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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컬 24시 닥터스 - 성탄특집 장기려의 후예들

등록일 : 2025-12-24 17:33:34.0
조회수 : 292
-(해설) 바보 의사, 치료비가 없는 환자에게 치료비를 내주고 그마저도 감당할 수 없게 되면 병원에서 도망가라고 몰래 문을 열어주었던 의사.
사람들은 장기려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해설)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았던 의사.
그의 결정은 의술의 방식이 아니라 의사의 태도를 바꿔놨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땅의 의료 현장에 남아 있습니다.
-저희는 단순한 진료를 넘어선 사람 중심의 봉사를 추구합니다.
성산 장기려 박사님께서는 환자를 병명이 아닌 한 사람으로 보셨습니다.
치료보다 더 중요한 건 공감이라고 그래서 저희는 지금도 한 사람의 삶에 다가가고
그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며 그 마음을 어루만지는 봉사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의 그 한 사람을 향한 깊은 시선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 우리는 그 시선을 따라 묵묵히 걷고 있습니다.
-(해설) 의료 기술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지만 환자를 대하는 마음만큼은 여전히 변하지 않습니다.
환자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의술인데요.
장기려 박사가 삶으로 보여준 의사의 길을 통해 우리는 어떤 거를 배울 수 있을까요?
장기려 박사, 그리고 그의 정신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함께하시죠.
2025년 8월, 한 대학병원의 의료진 84명이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에스와티니를 찾았습니다.
의사와 간호사, 방사선사와 물리치료사까지 모두 개인의 휴가를 반납하고 자비로 의료 봉사에 참여했는데요.
-올해는 남아공 의료 봉사 같은 경우에는 총 84명의 봉사자가 참여했습니다.
의료 환경 때문에 의료 접근성이 떨어지는 현지 교민이나 현지 주민을 대상으로 엑스레이, 초음파와 같은
여러 진료를 통해서 의료 갈증을 해소해 드리는 역할을 담당하고 돌아왔습니다.
-(해설) 비행기로 18시간, 차로 6시간. 고된 여정이었지만 환하게 반겨주는 주민들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마치 종합병원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규모. 일주일 동안 수천 명의 현지인이 의료 혜택을 받았는데요.
이 지역에서는 전례 없던 일이었답니다.
-(해설) 현지 적응까지 완벽하게 끝낸 모습이네요. 아름다운 자연을 품은 나라.
하지만 의료 상황은 열악했습니다. 의약품과 의료 용품은 늘 부족했고 비용 부담도 컸는데요.
에이즈와 자궁경부암, 만성 신부전이 만연했지만 치료의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여전히 많았습니다.
최영일 교수와 김구상 교수는 에스와티니 현직 국립병원의 특별 수술 허가를 받아 10건의 유방암과 갑상샘암 수술을 집도했는데요.
특히 김구상 교수에게는 잊지 못할 환자가 있습니다. 한번 만나볼까요.
-거의 뭐 좌측 유방의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20cm가 넘는 그런 거대한 종양을 가진 환자였고
그 당시에 나이가 스무살이었는데 아무런 상황이 불가능한.
바깥에 다니지도 못하고 그렇게 지내던 환자였죠. 그래서 환자가 치료할 돈도 없고 이런 것 때문에 같이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극적으로 국내로 초청을 해서 수술을 해 주자. 이렇게 됐고 많은 분이 후원을 해줘서 2년 전이죠.
한국에 환자를 초대하게 됐고 성공적으로 수술을 하게 됐습니다.
-(해설) 한국에서의 수술은 무사히 잘 끝났습니다. 프라미스는 새로운 삶을 찾았는데요.
그런데 2년 뒤 잠잠하던 종양이 재발했다는 소식 들렸습니다.
이번에는 남아공 인접 국가인 에스와티니에서 수술을 진행하기로 했는데요.
-에스와티니라는 나라에서 수술을 하게 되는데 일단 수술을 하기 위해서는
저희가 에스와티니라는 나라에 의사 면허증을 받아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또한 에스와티니 병원 자체에서도 저희 수술팀이 가서 수술을 하게 되는데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면
그쪽 병원에서도 어떤 의료진이 와서 하는지 이분들의 실력은 어느 정도인지.
무슨 수술을 하는지 굉장히 궁금해 하고 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소통하고 그런 것을 풀어냈죠.
-(해설) 낯선 땅에서 낯선 의료진과 함께 수술을 준비하는 과정.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환자를 치료한다는 같은 목적으로 함께 소통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신뢰가 점차 쌓였는데요.
-현지에서도 가서 만나게 되는 처음에 만날 때 굉장히 어색함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첫날, 이튿 날, 셋째 날 가면서 연합팀을 꾸려서 하게 됐고 그런 과정에서 동질감도 느끼고
서로 신뢰도 쌓이면서 마지막 날에는 굉장히 서로가 의료진 간의 친밀함을 느낄 수 있었고요.
저희가 가진 이런 수술 기술이든 이런 것들을 많이 보여드렸는데 이런 것들을 꾸준히 받고 싶다, 교류를 원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서 이런 교류의 장이 그리고 우리가 가서 하는 수술 봉사 같은 것이 꾸준히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해설) 수술을 준비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고 수술대에 오르기 전 환자의 걱정도 컸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프라미스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는데요.
우리 의료진은 수술법 노하우를 현지 의료진에게 아낌 없이 전수했습니다.
약속이라는 이름의 환자 덕분에 또 하나의 약속이 시작됐네요.
-에스와티니라는 나라는 굉장히 소국입니다.
굉장히 소국이고 경제적으로나 낙후된 지역인데 작년에 의과대학이 최초로 설립됩니다.
놀라운 일이죠, 요즘 같은 시절에 의과대학이 만들어지는 나라가 있구나 싶으실 텐데.
어떻게 보면 불과 140년 전에 우리 조선은 어땠을까. 1885년에 제중원이 만들어지고.
-(해설) 미국 선교사 알렌의 건의로 조선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해원이 세워집니다.
고종은 백성을 두루 고지한다는 뜻의 제중원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는데요.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죠.
그리고 그 시작에는 먼 나라에서 건너온 자들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저희도 그렇게 아주 오래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대한민국이 많은 의료계, 의학 발전이 있었죠.
그래서 지금은 나눔을 할 수 있는 입장이 됐는데 작년에 신입생을 받은 에스와티니 의과대학
그리고 에스와티니 현실에서 저희가 가서 느낀 것은 우리 조선이 받은 그 은혜.
그 감사함을 이곳에 나눔을 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거죠.
그리고 저희가, 제가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 많은 감사함으로 다가왔고 그리고 노력을 계속 이어가야겠다 이런 다짐을 해봤습니다.
-(해설) 1951년 한국전쟁의 포화 속, 부산 영도에 제3영도 교외 빈터에 천막을 친 장기려 박사.
북한에서 피난 온 그에게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70년이 지난 지금 그 천막은 한 대학병원으로 성장했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초대 병원장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데 힘썼죠.
-우리 병원은 초대 병원장이신 장기려 박사님의 정신을 이어받아 사랑과 헌신의 정신으로
환자 중심의 진료 그리고 따뜻한 인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해설) 장기려 박사는 병원 옥탑방에서 지내며 늘 환자 곁에서 살았습니다.
그를 기억하는 제자들은 언제나 사람을 먼저 보던 따뜻한 모습을 떠올리는데요.
-이곳이 장기려 선생님이 거주하시던 사택입니다.
1990년도와 95년도 사이에 저는 장기려 선생님을 이곳에서 뵀습니다.
연초가 되면 장기려 선생님께서는 외과 의국원들, 모범 병원의 외과 의국원을 모이게 하셔서
이곳에서 연초에 떡국을 외과원한테 대접해 주셨고 대접하시면서 항상 환자를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진료하고 사랑으로 대해달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외과 외국원에게 떡국을 연초에 대접해 주셨습니다.
-(해설) 제자들에게 그는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오랫동안 의과대학 교수직을 지내고 직접 세운 병원도 여럿이지만 부유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집 한 채 없이 병원 옥탑방에서 머물며 나눔과 청빈을 삶으로 실천했죠.
-저희가 학생 때 많은 강의와 수업을 듣고 또 많은 교수님들을 만나면서 우리 병원을 처음 만드신 장기려 박사님이
얼마나 대단하고 훌륭한 분이시고 그분이 지금 이 병원의 옥탑방에 살고 계신다는 걸 듣고 알게 되었을 때 그 감동이 벅찼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번 찾아가서 그분을 정말 한 번 뵈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그때 찾아온 3명의 학생에게 각자 따로따로 말씀을 해 주셨거든요.
-(해설) 무작정 찾아온 의과대 학생들에게 의사로서 진심 어린 응원을 아끼지 않았고요.
영양실조로 내원한 환자에게 그가 남긴 처방전에는 닭 두 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을 내주시오라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죠.
사람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인술의 정신이었습니다.
-(해설) 몸의 병만이 아니라 마음의 상처까지 어루만진 이 시대의 참 어른.
당시 사람들은 병원을 간다고 하지 않고 장기려 박사를 만나러 간다고 할 정도였는데요.
평생을 혼자 살았던 장기려 박사. 그가 늘 마음에 품고 살았던 건 평양에 두고 온 가족들입니다.
-그때 이산가족 상봉하는 분위기가 생기면서 아마 남북 간에 100가정인지 200가정인지 정해놓고 만나기로 되어 있었나 봅니다.
그런데 장기려 박사님이 부산에서 하셨던 활동이 워낙 왕성하셨고 또 의미가 깊다 보니
이제 장기려 박사님이 아마 순번이 높은 쪽에 있었던 것 같은데.
-(해설) 긴박한 전쟁 통에 장기려 박사는 둘째 아들 장가용만을 데리고 남쪽으로 왔습니다.
북에 남겨진 아내와 다섯 자녀. 그는 평생 가족을 그리워하며 살았는데요.
이산가족 상봉의 기회가 왔을 때 그가 내린 결정은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이 내가 우리 가족을 만나게 되면 누군가는 1명은 못 만나는 가족이 생기게 되기 때문에
내가 그럴 수 없어서 내가 양보하겠다고 그렇게 말씀하셔서 주변 사람들이 다 놀라기도 하고 또 그 뜻을 받아들여서 만났다고 합니다.
그때 장 박사님은 결국 가족을 뵙지는 못했지만 북에서 보내온 가족사진이 지금 전해져서 지금 아직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해설) 주변에서는 재혼을 권하는 사람도 많았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장기려 박사의 대답은 늘 한결 같았다는데요.
사랑하는 이가 북에 살고 있는데 내 어찌 그 기다림을 저버릴 수 있겠소.
아내 역시 재혼하지 않고 혼자서 다섯 아이를 키우며 부모님을 봉양했다고 하는데요.
훗날 북에서 전해진 아내의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 그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반복해서 듣고 또 들었답니다.
-(해설) 결국 장기려 박사는 끝내 아내를 만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는데요.
유일하게 같이 월남했던 둘째 아들 장가용 박사가 50년 만에 어머니를 평양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소식을 전했답니다. 자기 가족조차 포기했던 그가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것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병원에 갈 수 있는 세상. 아픈 사람이 돈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지 않는 세상.
그것이 장기려 박사의 평생 꿈이었습니다. 1950년대 대한민국.
서민들은 병원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채를 쓸 정도로 궁핍했는데요.
병원은 부자들만 가는 곳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죠.
1968년 장기려 박사는 채규철, 김서민, 조광제 등과 함께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 민간 의료보험이었는데요.
-아마 제가 초등학교 한 4학년, 5학년 때였는데 저희 어머니와 함께 초량에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이 있었는데
그때 조합료를 내러 갔던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는 그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잘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학생이 되고 또 의사가 되고 나서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해설) 건강할 때 돕고 병났을 때 도움받자.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장됐습니다.
국가가 만든 의료보험보다 10여 년이나 앞선 혁신. 현재 우리나라 국민건강보험의 토대가 됐죠.
-청십자 의료보험은 우리나라가 의료보험이 시작되기 전에 그러니까 1968년도에
우리나라 의료보험이 시작되기 한 십몇 년 전에 민간 주도로 이렇게 의료보험조합이 만들어졌거든요.
그래서 그 의료보험조합이 결국 나중에는 우리나라 국민 의료보험을 형성하는 데 굉장히 벤치마킹이 됐고 좋은 모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해설) 장기려 박사의 정신은 제자들에게도 이어졌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청십자 조합료를 내러 갔던 소녀는 의사가 되어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는데요.
-저는 의사로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싶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가 의료 선교 역사를 이렇게 보면서 우리가, 우리나라가 많은 서양.
특히 의료 선교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가 사랑을 사랑에 빚진 자가 되었는데
그 사랑의 빚을 갚는 것이 필요하다는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 해외 단기 의료선교 봉사를 가보니까 그 사람들이 너무 가난하고 또 가난 때문에 가지게 되는 질병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고 나라도 이 사람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해설) 가난 때문에 병원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 그곳에는 과거 대한민국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양승봉 선교사는 한국에서의 안정된 미래 대신 의료 혜택이 닿지 않는 곳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네팔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가난이 그냥 가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질병이 생기게 되면 그 질병이 질병을 키우게 되고
또 병원에 돈 때문에 오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진료하면서 이 사람들도 우리나라와 같이 의료보험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는데.
-(해설) 대부분의 환자는 치료비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가난한 이들이었습니다.
양승봉 선교사는 스승 장기려 박사가 했던 것처럼 네팔에도 의료보험을 만들기로 결심했는데요.
-마침 제가 장기려 선생님의 제자로서 장기려 선생님이 하셨던 청십자 의료보험을 어릴 때부터 제가 경험을 하게 되었고
또 제가 의사가 되고 난 다음에도 이 청십자 의료보험이 우리 부산 시민들을 섬기는 것들을 옆에서 보면서
네팔에도 이런 청십자 의료보험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한 네팔 카트만두 옆에 있는 티미시라는 인구 한 5만 정도 되는 도시에서 의료보험 조합을 시작하려고 했는데
그것이 코이카 사업으로 연결이 되어서 코이카 사업으로 의료보험 타당성 조사를 먼저 시작한 것이
네팔 의료보험의 시작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해설) 네팔과 베트남에서 31년간의 해외 의료선교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요.
지금은 한 대학에서 학생과 유학생의 건강을 돌보며 의료 현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장기려 선생님은 제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쭉 봬 왔었는데 제 삶에 있어서는 삶의 좋은 롤 모델로 이렇게 생각하고
또 그분이 사셨던 그 삶을 그대로 따라가려는 그런 노력을 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해설) 장기려 박사가 살았던 병원 옥탑방. 그의 제자들은 지금도 이곳을 찾아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깁니다.
신동훈 교수 역시 그 기억을 품고 있는데요.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건 환자를 위해 끝까지 고민하던 의료를 향한 뜨거운 열정이었습니다.
-그때는 토요일 오전에 토요 콘퍼런스라고 토요일 보건병원 외과국 집담회를 하였습니다.
그 집담회의 목적은 치료가 잘 되지 않는 환자나 치료가 어려운 환자 또 합병증에 빠진 환자들을 논의하고
어떤 치료가 좋은지 최신 지견이 무엇인지를 논의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때 장기려 선생님께서는 좌장 역할을 해 주셨는데 항상 하시는 말씀은 환자를 위해서는
용호상박처럼 치열하게 공부해서 서로 논의하고 토론해야 된다.
따라서 용호상박처럼 서로 논의하고 치열하게 공부해서 논의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해설) 지금도 병원에서는 매주 외과 콘퍼런스가 이어집니다.
교수와 전공의들이 한자리에 모여 최신 의학 지견을 나누고 어려운 환자 사례를 함께 토론하는데요.
환자를 위해 치열하게 공부하라는 장기려 박사의 가르침.
그가 뿌린 씨앗은 어느덧 후배 의사들에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대한민국 최초로 간 대량 절제술에 성공한 선구자적인 의사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요.
-아시다시피 간은 출혈과 수술 후에 간 부전으로 인해서 합병증으로 사망하게 되는데 이런 것들을 잘 극복하시고
해방이 되고 난 이후에 간 대량 절제술 우리나라 간의 50% 내외를 절제하는 간 대량 절제술을
1959년 2월 24일에 부산 지역에서 시행하게 됩니다.
대량 간 절제술은 당시에 시행하기에는 굉장히 어려운 수술이었습니다.
어려운 수술이었는데 장기려 선생님이 첫 케이스를 성공하시고 뒤를 이어서 몇 케이스를 더 성공하시고 난 뒤에
대한의학회 학회에서 발표하시게 됩니다.
발표하시게 되는데 그때 당시 의사 선생님끼리 의학회 모임에서 대단한 수술과 성공을 해서 간 수술의 외과적 돌파구를 마련하였다.
외과의 새 장이 열렸다고 기립박수를 받게 되는 의학회에서 받게 되는 역사적인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장기려 선생님께서는 대한의학회 학술상 대통령상을 1960년에 수상하시게 됩니다.
-(해설) 그 성공은 결코 무작장 이루어진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수술에 앞서 사체를 이용해 한국인의 간 해부학을 충분히 연구했고 간 절제에 필요한 외과적 정보를 치밀하게 축적했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당시 부산 비닐 회사의 양재원 사장과 구 러키그룹의 구인회 회장의 지원으로 사체 간의 해부학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요.
무엇보다 동료 의사와 후배, 제자들의 협력으로 이루어낸 결과였죠.
-1972년에 박영훈 원장님과 장기려 선생님이 현재는 간 이식이 이루어지고 있는 인간에게서 간 이식을
그 당시에는 선진국에서도 인간에서는 간 이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시도가 되는 시기였고 성공을 못 하는 시기였습니다.
그 당시 박영훈 선생님과 장기려 선생님께서 개를 가지고 잡종견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잡종견을 가지고 간 이식 수술을 시행하였고 그해 74마리를 시행하였고 그것을 학회에 발표했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 학회에도 발표했고 따라서 그건 대단한 업적들을 남기셨고 간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하셨습니다.
이러한 정신들이 아직까지도 우리한테 이어지고 우리한테 이어지고 후배들한테 이어집니다.
-(해설) 고정관념에 머무르지 않고 존재하지 않던 수술법을 스스로 만들어냈습니다.
어려운 길을 피하지 않는 선구자적인 모습이었죠.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진료를 이어가는 동시에 후학 교육에도 힘을 쏟았는데요.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기차에 의지해 두 도시를 오갔습니다.
그마저도 시간을 아끼기 위해 주로 밤 기차로 이동했죠.
-여기도 진료하시면서 서울에도 진료와 후학들을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바쁜 시간에는 밤 기차를 타고 왔다 갔다 하시면서 대한외과학회의 외과의 발전을 위해서 후학들과 진료와 수술을 진행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배웠던 선생님들이 지금 서울과 부산 대한민국에서 지금
제자와 제자들이 현재의 대단한 외과 의사의 역할을 하고 있고
그게 세계적인 지금 대한민국의 수술 기술과 의학이 발전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장기려 선생님께서는 특히 간 분야에 많은 관심을 가지셨는데 1981년까지 다른 외과 책들은 많이 있었는데
간담도계의 책자는 없어서 후학들을 위해서 1981년 간장 및 담도계 질환 책자를 이 책자를 저술하셨고.
-(해설) 세계간암학회에서 간 이식 대국으로 인정한 대한민국.
그 눈부신 발전 성과 뒤에는 간 절제술의 기초를 다진 장기려 박사의 업적이 지대하게 컸습니다.
간 이식, 최소 침습 수술, 로봇 수술,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기술들이죠.
천막 병원에서 시작된 꿈이 첨단 의료 기술로 꽃피우고 있는데요.
과거에는 생존 전체를 목표로 했다면 이제는 삶의 질을 함께 고려하는 단계로 발전했습니다.
정밀 영상 기술과 수술 기법의 진화로 출혈과 합병증은 줄고 회복 속도는 빨라졌는데요.
발전된 의료 혜택을 받은 환자가 있습니다. 박만호 씨는 7년 전 간암 진단을 받았는데요.
간암은 폐암에 이어 국내 암 사망률 2위. 초기에 증상이 거의 없어 조기 발견이 쉽지 않습니다.
박만호 씨도 병이 많이 진행된 상태에서 병원을 찾았죠.
-(해설) 당시 박만호 씨의 간은 간경화가 많이 진행된 상태였는데요. 복수도 차 있었습니다.
빨간 동그라미로 표시된 부분이 간암 병변인데요.
간 기능이 크게 떨어진 상황으로 간 이식이 꼭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박만호 님은 저한테 오신 지가 오래됐는데 7년, 8년 정도 된 것 같아요.
생체 간 이식을 했고 아마 당시에 아들이 기증했을 거예요.
B형 간염으로 인한 간경변과 간암이 있어서 전체 간을 드러내고 아들의 간을 기증하는 간 이식 수술을 했을 겁니다.
-(해설) 2018년 당시 간암이 있는 부위를 절제해 제거했습니다. 당시 아들에게 우엽 간 이식을 받았는데요.
현재는 복수도 없고 비장도 많이 작아졌습니다. 이식받은 간이 자리를 잘 잡았는데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너무 좋으시네요.
간 기능도 너무 안정적이고 건강하게 자기 본업을 하고 계시고 조금 일이 힘든 일을 하시는 것 같은데 조금 너무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어쨌든 7년, 8년 동안 몸 관리를 굉장히 잘하시고 피 검사에서는 특별히 문제 될 게 없을 정도로
간 기능, 콩팥 기능 다 안정적이고 추적 검사하는 CT든 내시경이든 다 깨끗하고 굉장히 좋으신 것 같아요.
-(해설) 아들에게 기증받은 간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박만호 씨.
무엇보다 아들에게 받은 간이라서 건강 관리를 허투루 할 수 없다는데요.
오랜 친구였던 담배와는 단호히 작별했고 하루 2번 꾸준히 운동하며 건강을 지키고 있답니다.
-(해설) 7년 전 간 색전술을 받은 이종명 씨.
정기 검진에서는 이상 없이 잘 지내왔는데 잠깐의 방심이 종양을 키웠습니다.
-(해설) 간의 오른쪽, 우엽에서 10cm가 넘는 크기의 종양이 발견됐습니다.
지속적인 음주가 간세포를 손상시키며 병을 키운 것으로 보이는데요.
-간세포암이라고 생각되는 경우 일단 수술이 일차 치료입니다.
그 말은 수술을 했을 때 가장 성적이 좋다는 말이고 다시 말하면 수술을 했을 때 가장 재발을 적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 외에도 색전술이라든지 또 고주파 열 치료, 고주파 치료 또 방사선 치료 등의 방법이 있지만 대개는 보조적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을 것 같고요.
일차 치료로 간 절제가 가능한 경우라면 간 절제를 시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입니다.
이렇게. 이쪽이 색깔이 좀 달라졌어요. 여기.
-(해설) 간암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건 종양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번 수술은 오른쪽 간을 절제하고 왼쪽 간을 약 40% 남기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요.
사전에 여러 검사를 거치지만 최종 결정은 수술 중 간 상태를 직접 확인한 뒤 이루어집니다.
-오늘 환자 간이 생각했던 것보다 깨끗하고 좋아서 수술도 조금 빨리 마친 것 같고 환자 회복도 괜찮을 것 같아요.
사실은 검사를 다 하지만 수술 전에, 100% 알 수는 없거든요.
그래서 실제로 수술 들어와서 좀 보고 결정을 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남아 있는 간도 괜찮아 보입니다.
-(해설) 긴장 속에서 모든 과정이 잘 마무리됐습니다.
-술을 많이 드셨으니까 나쁘긴 한데 절제 못 할 정도의 간은 아니었던 거예요.
그래서 예정대로 이렇게 절제하는 수술을 진행했습니다.
그래서 오른쪽 간을 잘랐는데 아마 다 이런 반응이 다 나오는 게 정상입니다.
안에 있는 것들이 다 종양이라는 거예요.
조직 검사는 봐야겠지만 제가 생각할 때는 간세포암으로 나올 것 같습니다.
아시겠죠? 더 궁금한 거 없으시면 이 정도면 다 충분하죠?
-(해설)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일.
그것이 의사의 사명이지만 현실의 의료 현장은 그 말만으로는 버텨내기에는 점점 더 녹록지 않습니다.
이런 구조는 의료의 지속을 위협하고 있는데요.
-외과뿐만 아니라 일부 과들 바이탈이라고 하죠.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그런 과들 의사들은 현재는 뭐랄까, 사명감, 사명감에 의존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어요.
그런데 사명감에 의존하는 시대가 되어 버리면 지원자가 많을 수가 없어요.
서로 경쟁적으로 열심히 하려고 하고 많이 하려고 하는 분위기가 되어야지 사명감에 의존하면 결국은 수준이 떨어지고요.
결국은 지원자가 줄게 되고 하는 사람이 줄게 되고 더 힘들게 되고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외과는 지금 그런 과입니다.
-(해설) 의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은 시대.
그럼에도 오늘도 많은 의료인들은 장기려 박사가 남긴 의사의 기준을 붙들고 환자 곁을 지킵니다.
그 헌신이 누군가의 오늘을 살게 하고 있으니까요.
-(해설) 어쩌면 환자의 짧은 감사 한마디가 힘든 외과의사의 길을 다시 걷게 합니다.
의사만이 누릴 수 있는 보람이죠.
-그럼요. 굉장히 아픈 환자를 치료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보람된 일입니다. 그것은 과를 불문하고요.
어떤 과 의사든지 아픈 사람을 낫게 하고 그들에게 일상을 돌려드리고 하는 것은 굉장히 기쁘고 감사한 일인 거예요.
환자들도 감사하지만 그건 의사도 감사한 일이고 모든 의료진이 감사한 일이고요.
그런 일들을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우리가 지원하고 돕고 또 더 기쁘게 그걸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해설) 1995년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장기려 박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정신은 지금도 살아 있는데요.
의료를 통해 이웃에게 희망과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
장기려 기념 의료선교센터에는 오늘도 그의 정신을 따라 환자 곁을 지키는 발걸음이 묵묵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장기려 기념 의료선교센터는 신앙인으로 의료인으로 본보기를 보여주셨던
장기려 선생님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만들어진 병원의 원내 조직입니다.
이전에는 개인별 단체별로 제각기 이루어지는 국내외 의료 봉사 활동을 통합하고 조율하고
협력, 후원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2009년부터 활동하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는 지역 교회와 협력해서 의료 봉사 건강 상담을 진행하고 있고 김해 진영 부분의 초등학교와 연계해서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 정기적인 건강 검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해외로는 멀리 남아프리카공화국 페루, 가까이 필리핀과 태국에 방문하면서 의료 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해설) 장기려 박사는 의사가 없는 무의촌을 찾아가며 한 번도 의사를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치료했는데요.
도움이 필요한 곳을 먼저 찾아가는 그 발걸음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의료 봉사의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봉사를 하는 분들의 얼굴이 정말 밝네요. 장기려 박사의 아들과 손자도 의사의 길을 따라갔는데요.
손자인 장여구 단장은 한 의료봉사단을 이끌며 할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국내 취약계층은 물론 해외 의료 사각지대까지 찾아가 무료 진료와 수술, 교육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나눔의 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요. 1969년 장기려 박사가 창립한 부산 외과학회.
56년이 지난 지금도 부산과 경남의 외과의사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해설) 부산 외과학회의 발걸음은 연구실과 학회장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의료가 닿기 어려운 곳, 수술 한 번이 삶을 바꾸는 현장으로 외과의사들이 직접 향하는데요.
장비와 환경은 낯설지만 환자를 살리겠다는 마음만은 같습니다. 지식과 기술을 나누고 현지 의료진과 함께 길을 찾는 일.
부산에서 시작된 외과의 정신은 국경을 넘어 지금도 의료 봉사의 현장에서 조용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러 대학에 학장도 하시고 그렇게 의학 인재들을 키워내는 일들을 하셨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크게는 장기려 박사님의 후예가 되는 셈이죠.
그렇지만 그 속에서도 가장 큰 뿌리는 아마 우리 부산 지역에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제가 부산 외과학회 부회장으로서 소회를 말씀드리자면
그러한 장기려 정신 그런 장기려 정신들이 지금도 깊이 뿌리 내려서 부산 외과학회의 이런 봉사활동에 대한 후원이든지
계속 이어가는 것들의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에스와티니 의료 봉사를 갈 때도 부산 외과학회의 많은 후원이 있었고요.
그게 8월이었는데 그 이후에 또 10월 말, 11월 초에서 요르단의
세계적으로 두 번째로 큰 자타리 난민 캠프도 방문하고 있는데 그때도 부산 외과학회가 많은 또 후원을 해주셨죠.
이렇게 지금도 이어져 나가는 그런 봉사 정신들이라든지 봉사와 관련된 그런 많은 활동이
결국은 장기려, 바로 그분의 자취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해설) 장기려 박사는 바보라는 말을 들으면 성공한 삶이다,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는 말을 남겼는데요.
그리고 사랑하는 자의 길을 삶으로 몸소 실천해 줬습니다.
-장기려 선생님은 제가 생각하기로는 환자를 진료할 때 사랑으로 진심을 다해서 환자를 치료하셨습니다.
진심을 다해 치료하셨고 또 어려운 수술이나 어려운 질환들에 당황하지 않고 난감해하지 않고
개척자 정신으로 간 수술도 마련하셨고 당시 항생제가 발전되지 않을 때 균주, 맹장염 혹은 담낭염의 균주, 균을 파악해서
어떻게 하면 잘 치료하셨을까 하는 시절을, 지금은 항생제가 발전했지만 그런 일들을 많이 하셨고 개척하셨습니다.
따라서 선생님의 사랑과 진심을 다해서 치료하는 정신, 개척자의 정신을 배워왔습니다.
-(해설) 어려운 환자를 외면하지 않는 것. 가난하다는 이유로 치료가 힘들다는 이유로 포기하지 않는 것.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끝까지 책임지는 것. 그것이 바로 장기려 정신입니다.
-몇 개월 있으면 딱 만 10년이거든요. 10년 되면 생일잔치 한번 할까요?
-교수님 덕분에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사실은 이춘만 님이 저한테 새로운 인생을 주신 거예요.
이 병원에서 이렇게 큰 수술 하고 이렇게 잘 회복되고 하시면 저한테도 대단한 거죠.
그렇죠. 저한테 더 그래요. 제가 더 감사하고 그래요. 굉장히 감사한 부분이죠.
왜냐하면 장기려 박사님이 이 병원을 설립할 때 이 병원에서 힘 없고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병원을 설립했지만
실제로 사실은 병원이 그렇게만 운영될 수는 없거든요.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들도 그런 마음들을 가지고 우리가 그런 일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요.
제가 보는 많은 환자들 중에 환자를 치료하고 회복을 하고 어려운 환자들 치료하고 하는 것들은 그 정신을 기리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매우 의미 있다고 생각하고요. 또 제가 이러한 기관에서 일할 수 있는 건 되게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설) 1951년 영도의 한 천막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7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병원에 갈 수 있는 세상. 아픈 사람이 외면받지 않는 세상.
장기려 박사가 꿈꿨던 그 세상을 향해 오늘도 많은 의료인들이 묵묵히 걸어가고 있습니다. 박사님, 감사합니다.
-봉사는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것. 가까이 다가가 안부를 묻는 것.
내가 당신 곁에 있습니다라고 말해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일입니다.
-똑바로 못 내려오겠는 거예요. 똑바로 하면 여기가 막 따끔따끔하고 아파요.
-너무 아파서 다리를 절 정도로 아팠어요.
-압력이 주어지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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