의 미래를 바꾼 결정적 순간이었습니다.
-(해설) 자신이 양자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주용은 출생의 비밀을
알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해설) 자신의 운명을 마음대로 바꿔버린 것에 대해 그때 딱 한 번
친아버지인 강정택에게 따지듯 물었을 뿐 더는 그 일에 대해 묻지 않았습니다.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걸 그때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 해도 여보. 너무 그렇게...
-(해설) 아무리 돌이켜 봐도 다정했던 기억은 없고 무섭게만 느껴졌던 단 한 사람.
그가 바로 사촌 형이라 불렀던 주용의 아버지, 강정택이었습니다.
-집이 질서가 어지러워지니까.
-강정택 할아버지가 동경제국대학에서 농정을 갖다 계속...
-(해설) 슬픈 인생 이야기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오랫동안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20살에 가족의 비밀을 알았고 마흔 넘어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 했던 큰아들 상현 씨.
-(해설) 그때부터 기억이든 기록이든 혹은 그 무엇이든 강정택 할아버지의 흔적이라면 그 어디든 찾아 나섰던 거죠.
강정택이 무려 13년 동안 학생으로서 또 학자로서 가장 오랜 시간 머물렀던 일본 도쿄대학.
이곳에서 한국농업사를 전공한 농학부의 마츠모토 타케노리 교수를 만났습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이상현입니다.
-반갑습니다.
-25년.
-그러니까 100년 정도.
-그러면 100년 됐네요. 그럼 여기가 할아버님이 계셨던 건물이네요?
-(해설) 그가 안내한 곳은 졸업 논문 보관실.
-여기가 졸업 논문 서고입니다.
-(해설) 그는 오래전 이곳에서 1933년 농업경제학과를 졸업한 강정택의 졸업 논문을 찾아냈습니다.
-금융조합에 취, 취 뭔가요?
-감해서.
-감해서.
-(해설) 빛바랜 종이 위에 적힌 그의 친필.
-원본이군요.
-많이 쓰셨습니다.
-엄청 쓰셨네요. 거의 박사 논문이네.
-(해설) 금융조합을 주제로 한 그의 졸업 논문은 200쪽이 넘습니다.
-저는 번역한 것을 얼추 봤습니다, 저도. 어려워서.
그런데 원본을 보니까 또 느낌이 새롭네요.
-그렇게 달필은 아니시네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글씨를 잘 쓰시는 것은 아니네.
저희 아버님도 잘 글씨를 못 쓰시는데. 저희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할아버지를 만난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를 만난 것 같습니다.
-먼저 이 연구실이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은 졸업생 명부니까.
-이것은 졸업생 명부군요. 소화 56년.
-81년, 81년에.
-81년에.
-여기 있습니다.
-강정택 할아버님 동기분들이 교수님들이 되게 많으시네요.
-(해설) 도쿄제국대학에서의 강정택을 기억하는 또 한 사람은 그의 여동생, 강금복입니다.
-(해설) 강금복은 강정택과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오른 그의 첫째 여동생이죠.
아버지 이충영은 판사와 변호사를 지낸 법조인으로
강정택과는 대구 고부와 도쿄제대 동문이면서 둘도 없는 친구였습니다.
-(해설) 강정택에 관한 이야기는 여전히 흥미롭고 그의 흔적을 찾는 일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맞아요.
-(해설) 지난 2021년 울산박물관에서 열린 75년만의 귀향, 1936년 울산 달리
특별 기획전 역시 그 신기한 여정에 한 획을 긋는 일이었죠.
때는 1936년. 일본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학생들은 조선 농촌의 위생조사를 기획 중이었습니다.
그 무렵 도쿄제국대학 농학부의 부수였던 강정택은 고향인 울산에서 조선농촌사회
경제 조사를 하던 중이었고 위생조사단은 그의 도움을 받아 울산 달리에서 위생조사를 하기로 한 거죠.
그해 7월과 8월에 이뤄진 조선 농촌의 위생조사.
특별기획전은 그때 당시의 사진과 영상 그리고 마을에서 수집한 민속품이 75년 만에 다시 울산으로 돌아온 거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울산 달리를 권한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그는 일본 문화인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시부사와 게이조.
시부사와 게이조는 1927년 조선인 유학생을 지원하는 모임 자강회에서 강정택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첫 수혜자인 강정택을 단지 식민지의 가난한 유학생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해설) 민속학에 심취해 자신의 대저택 차고 다락방에 아틱뮤지엄을
만든 시부사와 게이조는 특히 서민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죠.
아틱뮤지엄에서 이름을 바꾼 상민문화연구소. 이곳에 1936년 위생조사때 사진이 있습니다.
-(일본어)
-(해설) 그 당시 시부사와 게이조가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면 강정택은
그 나머지 울산에서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해설) 위생조사 당시 조사 단원들의 숙소는 강정택이 살던 외삼촌 이종하의 집.
-여기 우리 누각, 누각이에요. 잠깐만.
-이게 우리 사랑채 위에 있는 누각이에요.
-누각.
-이 밑이 물이었어요. 여기가 이제 저희 울산 집의 본채입니다.
저희가 이게 집이 4채가 이렇게 돌려서 있거든요, 중간에 정원이 있고요.
-(해설)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동사를 조사본부로 하는 위생조사는 울산 달리에서 당시 한 달 넘게 이어졌습니다.
-초가집 같은 거나 빈농, 부농, 중농 이걸 보고서, 대단하다, 어떻게 살았을까.
집이 무너질 것 같은 집도 많이 봤고 사진을 보면서 많이 느꼈습니다.
-(해설) 위생조사단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강정택.
이미 울산에서 평화의원을 열고 산부인과 진료를 시작한 그의 부인 이간원 역시 조사단에 힘을 보탰습니다.
-여기 할머니 얘기가 나옵니다. 울산에서 개혁한 그 강군의 부인 이간원.
거의 갑자기 갑자기 소름이 끼쳤습니다. 너무 기뻤고요.
또 기대도 하지 않은 부분에서 할머니의 함자가 나오니까 너무 갑자기 할머니를 만난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어요.
-(해설) 강정택 부부의 노력으로 위생조사가 끝날 쯤 마을 주민들과
학생들은 함께 막걸리를 나눠 마시며 춤과 노래를 즐길 정도로 가까워졌습니다.
시부사와 게이조 역시 위생조사가 끝날 무렵 울산을 찾았습니다.
(일본어)
-어디가 강형이라고 돼 있어요? 강형 있네.
달리를 떠나기 전에 강형과 정치적 얘기를 했다. 여기 그러면 강정택.
-거기 계시다는 얘기네.
-할아버지가 계신다는 얘기네.
-그렇죠.
-한번 찍어 주세요.
-옆에서 한번 서볼까요? 닮았어요?
멋쟁이네요, 그래도 넥타이도 매시고.
-넥타이도 잘 맸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일본 와서 만나네.
-(일본어)
-찾고 싶죠, 거기 혹시 할아버지의 흔적이 있을까.
저분도 할아버지 같고 저분 할머니 같은데 다 그렇지는 않을 거고
1000km도 넘는 멀리 떨어진 곳에 이렇게 자료가 남아 있다는 거에 너무 감사합니다.
-(해설) 사실 1936년 조사는 세 가지가 한꺼번에 이루어졌습니다.
그 세 가지는 조선 농촌에 대한 강정택의 경제조사, 도쿄대 의학부의
위생조사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아틱뮤지엄의 민속조사였죠.
강정택의 지원으로 조선 농촌의 위생조사는 그 당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울산 달리민속조사에 참여했던 미야모토 케이타로.
여기는 그가 남긴 기록이 있는 미야모토 기념재단입니다.
-(일본어)
-시츠레이시마스.
-시츠레이시마스.
-(일본어)
-들어가시죠.
-시츠레이시마스.
-(일본어)
-신세 많이 졌어요.
-(해설) 16살 때부터 영화를 촬영했던 미야모토 케이타로.
그는 민속학자이기도 했습니다.
-(해설) 그가 남긴 것은 울산 달리마을 사람들과 풍경을 담은 기록 사진과 13분짜리 동영상.
-저도 그때 갔습니다.
-저도 그때 갔었대요.
-그때 오셨어요?
-전시회에 한국 관련 영상을 가지고 울산에 제가 갔어요.
-저도 있었는데.
-그럼 만났을 수도 있겠네요.
-(해설) 아버지가 1936년 울산 달리에서 찍은 그 사진을 들고 75년 만에 울산박물관을 찾았던 아들.
-딱 특징이 정사각형 사진이네요.
-(일본어)
-이게 6X6이라는 이 사진의 크기가 이 카메라예요.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아요.
(일본어)
-보이시냐고.
-잘 보입니다. 필름은 없죠?
-(일본어)
-(일본어)
-(해설) 가로세로 6cm의 이 작은 사진이 없었다면, 미야모토 케이타로가 기록하지 않았다면
달리마을 주민들과 젊은 날의 강정택은 마주할 수 없었을 겁니다.
-왠지 지금 마음이 두근두근거려요.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마음이 두근두근 설레네요.
-저도 제 인생에서 이런 일이 올지 몰랐어요.
-정말 좋은 추억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정말 좋은 추억이 되는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감사합니다.
-(해설) 시부사와 게이조는 강정택에 대해 진실로 강군은 농민들의 보모였고
초등학교의 선생님이고 때로는 마을의 촌장이고 재판관이며 고민해결소였고 또 어떤 때에는 심부름꾼이라고 말했죠.
그러면서 조선 농촌의 위생 조사는 강정택의 열정이 없었다면 실현할 수 없었을 거라고도 했습니다.
젊고 패기 넘치던 강정택. 그는 조선 농촌, 특히 고향인 울산에 남다른 애정을 쏟았습니다.
-(해설) 위생 조사가 끝나갈 무럽 강정택과 조사단이 마을에 남긴 또 하나의 선물은 바로 우물이었습니다.
마을 공동 우물이 단 세 곳뿐이던 그때 두 개를 더 팠고 그중 하나가 동사에 있었습니다.
-(해설) 1960년대까지도 우물 바로 옆 살구나무에는 강정택이 달아 놓은 불종이 있었지요.
-(해설) 그는 달리 의용 소방대와 여성 의용 소방단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낮에는 서당, 밤에는 야학당을 열어 문맹 퇴치에도 앞장선 농촌 계몽의 실천가였습니다.
강정택이 일본과 울산을 오가며 농정학자로서의 길을 걷고 있는 사이
그의 부인 이간원은 아들을 보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다 부부는 주용이 3살 때 어린 딸을 데리고 일본행을 선택했습니다.
-(해설) 윤진백은 강정택의 둘째 여동생인 강소복의 남편.
그는 어린 주용을 데리고 일본에 갔습니다.
-(해설) 하지만 그 꿈만 같았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해설) 일본을 떠나기 전 처음으로 가족사진을 찍었습니다.
마치 영원한 이별이 곧 다가올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가족사진을 찍을 때 경옥은 이제 막 두 돌을 지났을 때였습니다.
-(해설) 아들이 울산으로 돌아간 뒤 쌍둥이를 출산한 이간원.
하지만 갓 태어난 아이들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간원 마저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죠.
강정택에게 그때는 가장 비극적인 시간. 가장 가슴 아픈 이별이었습니다. 세 살 무렵.
가족과 헤어졌던 강경옥. 그녀는 지금 울산 최초의 여의사였던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1948년 강정택은 16년간의 긴 일본 생활을 접고 고국에 돌아와 광복을 맞았습니다.
그 무렵 그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또 다른 과제가 있었습니다.
-(해설) 대지주의 땅을 소작농에서 나눠줌으로써 농지의 소유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했던 대한민국의 농지 개혁.
강정택은 일찌감치 농지 개혁의 적임자로 지목되었습니다.
실제 강정택이 쓴 여덟 편의 논문 중 단 한 편을 제외하면 모두 조선 농촌을 향하고 있죠.
-(해설) 강정택이 최고 실력자임을 단박에 알아본 사람은 바로 초대 농림부 장관 조봉암.
-(해설) 외삼촌 이종하는 당시 대지주였음에도 강정택의 농림부 차관 임명에 더 적극적이었죠.
-(해설) 농림부 차관 강정택이 중심이 된 농지 개혁 실무 초안의 기본 원칙은 유상 매수, 유상 분배.
한 농가당 농지 소유는 2헥타르까지였습니다.
이는 당시 북한의 무상 몰수, 무상 분배보다 민주적이고 농가당 1헥타르로
제한한 일본보다도 더 혁신적인 안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안은 1949년 6월 21일 제정된 농지개혁법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해설) 결국 농지 개혁은 강정택이 그간 조선 농촌 연구에 쏟은 농정학자로서의 열정을 모두 불태운 결과였던 거죠.
-아버님.
-(해설) 주용은 강정택이 농림부 차관이던 시절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해설) 강정택과 주용이 함께한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농림부 차관에서 물러나 그 이듬해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너무나 짧았습니다.
-(해설) 1950년 7월 2일, 인민군에게 납북된 강정택.
그때 나이 마흔셋.
농정학자로서의 큰 꿈을 펼쳐보기도 전에 그의 시간은 완전히 멈춰버렸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여기 누워 있고. 여기 외삼촌은 강원도에 이렇게 돼 있고.
-(해설) 강정택이 납북되고 한 달이 조금 더 지나 이수성의 아버지, 이충영 역시 비슷한 상황과 맞닥뜨렸습니다.
-(해설) 처남, 매제 사이로, 일본 도쿄대 동문으로 젊은 날을 함께했던 농정학자와
법조인은 그렇게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버렸습니다.
-김치도 없이.
-김치가 없어.
-김치 없는 게...
-(해설) 지나온 길을 뒤 돌아보며 주용의 삶을 바꾼 사람은 그의 친부, 강정택이었습니다.
-상희, 상원이 이렇게 네 명이 다 있고.
-(해설) 1950년 미국 국무성에 초청된 강정택.
아들과 함께 더 넓은 세상에서 꿈을 펼치려고 했지만 전쟁으로 그 꿈은 무산되고 말았죠.
-서울에 놀러 갔을 때, 당신이.
-(해설) 그럼에도 그 당시 배운 영어는 훗날 주용이 미국 미시간대 경제학과에 입학하는 하나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해설) 경제학을 전공한 주용은 미시간대 사회과학연구소에서 접한 컴퓨터와의 인연으로
한국인 최초의 IBM 입사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IBM의 한국 대표로 귀국길에 오르며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그가 찾아간 사람은 바로 시부사와 게이조.
-(해설) 주용은 자신을 강정택의 아들이라고 밝혔습니다.
-(해설) 그때가 강정택이 납북되고 무려 13년이 흐른 1963년.
그가 쉰여섯이 되는 해였습니다. 여기가 바로 60여 년 전 아버지가 찾았다는 시부사와 집안의 대저택.
-(해설) 언젠가 고국으로 돌아와 더 큰 꿈을 펼치려 했던 조선인 유학생들.
강정택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게 다리인가? 저기 아니면 저쪽 건너편 같은데요. 여기 같은데.
여기 앉으셔서 호수를 내다보지 않았을까. 여기 보이는 뷰가 딱 제일 좋네요.
여기가 명당이네요.
-(해설) 문학을 전공했던 이인기와 권중휘.
법학도의 길을 간 이충영 그리고 농학부의 강정택.
그들은 대구 고보를 거쳐 일본 도쿄제국대학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하지만 훗날 각각 서울대와 영남대 총장을 역임한 권중휘, 이인기와 달리
낙폭 된 강정택과 이충영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었습니다.
1977년 강정택의 평생의 은인이자 주용의 양부였던 이종하는 종하체육관을 기부했습니다.
그리고 2021년 주용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종하체육관 자리에
다시 종하이노베이션센터를 지어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했죠.
착공한 지 2년여 만에 완공된 새로운 복합문화시설.
이곳에는 강정택의 학문적 업적을 되새기는 아주 특별한 공간도 함께 들어섰습니다.
-(해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파란만장한 한국 사회 중심에서
농정학자로서의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강정택.
-(해설) 비극적이었지만 찬란했고 짧았지만 강렬했던 삶.
-(해설) 고향인 울산과 조선 농촌 연구에 평생을 바친 강정택.
이제 강정택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천재 농정학자로 기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