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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스페셜 - 활의 후예

등록일 : 2025-12-15 12:55:43.0
조회수 : 12
-(해설) 역사 이전에 아득히 먼 옛날. 이곳은 선사인들의 삶의 무대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남긴 암각화에서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활을 든 남자는 이곳 숲에 사는 동물을 단 한 발의 화살로 명중시키는 탁월한 사냥꾼이었을 겁니다.
그는 뛰어난 솜씨로 먼바다에 나가 고래도 잡았죠.
강한 활을 가진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그때 활은 생존을 위한 도구였으니까요.
지금으로부터 7000년 전, 활에 관한 이야기는 그렇게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광활한 중앙아시아 대륙은 오랫동안 유목민들의 땅이었죠.
그들은 수천, 수만 년 동안 가축을 기르며 초원을 찾아 이동하는 지구의 여행자였습니다.
-(해설) 11세기에 셀주크 제국과 뒤이어 등장한 오스만 제국.
그리고 지금의 튀르키예는 모두 유목 생활을 하며 화를 쓰던 튀르크 민족이었죠.
-(해설) 중앙아시아에서부터 러시아와 동유럽, 몽골과 중국 북부에 분포돼 있는 튀르크족의 후예들.
우리에게 돌궐로 알려진 이들이 바로 튀르크족이죠.
-(해설) 튀르크족은 말을 타는 기마술과 활을 쏘는 궁술을 모두 갖춘 무적의 전사들이었습니다.
(외국어)
-(해설) 튀르크족의 활쏘기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활쏘기 방법은 순식간에 아시아 지역으로 퍼졌죠.
-(외국어)
-(해설) 6세기 중반, 돌궐과 동맹을 나라는 고구려였습니다.
고구려가 돌궐과 형제의 나라가 된 것은 수나라에 맞서기 위해서였죠.
700년 동안 수백 번의 전쟁을 치른 고구려. 그들에게 최고의 무기는 단연 활이었습니다.
-(해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은 그 이름 자체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어릴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혔던 광개토왕은 한반도는 물론이고 만주와 연해주까지 영토를 넓혔습니다.
고구려의 영토는 그렇게 활과 함께 만든 역사였습니다.
-(해설) 고구려인들의 기성은 그야말로 그칠 것이 없었습니다.
산천초목을 누비며 사슴과 호랑이를 사냥할 때도 두려울 게 없었죠.
그들에게 수렵은 활쏘기를 연마하기 위한 흔한 일상이었을 겁니다.
이제 수렵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활을 쏘고 활을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김광덕 장인 또한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오는 전통 활인 동개궁에 매료돼 활을 만들게 됐죠.
-(해설) 그가 만드는 각궁은 우리의 대표적인 전통 활입니다.
그래서 만들 때도 물소뿔 2개를 기본으로 대나무와 옻나무, 여기에 소의 힘줄과 민어 부레 같은 천연 재료만을 쓰죠.
옛 방식 그대로 170번의 공정을 거쳐 재현되는 각궁. 4개월 이상 공을 들여야 비로소 하나를 만들 수 있죠.
-(해설) 활을 당길 때의 장력과 시위를 놓았을 때의 복원력. 이 둘의 조화가 절묘한 각궁.
그러면서도 시위를 부드럽게 당길 수 있어 팔에 전해지는 충격이 적은 편이죠.
-(해설) 이렇게 장인의 손끝에서 탄생한 활은 무기가 아니라 우리의 전통을 잇는 하나의 작품이죠.
그리고 활에 대한 그의 열정은 전통 활에 대한 복원으로 이어졌습니다.
-(해설) 명궁은 하루 아침에 탄생하지 않습니다. 활을 접은 지 어느 덧 50년이 된 장호현 명궁.
그에게 활은 인생 그 자체였습니다.
-(해설) 양궁선수이던 시절,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 전통 활쏘기 국궁.
-어깨 내리고. 좋아.
-(해설) 양궁과 비슷한 듯 다른 국궁은 그에게도 쉽지 않았습니다.
국궁은 점수제인 양궁과 달리 화살이 과녁에 닿으면 명중이죠.
과녁까지의 거리도 70m인 양궁의 배가 넘는 145m입니다.
-좋아. 연장하고. 이거 봐, 갑자기 바람이 밀려버리잖아. 그렇지?
-(해설) 활쏘기뿐 아니라 그는 사업에서도 승승장구했습니다. 인생 최대의 위기가 오기 전까지는 말이죠.
-(해설) 활을 쏘면서 그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활에 매달렸고 마침내 최고의 경지인 9단에 올랐죠.
-옳지, 됐어. 셋. 옳지. 어깨 올리고.
-(해설) 활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장오현 명궁.
그의 남은 목표는 전통 활쏘기의 명맥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전통 활쏘기에서 각궁만큼이나 중요한 건 대나무로 만든 화살 죽시입니다.
김병욱 장인은 바로 그 죽시를 40년 넘게 만들고 있죠.
-(해설) 대나무를 손질하는 데만 적어도 6개월 이상. 그런데 죽시라고 해서 대나무 한 가지로 만드는 건 아닙니다.
-(해설) 죽시의 모태는 버들잎을 닮은 유엽전입니다.
유엽전은 촉이 날카로운 조선시대의 전통용 화살이지만 지금의 죽시는 오히려 과녁에 꽂히지 않도록 촉을 둥글게 하죠.
-(해설) 교죽의 대가, 김병욱 장인. 교죽이 잘 된 화살은 시위에서 과녁까지 흔들림 없이 곧장 날아가죠.
-(해설) 울산에는 오래전부터 활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마을 궁근정이 있습니다.
마을 이름의 활을 뜻하는 궁이라는 글자가 들어가게 된 건 꽤 오래전의 일입니다.
-나무 등을 해서.
-원래 저 위에...
-(해설) 이곳은 당시에 병사들이 활을 쏘며 훈련하던 들판 사시들입니다.
인근에는 말을 기르던 마두배기, 과녁을 세우고 활을 쏘던 삽재라는 지명도 있죠.
그런가 하면 궁근정에는 화살과 관련된 마을 이름도 남아 있습니다. 이곳 살티마을이 바로 그런 곳이죠.
-(해설) 말하자면 살티마을과 살구정은 대나무 채취부터 화살 제작까지 모두 가능했던 곳이었죠.
궁근정 중에서 그때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곳은 이곳 우만마을입니다.
-(해설) 이렇게 활에 관한 이야기가 땅 이름으로 전해질 정도로 울산은 그 이전에도 그 후에도 활의 도시였습니다.
울산이 간직하고 있는 활의 역사는 지면에만 남아 있는 건 아닙니다.
선사인들이 남긴 암각화에서도 활을 쏘는 모습을 여럿 찾을 수 있죠.
-(해설) 활을 가진 선사인들은 육지 동물만 사냥하지는 않았습니다.
고래 사냥을 할 때는 동물 뼈로 만든 화살촉을 쓰기도 했죠.
-(해설) 신석기인들에게 활은 사냥 도구에 불과했죠.
이때만 해도 본격적인 전쟁의 시대는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적이 나타나면서 활의 역할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해설) 청동기 시대. 뾰족하고 날카로운 돌화살촉은 자신을 지키면서 적을 위협할 수 있는 하나의 무기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신라시대에 이르러 울산의 활은 보다 강력한 무기가 됐습니다.
-(해설) 청동기시대에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 둥글게 도랑을 만드는 정도였지만 신라 때는 이중, 삼중으로 성을 쌓았습니다.
울산과 경주 경계에 있는 관문성 역시 그렇게 만들어졌죠.
그렇게 울산은 신라의 수도 경주를 지키는 무예 도시가 되었습니다.
활은 나라의 운명을 바꾸기도 하고 새로운 정복의 역사를 만들기도 합니다.
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민족, 몽골이 그랬죠.
-(해설) 몽골 부족을 통일해 동유럽까지 진출하며 세계를 제패한 테무진.
그가 스물일곱의 나이에 위대한 군주 칭기즈 칸이 된 건 모두 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활과 화살에 관한 최고의 기술을 가진 몽골. 그들에게 활은 유목민들의 삶의 방식이자 또 다른 그들만의 언어였습니다.
-(해설) 13세기 몽골제국의 말발굽 소리가 유럽까지 울려 퍼지던 그때. 그들의 인구는 10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해설) 변방의 유목민에서 세계의 중심이 된 몽골. 그들에게는 위대한 군주와 함께 위대한 활이 있었던 거죠.
우리의 역사는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시간이었습니다.
고려 때는 28년간 무려 9번이나 몽골의 침략을 받았고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 이 두 나라와 큰 전쟁을 치르기도 했죠.
-(해설) 실제 울산에는 20개가 넘는 산성과 해안선을 따라 만들어진 봉수대.
여기에 말을 키우던 목장까지 있었죠.
-(해설) 특히 울산은 임진왜란의 최대 격전지 중 하나였습니다.
나라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앞장선 사람은 활쏘기에 능한 의병들이었죠.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서인충 장군입니다.
-(해설) 그는 선조 24년에 무과에 급제한 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육상과 해상 모두에는 큰 공을 세웠죠.
-임진왜란 때 보면 특히 많습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맨 앞에 먼저 들어가는 게 의병들입니다.
저기에 조총을 갖고 있잖아요. 칼은 일본을 갖고 싸울 수 없습니다. 그러면 뭡니까?
창 아니면 활. 일본에 비해서 우위에 있는 게 우리나라 활이거든요.
-(해설) 지난 2010년, 울산 박물관에는 서인충 장군과 함께 활약했던 박홍춘 장군의 소장품 하나가 기증됐습니다.
그의 후손인 박인우 선생이 내민 것은 13대조의 보검 한 자루였죠.
-(해설) 칼과 함께 기증한 또 하나는 박홍춘의 아들인 박계숙과 손자인 박취문이 함께 쓴 부북일기입니다.
-(해설) 부북일기는 무관인 아버지와 아들이 약 40년의 시차를 두고 각각 1년씩 함경도 해령에서
복무하면서 그 당시 변방 생활을 일기로 적어 한 권으로 엮은 책이죠.
특히 아들인 박취문의 일기에 자주 등장하는 게 바로 활쏘기입니다.
-(해설) 박취문의 일기를 보면 활쏘기는 일상이었습니다.
전체 357일 중 활을 연습하거나 시합을 한 날은 총 125일. 3일에 한 번꼴로 활쏘기를 즐겼습니다.
적게는 10순에 해당하는 50발을 쐈고, 가장 많게는 하루에 66순, 즉 300발을 쏜 날도 있었습니다.
-(해설) 실제 박취문은 여러 차례의 활쏘기 연습에서 50발을 명중시켜 직속 최고 상관인
회령부사와 북병사로부터 술상이나 쌀, 목화, 좁쌀, 겉보리, 벚나무 껍질을 받기도 했죠.
그런가 하면 활쏘기 시합에서도 수차례 1등을 차지하며 곡식을 포함해 항아리, 돗자리, 무명 같은 생활용품을 부상으로 받았습니다.
박취문은 고향인 울산에서 평소 갈고 닦은 활쏘기 실력을 부임지에서 유감없이 발휘했던 거죠.
-(해설) 조선시대, 활쏘기는 남녀노소 모두가 즐겼지만 특히 사대부들에게 활은 생활필수품이나 다름없었죠.
그러다 보니 활과 화살을 만드는 장인과 활쏘기를 배우려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무과 과거 시험에서도 활쏘기는 빠지지 않았죠. 그때마다 무과 합격자가 유독 많았던 곳이 바로 울산이었습니다.
하지만 1894년에는 무과 시험이 폐지되었고 1910년에는 일제의 활쏘기 금지령까지 내려졌습니다.
일제는 전통 활의 명맥을 끊으려고 했지만 1920년대 무예 도시 울산에 다시 활터가 생기기 시작했죠.
그중 하나가 바로 청학정입니다.
-서기 1921년 2월에 열한 분이 결성하셔서.
-결성.
-장소는 울산군 동면 방어리 동악산의 송림 속에서 그 당시에는 이름이 청파정이에요.
-그다음에 1930년, 9년 뒤에 청학정으로 이름을 명명 바꿨네요, 그렇죠?
-네.
-(해설) 그때 당시 지역에 뜻있는 사람들이 세운 청학정. 하지만 활쏘기는 일제의 감시 대상 중 하나였습니다.
-(해설) 그 무렵 울산 읍내에서 출범한 만화정은 전국 대회에서 6번, 지방 대회에서 무려 28번이나 우승하며 전성기를 맞았죠.
1970년대에는 기업체에서도 활터를 만들었습니다.
한국비료 사택에는 약사정, 용현동에는 선경정이 있었고 삼양정과 락희정은 1990년대까지도 이름을 알렸죠.
-(해설) 기업체 활터는 사원들을 위해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그 기업만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해설) 초등학교 1, 2학년 때 청학정에서 활을 쏘던 부친의 손에 이끌려 처음 활을 잡게 된 김세곤 명궁.
그는 기업체 활터에서도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해설) 그때의 영광스러운 순간은 기록으로 영원히 남았지만 그 현장에 있던 울산의 기업체 활터는 이제 한 곳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청학정 또한 지금까지 도시개발에 떠밀려 네 번이나 자리를 옮겨야 했고 지금도 새로운 활터를 찾는 중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단 한 번도 활을 포기한 적이 없었습니다.
-(해설) 삶의 고비마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워 준 것은 늘 활이었습니다.
-(해설) 그리고 한 세기를 넘긴 청학정은 이제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있죠.
-(해설) 활이 하나의 희망이었고 오랜 꿈이었던 사람도 있습니다.
-(해설) 그리고 19년 후.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됐다는 황현희 명궁.
그의 활쏘기는 전통 활인 각궁을 만나면서부터 다시 한번 더 달라졌습니다.
-(해설) 그는 궂은 날에도 활쏘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날의 날씨가 좋든 나쁘든 활을 쏘는 그날이 그에게는 가장 좋은 날인 거죠.
-(해설) 활쏘기를 통해 그는 도전하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새로운 목표는 옛 선조들의 활쏘기에 한 발 더 다가가는 것입니다.
-(영어)
-(해설) 척박한 땅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자유인의 땅, 카자흐스탄.
이곳에 아시아 지역 11개국 100여 명의 전통 활쏘기 선수들이 모였습니다.
-(해설) 이곳 활쏘기 대회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는 유목민의 전통과 스포츠가 섞여 있죠.
-(해설) 비록 시대는 변했지만 이곳 사람들은 모두 전통 활쏘기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해설) 지금 러시아 곳곳에는 여전히 튀르크 족의 후손들이 살고 있죠.
그래서 그들이 튀르키식 활쏘기에 관심을 갖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해설) 러시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대부분의 나라는 지금 전통 활의 부활을 꿈꾸고 있습니다.
-(해설) 우리 민족에게 활은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한 치도 물러설 수 없었던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단 한 발의 화살로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습니다.
-(해설) 역사 이전부터 활의 땅이었고 역사 이후에는 무예 도시였던 울산.
-(해설) 한반도에서 활의 전설이 시작된 반구천의 암각화.
그로부터 7000년 후 지금 이 땅에는 활의 후예들이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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