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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스페셜 - 세계의 벽, 죽음의 벽
등록일 : 2025-09-08 13:45:55.0
조회수 : 15
-(해설) 인류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세웠던 최초의 건축물.
20세기에 이르러 벽은 가장 잔혹한 얼굴로 변해갔습니다.
벽은 땅속에까지 세워졌죠. 최첨단 축성술을 동원한 방호벽.
하지만 난공불락의 방호벽도 생명을 지켜주진 못했죠.
-완벽한 장벽이란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해설)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이 낮고 남루한 벽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학살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벽은 증오, 차별, 반유대주의, 외국인 혐오의 결과로 언제든지 다시 생길 수 있습니다.
-(해설) 벽은 때로 하나였던 우리를 가르기도 합니다.
전쟁을 막기 위해 세운 그 벽은 왜 더 공고해져 버린 걸까요.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비무장 지대가 결국은 충돌 위험이 가장 높은 그런 중무장 지대로 변해버린 것이죠.
-(해설) 우리를 지키기 위해 세워진 벽들은 왜 역설적으로 죽음을 부르는 걸까요.
우리는 과연 벽을 통해 무엇을 지키고 또 무엇을 잃고 있을까요.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 지역 쉐넌버그.
평화로워 보이지만 오랜 기간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죠.
1차 대전 이후에는 독일의 침략을 막기 위한 난공불락의 요새가 들어섰습니다.
이 요새들은 지하에서 촘촘히 연결돼 거대한 장벽을 이뤘죠.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마지노선입니다.
지하에 건설된 이 방호벽의 길이는 무려 750km에 달했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축성술을 총동원한 지하의 철옹성.
요새는 방호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360도 회전이 가능한 포탑을 비롯해 공격 시스템도 갖췄죠.
그 아래엔 잠수함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지하 세계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해설) 보이지 않는 벽은 지하 30m에 숨겨져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참 내려가야 하는데요.
놀라운 건 80년 전에도 엘리베이터가 있었다는 사실이죠.
마지노선의 지하에는 전기설비 시설부터 공기정화 시설은 물론이고 기차가 다닐 수 있는 레일까지 깔려있습니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연결된 벽을 따라 걷다 보면 삶의 흔적도 엿볼 수 있죠.
당시로서는 초호화 시설이었을 다양한 공간들이 마련돼 있었습니다.
-(해설) SF소설에나 나올 법한 마지노선의 건설 비용은 무려 20조 원에 달했습니다.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지은 이 벽 안의 세계에서 살아갔던 병사들.
적을 방어해야 한다는 임무를 위해 가족을 떠나온 그들의 바람은 하나였을 겁니다.
무사히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는 것. 그 기도는 통했을까요?
기도실에서 가장 먼 곳에는 전투 구역이 자리했습니다.
각종 무기와 폭탄까지, 첨단 화약고나 다름없었죠.
-(해설) 완벽한 방어 시스템을 갖춘 최후의 보루.
마지노선의 최후는 어땠을까요? 독일군은 예상하지 못한 전략을 펼쳤습니다.
마지노선을 우회해 북쪽 아르덴 숲을 뚫고 돌진했죠.
한순간 무용지물로 전락한 마지노선.
그 쓰라린 패배의 흔적이 여기 남아있습니다.
1940년 독일군에 의해 뚫린 라 페르테 요새입니다.
-(해설) 강철과 콘크리트로 지어진 요새는 독일군의 대포를 여러 번 맞아도 견딜 수 있게 설계됐는데요.
어떻게, 이 철벽 방어벽이 뚫린 걸까요? 그들은 스스로 쌓은 벽의 신화에 갇히고 말았는지 모릅니다.
치밀한 전술, 전략을 짜지 못한 프랑스.
독일군은 그 허점을 뚫고 지하에 폭탄물을 투하했고 연쇄 폭발과 화재를 일으키며 철옹성 같았던 벽은 처참히 무너졌죠.
그 순간조차 프랑스 군 지휘부의 명령은 병사들에게 이곳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해설) 아비규환으로 변해버린 벽을 탈출해 살아서, 꼭 살아서 가족의 곁으로 가고 싶었던 병사들.
하지만 결국 벽에 갇힌 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습니다.
훗날 이들의 죽음은 지하의 비극으로 불리게 됐죠.
그렇게 벽에 갇혀 희생된 병사들은 모두 107명이었습니다.
-(해설) 마지노선의 비극적인 최후는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벽은 과연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는 장치일까요?
어쩌면 우린 오래된 벽의 신화에 사로잡혀 있는 건 아닐까요?
독일의 수도 베를린. 보이지 않는 벽이 얼마나 강력할 수 있을까.
이 도시엔 그 질문을 떠올리게 하는 벽이 있습니다.
바로 베를린 장벽입니다. 높이 3.6m의 이 벽은 분단의 장벽이었습니다.
그리고 세계를 둘로 나눈 이념의 벽이기도 했죠.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건 1961년. 그 기원은 보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오릅니다.
2차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은 결국 패망했습니다.
독일은 승전국들에 의해 네 개의 점령지로 분할됐죠.
본래 소련의 관할지여야 할 베를린은 주요 도시라는 점에서 연합군이 관할하는 서베를린과 소련이 관할하는 동베를린으로 나뉘게 됐습니다.
바로 그 경계에 베를린 장벽이 들어선 거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념의 경계.
그 사이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하루아침에 산산조각 나버렸죠.
동독의 마지막 외교 장관을 역임한 멕켈 씨는 당시의 고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해설) 1961년 8월 12일 밤, 베를린 장벽은 기습적으로 세워졌습니다.
자유를 찾아 서독으로 넘어가는 동독인들을 봉쇄하기 위한 분리 장벽이었죠.
-(해설) 장벽이 들어선 후 총성과 울부짖음으로 가득했던 베르나우어 거리.
집 앞에 세워진 벽에 가로막혀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고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야 했죠.
베를린 장벽으로 인해 평화롭던 이 거리는 비극의 현장으로 바뀌었습니다.
-(해설) 삼엄한 경계도 자유를 향한 갈망을 막진 못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아 벽을 넘었던 사람들.
18살의 동독 청년 페터는 그 벽을 넘다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그렇게 베를린 장벽을 넘다 목숨을 잃은 이들은 140명에 달합니다.
-(해설) 철조망에서 콘크리트로 강화된 베를린 장벽은 다시 외벽과 내벽의 이중 구조를 갖춰나갔습니다.
곳곳엔 감시탑과 자동 총격 장치까지 등장했지만 서독으로의 탈출은 막지 못했죠.
이 벽은 피로 물든 죽음의 벽이자 세계를 보이지 않는 이념의 벽으로 나눈 철의 장막으로 통했습니다.
그렇게 28년이 흐르고 1989년, 냉전의 괴물은 비로소 무너졌습니다.
시민들은 망치를 들고 나가 벽을 부수고 서로를 얼싸안았죠.
공고했던 베를린 장벽은 어떻게 무너질 수 있었을까요?
통일의 주역인 멕켈 전 장관은 가장 중요한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해설) 오랜 분단국가였던 독일은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마침내 통일의 소원을 이뤘습니다.
사실 동독과 서독 사람들이 물리적인 벽보다 먼저 허문 건 마음속 장벽이었죠.
서로를 향한 대립과 불신, 그 보이지 않는 벽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베를린 장벽은 과연 무너질 수 있었을까요?
-(해설) 베를린 곳곳에는 장벽의 잔해가 전시되어 있는데요.
인간이 그은 선 하나가 불러온 비극의 역사를 생생하게 마주하기 위해서죠.
특히 학생들에게 억압의 벽을 세웠던 자국의 치부를 그대로 알리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반성하지 않는 역사는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벽을 허문 자리의 흔적까지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죠.
더 나아가 장벽이 세워지기 이전부터 나치가 저지른 만행을 낱낱이 공개하고 있습니다.
나치 독일이 학살한 유대인은 무려 600만 명.
보이지 않는 벽이 얼마나 무서운 광기로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역사였죠.
-(독일어)
-(독일어) 전쟁이 지나간 자리에는 벽이 있었습니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
2차대전이 시작된 도시죠. 도시 곳곳에 여전히 전쟁의 상은이 남아있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
이 도시에는 그 질문을 남긴 벽이 있습니다.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비극을 부른 게토 장벽입니다.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붉은 벽돌의 담장.
나치 독일은 이 벽 안에 수십만 명의 유대인을 가뒀습니다.
-(해설) 80여 년 전 이 벽은 차별의 도구로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을 열등한 존재로 낙인찍고 그들을 가두기 위한 벽은 점점 더 확장돼 갔죠.
무려 4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바르샤바 게토에 수용됐습니다.
벽으로 둘러싸인 게토는 감옥이나 다름없었죠.
바르샤바 게토의 면적은 3.4제곱미터.
방 한 칸에 7명이 모여 사는 처참한 환경에서 질병과 굶주림으로 고통받았죠.
-(해설) 당시 목숨을 걸고 게토 밖을 넘나들었던 건 주로 아이들이었습니다.
작은 몸집으로 구멍을 통해 탈출하려다 벽에 끼여 죽는 일도 있었죠.
벽을 넘어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한 수많은 유대인이 굶주리거나 병들어 죽어갔습니다.
거리는 시신들도 넘쳐났죠.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수용소로 이송돼 집단 학살됐습니다.
그렇게 게토 장벽에 갇혀 죽음에 내몰린 희생자는 30만 명이 넘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만든 이 가장 잔인한 벽에 맞서 싸워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량 학살 소식에 유대인들은 지하 기지에 숨어 봉기를 준비했죠.
무력하게 죽기보다 저항하며 인간답게 죽기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해설)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목전에 둔 아이들의 생명을 꼭 지키고 싶었습니다.
부족한 음식을 나누며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죠.
하지만 나치 독일의 진압은 무자비했습니다.
공개처형으로도 모자라 게토 전역에 불을 질렀죠.
그럼에도 게토가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곳엔 죽음의 벽을 뛰어넘은 영웅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자리하고 있죠.
게토 장벽이 남긴 유산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독일 수상의 진심 어린 사죄. 피로 얼룩졌던 그 벽에 용서와 화해라는 새로운 기억이 조금씩 쌓여가고 있죠.
남은 게토 장벽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벽을 둘러싼 흔적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죠.
이 벽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차별의 벽이 얼마나 무서운 광기로 변할 수 있는지를 말이죠.
-(해설)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게토 장벽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세계 어디선가 세워지고 있는 벽은 무엇을 지키기 위한 걸까요.
무엇을 가두기 위한 건 아닐까요? 벽은 하나였던 우리를 둘로 가르기도 합니다.
한반도의 산과 바다를 가로지르며 끝도 없이 이어지는 거대한 장벽. DMZ입니다.
한반도에는 분단으로 인해 3개의 선이 생겨났습니다.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한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
그사이의 군사적 완충지대가 바로 DMZ죠.
DMZ의 총길이는 248km에 달합니다. 보통의 국경과 달리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죠.
본래 하나의 땅이었던 곳에 정전과 평화를 위해 세워진 벽.
하지만 처음에 그 약속이 지켜지진 않았습니다.
-(해설) 역설적이게도 세계에서 가장 중무장한 지역으로 변한 채 70여 년의 세월이 흘렀죠.
한국전쟁 이후 1953년 정전협정을 통해 분단선이 설정됐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장벽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해설) 1960년대에 처음으로 나무로 만든 목책이 세워졌습니다.
그 벽은 다시 철책으로 바뀌었고 벽은 점점 더 높고 길어져만 갔습니다.
경계가 삼엄해지던 그때. 판문점 공동 경비구역 안에서는 도끼 만행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북한군이 휘두른 도끼에 미군 장교 2명이 숨지면서 한반도의 긴장은 극에 달했죠.
-(해설) DMZ 안에서 남북한이 얼굴을 맞대고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던 판문점.
그곳에도 콘크리트 장벽이 들어섰습니다. 벽의 높이는 고작 5cm.
이로써 남과 북 사이를 오가는 유일한 통로에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생겨난 것이죠.
그렇게 남과 북 사이의 심리적 장벽도 높아져만 갔습니다.
그리곤 냉전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 순간에도 남과 북은 경쟁하듯 장벽을 세워나갔습니다.
감시 카메라와 첨단 센서도 등장했죠.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을 만큼 벽은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하지만 군사적 충돌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남북한이 다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그 경계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남긴 아픔을 건져내는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죽어서도 돌아오지 못한 전사자들의 유해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죠.
-(해설) 70년 넘는 세월이 흐르면서 유해 발굴 작업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해설)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는 10대, 20대 청년들이었죠.
DMZ는 여전히 기억합니다. 이곳에서 희생된 13만 7000여 명의 죽음을.
조청용 할아버지는 총알이 빗발치는 교전에서 운 좋게 살아남았습니다.
-(해설) 20살 청년에게 전쟁은 너무도 가혹했습니다.
분단되기 전 북한 땅에 속했던 이곳 철원에서 처음에는 군인이 아닌 인민군으로 징집됐었죠.
-(해설) 간신히 달아났던 그에게는 다시 군인으로 징집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결국 내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비극에 동참해야 했죠.
-(해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기쁨도 잠시.
가족들과 생이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해설) 그에게 분단의 벽은 어떤 의미일까요?
-(해설) 20살 청년에게 아흔넷의 노인이 되기까지 그 벽이 계속될 줄은 몰랐습니다.
살아생전 무너질 수 있을까. 마지막 꿈을 바람에 실려 보냅니다.
영국의 지배에서 독립한 뒤 남북으로 분단된 아일랜드.
이 땅의 역사는 한반도와 닮아 있습니다.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
도시를 가로지르는 분리 장벽은 평화의 벽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곳은 독립 이후에도 영국령으로 남게 되면서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죠.
개신교와 가톨릭, 영국연합주의와 아일랜드민족주의가 충돌하는 경계에 높은 벽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땅에서 같은 언어를 쓰며 살아가지만 벽을 경계로 삶의 풍경이 달라집니다.
벽에 그려 넣은 벽화엔 그들의 갈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나고 자란 토니 맥콜리 씨는 이 장벽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죠.
-(해설) 더 이상의 죽음을 막기 위해 세워졌던 장벽.
처음엔 지금의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철조망으로 만든 임시 장벽이 세워졌죠.
하지만 양쪽 간 대립은 벽을 뛰어넘었습니다.
유혈 충돌은 끊이지 않았고 그러다 10대 소년들이 숨지는 사건까지 발생했습니다.
-(해설) 장벽을 경계로 철저히 단절된 아이들.
죽음을 목도하며 자란 아이들의 마음속에 싹튼 것은 다름 아닌 증오였습니다.
죽음은 또 다른 보복을 불러왔죠. 벽은 점점 강화됐지만 폭력의 악순환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30년간 사망자가 무려 3500여 명. 벽은 그사이에 어떻게 변했을까요?
-(해설) 아찔하게 치솟은 이 벽의 높이는 13m. 건물 4층 높이입니다.
이 높은 벽을 경계로 대립했던 사람들은 벽이 결코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그리고는 30년 만인 지난 1998년 평화협정을 체결했습니다.
벽 사이의 문을 개방해 왕래하는 등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죠.
테러와 폭력이 크게 준 것은 오히려 벽이 열리기 시작하면서부터였습니다. 영국 국기를 단 장벽 건너편의 사람들.
수십 년간 단절된 채 살아온 이들에게 벽은 무엇을 남겼을까요?
-(해설) 물리적인 장벽이 부른 불신과 두려움.
그 마음의 벽을 허물기 위해 증오의 역사가 새겨졌던 벽을 평화의 메시지로 채워나가고 있죠.
이 벽은 죽음을 막기 위해 장벽이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해설) 이 땅에 진정한 평화는 언제 찾아올까요?
2023년까지 장벽을 허물겠다는 아일랜드 정부의 발표는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물리적인 벽보다 더 높고 견고한 심리적 장벽을 허물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필요한 걸까요?
벽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신화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시대가 됐습니다.
완벽한 방어를 꿈꿨던 그 벽에서 돌아오지 못한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분리 장벽은 거대한 감옥이 되어 수많은 아이들의 목숨까지 앗아갔습니다.
평화를 위해 세워진 벽들조차 갈등과 대립을 막는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죠.
벽은 지금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벽을 통해 무엇을 지키고 있을까요?
또 무엇을 잃고 있을까요?
20세기에 이르러 벽은 가장 잔혹한 얼굴로 변해갔습니다.
벽은 땅속에까지 세워졌죠. 최첨단 축성술을 동원한 방호벽.
하지만 난공불락의 방호벽도 생명을 지켜주진 못했죠.
-완벽한 장벽이란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해설)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이 낮고 남루한 벽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학살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벽은 증오, 차별, 반유대주의, 외국인 혐오의 결과로 언제든지 다시 생길 수 있습니다.
-(해설) 벽은 때로 하나였던 우리를 가르기도 합니다.
전쟁을 막기 위해 세운 그 벽은 왜 더 공고해져 버린 걸까요.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비무장 지대가 결국은 충돌 위험이 가장 높은 그런 중무장 지대로 변해버린 것이죠.
-(해설) 우리를 지키기 위해 세워진 벽들은 왜 역설적으로 죽음을 부르는 걸까요.
우리는 과연 벽을 통해 무엇을 지키고 또 무엇을 잃고 있을까요.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 지역 쉐넌버그.
평화로워 보이지만 오랜 기간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죠.
1차 대전 이후에는 독일의 침략을 막기 위한 난공불락의 요새가 들어섰습니다.
이 요새들은 지하에서 촘촘히 연결돼 거대한 장벽을 이뤘죠.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마지노선입니다.
지하에 건설된 이 방호벽의 길이는 무려 750km에 달했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축성술을 총동원한 지하의 철옹성.
요새는 방호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360도 회전이 가능한 포탑을 비롯해 공격 시스템도 갖췄죠.
그 아래엔 잠수함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지하 세계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해설) 보이지 않는 벽은 지하 30m에 숨겨져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참 내려가야 하는데요.
놀라운 건 80년 전에도 엘리베이터가 있었다는 사실이죠.
마지노선의 지하에는 전기설비 시설부터 공기정화 시설은 물론이고 기차가 다닐 수 있는 레일까지 깔려있습니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연결된 벽을 따라 걷다 보면 삶의 흔적도 엿볼 수 있죠.
당시로서는 초호화 시설이었을 다양한 공간들이 마련돼 있었습니다.
-(해설) SF소설에나 나올 법한 마지노선의 건설 비용은 무려 20조 원에 달했습니다.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지은 이 벽 안의 세계에서 살아갔던 병사들.
적을 방어해야 한다는 임무를 위해 가족을 떠나온 그들의 바람은 하나였을 겁니다.
무사히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는 것. 그 기도는 통했을까요?
기도실에서 가장 먼 곳에는 전투 구역이 자리했습니다.
각종 무기와 폭탄까지, 첨단 화약고나 다름없었죠.
-(해설) 완벽한 방어 시스템을 갖춘 최후의 보루.
마지노선의 최후는 어땠을까요? 독일군은 예상하지 못한 전략을 펼쳤습니다.
마지노선을 우회해 북쪽 아르덴 숲을 뚫고 돌진했죠.
한순간 무용지물로 전락한 마지노선.
그 쓰라린 패배의 흔적이 여기 남아있습니다.
1940년 독일군에 의해 뚫린 라 페르테 요새입니다.
-(해설) 강철과 콘크리트로 지어진 요새는 독일군의 대포를 여러 번 맞아도 견딜 수 있게 설계됐는데요.
어떻게, 이 철벽 방어벽이 뚫린 걸까요? 그들은 스스로 쌓은 벽의 신화에 갇히고 말았는지 모릅니다.
치밀한 전술, 전략을 짜지 못한 프랑스.
독일군은 그 허점을 뚫고 지하에 폭탄물을 투하했고 연쇄 폭발과 화재를 일으키며 철옹성 같았던 벽은 처참히 무너졌죠.
그 순간조차 프랑스 군 지휘부의 명령은 병사들에게 이곳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해설) 아비규환으로 변해버린 벽을 탈출해 살아서, 꼭 살아서 가족의 곁으로 가고 싶었던 병사들.
하지만 결국 벽에 갇힌 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습니다.
훗날 이들의 죽음은 지하의 비극으로 불리게 됐죠.
그렇게 벽에 갇혀 희생된 병사들은 모두 107명이었습니다.
-(해설) 마지노선의 비극적인 최후는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벽은 과연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는 장치일까요?
어쩌면 우린 오래된 벽의 신화에 사로잡혀 있는 건 아닐까요?
독일의 수도 베를린. 보이지 않는 벽이 얼마나 강력할 수 있을까.
이 도시엔 그 질문을 떠올리게 하는 벽이 있습니다.
바로 베를린 장벽입니다. 높이 3.6m의 이 벽은 분단의 장벽이었습니다.
그리고 세계를 둘로 나눈 이념의 벽이기도 했죠.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건 1961년. 그 기원은 보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오릅니다.
2차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은 결국 패망했습니다.
독일은 승전국들에 의해 네 개의 점령지로 분할됐죠.
본래 소련의 관할지여야 할 베를린은 주요 도시라는 점에서 연합군이 관할하는 서베를린과 소련이 관할하는 동베를린으로 나뉘게 됐습니다.
바로 그 경계에 베를린 장벽이 들어선 거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념의 경계.
그 사이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하루아침에 산산조각 나버렸죠.
동독의 마지막 외교 장관을 역임한 멕켈 씨는 당시의 고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해설) 1961년 8월 12일 밤, 베를린 장벽은 기습적으로 세워졌습니다.
자유를 찾아 서독으로 넘어가는 동독인들을 봉쇄하기 위한 분리 장벽이었죠.
-(해설) 장벽이 들어선 후 총성과 울부짖음으로 가득했던 베르나우어 거리.
집 앞에 세워진 벽에 가로막혀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고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야 했죠.
베를린 장벽으로 인해 평화롭던 이 거리는 비극의 현장으로 바뀌었습니다.
-(해설) 삼엄한 경계도 자유를 향한 갈망을 막진 못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아 벽을 넘었던 사람들.
18살의 동독 청년 페터는 그 벽을 넘다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그렇게 베를린 장벽을 넘다 목숨을 잃은 이들은 140명에 달합니다.
-(해설) 철조망에서 콘크리트로 강화된 베를린 장벽은 다시 외벽과 내벽의 이중 구조를 갖춰나갔습니다.
곳곳엔 감시탑과 자동 총격 장치까지 등장했지만 서독으로의 탈출은 막지 못했죠.
이 벽은 피로 물든 죽음의 벽이자 세계를 보이지 않는 이념의 벽으로 나눈 철의 장막으로 통했습니다.
그렇게 28년이 흐르고 1989년, 냉전의 괴물은 비로소 무너졌습니다.
시민들은 망치를 들고 나가 벽을 부수고 서로를 얼싸안았죠.
공고했던 베를린 장벽은 어떻게 무너질 수 있었을까요?
통일의 주역인 멕켈 전 장관은 가장 중요한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해설) 오랜 분단국가였던 독일은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마침내 통일의 소원을 이뤘습니다.
사실 동독과 서독 사람들이 물리적인 벽보다 먼저 허문 건 마음속 장벽이었죠.
서로를 향한 대립과 불신, 그 보이지 않는 벽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베를린 장벽은 과연 무너질 수 있었을까요?
-(해설) 베를린 곳곳에는 장벽의 잔해가 전시되어 있는데요.
인간이 그은 선 하나가 불러온 비극의 역사를 생생하게 마주하기 위해서죠.
특히 학생들에게 억압의 벽을 세웠던 자국의 치부를 그대로 알리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반성하지 않는 역사는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벽을 허문 자리의 흔적까지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죠.
더 나아가 장벽이 세워지기 이전부터 나치가 저지른 만행을 낱낱이 공개하고 있습니다.
나치 독일이 학살한 유대인은 무려 600만 명.
보이지 않는 벽이 얼마나 무서운 광기로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역사였죠.
-(독일어)
-(독일어) 전쟁이 지나간 자리에는 벽이 있었습니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
2차대전이 시작된 도시죠. 도시 곳곳에 여전히 전쟁의 상은이 남아있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
이 도시에는 그 질문을 남긴 벽이 있습니다.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비극을 부른 게토 장벽입니다.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붉은 벽돌의 담장.
나치 독일은 이 벽 안에 수십만 명의 유대인을 가뒀습니다.
-(해설) 80여 년 전 이 벽은 차별의 도구로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을 열등한 존재로 낙인찍고 그들을 가두기 위한 벽은 점점 더 확장돼 갔죠.
무려 4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바르샤바 게토에 수용됐습니다.
벽으로 둘러싸인 게토는 감옥이나 다름없었죠.
바르샤바 게토의 면적은 3.4제곱미터.
방 한 칸에 7명이 모여 사는 처참한 환경에서 질병과 굶주림으로 고통받았죠.
-(해설) 당시 목숨을 걸고 게토 밖을 넘나들었던 건 주로 아이들이었습니다.
작은 몸집으로 구멍을 통해 탈출하려다 벽에 끼여 죽는 일도 있었죠.
벽을 넘어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한 수많은 유대인이 굶주리거나 병들어 죽어갔습니다.
거리는 시신들도 넘쳐났죠.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수용소로 이송돼 집단 학살됐습니다.
그렇게 게토 장벽에 갇혀 죽음에 내몰린 희생자는 30만 명이 넘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만든 이 가장 잔인한 벽에 맞서 싸워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량 학살 소식에 유대인들은 지하 기지에 숨어 봉기를 준비했죠.
무력하게 죽기보다 저항하며 인간답게 죽기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해설)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목전에 둔 아이들의 생명을 꼭 지키고 싶었습니다.
부족한 음식을 나누며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죠.
하지만 나치 독일의 진압은 무자비했습니다.
공개처형으로도 모자라 게토 전역에 불을 질렀죠.
그럼에도 게토가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곳엔 죽음의 벽을 뛰어넘은 영웅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자리하고 있죠.
게토 장벽이 남긴 유산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독일 수상의 진심 어린 사죄. 피로 얼룩졌던 그 벽에 용서와 화해라는 새로운 기억이 조금씩 쌓여가고 있죠.
남은 게토 장벽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벽을 둘러싼 흔적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죠.
이 벽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차별의 벽이 얼마나 무서운 광기로 변할 수 있는지를 말이죠.
-(해설)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게토 장벽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세계 어디선가 세워지고 있는 벽은 무엇을 지키기 위한 걸까요.
무엇을 가두기 위한 건 아닐까요? 벽은 하나였던 우리를 둘로 가르기도 합니다.
한반도의 산과 바다를 가로지르며 끝도 없이 이어지는 거대한 장벽. DMZ입니다.
한반도에는 분단으로 인해 3개의 선이 생겨났습니다.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한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
그사이의 군사적 완충지대가 바로 DMZ죠.
DMZ의 총길이는 248km에 달합니다. 보통의 국경과 달리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죠.
본래 하나의 땅이었던 곳에 정전과 평화를 위해 세워진 벽.
하지만 처음에 그 약속이 지켜지진 않았습니다.
-(해설) 역설적이게도 세계에서 가장 중무장한 지역으로 변한 채 70여 년의 세월이 흘렀죠.
한국전쟁 이후 1953년 정전협정을 통해 분단선이 설정됐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장벽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해설) 1960년대에 처음으로 나무로 만든 목책이 세워졌습니다.
그 벽은 다시 철책으로 바뀌었고 벽은 점점 더 높고 길어져만 갔습니다.
경계가 삼엄해지던 그때. 판문점 공동 경비구역 안에서는 도끼 만행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북한군이 휘두른 도끼에 미군 장교 2명이 숨지면서 한반도의 긴장은 극에 달했죠.
-(해설) DMZ 안에서 남북한이 얼굴을 맞대고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던 판문점.
그곳에도 콘크리트 장벽이 들어섰습니다. 벽의 높이는 고작 5cm.
이로써 남과 북 사이를 오가는 유일한 통로에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생겨난 것이죠.
그렇게 남과 북 사이의 심리적 장벽도 높아져만 갔습니다.
그리곤 냉전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 순간에도 남과 북은 경쟁하듯 장벽을 세워나갔습니다.
감시 카메라와 첨단 센서도 등장했죠.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을 만큼 벽은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하지만 군사적 충돌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남북한이 다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그 경계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남긴 아픔을 건져내는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죽어서도 돌아오지 못한 전사자들의 유해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죠.
-(해설) 70년 넘는 세월이 흐르면서 유해 발굴 작업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해설)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는 10대, 20대 청년들이었죠.
DMZ는 여전히 기억합니다. 이곳에서 희생된 13만 7000여 명의 죽음을.
조청용 할아버지는 총알이 빗발치는 교전에서 운 좋게 살아남았습니다.
-(해설) 20살 청년에게 전쟁은 너무도 가혹했습니다.
분단되기 전 북한 땅에 속했던 이곳 철원에서 처음에는 군인이 아닌 인민군으로 징집됐었죠.
-(해설) 간신히 달아났던 그에게는 다시 군인으로 징집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결국 내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비극에 동참해야 했죠.
-(해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기쁨도 잠시.
가족들과 생이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해설) 그에게 분단의 벽은 어떤 의미일까요?
-(해설) 20살 청년에게 아흔넷의 노인이 되기까지 그 벽이 계속될 줄은 몰랐습니다.
살아생전 무너질 수 있을까. 마지막 꿈을 바람에 실려 보냅니다.
영국의 지배에서 독립한 뒤 남북으로 분단된 아일랜드.
이 땅의 역사는 한반도와 닮아 있습니다.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
도시를 가로지르는 분리 장벽은 평화의 벽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곳은 독립 이후에도 영국령으로 남게 되면서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죠.
개신교와 가톨릭, 영국연합주의와 아일랜드민족주의가 충돌하는 경계에 높은 벽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땅에서 같은 언어를 쓰며 살아가지만 벽을 경계로 삶의 풍경이 달라집니다.
벽에 그려 넣은 벽화엔 그들의 갈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나고 자란 토니 맥콜리 씨는 이 장벽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죠.
-(해설) 더 이상의 죽음을 막기 위해 세워졌던 장벽.
처음엔 지금의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철조망으로 만든 임시 장벽이 세워졌죠.
하지만 양쪽 간 대립은 벽을 뛰어넘었습니다.
유혈 충돌은 끊이지 않았고 그러다 10대 소년들이 숨지는 사건까지 발생했습니다.
-(해설) 장벽을 경계로 철저히 단절된 아이들.
죽음을 목도하며 자란 아이들의 마음속에 싹튼 것은 다름 아닌 증오였습니다.
죽음은 또 다른 보복을 불러왔죠. 벽은 점점 강화됐지만 폭력의 악순환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30년간 사망자가 무려 3500여 명. 벽은 그사이에 어떻게 변했을까요?
-(해설) 아찔하게 치솟은 이 벽의 높이는 13m. 건물 4층 높이입니다.
이 높은 벽을 경계로 대립했던 사람들은 벽이 결코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그리고는 30년 만인 지난 1998년 평화협정을 체결했습니다.
벽 사이의 문을 개방해 왕래하는 등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죠.
테러와 폭력이 크게 준 것은 오히려 벽이 열리기 시작하면서부터였습니다. 영국 국기를 단 장벽 건너편의 사람들.
수십 년간 단절된 채 살아온 이들에게 벽은 무엇을 남겼을까요?
-(해설) 물리적인 장벽이 부른 불신과 두려움.
그 마음의 벽을 허물기 위해 증오의 역사가 새겨졌던 벽을 평화의 메시지로 채워나가고 있죠.
이 벽은 죽음을 막기 위해 장벽이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해설) 이 땅에 진정한 평화는 언제 찾아올까요?
2023년까지 장벽을 허물겠다는 아일랜드 정부의 발표는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물리적인 벽보다 더 높고 견고한 심리적 장벽을 허물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필요한 걸까요?
벽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신화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시대가 됐습니다.
완벽한 방어를 꿈꿨던 그 벽에서 돌아오지 못한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분리 장벽은 거대한 감옥이 되어 수많은 아이들의 목숨까지 앗아갔습니다.
평화를 위해 세워진 벽들조차 갈등과 대립을 막는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죠.
벽은 지금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벽을 통해 무엇을 지키고 있을까요?
또 무엇을 잃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