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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찾아서
등록일 : 2024-04-11 09:56:06.0
조회수 : 93
-(해설) 11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올해 봄 극장가를 석권한 흥행작, 파묘.
단순한 오컬트 내용 속에 숨겨진 항일의 메시지가 관람객들의 시선을 모으며 영화의 의미가 새롭게 부각됐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독립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4월 11일 오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입니다.
영화 파묘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독립운동가에서 따왔다고 하는데요.
이 영화 속에 숨겨진 항일이나 또 독립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관전 포인트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2024년 대한민국 국민은 독립운동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오늘이 저희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인데요.
혹시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분들, 아시는 분 계세요?
-기억에 남는 분들.
-혹시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아는 분 계세요?
-잘 모르겠어요.
공부를 좀 할 걸 그랬네요.
-그렇죠.
도산 안창호 선생님도?
-그거는 들어봤어요.
-그렇죠.
그러면 부산 지역에서 독립운동 하신 분들도 혹시 아십니까?
-부산에서는 잘 모르겠어요.
-있었을까요?
-있지 않았을까요?
-(해설) 우리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첫 번째로 향한 곳은 일제 탄압을
나타낸 창살과 대한민국 독자가 형상화된 건물인데요.
이곳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경남도 내 지자체에서 건립한 유일한
독립기념관이기 때문입니다.
경남 양산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네 번의 독립운동을 펼친 지역인데요.
양산에 알려진 독립운동가만 200여 명에 달한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양산에 이런 공간이 있는 줄 몰랐어요, 선생님.
사실 이 독립운동이라는 게 학창 시절에 배웠던 이름 유명하신 분들 외에도 정말 많은 분이 도와주셨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찾을 수 있었던 거잖아요.
앞에 보니까 양산이 경남 본부에서 처음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한 데라고 하더라고요.
혹시 알려지지 않은 분 중에서 한 분만 좀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일단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이규홍 선생인데요.
많이 현상하고 있는 윤현진 선생하고 같은 시기에 유학 가서 같이 공부하고 또
거의 비슷한 시기의 상해로 망령해서 활동하신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나중에 윤현진 선생 돌아가시고 난 뒤에 정무 총장이나 내무 총장
그다음에 임시 의정은 부회장까지 요즘으로 치면 선생님은 장관급 내지는 국회 부의장급입니다.
그렇게 하신 분이 있는데 이분이 귀국 투병을 위해서 귀국하셔서 4년 동안 투병
생활하다가 돌아가셨는데 이 사이에 행적이 불분명하다 이래서 서훈을 못 받고 있어요.
엄격한 잣대로 하는 건 참 좋은 일인데 주위에서는 안타깝게 생각하는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정말 많은 양산 시민분이 또 도움을 주셨을 거잖아요.
-그렇죠.
-제가 또 천천히 둘러보면서 다시 한번 마음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해설) 이곳에서는 통도사 스님들의 항일 기록이나 3.1운동 최초의 순수 농민운동 기록을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는데요.
양산의 항일 독립 기념사를 시간과 사건, 진품 유물들로 함께 둘러보며 역사
속에서 잊힌 독립운동가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민족의 소리가 끊어지기 전에 우리 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
만약 성공하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말씀을 윤현진 선생이 하셨나 봐요.
이분은 어떤 분이세요?
-이 글에서 보듯이 아주 단호한 결기가 느껴지는데요.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을 떠나셨습니다.
그때 남기신 말이에요.
임시정부 구성에 참여하면서 초대 재무 차장도 지내시고 그런데 이분이 안타깝게도 2년 반 활동하시다가 과로가 겹쳐서 사망하십니다.
아주 안타까운 일인데요.
안에 들어가시면 쓰던 도장이라든지 그다음에 졸업생 명부라든지 아주 일부의 유품들이 남아 있습니다.
-(해설) 양산시립독립기념관은 복제품 위주인 다른 기념품과 달리 자료의 약
90%가 진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독립운동가 후손과 시민들이 기념관의 뜻에 동참하며 기꺼이 관련 사료들을 기증했기 때문입니다.
독립운동가의 용기와 희생을 마음속에 새겨보면 좋겠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이야기가 정말 가슴 깊게 파고 듭니다.
나였다면 할 수 있었을까?
그런 용기가 났을까라는 의문도 많이 들고요.
많은 분의 희생으로 지켜낸 대한민국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잘살고 있다는 것.
하늘에서 꼭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다음 장소로 한번 이동해 볼까요?
-(해설) 여성독립운동가를 떠올리면 유관순 열사를 대표적으로 떠올리는데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여성 독립운동가가 또 한 분 있습니다.
의열단의 숨은 여전사라고 불리는 인물인데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부산 지역에도 이렇게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이 계신다는 거에 되게 놀랐거든요.
여기는 어떤 공간인가요?
-그렇군요.
그런데 복원이 잘되어 있는데 한번 천천히 둘러볼까요?
-(해설) 박차정 의사의 생가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단층 목조기와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불꽃 같은 삶을 산 박차정 의사는 군복과 총으로써 일제에 맞서 무장투쟁의 선봉에 선 독립운동가입니다.
-이렇게 사진이나 이런 것들도 전시되어 있어서 이해가 조금 더 잘되는 것 같은데
여자분이 이렇게 총을 들고 군복을 입고 있는 동상이나 이런 것들을 본 적이 많이없는 것 같아요.
어떻게 독립운동에 참여하셨을까요?
-박차정 의사 집안을 보면 예전부터 독립운동가로 유명하신 김두봉
선생님이나 김두전 선생님 그리고 박용한 선생님이 계셨고 큰오빠 박문희 씨,
작은오빠 박문호 씨도 신간회 및 의열단에 거기에 들어가셔서 활동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집안 배경을 보면 항일 정신이 투철하고 민족정신이 강한 집안에서 자랐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박차정 의사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신 것 같습니다.
-(해설) 조국을 위해 총을 든 여성, 부산 출신 박차정 의사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또 다른 업적들도 어떤 게 있을까요?
-박차정 의사는 1929년에 동래일신여학교를 졸업하면서 근우회의
중앙상무위원으로 활동하게 되거든요.
그때부터 아마 독립운동에 열심히 참여했던 것 같고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김원봉 씨랑 결혼하고 31년도부터 조선의열단,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제일 첫번째 여자 교관이 됩니다.
그때부터 무장 운동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 1939년 장시성에 있던 곤륜산 전투에서 총상을 입게 돼요.
그래서 독립을 앞두고 1년 전에 1944년에 순국을 하게 되시죠.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을 다 바쳤지만 그렇게 기다리던 독립운동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신 안타까운 인물입니다.
-(해설) 오롯이 조국의 독립만을 위해 총을 들고 일제에 맞서 싸웠던 박차정
의사의 숭고한 희생을 추모해 봅니다.
-오늘은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맞아서 부산, 경남에서 잊혀져 가는
독립운동가분들을 만나봤습니다.
잊어서는 안 될 아주 소중한 기억이기도 하고요.
오늘만큼은 이번 한 주만큼은 이분들의 희생과 용기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는
시간 가져보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여기서 인사드리겠습니다.
-(해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울려 퍼지던 그날의 함성과
독립운동가들의 진심 어린 마음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길 바라봅니다.
대한독립 만세.
단순한 오컬트 내용 속에 숨겨진 항일의 메시지가 관람객들의 시선을 모으며 영화의 의미가 새롭게 부각됐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독립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4월 11일 오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입니다.
영화 파묘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독립운동가에서 따왔다고 하는데요.
이 영화 속에 숨겨진 항일이나 또 독립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관전 포인트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2024년 대한민국 국민은 독립운동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오늘이 저희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인데요.
혹시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분들, 아시는 분 계세요?
-기억에 남는 분들.
-혹시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아는 분 계세요?
-잘 모르겠어요.
공부를 좀 할 걸 그랬네요.
-그렇죠.
도산 안창호 선생님도?
-그거는 들어봤어요.
-그렇죠.
그러면 부산 지역에서 독립운동 하신 분들도 혹시 아십니까?
-부산에서는 잘 모르겠어요.
-있었을까요?
-있지 않았을까요?
-(해설) 우리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첫 번째로 향한 곳은 일제 탄압을
나타낸 창살과 대한민국 독자가 형상화된 건물인데요.
이곳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경남도 내 지자체에서 건립한 유일한
독립기념관이기 때문입니다.
경남 양산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네 번의 독립운동을 펼친 지역인데요.
양산에 알려진 독립운동가만 200여 명에 달한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양산에 이런 공간이 있는 줄 몰랐어요, 선생님.
사실 이 독립운동이라는 게 학창 시절에 배웠던 이름 유명하신 분들 외에도 정말 많은 분이 도와주셨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찾을 수 있었던 거잖아요.
앞에 보니까 양산이 경남 본부에서 처음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한 데라고 하더라고요.
혹시 알려지지 않은 분 중에서 한 분만 좀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일단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이규홍 선생인데요.
많이 현상하고 있는 윤현진 선생하고 같은 시기에 유학 가서 같이 공부하고 또
거의 비슷한 시기의 상해로 망령해서 활동하신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나중에 윤현진 선생 돌아가시고 난 뒤에 정무 총장이나 내무 총장
그다음에 임시 의정은 부회장까지 요즘으로 치면 선생님은 장관급 내지는 국회 부의장급입니다.
그렇게 하신 분이 있는데 이분이 귀국 투병을 위해서 귀국하셔서 4년 동안 투병
생활하다가 돌아가셨는데 이 사이에 행적이 불분명하다 이래서 서훈을 못 받고 있어요.
엄격한 잣대로 하는 건 참 좋은 일인데 주위에서는 안타깝게 생각하는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정말 많은 양산 시민분이 또 도움을 주셨을 거잖아요.
-그렇죠.
-제가 또 천천히 둘러보면서 다시 한번 마음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해설) 이곳에서는 통도사 스님들의 항일 기록이나 3.1운동 최초의 순수 농민운동 기록을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는데요.
양산의 항일 독립 기념사를 시간과 사건, 진품 유물들로 함께 둘러보며 역사
속에서 잊힌 독립운동가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민족의 소리가 끊어지기 전에 우리 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
만약 성공하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말씀을 윤현진 선생이 하셨나 봐요.
이분은 어떤 분이세요?
-이 글에서 보듯이 아주 단호한 결기가 느껴지는데요.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을 떠나셨습니다.
그때 남기신 말이에요.
임시정부 구성에 참여하면서 초대 재무 차장도 지내시고 그런데 이분이 안타깝게도 2년 반 활동하시다가 과로가 겹쳐서 사망하십니다.
아주 안타까운 일인데요.
안에 들어가시면 쓰던 도장이라든지 그다음에 졸업생 명부라든지 아주 일부의 유품들이 남아 있습니다.
-(해설) 양산시립독립기념관은 복제품 위주인 다른 기념품과 달리 자료의 약
90%가 진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독립운동가 후손과 시민들이 기념관의 뜻에 동참하며 기꺼이 관련 사료들을 기증했기 때문입니다.
독립운동가의 용기와 희생을 마음속에 새겨보면 좋겠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이야기가 정말 가슴 깊게 파고 듭니다.
나였다면 할 수 있었을까?
그런 용기가 났을까라는 의문도 많이 들고요.
많은 분의 희생으로 지켜낸 대한민국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잘살고 있다는 것.
하늘에서 꼭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다음 장소로 한번 이동해 볼까요?
-(해설) 여성독립운동가를 떠올리면 유관순 열사를 대표적으로 떠올리는데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여성 독립운동가가 또 한 분 있습니다.
의열단의 숨은 여전사라고 불리는 인물인데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부산 지역에도 이렇게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이 계신다는 거에 되게 놀랐거든요.
여기는 어떤 공간인가요?
-그렇군요.
그런데 복원이 잘되어 있는데 한번 천천히 둘러볼까요?
-(해설) 박차정 의사의 생가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단층 목조기와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불꽃 같은 삶을 산 박차정 의사는 군복과 총으로써 일제에 맞서 무장투쟁의 선봉에 선 독립운동가입니다.
-이렇게 사진이나 이런 것들도 전시되어 있어서 이해가 조금 더 잘되는 것 같은데
여자분이 이렇게 총을 들고 군복을 입고 있는 동상이나 이런 것들을 본 적이 많이없는 것 같아요.
어떻게 독립운동에 참여하셨을까요?
-박차정 의사 집안을 보면 예전부터 독립운동가로 유명하신 김두봉
선생님이나 김두전 선생님 그리고 박용한 선생님이 계셨고 큰오빠 박문희 씨,
작은오빠 박문호 씨도 신간회 및 의열단에 거기에 들어가셔서 활동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집안 배경을 보면 항일 정신이 투철하고 민족정신이 강한 집안에서 자랐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박차정 의사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신 것 같습니다.
-(해설) 조국을 위해 총을 든 여성, 부산 출신 박차정 의사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또 다른 업적들도 어떤 게 있을까요?
-박차정 의사는 1929년에 동래일신여학교를 졸업하면서 근우회의
중앙상무위원으로 활동하게 되거든요.
그때부터 아마 독립운동에 열심히 참여했던 것 같고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김원봉 씨랑 결혼하고 31년도부터 조선의열단,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제일 첫번째 여자 교관이 됩니다.
그때부터 무장 운동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 1939년 장시성에 있던 곤륜산 전투에서 총상을 입게 돼요.
그래서 독립을 앞두고 1년 전에 1944년에 순국을 하게 되시죠.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을 다 바쳤지만 그렇게 기다리던 독립운동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신 안타까운 인물입니다.
-(해설) 오롯이 조국의 독립만을 위해 총을 들고 일제에 맞서 싸웠던 박차정
의사의 숭고한 희생을 추모해 봅니다.
-오늘은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맞아서 부산, 경남에서 잊혀져 가는
독립운동가분들을 만나봤습니다.
잊어서는 안 될 아주 소중한 기억이기도 하고요.
오늘만큼은 이번 한 주만큼은 이분들의 희생과 용기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는
시간 가져보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여기서 인사드리겠습니다.
-(해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울려 퍼지던 그날의 함성과
독립운동가들의 진심 어린 마음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길 바라봅니다.
대한독립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