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기
테마스페셜 - 졌지만 이기는 변호사 한승헌
등록일 : 2026-07-27 14:07:48.0
조회수 : 176
한승헌, 시대를 변론한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는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학업을 이어가며 법조인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학비를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신문 배달과 여러 일을 병행했고, 어머니도 장사를 하며 아들의 공부를 뒷바라지했습니다.
한 변호사는 대학 재학 중이던 1957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뒤 검사로 근무했습니다.
검사들이 선호하던 서울중앙지검에서 근무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스스로 사표를 냈습니다.
이후 변호사로 활동하며 정부의 탄압을 받던 시국사건과 인권사건의 변론을 맡기 시작했습니다.
변호사 개업 초기에는 소설 때문에 처벌받게 된 남정현 작가의 사건을 첫 시국사건으로 맡았습니다.
당시 정부와 대립하는 사건을 꺼리는 변호사들이 많았지만, 한 변호사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피고인들의 요청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선거운동과 관련된 사건에서는 변론을 통해 1심 무죄 판결에 힘을 보탰습니다.
그는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창립에 참여하며 국제적인 인권 연대 활동에도 나섰습니다.
유신체제 아래에서 인혁당과 민청학련 관련 사건의 변론에 참여했고, 사형을 선고받은 여정남의 변호도 맡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자신도 수감돼 있어 여정남의 죽음을 막지 못한 일을 평생 마음에 담아뒀다고 주변 사람들은 전했습니다.
한 변호사는 사형제도를 비판하는 글로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아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법정에서는 해당 글이 반공법 위반이 아니라 문학이자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는 증언이 이어졌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김지하 시인의 사건도 강하게 변호한 한 변호사는 이후 반공법 위반으로 변호사 활동을 이어갈 수 없게 되자 아내 명의로 출판사를 운영했습니다.
출판사 역시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았지만, 그는 민주화 인사들과 교류하며 인권운동을 계속했습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에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창립에 참여했습니다.
민변 현판의 글씨를 직접 쓰고, 변호사는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고생을 감수해야 하는 직업이라는 뜻을 남겼습니다.
김대중 정부 출범 뒤 국회의원과 장관직 제안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했고, 독립적 지위인 감사원장직은 수락했습니다.
전두환 정권 당시 권력으로부터 입을 다물라는 취지의 제안을 받았을 때도 쓴소리와 바른말을 멈출 수 없다며 거부했습니다.
한 변호사는 동학 기념사업과 전주국제영화제에도 참여하며 고향 전북을 위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특히 전주국제영화제 출범 당시 기업 후원을 이끌어내며 영화제가 자리 잡는 데 도움을 줬습니다.
그가 남긴 “자랑스럽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부끄럽게 살지는 않겠습니다”라는 말은 그의 삶을 보여주는 문장으로 소개됐습니다.
유죄 판결을 예상하면서도 무죄를 확신하며 변론했던 그는 자신을 “지면서 이기는 변호사”라고 표현했습니다.
한승헌 변호사는 평생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법정 안팎에서 활동하며 ‘지면서 이기는 변호사’의 삶을 보여줬습니다.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 만료와 더불어
한승헌 변호사는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학업을 이어가며 법조인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학비를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신문 배달과 여러 일을 병행했고, 어머니도 장사를 하며 아들의 공부를 뒷바라지했습니다.
한 변호사는 대학 재학 중이던 1957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뒤 검사로 근무했습니다.
검사들이 선호하던 서울중앙지검에서 근무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스스로 사표를 냈습니다.
이후 변호사로 활동하며 정부의 탄압을 받던 시국사건과 인권사건의 변론을 맡기 시작했습니다.
변호사 개업 초기에는 소설 때문에 처벌받게 된 남정현 작가의 사건을 첫 시국사건으로 맡았습니다.
당시 정부와 대립하는 사건을 꺼리는 변호사들이 많았지만, 한 변호사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피고인들의 요청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선거운동과 관련된 사건에서는 변론을 통해 1심 무죄 판결에 힘을 보탰습니다.
그는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창립에 참여하며 국제적인 인권 연대 활동에도 나섰습니다.
유신체제 아래에서 인혁당과 민청학련 관련 사건의 변론에 참여했고, 사형을 선고받은 여정남의 변호도 맡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자신도 수감돼 있어 여정남의 죽음을 막지 못한 일을 평생 마음에 담아뒀다고 주변 사람들은 전했습니다.
한 변호사는 사형제도를 비판하는 글로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아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법정에서는 해당 글이 반공법 위반이 아니라 문학이자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는 증언이 이어졌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김지하 시인의 사건도 강하게 변호한 한 변호사는 이후 반공법 위반으로 변호사 활동을 이어갈 수 없게 되자 아내 명의로 출판사를 운영했습니다.
출판사 역시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았지만, 그는 민주화 인사들과 교류하며 인권운동을 계속했습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에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창립에 참여했습니다.
민변 현판의 글씨를 직접 쓰고, 변호사는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고생을 감수해야 하는 직업이라는 뜻을 남겼습니다.
김대중 정부 출범 뒤 국회의원과 장관직 제안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했고, 독립적 지위인 감사원장직은 수락했습니다.
전두환 정권 당시 권력으로부터 입을 다물라는 취지의 제안을 받았을 때도 쓴소리와 바른말을 멈출 수 없다며 거부했습니다.
한 변호사는 동학 기념사업과 전주국제영화제에도 참여하며 고향 전북을 위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특히 전주국제영화제 출범 당시 기업 후원을 이끌어내며 영화제가 자리 잡는 데 도움을 줬습니다.
그가 남긴 “자랑스럽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부끄럽게 살지는 않겠습니다”라는 말은 그의 삶을 보여주는 문장으로 소개됐습니다.
유죄 판결을 예상하면서도 무죄를 확신하며 변론했던 그는 자신을 “지면서 이기는 변호사”라고 표현했습니다.
한승헌 변호사는 평생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법정 안팎에서 활동하며 ‘지면서 이기는 변호사’의 삶을 보여줬습니다.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뜻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고 국민적 화해를 이룩하기 위하여는 대통령 직선제를 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한승헌 변호사님하고 비슷하게라도 보여야 되는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다만 그뿐이었습니다.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제 나이가 지금 나이로 아흔다섯입니다.
한승현 님과 저는 53학번 그러니까 전북대학교 법정대학 정치학과에 입학을 했습니다.
차마. 차마. 그러니까
-(TV) 4월 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전국 민주청년학생 총연맹 사건의 수사 상황을 발표했습니다.
-(TV) 이들 60명 가운데 과거 공산 불법 단체인 인민혁명당과 약 20명의 배후 조종자가 스며들어
학생들을 뒤에서 조종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인혁당 사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여정남 군의 변호인이었지만 그의 불행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 또한 이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오시고 부인도 오시고 1975년 4월 8일 나의 첫 공판일이었습니다.
그날 법정 밖에서 울부짖는 여인들을 봤습니다.
참으로 비통한 모습이었습니다.
-희생된 여덟 명 중 평생 잊지 못할 그 이름 여정남.
고맙다고. 죄송합니다, 약간 욱해져가지고 이렇게.
-다만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가 이긴 것입니다.
나는 지면서 이기는 변호사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